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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나니 수련이 간단하고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가정관을 늘 잘 넘지 못했다. 아내는 성격이 좋지 않아 잔소리하기를 좋아하고 화를 내고 나를 더러운 돼지라고 말하는데 “당신 엄마와 같다.”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났고 나는 아내의 이 말에 대해 무척 반감을 느꼈다. 나는 정념이 충족할 때 그녀가 나를 도와준다는 것을 느끼고, 사람 마음이 강할 때 나는 그녀를 원망하고 미워했는데 이런 상태가 언제 끝날 것인가?

한번은 아내가 나를 아주 모질게 욕했고 내가 몇 마디 받아쳤더니 아내는 억울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울어서 눈까지 부었다. 이틀 동안 나와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음속으로 조급했다. 늘 이런 상태이면 되겠는가? 이렇게 나아가면 또 수련인인가? 나는 반드시 돌파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늘 이 언덕을 넘지 못하는가? 원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자신을 분석해보니 매우 표면적으로 수련한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법을 배우고 연공도 하고 발정념도 하지만 실질적인 수련이 부족했다. 늘 ‘다툼’과 ‘후회’에서 배회하고 있었고 본질상에서 변화가 적었다. 매번 모순이 나타날 때 늘 표면의 ‘일’을 주시하고 불복하고 말싸움을 하는데 계속 반복되면서 제고가 없었다.

나는 또 자신을 깊이 파보았다. 이 원한의 뿌리는 나인가? 그것은 후천의 진흙이고 오로지 대법만이 깨끗이 씻을 수 있고 비로소 선과 자비가 있을 수 있으며 비로소 원한이 없음을 해낼 수 있다. 나에게 제고하려는 소원이 있자 사존께서는 나를 도와주셨다. 사부님의 한마디 법이 나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러나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1] 특히 “버리는 것(放棄)” 두 글자가 아주 선명했다 내가 생각해보니 맞다. 무엇을 다투는가? 앞을 향해 무엇을 맞받아치고 있는가? 버리는 것은 한걸음 물러나는 것인데 이는 얼마나 간단한가? 수련인의 자아, 사람마음, 관념, 집착은 드넓은 바다 같고 버리는 과정은 바로 깨끗이 씻고 승화하는 과정이며 이 두 글자는 수련의 시종(始终)에 관통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마음은 단번에 넓어졌고 정신도 홀가분해졌다. 아내가 또 잔소리할 때 나는 마치 외부에 있는 한 송이 상서로운 구름같이 평온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가 어떻게 독단적이고 예의가 없어도 나는 모두 평온하고 상화롭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나의 수련을 지지하는 이 한 점만으로도 족했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늘 눈에 거슬리는 것과 눈에 거슬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만약 억지로 견지하면 결과는 기 싸움을 하고 싸우게 된다. 나는 버리는 것이 좋은 화해방법임을 느꼈다. 예를 들어 매번 고기를 사서 만두를 빚을 때 그녀는 고기를 만두소로 다져서 가져오지 않고 집으로 그냥 가져와 나에게 만두소를 다지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왜 이렇게 해요?” 아내가 말했다. “이렇게 해야 깨끗하고 안심돼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 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데 고기를 다지는 것과 같지 않나요?” 그녀는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 왜 말대꾸해요?” 나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 말을 들을게요.” 그녀의 ‘깨끗함’과 나의 ‘시간 절약’은 모두 관념이다. 자신의 관념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뒤틀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성취하게 하고 있고 모순이 확대됨에 따라 나에게 포기 속에서 더욱 큰 제고가 있게 했다.

또 한번은 어린 손녀가 열이 났고 아내는 술로 안마하고 침을 놓았다. 나는 이 모습을 보고 약간 조급했다. 손녀는 대법을 수련하는데 아내가 이 일을 하다니, 아이의 몸을 온통 시커멓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제지했다. 아내가 화를 냈다.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어린 손녀가 가련하게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나의 원한의 물질은 대뇌를 가득 채웠다. 악념도 위로 튀어나왔다. 만약 예전 같으면 나는 아이를 안고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이렇게 하지 않고 즉시 경각심을 가졌다. 손녀는 사부님께서 상관하고 계시는데 누가 망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이는 나를 수련하는 것이고 이는 원망을 제거하는 좋은 기회이고 나는 발정념하여 제거해야 한다! 마음은 꽉 막히지 않았고 또 밝아졌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겨냥성이 있기에, 진정하게 그 마음을 집어내어 그 마음을 제거하는데, 그러면 수련이 매우 빠르다.”[2] 나는 사부님의 이 한마디 법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고 사람마음, 관념, 마성이 나올 때 즉시 잡고 제거했다! 제고가 아주 선명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하니 간단하고 홀가분하고 효과가 좋았다. 나는 자신의 신체 소우주의 수호자이고 나는 바른 요소를 위해 책임져야 하고 신체의 어느 곳에 불편하거나 통증이 있으면 그곳의 우주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발정념하여 그 천체를 바로 잡았고 중생들이 구도되게 했다.

‘버리는 것’이 습관으로 형성되었을 때 나는 아내가 너무나 가련하고 너무나 고생스러운 것이 보였다. 역사상 나와 아내가 어떤 연분인지를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나에 대한 상처를 나에 대한 성취로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업을 적게 짓게 하려고 가끔은 그녀가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나는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해요. 화를 내지 말고.” 내가 아내를 포용하고 관대하게 대할 때 자신이 고상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밖에 나가려고 신발을 신을 때, 늘 내가 아내의 신발을 신겨준다. 초기에 나는 허리를 굽힐 수 없었고 비천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또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무엇이 고상인가? 남을 위한 것이고 아내는 남이 아닌가? 내가 사상적으로 제고가 있을 때 행위도 자연스러워졌고 상대방을 마음속에 놓을 수 있었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일종의 행복으로 여길 수 있었고 이렇게 해야 비로소 기꺼이 가서 할 수 있었다.

수련생 사이에서도 같은데, 더욱 잘 수련한 수련생도, 당신은 역시 그의 몸에서 단점 혹은 마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모순 속에서 버림을 해내고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만 볼 수 있으면 당신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간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번은 나는 한 수련생이 괄사(刮痧, 급성 위장염 따위에 쓰이는 민간요법)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나는 즉시 ‘버리는 것’이 생각났다. 만약 예전 같았으면 나는 수련생한테 가서 말했을 것이다.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일면을 보지 말고 늘 다른 사람의 좋은 일면을 보아야 한다.”[3] 어느 제자가 어떠한가? 사부님께서 가장 똑똑히 알고 계시고 수련생의 단점은 자신을 수련하는 거울이다. 수련생의 단점을 보는 것을 포기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반짝임을 볼 수 있고 끊임없이 버리는 중에서 선심은 갈수록 커지고 대법 표준에 점점 도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을 낮게 내려놓아야 비로소 남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고 비로소 남을 위해 헌신할 수 있고 당신은 비로소 갈수록 깨끗해질 수 있다.

이상은 최근 약간의 체험이고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 입각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들이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각 지역 2-미국 필라델피아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2003년 정월 대보름 설법’

 

원문발표: 2020년 8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8/10/4102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