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수련생들이 쓴 글이나 명혜망에서 방송하는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고 공을 전하실 때의 소중한 추억을 볼 때마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이런 소중한 추억들은 우리 모든 제자가 정진하도록 격려하며, 미래 사람들에게 남겨줄 귀중한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사부님의 여러 설법반에 참가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적어보려 한다. 대법을 실증하고, 사부님께서 당시 어떻게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중화대지에서, 우리 같은 편벽한 곳까지 포함해 대법의 종자를 뿌리시며 중국 각지의 중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펜을 들어 전 과정을 회상하니 비할 바 없는 행복과 감사가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고, 눈물이 절로 흘러내린다…
나는 대서북 황토고원의 편벽하고 가난한 작은 산촌에서 태어났다. 내가 열 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지세가 상대적으로 평탄한 평원지대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중학교 학력으로 지식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기에,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형제자매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시키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진학할 기회를 얻게 됐다. 그때 내가 입던 옷은 모두 기운 옷을 또 기운 것이었고, 겨울에 입던 옷을 여름에도 입었으며, 매일 한 끼 먹으면 다음 끼니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가난한 시대에 우리는 중공 악당에게 ‘가난할수록 영광’이라고 세뇌당했고,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일해야 했다. 나는 가끔 학교에서 공연할 때 이웃집 옷을 빌려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85년에 나는 결혼했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돼 나는 작은 진(鎭)으로 들어가 작은 가게를 열고 자영업자가 됐다. 생계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고생하다 보니 점점 체력이 딸리는 것 같았다. 중의사인 외조부는 나에게 기공을 연마하라고 하셨는데,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나는 기공에 비교적 관심을 갖게 됐다. 1992년에 나는 대가를 아끼지 않고 타지로 가서 한 기공학습반에 참가했다. 한 기(期) 학습반에 수백 위안의 학비를 냈는데, 그때 수백 위안은 상당한 돈이었다. 여비와 숙식비를 합하면 천 위안 가까이 썼는데, 정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결국은 헛되이 돌아다니며 돈을 쓰고 고달팠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전법륜)와 같았다. 결국 그 기공사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치료에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4년 6월 어느 날, 나는 그 기공학습반에 가서 ‘심화과정’을 밟으려고 준비하던 중 베이징에서 환승하면서 베이징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베이징을 경유하는 이유를 말했다. 그는 급히 나에게 파룬궁을 소개해주면서, 파룬궁 사부님께서 방금 베이징에서 12기 학습반을 마치셨는데 공법이 아주 좋다고 했다. 베이징 학습반은 이미 놓쳤다고 했다. 저녁에 그는 사부님의 베이징 설법 녹음테이프를 여관으로 가져다주었다. 마침 나는 재생기를 갖고 있었는데 밤새 몇 개의 테이프를 들으면서 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나 좋다고 생각해 즉시 베이징에 머물기로 했다.
이어서 베이징 디탄(地壇) 공원 팡쩌탄(方澤潭) 연공장을 찾아갔다. 보도원은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그때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갔었다). 보도원은 우리에게 다섯 세트 연공동작을 무료로 가르쳐주었고, 나는 ‘중국 파룬궁’이란 책도 청해왔으며, 사부님께서 정저우(鄭州)에서 학습반을 여신다는 소식도 얻었다. 정말 너무나 운이 좋았다! 비할 바 없이 기쁜 마음으로 개강하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1994년 6월 9일 저녁, 나는 베이징에서 허난(河南)성 정저우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정저우에 도착하니 이미 6월 10일 오전이었다. 현지 수련생들이 맞아주었고 신청처에 가서 40위안을 내고 등록했다. 그곳 수련생들이 또 우리에게 비교적 실속 있는 여관을 찾아주었다.
6월 11일 오전, 나는 몇 명의 외지 수련생들과 함께 미리 그 매우 간소한 실내구장에 도착했다. 구장의 지붕은 석면기와와 철판 등으로 덮여 있었고, 시멘트 바닥에 계단도 시멘트로 쌓아 올린 것이었으며, 가운데 비교적 넓은 평대가 하나 있고 거기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우리가 신수련생이라 처음 수업을 들었는데, 장소 조건이 간소하고 모두 시멘트 계단이며 좌석과 번호도 없어서 자유롭게 자리를 선택했다. 우리 몇몇 수련생들은 평대 뒤쪽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사부님께서 오시면 우리도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부님의 대공(帶功)보고회를 들은 후, 많은 노수련생들이 우리에게 사부님보다 위에 올라가서 수업을 들으면 안 된다고 말해주어서야 우리는 그것이 사부님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부끄럽다. 어찌 공손히 아래 앉아서 수업을 들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둘째 날 우리는 미리 강당에 와서 아래 시멘트 바닥에 앉아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회의장에는 대략 1천여 명의 수련생이 있었다.
6월 12일 사부님께서 강의하고 계실 때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더니 폭우에 우박이 섞여 내렸고, 철제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창문에는 유리가 없어 빗물이 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들이쳤고 갑자기 정전됐다. 기억으로는 사부님 설법 책상 옆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왔는데, 사부님께서는 위치를 바꾸시어 책상 위에 앉으신 채 대수인(大手印)을 하시고, 또 석가모니가 당시 법을 전한 이야기를 한 단락 하셨다. 수련생들이 모두 조용해지더니 곧 비가 그쳤고, 한 줄기 햇빛이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자 수련생들이 한바탕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후에 조건이 좋은 체육관으로 옮겼는데 사부님께서는 매일 강의하시기 전에 마당을 둘러보셨다. 처음에는 수련생들은 사부님을 둘러싸고 사부님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지만 이후에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막 수업을 들었기에 이것이 진정한 수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내 등 통증을 치료해주시길 원했다. 설법반 중간의 어느 날, 모두 마당에서 강의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마침 사부님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사부님께서는 두 팔을 가슴에 끼고 화기애애하면서도 엄숙하게 나를 보시며 말씀하지 않으셨고, 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사부님께서 내 등 부위를 가리키셨다. 이후에 점차 사부님께서 진정으로 설법하고 공을 전하며 사람을 수련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정말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이런 일은 기회가 많지 않고 나 역시 늘 이렇게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말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연분이다.”(전법륜)와 같았다.
8일 학습반이 끝났다. 우리 서북 몇 개 성의 제자들은 ‘중국 파룬궁 정저우 학습반’ 현수막 앞에서 사부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전법반이 끝날 때 모든 신수련생이 파룬궁 학습반 수료증을 받았고, 또한 사부님께서는 우리 모든 수련생에게 심득체험을 쓰도록 요구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수련생의 심득체험을 한 편도 빠뜨리지 않고 다 보신다고 하셨다.
정저우 학습반이 끝나고 나는 사부님을 따라 지난(濟南)에 가서 지난 제2기 파룬궁 전법반에 참가하기로 했다. 우리 일행에는 쓰촨성 청두(成都)에 가서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던 베이징 여수련생이 있었는데, 그녀도 사부님의 몇 개 설법반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젊은 인재로, 한 다국적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난에 도착한 당일 오전, 우리는 황팅(皇亭) 체육관을 찾아가 신청비를 냈다. 우리는 노수련생에 해당돼 한 사람당 25위안의 신청비만 냈다. 여관을 찾으러 가서 여러 곳을 찾아봤지만 모두 없다고 했는데, 사부님께서 설법하시는 황팅 체육관에 가장 가까운 여관에 가니 우리 몇 사람의 방과 침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부님께서 어디서나 모든 제자를 보살펴주고 계셨던 것이다.
6월 중순, 지난의 기온은 섭씨 38도 이상이었다. 강의 중간 어느 날 정오에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의 요청에 응해 바깥 계단에서 모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셨다. 나는 당시 사부님과 다시 한 번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너무 고생하시고 우리는 이미 정저우에서 찍었으니 사부님을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자고 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사부님께서는 질서 있게 수련생들과의 사진 촬영을 배치하셨다.
지난 학습반 셋째 날부터 나는 심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하루가 아주 빨리 지나갔는데 오히려 아침의 그런 병의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병하고 온몸이 가벼운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약을 한 알도 먹지 않았고, 또한 사람도 젊어 보이게 됐다. 지금 보면 동갑내기와 10여 년은 차이가 난다.
바로 1994년 10월, 나는 현 소재지에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사부님께서 광저우에서 학습반을 연다는 기쁜 소식을 얻었는데, 내가 친구와 통화하는 내용을 전화박스의 서비스원도 모두 들었고 나에게 “여러분은 정말 행복하겠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12월 사부님께서 개강하시기 3일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해 아내와 친척 한 분을 데리고 시안(西安)에 가서 시장에서 라면 한 상자를 사고 광저우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이때 신기한 작은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우리가 떠나기 전날 저녁에 다섯 살 된 딸이 갑자기 열이 났다. ‘어떻게 하지?’ 사부님의 설법은 반드시 들으러 가야 하는데, 아이를 집에 두고 할머니가 돌보게 하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예 딸을 광저우로 함께 데려가자! 그 결과 시안에 도착하자마자 딸이 깡충깡충 뛰면서 아무 병도 없게 됐다. 사부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딸도 가서 설법을 듣게 하셔서 사부님의 작은 제자가 되게 해주셨다.
광저우 전법반에 참가하러 온 수련생들이 아주 많았는데 5천여 명이었다. 당시 20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입장권을 사지 못했다. 우리도 당시 표를 예약하지 못했는데, 내 베이징 친구가 이미 먼저 내 아내와 친척 두 사람에게 표 두 장을 구해주었다. 그녀들이 사부님 전법반에 처음 참가하는 신수련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나와 기타 표가 없는 수련생들은 보도소의 안배에 따라 체육관 옆의 작은 홀에서 무선전파 형식으로 사부님의 첫날 설법을 들었다. 둘째 날 수련생이 또 나에게 표 한 장을 구해주면서 나도 들어가서 아이를 돌보게 해서 아내와 친척이 사부님의 설법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게 했다. 이후에 베이징 보도소 수련생이 표를 양보한 이야기를 본 후에야 우리 표는 베이징 보도원들이 양보한 것임을 알았다. 베이징 수련생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사부님께서 매일 강단에 오르시기만 하면 수천 명의 전법반 장내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두 전심으로 사부님께서 고층차의 법리를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다. 사부님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두 시간이 넘게 설법하시는 동안 물 한 모금도 드시지 않으셨다. 사부님께서는 강의 중간 어느 날을 이용해 수련생들의 몸을 청리(淸理)해주셨는데, 모두 한 손을 들고 발을 구르게 하셨다. 발을 구르는 순간에 사부님께서 손으로 잡아채서 또 아래로 내던지시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사부님 앞 바닥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당연히 천목(天目)이 열린 제자들은 더 많은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당시 광저우 군구(軍區)의 한 초대소(국영 여관)에 머물렀는데, 매일 전용 대형 승용차가 우리를 태우고 다녔다. 우리 이 초대소에는 사부님의 전법반에 참가하러 온 많은 대학교수와 국가 고급기술자들이 머물고 있었고, 많은 노제자들이 있었는데 하나 같이 얼굴이 불그스름했고 50대가 넘었는데도 아주 젊어 보였으며, 말씀하시는 것이 화기애애하고 친근했고, 어떤 우월감도 부리지 않으며 모두 함께 각자의 심득체험을 교류했다.
아내는 여러 해 동안 앓던 폐결핵이 그때부터 나았다. 원래 찬 것을 먹을 수 없었는데 그때부터 차든 뜨거우든 상관없었다. 집에 돌아온 후 현 방역소에서 준 폐결핵 전문 치료약도 버렸고 사람이 그때부터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이 학습반에서 돌아온 후 우리집은 연공장이 됐고, 정기적으로 신수련생들에게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틀어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베이징 연구회에서 우리집 주소를 얻어 계속 우리집을 찾아왔는데, 우리가 점포에 살면서 바로 거리 옆에 있어 비교적 찾기 쉬웠기 때문이다. 대법은 아주 빨리 우리 주변 시와 현(縣)에 전해졌다.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테이프가 출판된 후, 내가 당시 갖고 있던 컬러 텔레비전 한 대와 비디오 재생기 한 대가 내가 홍법하는 보물이 됐다. 우리 현지에서 9일 학법반을 여는 것 외에 자주 시골로 가져가기도 했다(당시 농촌은 대부분 흑백 텔레비전이었다). 때로는 비교적 큰 기업과 기관에서 나를 초청해 사부님의 설법과 공법을 가르치는 영상을 방영하게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갔는데, 때로는 한 번 가면 8~9일이어서 가게 장사는 아내 혼자 돌봤다. 매번 내가 홍법하고 돌아오면 며칠 동안 장사가 유난히 잘됐고 장사에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이것은 대법을 수련해서 얻은 큰 복이다. 이후에 나는 성 총보도소와 협력해 인근 성과 우리 성의 시 구역에 가서 모두와 함께 교류하며 홍법과 수련의 좋은 환경을 형성했다.
내가 이 경험을 적어내는 것은 대법의 복음이 우리 이 서북 변방 지역에 광범위하게 전해진 상황을 실증하기 위해서다. 중공의 미친 박해 하에서 나도 박해받는 중점 대상이 됐다. 사부님의 자비에 감사드리며, 내가 넘어진 후 다시 일어서도록 격려해주시고, 비틀거리며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덕분이다.
사부님의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허스(合十)
수련생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나의 사부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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