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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많은 집착심을 보호하고 있는가?’를 읽은 소감

글/ 대륙 대법제자 후이광(慧光)

[밍후이왕]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집착심을 보호하고 있는가?’란 문장에서 말했다. “최근 자신의 수련을 수련생과 교류하면서 아직도 많은 수련생, 심지어 노 수련생마저 안으로 찾아 집착을 버리는 이 점에서 철저히 하지 않아 집착심을 보호하고 진정으로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방면에서 나는 느낀 바가 있다. 왜냐하면, 안으로 찾는 것과 자신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 수련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래에 나는 마음을 닦아 집착을 제거한 일부 깨달음을 써내어 수련생과 교류하려 한다.

간혹 번거로움과 모순에 부딪히면 나는 종종 표면으로 안을 찾지 진정으로 자신의 집착의 근원을 찾지 못했다. 심지어 교류할 때 안으로 찾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미안한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한 가지 일을 교류하면서 어떤 방면에서 잘못했고 ‘정’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안으로 찾는 것 같지만 사실 턱없이 부족하다.

사부님은 “사람에게는 정이 있기 때문인데, 화를 냄도 정이요, 기뻐함도 정이요, 사랑함도 정이요, 증오함 역시 정이요, 일하기 좋아함도 정이요, 일하기 싫어함 역시 정이며, 누가 좋고 누가 나쁘게 보이며, 무엇을 하기 좋아하고 무엇을 하기 싫어하는 일체가 다 정이라, 속인은 바로 정을 위해 산다.”[1]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렇게 많은 것이 모두 정이다. 도대체 나는 어느 방면의 ‘정’에 집착하는가? 내가 ‘정에 집착한다’는 이 방패로 자신의 좋지 않은 집착을 더 깊이 찾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집착심을 보호하고 있는가?’의 작가는 “나는 비교적 완고한 집착에 맞서 끊임없이 자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마음을 움직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신에게 무엇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괴로운지 물어보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좋지 않기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당연히 이 답은 불합격이다. 계속 추궁하다가 ‘나의 무엇이 나쁘다’라고 대답해야 합격으로 칠 수 있다. 만약 대답할 수 없으면 당신은 ‘설령 다른 사람이 나쁘다 해도 너는 무엇 때문에 마음을 움직였는가? 신은 사람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면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가 자신을 수호하려는 그 사심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일보까지 찾았을 때 나는 자신에게 이것이 근본적인 집착이 아닌가? 너는 사람이 되려는가 아니면 신이 되려는가? 신이 되려 하면서 어찌 아직도 사람의 이치로 문제를 생각하는가? 어찌 이 사람 마음을 원하는가?”라고 썼다. 나는 이렇게 깊이 찾은 후 그 숨은 집착심이 떠오르고 다음 그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심지어 쉽게 뽑을 수 있게 된 것을 발견했다. 이쯤에서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한다. “사부님 저는 신이 되려고 하며, 이 사람 마음은 필요 없습니다. 사부님께서 제자를 도와 제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집착을 찾은 후 일주일 만에 나는 질적인 도약을 했다.

어떻게 찾고 집착을 제거하는지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한다. 나 역시 윗 문장의 수련생처럼 층층이 자신을 추궁한 후 자신의 제일 근본적인 집착을 찾았다. 이때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가?” 마침내 나는 어떤 방면에 대한 법리가 똑똑하지 않거나 혹은 견정하게 믿지 못해 조성된 것을 발견했다.

마침 자신에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만약 내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단락 법을 명백히 알았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이치를 말해 주겠는데, 속인이 인식할 수 없는 이치다. ‘당신이 보기에는 당신이 무엇을 해도 다 잘하지만, 당신의 명(命) 중에는 없으며, 그는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지만, 그의 명 중에는 있기에 그는 간부가 되었다.’ 속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속인의 생각이다.”[1] 다음 나는 좀 크게 생각한다. 나는 원만(圆满)할 뿐만 아니라 성주괴멸(成住坏灭)의 마지막 전환점에서 법에 동화하고 조사정법 하겠다. 내 어찌 이렇게 작은 일에 집착하겠는가? 이렇게 나는 평온하지 않은 사심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 방면의 법리가 명확해졌을 때 만약 당신이 고난 중에 있다면, 마음은 안정되고 거리낌이 없다. 정말 괴로울 때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도움을 청한다면 더욱더 대법을 견정히 믿고 사부님 은혜에 감사함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고난도 더욱 빨리 지나갈 것이다.

사부님은 “수련하는 사람과 속인의 이치는 반대다. 사람은 편안하면 그것을 좋은 일로 여기고, 대법제자는 사람의 편안함을 제고하는데 있어 나쁜 일로 여기며, 제고를 말하자면 불편함이 좋은 일이라고 여긴다. (박수) 이 근본 관념을 당신은 전변(轉變)했는가 하지 못했는가?”[2]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렇다. “이 근본 관념을 당신은 전변(轉變)했는가 하지 못했는가?”[2] 이것은 우리가 시시각각 자신을 추궁해야 할 문제다.

사부님께서 “하지만 후천적인 의식 관념을 타파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수련이기 때문이다.”[3]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난 중에, 모순 중에, 유혹 중에서 진정으로 법 중에 명백하고, 동화하여 관념이 전환되면 우리 본성의 일면은 자연스럽게 더욱 법에 부합된 방법을 선택하고 그 집착심은 정말 하나의 나무 부스러기가 쇳물에 빠진 것처럼 녹아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은 나 개인의 깨달음이다. 만약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자비롭게 시정하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제 2권’

 

원문발표: 2020년 6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23/4080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