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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있었던 그 9년

글/ 왕신(王欣)

[밍후이왕] 외국에 온 지 이미 1년이 넘었다. 수련생들은 나에게 감옥에서 9년 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의 감수는 만약 사부님의 세심한 보호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까지 걸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2001년 3월, 나는 베이징 하이덴(海澱)구 구치소에 납치됐다. 그해 나는 25살이었다.

중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수련생은 모두 알고 있다.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강제 세뇌는 없는 곳이 없다. (정치시험은 줄곧 대학원생까지 시험을 보고 직장에 들어가면 또 이른바 ‘정치학습’이 있다) 당신이 막 철이 들고 글자도 모를 때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만화책을 볼 수 있고, 길의 선전 화보, 라디오의 방송 등이다. 중공은 한편으로 당 문화를 주입하고 한편으로 대학에 가야 출로가 있다는 미끼를 던져 당신은 문장 열독과 문제 풀이에 몸부림치게 한다. 최종 대학에 진학한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가장 독해 받은 피해자다. 무신론과 진화론은 이런 피해자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나는 그중의 한 사람이다. 이런 사악한 이론은 내 머릿속에 두꺼운 병풍이 생기게 했고 납치된 후 한동안 자신과 법 사이에 한 층의 벽이 생겼다. 나는 늘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확고[堅定]함을 희망하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처해 있었다. 표현 형식은 나를 감금한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에게 반문했다. 왜 수련하는가? 왜 이 법을 굳게 믿는가? 등 초기문제를 생각했다. 생각하는 과정에서 매번 20일 지나면 머리는 명석해지고 마음속으로 대법에 아주 확고했다. 그러나 1주일 지난 후 또 흐리멍덩해졌다. 마치 양파껍질을 한 층 한 층 벗기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태는 반복됐고 약 4년 지속됐다.

하이덴구 구치소는 감방에 수련생을 한 명씩 분리하여 교류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구치소에 20일 감금된 후 자신의 정념이 갈수록 약해지는 것을 느꼈고 견지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때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그때 감방의 방장은 지식이 없는 형사범이었다. 갑자기 여러 사람에게 자신이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야기 하나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미국에 채드윅이라는 직업 수영선수가 있는데, 그녀는 영국 도버 해협을 성공적으로 횡단한 2년 후 그녀는 다시 자신에게 도전했다. 캘리포니아 해안 맞은편 먼 섬에서 해협을 지나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하는 것이다. 횡단하는 그날 아침 해변은 갑자기 큰 안개가 끼었다. 채드윅은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호송하는 배가 보이지 않았다. 험악한 날씨도 그녀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마음속에 하나의 목표가 있는데 바로 캘리포니아 해안에 가는 것이다. 15시간 후 그녀는 얼어 입술이 자색으로 변했고 체력은 이미 극에 달했다. 30분 수영을 더 견지한 후 채드윅은 마침내 구호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배에 오른 후 자신이 종착점까지 1해리 남은 것을 발견했다. 마지막에 그 방장은 말했다. “반드시 견지해야 합니다. 혹시 당신 성공의 거리와 한걸음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지친 마음은 단번에 정념으로 충만 됐다.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나를 점화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며칠 후 나는 베이징 제1구치소로 이송됐다. 전설 중의 ‘반보교(半步橋, 반걸음 다리)’ 44호다. 반보교라고 부르는 원인은 그곳은 중죄인을 수감하는 곳이다. 많은 수감자는 족쇄를 차고 다녀 반걸음씩 걸을 수밖에 없기에 반걸음 다리라고 한다. 류원위(劉文宇)를 포함해 나의 많은 칭화대 동문이 전에 거기에 납치돼 박해당했다.

구치소의 공통점은 고독하고 비좁고 배고프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목판에 앉아 있어야 한다. 베이징 구치소의 환경은 해이덴구 구치소처럼 긴장되지 않았다. 내 느낌은 이전에 온 수련생이 환경을 개창한 것 같다. 우리는 경찰 모르게 장부를 쓰는 종이를 소책자로 만들어 사부님의 시와 짧은 경문을 썼다. 한편으로 자신이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수련생이 만약 새로운 경문을 외울 수 있으면 또 그 위에 썼다. ‘가을바람 서늘하구나’ 이 시는 그때 베이징의 한 수련생에게 배운 것이다. 그때 우리 수련생마다 진상을 똑바로 알리는 것을 잘해 수감자의 존중을 받았다. 방장은 감방의 모든 장부와 공금을 내 손에 보관했다. 신임을 받는 동시에 우리는 종이와 펜이 있어 사부님의 경문을 외워 썼다. 수감자들은 떠날 때 진심으로 “파룬, 안녕히 계세요.”라고 했다.

불법 수련은 아주 현묘한데, 일부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 2001년 말 어느 아침에 일어날 때 두 구절의 시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벼운 배 이미 첩첩산중을 지났는데 양쪽 기슭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구나” 이렇게 인상이 깊은 것은 이 시가 거꾸로 말한 것이다. 그때 사부님께서 점화해주신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2003년 초 사부님께서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 설법’이 감옥에 전해왔다. 사부님께서 서두에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하신 다음 “양쪽 기슭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 가벼운 배 이미 첩첩산중을 지나고 있구나(兩岸猿聲啼不住, 輕舟已過萬重山).”[1]라고 말씀하셨다. 함께 수감된 수련생이 나의 경험을 알고 ‘묘하다!’라고 감탄했다.

2002년 6월 나는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 화쯔(鏵子)감옥에 이송됐다. 그곳은 시멘트 공장이다. 주변 환경은 나쁘고 먹는 것은 더욱 나쁘다. 2주에 2번 쌀과 밀가루가 있고 기타는 덜 익은 옥수수떡과 술떡이다. 겨울에 멀건 배춧국은 베이징구치소와 같았는데, 기본상 가마솥 씻은 물과 배춧잎 몇 장이었다. 여름에는 거의 끼니마다 호박이었다. 그래서 자유를 얻은 후 지금도 호박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막 거기 도착했을 때 우리 수련생마다 옆에서 두 명의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루어진 감시원)가 있고 수련생은 서로 말을 하지 못하고 둘은 눈빛으로 교류했다. 바오자에게 진상을 알리면서 바오자의 우리에 대한 감시는 처음처럼 그리 엄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타 수감자가 주의하지 않을 때 상대방에게 사부님의 법을 외워주거나 혹은 간단한 교류를 했다. 매번 신경문이 전해 들어오면 우리는 시간을 정해 급수실 등에서 만나 남이 주의하지 않을 때 손으로 전해줬다. 혹은 한 사람이 빈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사람은 기회를 빌려 경문을 빈 찻잔에 넣는 방식을 썼는데, 이런 방식으로 경문을 얻었다. 그러면 어떻게 배우는가? 주로 법공부 방법은 밤에 잠잘 때 머리는 이불 밖에 내놓고 손에 경문을 놓고 이불 안에 넣는다. 감방은 밤에 불을 끄지 않는다. 약한 광선은 이불을 통해 이불 안의 손에 비춘다. 눈은 안으로 보고 이렇게 법공부를 한다. 법공부할 때 감방에 앉아 있는 야간 바오자를 주의해야 하고 복도에서 당직 수감자에게 발견되지 않게 경계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발각되면 안 된다. 한 수련생이 본 후 다른 수련생에게 전해주는데, 한 편의 경문을 모두 다 보려면 오랜 시간 걸렸다. 그러나 사악한 환경일수록 법공부해서 정념을 강화해야 했다. 나는 그때 ‘홍음2’를 모두 외웠다. 그때 생각했는데, 장래 자유를 얻었을 때 반드시 시간과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궁지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대법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2002년부터 화쯔(鏵子)감옥에 불법적으로 수감된 대법 수련자는 줄곧 제3감구(第三監區)에 수감돼 있다. 강제 노동, 피동적으로 음란 테이프를 보게 하고 혹은 형사범에게 각자 다른 종교의 것을 강제로 듣게 하고, 쪽걸상에 앉게 한다. 대략 2003년 초 수련생 7명은 단식으로 박해를 저지하고 무죄 석방을 요구했다. 이런 박해는 반년 동안 지속됐다. 별명이 ‘다터우(大頭)’라는 사악한 수감자는 죽을 주입할 때 가래를 뱉고 심지어 걸레 씻은 더러운 물에 죽 그릇을 씻었다. 보통 형사범도 보기가 힘들어 말했다. “너무 악랄하다!” 이것은 악한 경찰이 부추긴 것인지도 모른다. 악한 경찰 감구 책임자 리청신(李成新)은 회의할 때 악랄하게 떠들어댔다. “당신에게 코로 밥 먹게 하겠다. 당신들에게 소변과 대변을 좀 주입하겠다!”

2004년 6월 오랫동안 음모를 꾸며 새로운 박해가 시작됐다. 랴오양 화쯔감옥은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100일 전향 행동을 펼쳤는데,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를 강제 협박해 수련을 포기하게 했다. 10여 명 수련자를 3감구에서, 기타 감구에 분배해 놓고 박해했다. 나는 교육과에 분배됐다. 기타는 3감구에서 집중 전향했다. 파룬따파 수련자 롄핑(連平)과 판쉐쥔(範學軍)은 그때 기타 감구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 사실, 그때 랴오닝 화쯔감옥의 대법 수련자를 겨냥한 100일 전향 행동은 시간 배치가 있었다. 어느 시간에, 어느 감구 대법 수련자를 겨냥해 박해하는지 그들은 모두 전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나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나와 나이가 비슷한 대법 수련자 롄핑은 이미 7월에 박해당해 사망했다.

2004년 9월 초 오전, 교육과 수감자 몇 명은 낡은 책상과 의자를 가득 넣었던 작은 방을 정리했다. 그때 나를 감시하던 바오자 리빈(李彬)은 나에게 말했다. “당신 지금 빨리 ‘서명’해요. 만약 ‘5서(신앙을 포기하는 각종 문서)’를 쓰지 않으면 당신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워요.”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태연했다. 리빈에게 말했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저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일도 없을 거예요.” 한 시간이 지난 후 기적이 나타났다. 작은 방을 비운 사람은 또 낡은 책상과 의자를 다시 넣어두었다. 나에 대한 박해는 이렇게 끝났다. 인간의 표상(表象)이 무엇인가? 2시간 후 나를 감시하던 바오자 양이난(楊毅男, 전 선양시 부시장)은 돌아와 나에게 알렸다. 그날 오전 감옥대장 자오위산(趙宇山), 상무부 감옥대장과 교육과 과장은 나의 상황을 겨냥해 또 한 번 회의했다. 양이난도 불려가 토론했다. 최종 결론은 강제 전향을 완화한다는 것이었다. 양이난은 온 힘을 다해 감옥대장과 이치에 근거해 강력한 논쟁을 벌였다고 했다. 말하기를 왕신(王欣)은 학업, 전도, 가정, 사랑을 모두 포기했다. 당신들이 그를 협박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가? 정말로 옥과 돌이 함께 불에 훼손되면 감옥은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이어 그는 말했다. “제가 왜 당신을 보호했는지 아세요? 어느 하루 아침 내가 기침해서 숨쉬기 어려웠어요. 감방의 모든 사람은 나와 오랫동안 지냈는데 누구도 나를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당신은 막 들어왔고 내가 감시하는 대상이었는데, 당신은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물을 주었고 감옥에서 나를 부축해 다니며 병의 증상을 완화시켰어요. 당신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지만 제 마음속에는 기억하고 있어요. 단지 입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후 교육과는 도리어 나 몰래 내 온 가족을 촬영했는데, 온 가족이 번갈아 가며 화면에서 나에게 신앙을 포기하라고 권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선양 463병원에 가서 요독증에 걸린 어머니에게 투석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목적은 도덕 납치이고 나를 협박해 전향하려는 것이었다. 더욱 악독한 것은 그들이 어머니에게 내가 ‘마음을 돌리겠다’라고 승낙하면 아주 빨리 감형하고 석방할 것이라고 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한 어머니는 굳게 믿었다. 그와 동시에 교육과 경찰은 감옥에 온 후 촬영한 것을 나에게 보여주고 나에게 어머니가 이미 중병에 걸려 마지막 얼굴을 보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반드시 수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감옥에서는 그런 진정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불을 지르는 범죄자도 부모가 중병에 걸려 돌아가시려 하면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마지막으로 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사람의 기본 인격을 지키고 헌법의 기본 존엄을 지켜도 집에 돌아가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사실 어머니는 그때 신체상황과 의료조건(어머니는 퇴직 간부이고 높은 의료보험이 있다)으로 2년을 더 유지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옥의 속임수에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2005년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최종적으로 자기 아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감옥에 오셔서 어머니가 돌아간 날을 알려줬을 때 나는 괴로웠고 놀랐다. 어머니 돌아가시던 날 밤에 나는 똑똑히 꿈을 꿨다. 꿈에서 3감구의 한 대법 수련자 창완량(常萬亮)은 밖의 하늘을 보며 말했다. “왕신, 저것이 무엇인지 보라.” 내가 하늘을 보니 한 은하계가 보였는데 이 은하계는 나에게 따뜻하고 포근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2003년부터 2006년 말까지 대법 수련자는 랴오양 화쯔감옥에서 단식투쟁을 거의 멈춘 적이 없었다. 크게는 무죄 석방을 요구했고 작게는 머리를 빡빡 깎지 않는 것이었다. 2005년 9월과 2006년 4월 수련인의 합법적인 권익을 위해 명찰을 달지 않고 잠자리 위치를 조절하지 않았다. 나는 99일과 140일의 단식투쟁에 참가했다. 악한 경찰은 내가 단식할 때 나에 대한 박해를 진행했다. 전에 단식한 수련생이 받은 박해와 유사했다. 경찰의 방종과 의도에 따라 일부 수감자는 도덕성이 없는 일을 많이 했다. 이름이 ‘다터우(大頭)’라고 불리는 수감자는 경찰 곁의 인기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에 대한 음식물 주입을 책임진 사람이었다. 그는 옥수수죽 냄비를 화장실 소변 변기 위에 올려놓고 우리가 먹을 때 뜨거울까 봐 식혀준다고 말했다. 1년 내내 화장실에 파리가 날아다니기에 위생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는 나쁜 습관을 고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은 그가 냄비에 더러운 것을 넣는 것을 보았다. 여러 사람이 나에게 와서 ‘다터우’는 덕을 잃는 일을 한다고 욕했다. 우리가 사악의 음식물 주입에 협조하지 않아 당직 수감자는 우리를 들거나 혹은 끌고 경찰 사무실에 가서 음식물 주입을 했다. 음식물 주입을 한 후 들고 오거나 끌고 온다. 때로는 직접 감옥 바닥에 던져 버렸다.

2007년 초 대법 수련자가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우리 수련 상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점호하는데 협조하지 않았고 번호를 붙이는데 협조하지 않았으며, 노예 노동에 참가하지 않고 쪽걸상에 앉지 않으며, 무장결찰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수련생은 가족과 접견하면서 진상소책자를 감옥에 들여왔다. 감옥에서 모두 진상소책자로 진상을 알렸다. 2007년 4, 5월에 수련생은 전자책을 감옥에 가져왔다. 류 씨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것을 깨달았다. “당신들은 이미 상생상극(相生相剋)의 법리(法理)를 알고 있는데, 두려움이 없다면 당신을 두렵게 하는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탄연(坦然)하게 내려놓음으로써 도달하는 것이다.”[2] 그는 전자책 글을 종이에 베껴 썼다. 처음에 밤에 침대에 엎드려 쓰고 나중에 낮에 침대에 앉아 쓰고 다 쓴 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여러 사람이 쓰게 했다. 그때 모두 심성이 올라왔고 모든 수련생은 함께 공개적으로 법을 베꼈고 어떤 수련생은 밤낮으로 모두 법을 베꼈고 힘들면 잠을 좀 잤다. 한번은 감옥을 조사하다가 한무리 무장경찰은 한 수련생이 베낀 법을 가져갔다. 그 수련생은 단식 항의를 한다고 나에게 알려줬다. 나는 그와 함께 항의한다고 했다. 반나절 사이에 경찰은 그 곁의 바오자를 불러 베낀 법을 그에게 돌려줬다. 그때 화쯔감옥 다른 공간의 사악은 철저히 붕괴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아침저녁 6시, 정오 12시에 입장하고 발정념 했다. 이때 경찰은 우리를 못 본 체했다. 곁의 바오자는 보름에 한 번씩 바꿨는데 경찰의 말에 따르면 주변의 사람이 모두 파룬궁으로 변할까 봐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해서 좋은 점은 2007년 말 화쯔감옥 수감자들은 거의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진상을 알게 됐고, 많은 사람이 정확한 선택을 했다. 이때 랴오닝성 감옥 관리국에서 우리 화쯔감옥의 박해받은 수련자를 분리했고 랴오닝성 기타 3개 감옥으로 납치해 갔다. 나와 왕바오진(王寶金, 박해당해 사망), 바이허궈(白鶴國, 박해당해 사망), 류취안(劉權, 박해당해 사망) 등 십여 명의 대법 수련자는 랴오닝 다롄(大連) 난관링(南關嶺)으로 납치됐다. 나와 성이 런(任)인 수련생은 제 16대대에 배치됐다.

난관링(南關嶺)감옥에 갔을 때 런 수련생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신앙은 무죄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리하여 직접 엄관대(嚴管隊)에 수감됐다. 나는 당시 몸에 몇 권의 대법 경문을 숨기고 있었기에 그와 함께 외치지 않았다. 감방에 들어가 대법 경문을 잘 숨긴 후 나는 단식으로 항의했다. 3일 후 난관링감옥 경찰은 수감자에게 명령해 나에게 강제 음식물 주입을 했다. 그때 나를 지키는 바오자 수감자 중 한 명은 쑹더관(宋德官, 살인범)이고 다른 한 명은 왕둥(王東, 강도범)이다. 한번은 음식물 주입할 때 한 사람은 나의 한 어깨를 잡고 바닥에서 끌고 16대대 3층 감방에서 계단을 지나 1층까지 끌고 왔다. 그런 후 300m 거리의 감옥 병원으로 끌고 갔다. 그때 겨울이라 나의 다리와 발은 여러 곳이 살이 벗겨졌다. 당시 마음속으로 괴로웠다. 그때 생각은 어렵게 화쯔감옥에서 환경을 바로 잡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박해 환경으로 바뀌었다. 나는 죽음으로 항의하려 했다. 마침 내가 있는 위의 침대 틈에 칼날을 발견했다. 밤에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할 때 눈앞에 노란 가사를 입은 사람이 의념으로 내 머릿속에 메시지를 보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가르친 것인가?”, “당신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이 의념이 줄곧 몇 번 반복됐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생각 없이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깨달았다. 나는 빨리 나쁜 생각을 포기했다.

한 달 후 나는 노예 노동을 거부해 엄관대에 수감 됐다.

난관링의 엄관대는 매 칸 감방이 4㎡이고 높이는 3m이고 위에 하늘창이 있다. 들어가면 변기통과 세면대가 있고 잠을 잘 때 머리는 변기통을 향해야 하는데, 극히 모욕적이다. 제일 안쪽에 4칸의 감방이 있는데 감방 벽에 두꺼운 고무가 붙어있다. 안에 있는 사람이 괴로움을 참지 못해 벽에 부딪혀 자살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문 양측을 마주하고 있는 벽에 바닥과 30㎝ 높이에 각각 두 개의 쇠고리가 있었다. 쇠고리의 거리는 1.8m이고 각 고리에 또 3개의 작은 고리가 끼워져 있다. 나와 다른 두 수련생은 그중의 3개 감방에 감금됐다.

우리가 난관링감옥의 엄관대에 수감된 후 사형범만 쓰는 족쇄를 찼고 동시에 손에 수갑을 찼는데, 줄곧 안에서 나올 때까지 찼다. 나는 가장 안쪽 감방에 배치됐다. 안에 들어간 후 벽을 보라고 명령했고 두 다리는 분리하고 오른손과 왼손은 분리하여 각각 수갑을 채우고 수갑의 다른 한쪽은 내가 차고 있는 족쇄 고리를 지나간다. 3일 후 한 손의 수갑을 채우고 다른 한쪽은 벽의 쇠고리에 채웠다. 그러므로 거기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고 몸도 움직이지 못했다. 밤에 잠잘 때 한쪽 수갑은 벽에 묶여 있어 밤에 잠을 잘 때 몸만 움직이면 놀라 깨어났다. 이런 상황은 줄곧 3, 4개월 지속됐다. 대략 2008년 3월에 나는 중간 감방에 배치됐다. 이 감방에 들어가서도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었고 밥을 먹고 잠을 자든 화장실에 가든 수갑과 족쇄는 풀어주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다. 4월 말 단식 항의 4일 만에 연공을 요구했다. 그때 감옥 정치과 과장 쥔(鈞, 음역)은 나의 요구에 응했다. 나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나는 정오와 아침에 연공할 수 있었다. 내가 연공을 할 때 엄관대의 수감자도 바닥에 앉을 필요가 없게 됐다. 엄관대 경찰은 그들도 나를 따라 덕을 보았다고 말했다.

엄관대 감방에 세면대가 있는데 아래 하수관이 없다. 세면대 중간은 큰 구멍이었다. 아래는 쓰레기통이 받고 있다. 수감자가 하수관을 이용해 자살할까 봐 그런 것이었다. 나는 낮에 엄관대에 앉아있고 통상 홀로 법공부를 하거나 발정념했다. 힘들면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때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내가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세면대 안의 한 방울 물이 쓰레기통에 떨어지고 땅하고 소리가 났다. 내가 생각한 일이 너무 터무니없으면 소리는 더욱 컸다. 나는 생각하지 말라고 일깨워줬다. 한번은 일부러 보았는데 세면대 안에 고인 물이 없었다. 2009년 감방으로 돌아간 후 자신의 사상이 빗나갔을 때, 감방 창문 철난간은 ‘웅웅’ 소리가 나며 내가 옳지 않다고 일깨워줬다. 그러나 누가 그 난간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바오자에게 물으니 그들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8, 9월에 엄관대 위생을 정리하는 수감자는 리린(李林)이라는 살인범으로 바뀌었다. 이 사람은 몹시 나쁘고 경찰에게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어 우리 수련인을 괴롭혔다. 그는 구실을 대며 내가 연공하는 것을 금지하고, 급식에서 감옥에서 준 식량을 떼먹었으며, 주기적으로 수련생을 모욕하고 욕했다. 8월 이후 11월 말 재차 단식 항의 전 나는 이미 엄관대에서 단식을 2차례 했다. 매번 단식 후 처음으로 음식물을 주입할 때 16대대 경찰은 수감자 몇 명을 찾아 나를 엄관대에서 끌어내고 감옥의 정원에서 500m 먼 감옥 병원까지 끌고 갔다. 그리하여 다리, 엉덩이는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내 바지도 닳아 없어졌다. 그들은 이렇게 나를 감옥에서 끌고 다니며 나를 괴롭히고 모욕했다. 만약 당신이 놀라서 물러서지 않고 계속 단식하면, 손수레로 엄관대와 감옥병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나중에 공공연하게 그렇게 하지 않고 옥수수죽에 대량의 소금을 넣었다. 나는 이 때문에 토하고 설사했다. 11월 말에서 12월 초가 되어 나는 또 한 번 단식하고 연공을 요구했다. 이번에 나에 대한 괴롭힘은 미친 듯 악독했다. 단식기간 그들은 나를 벽에 걸어 놓고 막 엄관대 들어올 때 자세와 같았는데, 유일한 구별은 밤에 벽에서 내려줘 잠을 자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잠을 잘 때 한 손목을 벽에 채워 놓고 발의 족쇄 중간 체인을 다른 쇠고리에 채워놓았다.

음식물을 주입할 때 16대대의 성이 왕(王) 씨인 대장(隊長)과 성이 장(張) 씨인 대장은 내가 극히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전기봉을 가했다. 감옥 병원에서 나는 음식물 주입 침대에 누워 있으면 왕 대장은 전기봉을 들고 발, 다리, 손에 전기를 충격했다. 전기봉은 파파 소리도 났다. 내가 아무 소리 없자 왕 대장은 전기봉을 가져와 침대에 전기를 옮겼다. 전기봉이 망가졌나? 전기봉이 망가지지 않은 것을 보고 계속 손발에 전기봉 충격을 가했다. 온 방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고 전기봉의 파파 소리만 들렸는데, 수감자는 모두 놀랐다. 주입된 농도가 높은 음식은 그때 토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주입했다. 그런 후 그들은 나를 다시 엄관대로 끌고 가고 엄관대 문에 들어서면 즉시 와와 토했다. 그런 후 설사해 소금물을 배출했다. 이런 음식물 주입은 하루에 한두 번이었다. 이튿날 음식물을 주입할 때 그들은 또 전기봉으로 전기를 가했다. 그때 왕대장에게 왜 사람을 때리냐고 물을 때 그는 말했다. “누가 당신을 때린 거요?” 내가 견지했기에 7일 후 그들은 더는 짙은 소금물 음식을 감히 주입하지 않았다. 이때 나는 그들이 박해해 고열이 지속됐다. 폐에 이미 구멍이 2개 났고 황담수(黄胆水)를 토하고 뭘 마시면 뭘 토했는데, 더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7일째 되는 날 나는 흐리멍덩할 때 7척의 배를 보았다. 중간은 은으로 만든 것이고 나머지는 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똑똑히 알고 있었다. 넷째 날 사부님께서 나에게 밥을 먹으라고 권해 나는 사과 반 개를 먹었다. 이것은 7일 동안 얻은 수확이다. 8일 째 부터 나를 감옥병원 병실에 남겼고 사람을 찾아 나를 간호하게 했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감옥은 재빨리 나를 다롄시 제3병원에 데려가 응급처치를 했다. 그때 이미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한 손을 병실의 침대에 채워놓았다. 그때 의사와 간호사가 질책해 풀어주었다. 그들은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 아버지를 불러 나를 간호하게 했다. 동시에 나의 기타 가족에게 통지해 마지막 얼굴을 보게 했다. 그들은 내가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나와 둘째 고모집 여동생과 셋째 삼촌 집의 남동생은 모두 나를 보러 왔다. 아버지의 말로는 그때 나는 뼈만 남아 앙상했고 이미 임종에 처했다고 했다. 병원에서 응급처치와 간호를 거쳐 나는 깨어났다. 그러나 대략 2주 동안 나의 의식은 비교적 혼란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줄곧 칭화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줄 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칭화학교 병원에 데려와 병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퇴원할 때 비로소 기억을 회복했다.

감옥과 외부의 수련생은 아주 대단했다. 내가 박해당한 상황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러나 그때 경찰이 정보를 봉쇄했기에 수련생들은 나의 기관지가 파열돼 병원에 이송된 줄만 알고 있었다. 감옥으로 돌아간 후 나는 16대대 감방에 감금됐다. 그들은 나에게 노예노동을 시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2009년 5월에 대대의 수감자가 일을 나간 후 감방에 이미 경찰이 없었고 나는 안에서 연공하고 바오자 수감자도 기본상 나를 상관하지 않았다.

16대대에서 나는 일부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는 능력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그와 깊이 이야기했다. 한번은 홀에서 밥을 먹을 때 나는 한 수감자에게 말했다. “‘사람 몸은 얻기 어렵고, 중사(中土)는 살아남기 어렵고, 불법은 만나기 어렵다.’ 당신이 볼 때 맞은편 화분에 심은 나무는 매일 거기에 서 있는데 얼마나 힘든가?” 뜻밖에 그 화분의 나무는 우리를 향해 흔들었다. 나의 말을 들은 것처럼 계속 끄덕이는 것 같다. 화분 주변은 사람이 없고 홀이라서 바람이 없었다. 그 수감자는 아주 놀라 말하기를 “본래 만물은 모두 영혼이 있구나. 당신이 말한 것이 모두 진짜입니다.”

2009년 4, 5월에 난관링감옥은 새로운 관리방식을 추진했다. 그들은 ‘견벽청야(堅壁清野)’라고 불렀다. 낮에 감방에 수감자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밥을 타는 수감자와 홀을 청소하는 4, 5명 수감자만 남아있다. 매일 오전 8, 9시에 감방에서 나가고 10시쯤에 돌아왔다. 오후 1시 넘어 현장에 가고 3시 넘어 감방에 돌아온다. 나도 이런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나왔다 했고 줄곧 감옥에서 떠날 때까지 그랬다.

난관링감옥에 마지막 1년 동안 있을 때 겉으로 나에 대한 엄중한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왕 대장과 장 대장, 자오(趙) 대장은 기회를 찾아 나를 박해했는데, 작은 상황은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안전 검사문을 지나가지 않아 엄관대에 감금했다. 나는 엄관대에 들어가자 단식 항의했다. 이틀 후 대대에서 데려갔다. 그들도 나에게 더는 음식 주입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난관링감옥에서 줄곧 떠날 때까지 있었다. 나는 최대한 사악에 협조하지 않았는데, 번호를 말하지 않았고 노역을 하지 않았으며 점호에 참가하지 않았다. 나는 되도록 한 수련자의 존엄을 지켰다. 떠날 때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정문을 나올 때 정문 경찰은 등기하고 서명해야 떠날 수 있다고 요구했다.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나를 보내준 16대대장이 나를 대신해 서명한다고 했다. 정문 경찰은 동의하지 않았다.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서명하면 당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단지 당신이 여기에서 나갔다는 것을 증명해요. 서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을 석방하지 못해요. 이것은 규정이요.” 나는 말했다. “그러면 저는 돌아가겠어요. (감옥으로 돌아간다는 뜻)” 당직 경찰은 단번에 웃으며 말하기를 “그러면 당신은 가시요.”

랴오양 화쯔감옥에 들어가서부터 계산하면 모두 55명 대법 수련자가 있었다. 화쯔감옥에서 직접 박해당해 2명이 사망했고 다롄 난관링감옥에서 박해당해 3명이 사망했다. 최소 2명은 병보석으로 나간 뒤 집에서 사망했다. 또 최소 5명은 병원에서 응급처치받고 돌아왔는데, 어떤 때는 심지어 구사일생이었다. 이번 박해의 참혹함을 볼 수 있고, 사람이 과거에서 미래로 걸어가는 것은 아주 간고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달이면 무너졌을 것이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

 

원문발표: 2020610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0/4071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