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비록 매일 모두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수련이 너무 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요하게는 자신의 10살 난 아이와 같이 지내면서 모순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모두 말했다. “너희 둘은 태어날 때부터 모순덩어리다.” 자신도 매우 괴로웠는데 수련을 이렇게 오래 했지만 어찌하여 자신의 아이도 용납하지 못하는가?
어릴 때 나는 부모님 눈에서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좀처럼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그 당시 가정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늘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당시 목표가 바로 공부를 잘하기만 하면, 장래 좋은 대학에 붙고 좋은 회사를 찾을 수 있으며 비로소 좋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고 성적은 항상 반에서 앞쪽에 있었다.
이런 관념의 영향으로 나는 아이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았는데, 늘 그가 공부를 잘하기 바랐다. 매번 선생님이 그룹 내에서 성적을 발표하기만 하면 내 마음은 매우 긴장되었는데, 바로 손에 잡힌 일들을 내려놓고 아이의 성적 등수를 보았다. 시험을 잘 보면 마음속으로 기뻤고, 시험을 잘 보지 못하면 마음속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늘 아이를 훈계했다. “너는 모모를 봐라. 모모는 성적이 얼마나 좋니, 마땅히 따라 배워야 한다. 그 아이는 너보다 총명하지 못한데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반드시 그 아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 정말 사부님께서 법 속에 말씀하신 부분과 같았다. “다른 사람이 만약 잘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1] 나는 자신의 슬픔과 즐거움이 전부 아이의 성적에서 유래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성적이 좋기만 하면 나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게임을 하도록 허락했다. 마치 자신이 남들 앞에서 한층 더 높아진 것 같았고 체면 세우기를 좋아하는 마음, 허영심이 너무나 강렬했다. 나는 아이를 ‘자아’를 만족시켜주는 도구로 여겼고 완전히 속인의 홍류 속에 빠졌다. 성적은 아이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 되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수련생과 교류했고 수련생은 나를 일깨워주었는데, 수련인은 밖을 향해 보지 말아야 하고 마땅히 안을 향해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비로소 자신이 수련인임을 의식했고 어찌 사부님께서 주신 ‘안을 향해 찾는’ 법보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에게 물었다. 속인 속에서도 “360가지 업종에서 업종마다 장원이 나온다.”란 말이 있고 성적 또한 사람의 유일한 출로가 아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아이의 성적에 집착한단 말인가? 만약 남의 집 아니라면 나는 긍정코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인데 이는 정(情)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아이가 출세하길 원하는데, 그러나 이는 내가 말해서 결정되는 것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이 망상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이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더욱 고급적인 생명이 볼 때, 인류사회의 발전은 다만 특정한 발전법칙에 따라 발전함에 불과하므로, 사람의 일생 중에서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그가 당신의 능력에 따라 당신에게 안배해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1] 사부님의 설법이 생각났고 나는 내 아이에 대한 정이 너무나 중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사람마다 각자 팔자가 있고 사람의 일생은 일찍이 배치가 잘 되었는데 나는 고달프게 무엇을 집착한단 말인가? 심신만 피곤할 뿐이다. 또 바로 당 문화의 입시교육 영향으로 나도 그 속에서 세파에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법리가 청성해지자 마음도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아이의 숙제를 검사하면서 아이가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면 아이는 항상 불쾌감을 표출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물건을 던졌다. 어떨 때는 심지어 아주 듣기 싫은 욕도 했는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내가 어디가 틀렸나요? 어디가 틀렸나요?”라고 했다. 이런 정황을 마주해서 나는 모두 참을 수 없었고 아이와 쟁론했고 마음도 평형을 잃었다. 어찌 틀린 곳을 시정하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되는가? 가끔은 또 화가 나서 울었다. 지금 다시 이런 정황이 나타나면 나는 평온하게 아이와 대화할 수 있다. 비록 아이에 대한 정이 아직 존재하고 가끔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법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수련인의 선(善)을 지킬 수 있고 주동적으로 그 좋지 못한 마음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아이의 표현에서 자신을 찾아보았다. 어머니(수련생)도 매번 내가 법에 입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 주지만, 나는 입으로 대답하고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또 이유를 찾아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해석하곤 했다. 아이의 표현은 나 자신의 표현이 아닌가? 아이는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나 역시 좋지 않은 말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며 잘난 척하며 늘 자신이 맞다고 여기고 남을 깔보았다. 원래 아이의 표현은 모두 그의 진실한 자신이 아니었고 그는 나를 도와서 제고시키고 있었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아이는 이런 하나의 배역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것을 인식하고 나는 진짜로 마음속으로부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너에게 감사하단다! 고맙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0년 4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26/4031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