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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바꾸자 상태가 변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0년의 수련 길을 돌이켜보니 비틀거리며 많은 굽은 길을 걸어 사존께 심려를 끼쳐드렸다. 그런데 굽은 길을 걷고 사존께 심려를 끼쳐드린 주요 원인은 자신이 수련하면서 법에 잘 동화되지 못해 인념(人念)이 수련자의 정념(正念)으로 변하지 않아 항상 사람의 기점에서 사람 말을 하고 사람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련에서 번거로움이 계속되었고 억울한 일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고가 느렸다.

오늘, 내가 관념을 바꾼 후에 이전에 경험한 모든 것을 돌이켜볼 때, 과거의 많은 인식과 방법이 모두 잘못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아주버님에 대해 선입견이 있었다. 아주버님은 수년간 본가에 오지 않고 부모를 부양하지도 않으며 남의 자식 같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지금 나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내가 사람의 이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불교 중에서는 말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바로 업력윤보(業力輪報)다.” 당신이 그에게 빚을 졌으면 그는 당신을 찾아와서 빚을 받아갈 것이며, 더 많이 받아 가면 다음번에 그가 다시 당신에게 갚아준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다음번에 거꾸로 되는데, 바로 이렇게 돌아오고 돌아간다.”[1]라고 말씀하셨다. 일체는 모두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버님과 시부모님 사이의 인연 관계를 모르므로 사람의 이치로 이런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직장이나 기타 사회환경 중에서 자신의 일부 표현을 생각해보았다. 불공평한 일에 부딪힐 때마다 늘 매우 분개하며 뭐라 하고 무언가를 하면서 정의감이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 중에 서서 사람의 일에 관여한 것에 불과하다.

관념을 바꾼 후에 나는 내가 문제를 보는 각도가 달라진 것을 발견했으며, 수련인의 정념, 사존께서 가르치신 바른 법리로 사람과 일을 대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시아버지는 절대 효도하지 않는 시동생 일가족에게 돈과 물건을 주면서 더 관심을 두지만, 당신을 마음 써서 돌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켜 우리는 돈도 쓰고 힘을 다하는데 시아버지는 도리어 우리에게 불만이 있다. 관념을 바꾸기 전에는 시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만까지 있었다. 하지만 관념을 바꾼 후에 나는 그 속에서 나의 질투심, 이익 추구의 마음, 보답을 바라는 마음 등등 사람 마음을 보았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수련인으로서 노부모에게 마땅히 효도해야 하는데, 타인과 무슨 겨루기를 한단 말인가? 시아버지의 표현을 마음에 둬서 뭘 할 것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할 것만 상관하면 된다. 질투심, 이익 추구의 마음, 보답을 바라는 등 사람 마음을 제거해버리자!

예전에 나는 어머니가 현모양처가 아닌 것을 원망했고, 오빠들이 장래성이 없는 것이 어머니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으며, 나의 고통은 가정이 조성한 것이라고 여겨 이런 가정에 태어난 것에 열등감과 불행을 느꼈다. 사존께서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이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1] 사존께서는 또 “사람이 예전에 나쁜 일을 하여 생긴 업력(業力) 때문에 병이나 마난(魔難)이 조성된다.”[1]라고 말씀하셨다.

사존께서 가르치신 바른 법리가 나의 사람 관념을 바꿔 나의 고통을 조성한 진정한 원인은 자신의 업력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사존께서는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 사람은 제각기 운명이 있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좌우할 수 없다. 나의 고통은 어머니와 오빠들이 조성한 것이 아니라 나의 업력이 조성한 것이다. 오빠들이 장래성이 없는 것 역시 그들의 운명인바,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다. 나의 덕과 업에 근거해 나는 마땅히 이런 가정에 태어나야 했으며, 마땅히 이런 인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 인생의 길 위에서 나는 확실히 적잖은 고생을 겪었고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나도 수많은 업력의 빚을 갚았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자신이 진 빚은 자신이 갚아야 한다. 이것은 우주의 이치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수련 중에서 나는 수련생에게 오해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사람의 생각으로 문제를 보았기에 수련생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겼으며, 일 표면의 옳고 그름에 뒤엉켜있어 억울했다. 내가 관념을 바꾸고 수련인의 정념으로 다시 이 일을 보니 정말로 내가 잘못한 것이었다. 내게 다른 사람에게 뭐라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등 한 더미 사람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련생의 오해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런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정말로 나를 오해한 수련생에게 감사드려야 마땅하다.

사람은 명리정(名·利·情)을 좋은 것으로 여겨 지향하고 추구한다. 예전의 자신을 생각해보니, 마음이 사람 속에 있어 업무에서도 항상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무슨 일이든 앞다퉈 했다. 상급자의 인정, 표창과 물질적인 보너스를 얻으면 곧 득의양양하며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집안 살림도 남보다 좋아야 했으며, 자식도 다른 아이들보다 발전성이 있어야 했다. 관념을 바꾼 후에야 나는 이런 표현은 사실 모두 당(黨)문화에서 생긴 것으로서, 그 속에는 쟁투, 질투 및 명리정에 대한 추구가 가득해 대법의 요구와 위배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련인으로서 어디에서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생명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맞다. 사람 속의 명리정은 수련인이 원만을 향해 나아가는 한 가닥, 한 가닥의 동아줄로서, 마땅히 끊어야 한다.

관념의 변화로 나의 수련 상태도 변했다. 과거에는 집착하며 내려놓기 어려웠던 마음을 지금은 내려놓기 쉬워졌으며, 과거에 수련은 고생스럽고 힘들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수련하기 수월해졌다. 번잡한 말세의 혼란한 상태에 직면해 더는 이전처럼 그렇게 미혹되거나 진정으로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못하지 않고, 명리 앞에서 더는 쟁탈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손실이 있을 때, 마음속으로 탄연하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무고한 상해에 직면해 더는 예전처럼 고통에 뒤엉켜 마음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다. 사람의 것을 내려놓으니 정말 좋다. 관념을 바꾼 후에 수련이 매우 간단해졌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여기 속인사회에 와서, 마치 여관에 투숙하듯이 며칠 좀 묵었다가 총총히 간다.’”[1] 사존께서는 또 “인생은 짧은 것 잠시 여관에 든 것 같다네 올 때 발한 서원 잊지 말거라”[2]。확실히 인간 세상은 수련자가 잠시 쉬는 여관일 뿐이다. 대법제자로 말하자면, 인간 세상의 여관에 있는 모든 것에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해 사존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행로를 낭비해서는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관념을 바꿀 수 있는가, 인간에서 뛰쳐나올 수 있는가는 매 수련자가 신을 향해 가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내려놓기만 하면 우리는 비로소 수련하여 신이 될 수 있다!

이상은 본인의 현 단계에서의 인식과 체득으로서 부족한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癡(어리석음)’

 

원문발표: 2020119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16/3990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