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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얻어 미혹을 깨는 큰 소원을 이루어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련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0년을 한 생명의 긴 과정에서 보면 짧아 보이지만 한 수련자의 풍상고초가 가득 들어있는 것입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나를 끝없는 고해에서 해탈시켜주었습니다. ‘서유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 몸을 얻기 어렵고 중토(중국)에서 태어나는 것도 어려우며 정법(正法)을 만나는 것도 어렵도다. 이 세 가지를 갖춘다면 대단히 큰 행운이다!” 나는 운 좋게 우주 대법을 얻었습니다. 수련하는 중에 자비로운 사존께서 하나하나의 고난을 지나올 수 있게 보호해주셨으므로 나는 대법에서 단련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존을 따라 20년간 정법 시기 대법제자로서 정법 노정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대단히 큰 행운이었습니다!

1. 대법 수련에 들어서다

나는 1998년 8월 수련을 시작한 대법제자입니다. 나이는 34세로 남편과 슬하에 13세 아들, 10세 딸을 둔 4식구의 가정주부입니다.

내가 공장에서 근무할 때 은행원 남편을 만나 결혼했으므로 조건도 좋았고 가정형편도 괜찮은 편이었는데 뜻밖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딸을 출산하고 3개월이 되었을 때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70여 세 노인을 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당시 노인이 실신 상태라 급히 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했지만 4일째 되는 날 노인은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남편은 교통사고의 책임으로 3년형의 집행유예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직장에서는 은행대출업무직에서 보일러 잡부로 강등되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은 남편은 화를 참지 못하고 사표를 제출해버렸습니다.

그러나 교통사고 피해자에게 병원비 외에 1만 위안(한화 약 169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해야 했으므로 우리의 형편으로 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그 돈은 50위안(한화 약 8천 원)의 내 월급 2년 치에 해당하는 큰돈이고 남편은 직장을 잃었고, 딸까지 출산한 상태여서 참으로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가정은 큰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돈을 갚기 위해 여기저기서 빌려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겨우 자금을 융통해 동업으로 장사를 하다가 7천여 위안(한화 약 118만 원)을 사기당하고 말았습니다. 50위안의 내 월급으로 가족의 생계를 겨우 유지했는데, 남편이 밖에서 많은 빚을 지고 나서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늘 채권자들이 집을 찾아와 돈을 갚으라며 독촉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내 월급에서 떼어줬는데, 어느 달에는 빚을 갚고 나면 14위안밖에 남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몇 년간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참으로 비참한 실정이었습니다.

1998년 8월 어느 날 다른 도시에서 사는 언니가 찾아와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한다”고 하면서 “이 공법은 매우 좋다”라고 했고, “병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다 바꿀 수 있다.”라고 하면서 “가정환경도 바꿀 수 있다.”라고 말함에 따라 나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정환경이 바뀐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당장 다음 날 연공장을 찾아가서 연공을 했고, 법을 배우면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법을 배워 생명의 내원을 알았고, 사람이 사는 목적과 윤회, 인연 등등을 알게 되어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은 바로 원래 천서(天書)였구나!’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배웠고, 배울수록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그때부터 삶의 목적을 알았고, 생명의 귀착점을 알게 됐습니다.

끊임없는 법공부와 연공으로 법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으며, 끊임없이 사람의 관념이 바뀌고 심성이 높아졌으므로 처음 입문했을 때의 생각과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법을 얻을 때는 생활보장이 되고 가정환경도 바뀌기를 기대했습니다. 법 공부를 한 지 1개월이 넘었을 때 양식이 바닥이 났으나 쌀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퇴근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쉬고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했습니다. “사부님! 삶이 너무 고달픕니다. 그래도 저는 수련을 잘해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두 아이와 함께 3일간 감자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고달플수록 대법 수련을 견지하도록 신심이 강해졌습니다. 단시간 내에 어려운 가정형편이 바뀌기를 기대했던 마음을 버리고 오직 대법의 ‘진선인(眞·善·忍)’에 동화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眞)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2. 어려운 가정 속에서 심성을 제고하다

법 공부가 깊어지면서 가정의 모순도 잇따랐습니다. 남편이 점점 크게 화를 내며 성격이 거칠어졌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눈이 벌겋게 술에 취해 집에 온 것을 보고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으라고 하자, 대야를 발로 차버려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되었지만, 나는 아무 소리 않고 얼른 걸레로 바닥을 훔쳤습니다. 남편은 그래도 화를 내지 않는 나를 보고 더욱 화가 나서 소파에 누워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휘두르며 아- 아- 하며 말했습니다. “이 파룬궁은 정말 대단하네. 오늘 나는 당신이 정말 화를 내는지 안 내는지를 보겠다!”라고 하더니 벌떡 일어나 사정없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참을 때려도 화를 내지 않자, 어린 딸과 아들에게 매질했습니다. 그렇게 2시간 동안 소동을 부리다가 지쳐서 침실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가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남편의 상체를 잡고 두 아이에게 한쪽 다리를 들게 해서 침대로 옮긴 후 신발과 바지를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었습니다. 그는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잤습니다.

당시 나는 겉으로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남편 옆에 10분간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자 머리가 텅 빈 것 같았고, 조금 전 겪은 일이 매우 먼 일만 같았습니다. 그때 잠자던 남편이 말했습니다. “참음은 고상한 것이고, 온화함은 고귀한 것이다.” 그 말은 사존께서 남편의 입을 통해 나를 격려해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련을 견지하겠다는 마음이 다져졌고, 사존을 향한 무한한 공경심이 깊어졌습니다. 심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그런 유사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3.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가다

1999년 7월 장쩌민은 파룬궁을 탄압하며 각종 헛소문과 비방으로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과 대법을 모함하고 모독함에 따라 주위의 수련생들이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당시의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베이징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의 적은 월급으로 두 아이의 초등학교 뒷바라지를 하며 네 식구의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실정인 데다가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나와 아이들을 때리고 욕하며 괴롭혔으므로 법 실증을 위해 베이징에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조급했습니다. ‘그래도 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두 아이를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언론매체가 연일 사부님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형편이 어렵더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상을 알리고 사부님의 결백을 위해 청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베이징에 가기로 했습니다. ‘법을 바로 잡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9년 9월 언니와 또 다른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보니 베이징 민원부서 건물은 이미 사람을 체포하는 곳으로 변해 청원을 접수할 곳이 없었습니다. 1개월 넘게 베이징에 머물며 청원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간에 많은 위험을 겪었는데 추적조사와 납치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며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어는 날 우리 세 명은 허허벌판에 있는 한 수련생 집으로 가서 옥수수 밭머리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니, 수련생 집은 온통 벌레와 쥐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99년 10월 26일 중앙텔레비전 저녁 뉴스에서 “파룬궁은 ×교다”고 방송했습니다. 우리 세 명은 그곳 몇 명의 수련생과 함께 그날 저녁 베이징 톈안먼 광장으로 법을 실증하러 갔지만, 이미 현장에 경찰이 곳곳에 가득 배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톈안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납치되어 첸먼 파출소로 끌려갔다가 다음 날 펑타이 체육관으로 옮겨졌고, 종일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있다가 저녁 늦게 베이징 미윈 구치소로 이송되었는데, 이미 그곳에 십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모두 수갑과 족쇄를 차고 벽 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수련생이 연공을 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수갑과 족쇄를 채운 후 울안에서 끌고 다니는 형벌을 가해 수련생의 발목이 땅에 끌려 피범벅이 되자, 다른 수련생들이 그 경찰에게 항의하였고, 경찰은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나서라고 하면서 십여 명 수련생을 모두 형구에 채워 벌 세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연공을 했다고 그런 겁니까? 그럼 나도 연공하겠다.”라고 말한 후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5분 정도 됐을 때 밖에서 한 경찰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또 연공하는 사람이 나왔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감방 철문이 ‘쾅’하고 열렸고, 키가 크고 뚱뚱한 경찰이 달려들어 나를 때리고 발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다리를 찼습니다. 내가 한번 웃고 나서 다시 다리를 틀어 올리자. 약이 오른 경찰은 사정없이 가부좌한 다리를 찼으며,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가부좌 다리를 힘껏 밟고 섰습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나를 끌어 일으켜 세우면서 “벌 받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라.”라고 밖으로 밀었는데, 내가 신발을 신으려고 하자 경찰은 “신발은 무슨 신발이야!”라고 하면서 밖으로 밀쳤습니다.

당시는 10월 말이고, 밖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나를 비가 오는 젖은 땅에 확 밀어 쓰러트리며 “이건 맷집이 좋은 것 같으니 때려라.”라고 말하자, 4~5명의 경찰이 달려들어 머리고 몸통이고 구별하지 않고 사정없이 10여 분간 집단구타를 한 후 일으켜 세워 놓고 우두머리가 수하 경찰에게 지시했습니다. “그 여자에게 제일 무거운 족쇄를 찾아서 채워!” 매우 굵고 무척 무거운 녹슨 족쇄를 채울 때 잠금장치를 망치로 때려서 채웠으며, 또 뒤로 수갑을 꽉 끼게 채웠습니다. 족쇄가 무거워 걷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걸을 때 땅에 닿은 족쇄가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경찰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악당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가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감방에 앉아 있을 때 등 뒤로 채워진 수갑이 손목을 너무 꽉 조이는 데다가 수갑이 녹이 슬기까지 해서 피부가 쓸려 매우 아팠습니다. 그래도 연공을 하고 싶었지만,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어서 다리를 틀 수가 없어서, 옆에 있는 노년 수련생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가부좌를 하려는데 내 다리를 올려줄 수 있나요?” 그가 다리를 틀어 올려주어서 10여 분간 앉아 있자, 수갑이 조이거나 쓸리지 않고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내 뒤에 있던 수련생이 놀라워하며 말했습니다 “와, 아주머니 수갑이 열렸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무척 감격했으며, 다시 한번 대법의 신기함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다음 날 점심시간에 경찰이 감방에 들어와 풀린 수갑을 보고 놀라 말했습니다. “이런! 이 수갑이 어떻게 풀렸지?!” 그들은 녹이 슬어 오래된 수갑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맘속으로 모든 중생에 대한 사부님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생에게 잘못을 깨닫게 하고 자신을 망치지 않고, 대법과 대법제자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사존께서 시시각각 자비롭게 제자를 지켜주시고, 또 대법이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경찰차 1대가 왔고, 차에서 경찰 2명이 내려 나를 불러낸 후 큰 망치로 족쇄를 부숴서 풀었으며, 나를 차에 태운 후 그들은 사부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뭐라고 하든지 나는 개의치 않지만, 대법 사부님께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에게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아주머니, 지금 당신의 꼴을 봐! 아주머니의 사부라고 말을 못 하게 하는 건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내가 즉시 휴지를 꺼내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 그의 태도는 돌변했고 대법에 대한 불경스러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운전하던 경찰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우리 이렇게 오랫동안 실랑이를 했는데 가방에 돈이 있으면 우리에게 밥을 사줄 수 있나요?” 나는 “사줄 수 있다. 가방에 아직 300위안이 있으니 우리가 밥을 먹을 돈은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농담한 거라면서 “어떻게 아주머니의 돈을 쓸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차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변했는데, 사존께서 모든 중생에게 큰 자비를 내리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베이징에서 겪은 신기한 일들은 더 많았지만 길게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4. 파출소장이 우리 둘을 집에 데려다주다

베이징에서 납치되어 현지로 이송된 후 세뇌 반에 갇혀 “연공하지 않고, 베이징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라는 보증서를 쓰라고 핍박하면서 “만약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겠다”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렇게 불법으로 1개월간 갇혔다가 오빠가 500위안(한화 약 8만 원)의 식비를 내고 풀려났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알게 된 일은, 직장에서 남편을 핍박해 “말을 듣지 않으면 해고한다”라고 해서, 나를 대신해 서명하게 한 후 4천 위안(한화 약 67만 원)의 퇴직금을 받는 것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직장을 잃은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용직 일을 하게 되어, 식당이나 가정부를 하는 등 온갖 잡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현지 파출소에서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던 나를 중요 감시대상으로 정해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집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우며 괴롭혔습니다. 한번은 자정이 넘은 야심한 밤에 경찰차가 집 앞에서 경적을 울려대며 소란을 피워 남편과 아이들이 놀라 깼고, 밤잠을 설친 남편은 화가 나서 나에게 더욱 심하게 대했습니다.

2003년 여름, 언니와 함께 많은 양의 진상 자료를 챙겨 농촌으로 배포하러 가서 집집이 다 돌리고, 조금 남은 자료를 가지고 귀가하다가 현지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었는데, 진상을 모르는 농촌 촌민이 신고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파출소에 도착했을 때 610(파룬궁 수련생을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조직기관) 요원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고 진상을 알리자, 610 요원이 말했습니다. “이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모두 자비롭고 인자하군!” 그렇지만 파출소는 당일 저녁 우리를 구치소로 이송하고 가뒀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우리가 알려준 파룬궁 진상을 알게 된 구치소의 많은 수감자와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10일 후 언니와 함께 2년의 노동교화처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갇힐 노동교화소에 도착했지만 의외로 노동교화소 측이 수감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파출소장이 조급한 마음에 인맥을 찾아 뛰어다니며 부탁했지만, 노동교화소 측은 우리를 받기를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때 파출소장이 서류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나서 “당신들이 승리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파출소장은 노동교화소 측 사람에게 “공산당은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착한 두 사람을 왜 노동교화소에서 받지 않느냐? 이후 단 1명도 이곳으로 보내지 않겠다.”라고 말했고, 또 경찰 두 명도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이후부터 당신들이 우리 눈앞에서 파룬궁 자료를 배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들을 상관하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우리에게 채웠던 수갑을 풀어주면서 “이 수갑도 이젠 소용없어.”라고 했습니다. 집이 시내에 있는 파출소장이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면서 부하 경찰에게 “아주머니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라.”라고 지시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기쁘면서도 한 편 괴로웠습니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사존께서 또 한 번 우리의 고난을 해결해주신 것이 기뻤지만, 반면 내 수련의 누락과 언니에 대한 깊은 정으로 인해 박해를 초래했다는 생각이 괴로웠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시내 수련생이 현지소식을 전하는 특간을 제작해 악당이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중생이 대법에 죄지은 내용을 폭로했습니다. 언니는 파출소장에게 선행을 권하는 서신을 써서 직접 전했는데, 후에 파출소장은 “이곳에서 근무할 수 없다.”라고 말한 후 다른 곳으로 전근했습니다.

5. 자비와 위엄은 같이 있다

2005년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인근 마을에 사는 수련생에게 ‘9평 공산당’을 전해주려고 갔다가 잠복하던 경찰에게 납치되어 또 시 구치소에 갇혔고, 1개월 후 불법적으로 노동교화처분을 받아 성(省) 노동교화소에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노동교화소는 전향하지 않은 대법제자에 대해 매우 혹독하게 대할 때였습니다. 노동교화소에 들어가자마자 매우 엄하게 대했는데 몇 사람이 돌아가며 세뇌했지만, 나는 시시각각 ‘진선인’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며 심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와 한 수련인으로서, 내가 말하건대 수련인은 적이 없다. 당신들은 오로지 사람을 구원하는 몫이 있을 뿐”[1]이다. 나는 사존의 가르침을 명심했습니다. “수련인은 적이 없으며”[2]를 되새기며 여러 방면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차츰 심성이 제고되었고,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노동교화소 3층 화장실의 물이 누수되어 교도관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2층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3층 화장실에서 누수 된 똥물이 튀어 화장실 갈 때는 모두 우산을 쓰고 갔습니다. 나는 전향하지 않은 다른 한 수련생과 화장실 누수 문제를 상의하며 “바깥으로 물품을 사러 갈 때 대형 비닐을 사서 누수가 되는 화장실 전체 천정을 씌우자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도 돈을 내겠다고 했고, 또 몇 사람들도 돈을 내겠다고 해서, 비닐을 구매한 후 천정에 비닐을 씌웠습니다. 다음 날 교도관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리책임자인 한 수감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디서 그렇게 큰 비닐을 구했는가?”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그가 제안하고 추진해서 바깥으로 물건을 사러 갔을 때 구매해 설치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많은 수감자가 모두 그 일을 알고 말하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진상을 말해주면 “화장실 그 비닐을 아주머니가 사서 설치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했으며, 나는 웃으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산 거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쁜 마음으로 나의 삼퇴 권유를 받아들여 단번에 많은 사람을 중국 공산당조직에서 탈퇴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정신상태가 그다지 정상이 아닌듯한 한 수감자가 나와 마주하고 앉아 있다가는 부릅뜨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갑자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감방장에게 나를 가리키며 내가 자기에게 욕을 했다고 말했지만, 나의 성품을 알고 있는 감방장은 믿을 수 없다고 했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화가 나서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누가 나를 나쁘게 대하고, 억울한 말을 해도 줄곧 미소를 지으며 평온을 유지하며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담당 교도관이 와서 말했습니다. “아, 또 아주머니군요. 왜 떠들어요? 아주머니는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도 만족할 줄 모르네요?” 그 경찰은 나를 가리키며 “저분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좀 배우세요! 아주머니가 또 말썽을 부리며 떠들면 아주머니를 파룬궁이 없는 감방으로 보낼 거예요. 그러면 아마 아주머니를 때려죽일 겁니다.” 그녀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나서 “잘못했다. 다른 곳으로 보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번은 노동교화소 3소대에 갇힌 파룬궁 수련생이 경문 한 장을 전해주어 전향하지 않은 수련생이 읽었으며, 나중에는 이미 전향한 수련생도 그 경문을 보겠다고 해서 보여주었는데, 다 읽고 난 그가 전향을 번복한다는 성명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정황을 알게 된 교도관이 그녀를 교도실로 불러 내 “경문을 보지 않았느냐?”라고 추궁했고, 겁에 질린 그녀가 자기에게 경문을 전해준 수련생을 지명했습니다. 대대장이 크게 화를 냈으므로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는 사태로 발전했습니다. 대대장은 복도에서 크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보라. 이번에 경문을 전한 사람을 꼭 찾아낼 것이다.” 교도관은 퇴근하면서 학위(學委: 이미 5서를 쓴 사람)에게 이 일의 장본인을 찾아내라고 지시했고, 학위가 나를 찾아와 그 경문을 보았냐고 물었을 때, 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심적 압박이 매우 크다면서 나에게 자세히 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향하지 않은 모든 사람의 사물함을 다 검사했는데 나오지 않았다.”라면서 “아주머니는 매우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주머니 사물함만 검사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경문을 읽은 것으로 밝혀진 전향한 수련생이 이미 처음 경문을 소지하고 있던 수련생을 지목했고, 그가 누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나를 찾아왔으니 말인데, 내일 대대장이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면, 그 경문을 내가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고 말하세요. 지명 당한 그 수련생은 이미 두 번씩이나 노동교화처분을 받고 5년 동안 갇힌 사람입니다” 그녀는 눈이 둥그레지며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어찌 이렇게 큰일을 감당하려고 합니까? 이번에 대대장은 정말 단단히 화가 났어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요!”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사부님께서 관계하시는 일입니다.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수련생을 압박하며 박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을 내가 대면하겠습니다.” 다음 날 언니가 나에게 가져다준 똑같은 경문을 학위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경문을 직접 내 손으로 아주머니에게 준 겁니다. 가서 그렇게 보고하세요.” 학위가 대대장이 출근하자 경문을 제출하며 내가 일러준 대로 보고했습니다. 대대장과 담당 교도관은 내가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온 경문이라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지나갔습니다. 잠시 가족 면회를 중지시킨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사존께서 또 한 번 선해 해 주셨으므로, 나는 별고 없이 그 난관을 걸어 지나왔습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수련생을 지목했던 그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심한 가책으로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 일이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큰 부담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길을 잘못 걸을 때가 있으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하루빨리 대법으로 돌아오길 바랐습니다.

노동교화소에 불법적으로 1년 반 갇힌 기간에도 신사신법의 굳은 신념으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했습니다.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온갖 박해와 억울함을 당했던 그 이후부터는 누구도 더는 나를 욕하거나 때리거나 억울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노동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도 교도관, 사오(邪悟)한 사람 등 수감자 중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나를 찾아와 상의하며 나를 만나기를 좋아했습니다. 나는 사람과 일에 대해 모두 대법으로 가늠하며 적절하고 합당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환경은 내가 진상을 알리는데 편리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존중해준 것은 대법의 위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자비와 위엄은 함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6. 완전히 남을 위해 대법의 신기함이 펼쳐지다

아들이 한 회사에서 근무할 때인 2010년 나를 따라 파룬궁을 배웠습니다. 아들의 편의를 위해 직장이 있는 도시에 셋집을 얻었고, 아들이 컴퓨터와 프린터를 구매해 집에 설치한 후 우리 모자는 대법 자료를 만들어 수련생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들은 직장 근무가 끝나면 나와 함께 진상 자료를 만들었는데 NTDTV 한싱(韓星)5호도 설치하는 등 매일 열심히 일했습니다.

2012년 8월 넷째 형님(수련생)이 시장에게 진상 전화를 하다가 납치된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질녀가 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손자를 데리러 오지 않았으니, 무슨 일이 있는지 가보라.”라며 연락을 했습니다. 아들, 둘째 형님, 조카(수련하지 않았음) 등 세 명이 넷째 형님 집에 갔다가, 가택수색을 하던 경찰에게 아들과 조카가 납치되었고, 연이어 둘째 형님과 내가 거주하는 셋집도 수색당하면서 둘째 형님도 납치됐습니다. 그렇지만 사부님의 보호로 나는 그 난관을 벗어났습니다.

집을 수색당해 돌아갈 집도 없고, 돈도 한 푼 없어서 잠시 언니 집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수색당한 내 집에서 각종 자료, 시디, 아직 설치하지 않은 한싱5호 접수기 등 10여 개의 기기가 발견됐기 때문에 시장이 직접 사건을 지휘하여 공안, 610 등이 합동으로 조사하는 등 대단히 큰 사건으로 되어, 그들은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사건과 관련해 우리 집에서 네 명이 납치되어 모두 불법적인 징역형과 노동교화처분을 받았으며, 나를 납치하려고 경찰이 우리 셋집에서 계속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꿈에 두 아이가 경찰에게 맞아 만신창이 된 모습을 보고, 언니와 함께 장시간 집중적인 발정념으로 사악을 제거했습니다. 15일 후 나와 언니는 성 소재지의 한 가정에서 도우미 일을 하게 되었는데 90세 노부부를 보살피는 일이었고 월 급여는 1,500위안(한화 약 25만 원)이었습니다.

주인은 모두 간부로 퇴직한 노부부였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는 부부였습니다. 집의 방은 비교적 컸지만 내가 기거하는 방은 매우 작은 데다 방안에 전등도 없어서 어두워지면 집 밖 가로등 아래서 대법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여건이 좋지 않아 많은 압력을 받는 상황이었어도 한순간도 자신이 대법 수련자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노부부의 생활을 소홀함 없이 보살폈습니다. 방, 화장실, 주방 등 보이지 않는 곳의 묵은 때까지 철 수세미로 닦아내 집 안을 깨끗이 만들었습니다. 화장실 변기가 낮아 할아버지가 앉았다 일어서기를 힘들어하는 걸 알고 신문과 내 가을옷으로 두툼한 변기 커버를 만들어 씌워 불편을 덜어주자 노부부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발을 씻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발톱을 깎아달라고 했는데, 새끼발톱이 살 속을 파고들어 잘 보이지 않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내가 다가가 할머니 대신 할아버지의 발톱을 깎으려고 가위를 발톱에 댔을 때 고름이 뿜어져 나와 얼른 휴지를 대고 천천히 조금씩 고름을 완전히 빼주자 노부부는 매우 감동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노부부는 모두 간부로 퇴직했으므로 생활 형편이 넉넉한데도 평소에는 매우 검소한 편이라, 돈이 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함부로 사 먹지 않았습니다. 내가 첫 급여로 1,500위안(한화 약 25만 원)을 받았을 때 노부부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서 대접하자, 노부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참 좋은 사람이야. 친딸이라도 이렇게 하지 못할 거야!”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의사가 사지 절단 수술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정맥염이 있었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라고 알려주었고, 할머니는 그걸 외운 후 다리가 아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당신도 외워보라.”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할머니에게 “당신도 그녀가 말한 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동생의 뇌출혈 증세가 매우 위중해서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동생과 그의 자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채 채소를 사러 아래층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발을 삐고 말았습니다. 사부님께 얼른 일어서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내가 정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 난간을 잡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노부부는 내가 넘어져 발이 심하게 부은 것을 보고 내출혈을 저지하는 비상 구급약을 주면서 뿌리라고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사양하며 “나는 연공인이라 사부님께서 관계하시므로 내일이면 나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 사람은 너무 고집이 세군. 무슨 연공을 하는지 몰라도 내일이면 다리가 오늘보다 더 심해질 거야. 먹는 약도 아니고 뿌리는 것인데 못할 게 뭐 있나!”라고 말한 후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엔 당신이 일찍 일어나 밥을 해!” 할머니는 “알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밤 발의 통증이 참기 힘들 정도로 심해 법을 외우고, 발정념을 했으며, 밤 12시 발정념을 하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했을 때는 걷지 못하고 기어갔다가 기어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새벽 6시 발정념을 마쳤을 때도 역시 발이 아팠고, 통증으로 온밤을 잠들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자리에 누우려다가 갑자기 어제 할아버지가 한 그 말이 생각나서 단번에 기어 일어나며 생각했습니다. ‘90세 노인이 나에게 줄 밥을 짓게 해서야 되겠는가? 기어가서라도 내가 밥을 해야 한다.’ 기어서 화장실에 갔고, 변기를 잡고 일어서려고 할 때 갑자기 훅- 발바닥에서 한 가닥 서늘한 냉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으며, 순간 발이 아프지 않았습니다. 신기하게 정상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 일념이 있었을 뿐인데,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이 난을 제거해주신 것입니다. 감격스러운 마음을 사존께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얼른 주방으로 가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일어났고, 내 발이 나은 것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쳐들고 말했습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하다! 그 공을 헛되게 연마한 것이 아니군.” 나는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내가 대단한 것 아니라 대법 사부님이 대단하신 겁니다! 대법이 신기한 겁니다!” 그때 할머니도 나오면서 “오! 자네 정말 나은 거야! 정말 신기하다! 정말 신기해!” 노부부는 진정 대법이 신기하다는 것을 알고 모두 기뻐하며 악당의 중국 공산당조직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당 문화와 무신론의 주입을 받아 두뇌가 혼미해진 중국인은 직접 보지 않으면 대법이 신기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대법제자의 착실한 수련이 다른 사람을 위한 자비로운 경지가 체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법에 부합될 때 대법의 신기함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법을 실증하는 가장 좋은 진상입니다.

후기

2012년이 지나서야 납치됐던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감금당한 기간에 혹독한 고문 박해를 당하며 자백을 강요받았는데, 코로 매운 고추에 술을 섞어 주입하고, 바늘과 사냥개로 고문하는 등 온각 악독한 고문을 당해 정신이 흐릿해졌습니다. 성 소재지에서 다시 셋집을 마련하여 아들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고, 역시 사존의 보호로 순조롭게 사회보험 공공임대주택을 샀으며, 우리 세 식구는 안정적인 생활환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컴퓨터, 프린터를 사서 진상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여 중생을 구도했습니다.

대법의 신기한 일은 너무 많습니다. 한번은 자료를 배포하다 조심하지 않아 다리가 골절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 사존께서 이어주셔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에게는 세 번 교통사고가 발생했지만 모두 무사했습니다. 한번은 아들이 화물차를 운전하다가 70세 노인을 치어 중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당시 우리 수중에 돈이 없어서 1만 위안 상당의 돈을 빌린 후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노인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습니다. 우리 모자는 파룬궁을 연마하여 박해받은 사실을 그들에게 들려주었고, 삼퇴를 시켜주었으며,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빌어주었습니다. 매우 감동한 노인의 상처는 빨리 호전되어 갔으며, 완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도 노인과 가족은 우리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입원 3일 만에 퇴원하면서 “아들딸이 집에서 노인을 보살피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3일간의 입원치료비와 각종 검사료를 포함해 총 1만1천 위안을 썼는데, 자비로운 사존께서 또 한 번 우리 모자를 구해주셨습니다. 나는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 안으로 찾았으며, 아들에 대한 정과 좋아진 환경에서 자신을 느슨히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법 수련을 거의 21년간 했으므로 서술할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진수한 대법제자라면 누구나 신기한 체험이 있을 것인데 모두 한 권의 책을 써도 될 것입니다. 사존께서 제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제자를 구하시고 제고시킨 크나큰 은혜를 우리는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용맹정진하며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뿐입니다. 사존께서 우리를 구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중생을 구도해야 합니다.

나는 법을 얻어 미혹에서 깨어나는 큰 소원을 이루어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존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지설법7-시카고 시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3-세간을 향해 바퀴(輪)를 돌리노라’

 

원문위치: 2019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18/3959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