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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법회] 선념으로 난을 대하다

글/ 한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법 노정이 길어짐에 따라 수련이 느슨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시간에 집착하고 원만에 집착하고 속인의 행복에 집착합니다. 안일을 구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생명의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 시각 중생 구도라는 수련의 기점이 흔들린다면 이 고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법회를 통해 수련의 기점을 바로잡고 다시 정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2007년 2월부터 파룬궁(法輪功)을 배웠습니다. 9일 학습반에 참가하여 ‘전법륜(轉法輪)’을 보았습니다. ‘전법륜(轉法輪)’ 몇 번 더 읽고 나서 제가 얼마나 나쁘게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렇게 자신을 망치며 살아온 삶이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법을 만나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때 파룬궁 수련을 결심했습니다.

1. 일념(一念)에서 정사(正邪) 대결을 보다

수련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같은 연공장의 수련생이 제게 진상을 알리는 곳에 가 보자고 했습니다. 진상을 알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어쨌든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진상을 알리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진상 알리는 활동을 하는 수련생들과 인사한 후 길 앞에 놓인 진상판을 보았습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하는 내용과 잔인한 박해 사진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같은 수련생으로서 매우 비통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는데 수련생들이 박해받는 장면을 보면서 웃고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그때의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주위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곳에 주저앉고 싶었을 것입니다. 진상 알리는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진상 알리는 활동을 계속해야 할까?’ 많은 갈등 끝에 ‘그 마음이 그곳에서 올라왔다면 그곳에 가서 없애버리자.’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서 진상 알리는 활동을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진상 알리는 활동 중에도 여전히 그 마음은 저를 괴롭혔고 누구와도 터놓고 교류하지 못했기에 제게 많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1]

사실 수련생들이 박해받는 모습을 보면서 비통해했던 좋은 마음과 웃고 있는 나쁜 마음은 일념에 같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진상 알리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그만큼 큰 선념(善念)이기에 또 그만큼 큰 악념(惡念)이 동시에 나왔던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나쁜 마음에 부담을 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정시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닦아 내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말하라면, 사람의 대뇌는 우리 이물질공간의 형식 중에서 그것은 단지 가공공장일 뿐이다. 진정한 정보는 元神(왠선)이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내보내는 것은 언어가 아니며, 그가 내보내는 것은 일종의 우주 정보로서 모종의 의미를 대표한다.”[1]

저는 다음과 같이 인식했습니다. 사람의 의념이 우주 정보가 대뇌에서 이 물질 공간의 형식으로 가공된 것이라면 수련 중에 선과 악의 일념이 생기는 순간, 내 신체의 소우주에서도 정사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그 일념과 연관되어 있을까? 그렇다면 수련 중에서 만나게 되는 일사 일념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수련은 너무도 엄숙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많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고 많은 생명의 구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두려워도 숨지 말자

저는 학창 시절 많은 두려움을 쌓았습니다.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수업 시간은 공포였습니다. 맞는 것도 아픈데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더욱더 아팠습니다. 나중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수련하기 전에는 이 두려움을 건드리는 상황을 피하면 되었기에 사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련 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많은 수련생 앞에서 혼자서 책을 읽을 때 그리고 제 인식을 수련생 앞에서 교류할 때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션윈(神韻) 홍보에 참여하면서 크게 좌절하는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저와 대구 수련생 그리고 부산 수련생 세 명이 션윈을 홍보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저와 대구 수련생은 자료를 나누어 주고 부산 수련생이 사람들 앞에서 션윈 공연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부산 수련생은 나이가 좀 있는 아주머니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소개 시간이 되어 저와 대구 수련생은 자료를 나누어 주었고 부산 수련생은 사람들 앞에서 션윈을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부산 수련생은 긴장하여 말을 더듬거리며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아 저는 부산 수련생 옆에 가서 사람들에게 “긴장해서 그러니 좀 이해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더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났을 때, 저는 제가 수련생을 진정으로 도운 것이 아니라 두려움 마음을 수련생의 실수 뒤에 숨기고 여러 사람 앞에서 그렇게라도 말을 한번 해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수련생은 알지 못했지만, 너무도 죄송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얼굴을 들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두려워 실수하여 좀 망신스러우면 그만이지, 어떻게 아주머니 뒤에 숨었단 말인가? 그것도 그 사람의 실수 뒤에, 상처 뒤에.’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절대 그렇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수련 전에는 피하면 되었지만, 수련 후에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속인 중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을 당신에게 모두 내려놓게 해야 한다. 어떠한 집착심이든 당신에게 있기만 하면, 각종 환경 중에서 그것을 닳아 없어지게 해야 한다. 당신에게 곤두박질치게 하고 그 중에서 도(道)를 깨닫게 하는데, 바로 이렇게 수련해 온 것이다.”[1]

그 후부터 단체법 공부하는 날이면 교류할 내용을 마음속에 준비하고 갔습니다. 물론 떨려서 말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날도 많았지만, 결국 떨면서도 점점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뿐만 아니라 집착심도 많이 보았고 또 심성도 많이 제고했습니다. 말하는 과정이 수련 과정이었으며 수련이 제고됨에 따라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말의 표현은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성의 제고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 향기와 향수

대구 대기원(大紀元)에서 일하다가 신문 배포하는 일을 하려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극단적인 선택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 선택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신문을 배포하면서 마음이 바르지 않거나 속인의 생활을 중시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왠지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표면의 도구만 볼 수 없으며, 그것의 실제 효과를 보아야 한다. 중국 고대의 중의는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서, 현재의 양의는 얼마만한 해가 더 지나도 따라잡지 못한다.”[1]

저는 법에서, 생명의 초라함은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했습니다. 정말로 중생 구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성냥개비 같은 삶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표면의 역할에 집착하였기에 자신을 더욱더 초라하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대림동은 서울에서 중국인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입니다. 저는 주로 대림동에서 신문을 배포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배포대를 설치하고 신문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배포대 주위에 쓰레기가 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쓰레기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나는 지금 쓰레기를 줍고 있구나.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다른 사람들도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지.’ 저는 주운 쓰레기를 버리면서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정말로 좋은 일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쓰레기를 줍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결국 사상에서는 자신을 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위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숨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안으로 찾는 중에서, 제가 유위(有爲)적인 생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위(無爲) 상태의 수련은 어떤 것일까? 그러다 여느 날 다음과 같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꽃은 자신이 향기를 뿜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향기를 뿜고 있는 것조차 모를 것입니다. 향기를 뿜는 것은 꽃의 특성일 뿐입니다. 꽃이 향기를 뿜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꽃에게는 집착일 수도 있습니다. 수련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성을 제고해서 도덕 표준이 올라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심성에 따라 선이 표현되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건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꽃처럼 좋은 일을 하면서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뿌린 향수가 아니라 심성이 제고됨에 따라 생명 본원의 순수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꽃향기와 같을 것입니다. 향수가 아니라 향기가 되기 위해 심성 수련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은 좋은 생각이라도 생각에 공을 들일 것이 아니라 심성 제고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생각이 단순해지고 향기가 날 것입니다.

4. 선념(善念)으로 난(難)을 대하다

저는 대림동에 있을 때 진상 알리는 장소에 대한 집회신고를 담당했습니다. 어느 날 담당 형사가 전화로 제게 진상판의 잔인한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별로 잔인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허가받은 집회 기간이 다 되어서 다시 집회신고를 하러 갔습니다. 그 담당 형사는 제게 화를 내면서 집회신고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집회신고 없이 해도 문제가 없으니 그냥 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저를 길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질 수 없어서 같이 맞섰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제가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언쟁하다가 집회신고를 하지 못하고 내려올 때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여자 형사가 저를 따라오더니 “당신은 여기에 혼자 온 것이 아니라 파룬궁을 대표해서 왔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집회신고 없이 진상 알리는 활동을 하다 보니 전에 없던 문제가 자꾸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 더 경찰서에 찾아갔지만, 결국 똑같은 상황만 반복되었습니다.

심성의 고초를 겪은 후 쟁투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치야 어떻게 되었든 수련생으로서 집착심을 가지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제 잘못이었습니다. 서로를 향한 쟁투심이 이미 커져 있었기에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담당 형사에게 전화하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담당 형사는 “그렇지, 자네가 잘못했지.”라고 하며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모자이크 처리하고 사진을 찍어서 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물론 집회신고도 다시 하게 되었고 담당 형사는 그 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파룬궁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수련생으로서 모순이 왔을 때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어도 집착심을 지니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모순을 겪으면서 옳고 그름에 빠져 집착심을 찾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수련은 집착심을 찾아서 버리는 것이며, 수련 중에서 만나게 되는 모순을 해결하는 것도 그 속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도(道)가 한 자[尺]면 마(魔)는 한 장(丈)이라고 한다. 그것은 속인 중의 삿된 설(邪說)로서, 그 마(魔)는 영원히 도(道)보다 높을 수 없다.”[1] 사부님께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디 기와 기 사이에 제약작용이 있는가? 기는 전혀 병을 치료할 수 없다.”[1]

집착심으로 속인의 집착심을 대하고, 마성의 마음으로 난을 해결하려고 할 때는 일이 오히려 힘들게 변하고 저도 그 속에서 지쳐갔습니다. 선념을 움직여 모순을 대하면 당시에는 괴로워도 그 뒤에 겪게 되는 상황은 항상 평온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념은 바른 에너지로서 난을 정정당당하게 넘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맺는말

정법 노정이 길어짐에 따라 저의 수련이 느슨해지고 있음을 깊이 느낍니다. 수차 수련의 의지를 강화하지만, 며칠 정진하다가 또 느슨해집니다. 이런 약한 의지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지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신(神)의 배치 속에 있다는 것을 법 공부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수련이 따라가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점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련의 기점이 구세력의 요구에 부합하면서도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시간에 집착하고 원만에 집착하고 행복에 집착하면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구세력의 사심(私心)에 부합합니다. 구세력도 신(神)일 텐데 사람의 의지로 신의 의지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그의 일생을 개변시킬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한 방법으로서, 바로 이 사람이 이후부터 한 갈래 수련(修煉)의 길을 걷는 것이다.”[1]

우리의 의지가 사부님의 법에 부합할 때 자연히 구세력의 요소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이래야만 사부님을 더욱 바짝 따라 수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 구도! 오직 기점을 여기에 두고 수련해야만 이 시기에 더욱 정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류한 것은 저의 인식일 뿐입니다. 수련생 여러분께서도 언제나 법을 스승으로 삼고 수련하시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019 한국 법회’ 발언고)

 

원문발표: 2019년 11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해외법회원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17/3959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