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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생명의 귀로(歸路)를 찾다

법을 얻은 후 생명은 법을 위해 온 것임을 알았다

글/ 지린성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나는 올해 66세로 인생의 전반 부분은 순탄하지 못했다. 1995년 운 좋게도 파룬따파를 만나 생명은 법을 위해 왔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다. 나는 책을 단 하루라도 읽어본 적이 없고 큰 글자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수련 후 빠른 시간 내에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도할 수 있었다. 진상을 알릴 때 사람들은 내가 어쩌면 그렇게 잘 말할 수 있냐고 하면서 “교수보다 더 교수 같네요!”하고 말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렸다.

나의 수련 이야기를 말해보겠다.

고난의 어린 시절

우리집은 베이다황(北大荒)에 있었고, 집에는 형제자매가 9명인데 나는 여자아이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그 시절 부모님은 다 출근했기에 나는 6살부터 밥하는 것을 배워 부뚜막 앞에 낮은 의자를 놓아야만 도마에 닿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일가족의 밥을 했다. 8살에 학교를 가야 할 때 신청만 하고 수속하지 못했는데 추수를 해야 했다. 나는 보리 이삭을 주어야 했기에 그해에는 공부를 못했고, 9살 되던 해 또 신청은 했지만 밭에 김을 매야하기에 또 공부를 못했다. 10살 되어 신청하자마자 어머니가 여동생을 출산해 나는 산후조리를 돕고 동생을 돌보며 집을 정리하고, 닭을 기르며, 돼지 먹이를 끓이고, 세끼 밥을 준비해야 했다.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매 끼마다 나는 조금이나마 잘 드시도록 작은 솥에 밥을 해드렸다.

일하기 바빠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40일의 산후 휴가를 마치고 출근했고 집안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옷을 빨고 기저귀를 바꾸며 동생을 잠재워야 했으며 동생이 울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내 아래 입술을 빨도록 했다. 그 후로 학교에 가는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않았는데 이렇게 평생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

몇 살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어릴 때 나는 이곳은 내 집이 아니며 내 집은 천상에 있다고 느꼈다. 밤에는 하늘에 있는 별을 보면서 내 집이 어딘지 찾았는데 너무 높아 닿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각종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막대기를 하나하나 묶고 그 위에 젓가락을 하나하나 이어 하늘까지 이어서 젓가락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사람은 너무 고달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면 죽는 것이 더 나았다.

그때 내 천목은 열려있었는데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나는 그의 상황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다들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저녁 구들에 누워 잠잘 때 창문 위쪽 벽과 인접한 곳에 뭔가 두 개가 보였다. 알록달록한 갑옷을 입고 손에는 창과 작살을 들고 있었으며 얼굴은 험상궂었는데 매우 무서웠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지 않으려 했으며 가족들이 놀랄까봐 말도 못했다. 한쪽에 한 명씩 그들은 매일 그곳을 지켰다. 수련한 후에야 그들은 금강호법신임을 알았다.

14살 되던 해, 농장에서 일꾼을 모집했다. 나는 갖은 방법을 다해 가려했고 집안일에서 벗어나려 했다. 집 문을 나서자 나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남자 일꾼들과 함께 온종일 일하고 힘든 일을 다 했다. ‘다자이(大寨: 문화혁명 시절 모범 지역)를 따라 배우고’, 토지를 개간하며, 수로를 만들고, 짐을 지며, 땅다지개를 굴렸는데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으며 남자 일꾼과 같은 노동 점수를 받았다. 나는 일하는 솜씨가 좋았고 속도가 빠르며 세심했는데 속일 줄 몰랐다. 내가 일하면 다른 사람이 안심할 수 있기에 일을 배치할 때 내가 혼자 한 가지 일을 독립적으로 하게 했다. 번 돈은 모두 어머니께 드렸으며 이렇게 결혼 전까지 일했다. 단 하루도 공부하지 못했고 일자무식이었다.

모든 것이 운명

18살,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나는 죽어도 싫었다. 차라리 절에 가야지! 하지만 어머니의 욕설에 견딜 수 없었고 부모님을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비구니가 될 수 없으니 시집을 가겠다고 하고 20살 되던 해에 목수에게 시집갔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요리사였는데 아버지는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서 일하다 상사에게 미움을 사 농장으로 내려왔다. 그의 집에는 그들 부자 두 명뿐이었는데 보기에 안됐다고 생각해 그에게 시집갔다.

결혼 후 처음 몇 년은 그나마 평탄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며 몇 푼 저축했다. 하지만 셋째 딸을 낳은 후 시아버지는 나에게 이혼을 강요했으며 나를 내쫓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인데 그의 집은 독자여서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혼을 거부했다. 남편도 나를 때리고 가라고 강요했으며 딸 셋을 기차에 버리려 했는데 누가 주우면 안아가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심지어 밖에서 망을 보면서 아들에게 아가씨나 대학생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문화대혁명 이후 정책을 시행하면서 시아버지는 도시로 전근하게 됐다. 나도 시아버지가 도시로 전근하길 바랐는데 그러면 아이들도 공부하고 장래성이 있을 것 같았다. 연이어 아들이 태어났지만 계속 병을 얻었다.

어느 날, 옆집에 라마 한 분이 오셨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복이 많다고 하면서 내가 남쪽으로 엄청 멀리 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시아버지가 지금 정책이 시행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연말 마지막 날에 당신 시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결정이 정정될 것이니 위에 큰 철인이 찍혀있을 겁니다”라고 말했고 또 “당신 시아버지가 이 일을 하는데 두 마리 용이 구슬을 갖고 놀고 있고 용 앞에는 등이 길을 비춰 주고 있는데 온 가족은 당신 덕을 본 것입니다”라고 말해줬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과연, 연말 31일 시아버지는 돌아오셨는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으셨다. 나는 글자를 모르기에 종이에 쓰인 내용은 모르지만 그 위에는 정말로 큰 철인이 찍혀 있었고 우리는 도시로 갈 수 있었다.

1981년 온 가족은 도시로 가게 됐고 호구도 올렸지만 나는 온 몸에 병을 얻었다. 관절염, 류머티즘성 관절염, 요근(腰筋) 손상으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반시간 이상 천천히 움직여야만 일어날 수 있었으며 심장병, 히스테리로 매일 잠을 잘 수 없었고 입으로 왜 죽지 않냐고 중얼거렸다. 심한 부인과 질환으로 양측자궁부속기염, 자궁경부미란을 앓았으며, 가장 심각한 것은 비염이었다. 또 많은 것들에 대해 알레르기가 생겼다. 한 원로 중의사는 내 맥을 짚어 보더니 나에게 무슨 화가 그리 많으냐고 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화가 안날 수 있냐고 생각했다. 이 집을 위해 많은 것을 헌신했다며 마음속으로 불평이 많았다.

법을 얻다

건강이 나쁜 관계로 가슴은 항상 답답했다. 길을 찾을 수 없었고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었으며 살아 있는 것이 너무 고생스러운데 어떻게 할까? 그리하여 나는 절에 가서 귀의하고 거사가 됐다.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에는 절에 다녔다.

1994년 연말, 절에 있는 한 비구니는 내 가게에 와 삭발을 했는데 그녀는 리훙쯔 사부님의 광저우설법 비디오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급히 듣고 싶어 설날 후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9개 비디오에서 그녀는 나에게 마지막 3강 비디오를 주었다. 나는 그 3개의 비디오를 갖고 고향에 설을 쇠러 갔었다. 이 비디오를 나는 반복으로 들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기타 비디오를 바꿔 들었다. 당시 ‘전법륜’은 아직 발행하지 않았기에 나는 ‘파룬궁’ 앞 페이지에 있는 ‘개론’과 사부님 경문 ‘미혹 속의 수련’, ‘인과’를 외웠다. 그것은 비구니가 베낀 것이었는데 그녀가 읽자 나는 바로 기억했다. 수련하기 전 몇 달간의 불교와의 인연은 나로 하여금 불법의 기본 상식을 알게 했고 인과응보, 생사와 윤회, 운명 등을 알게 됐다. 사부님의 설법을 녹음으로 듣고 나는 절에 가서 관음보살상에 향을 올리면서 “저는 대법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오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995년 초 40여세 나이에 나는 정식으로 대법 수련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진정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법보임을 알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그동안의 고통은 오늘날 대법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나는 죽을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았는데 딸들은 기뻐하며 “이제 잘됐네요. 우리 엄마 이제 죽을 생각을 안 하네요!”라고 말했다. 연공장에 나가서 많은 노수련생들을 알게 됐다. 어느 날 한 노수련생 집에 갔는데 벽에 사부님 교공도(教功圖)가 있는 것을 봤다. 사부님 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금빛이 줄줄이 내려 왔는데 촘촘히 눈꽃처럼 눈부셨다. 그날 저녁 꿈을 꿨다. 연공장에서 사부님께서는 보도원에게 나를 화단에 있는 작은 길옆에 있으라고 전하셨다. 보도원이 나에게 알려주자 나는 가서 서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내 뒤에 서서 내 신체를 정화해주셨는데 나는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보지 못했다. 돌아서서 사부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려 했으나 사부님께서는 이미 가셨다. 그 며칠 동안 발목에는 참기름을 바른 것처럼 땀구멍에서 찬바람이 휙휙 나가는 것 같았으며 걸음을 걸을 때는 힘주어 걸어야 했는데 힘주지 않으면 발은 땅에서 뜨려고 했다. 아침 연공을 마치고 장갑을 벗어보니 손에 근육은 모두 사라졌고 뼈와 힘줄 그리고 가죽만 남아있었는데 나도 막 무서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야 차츰 나아졌다. 그 며칠 온 몸에서 찬바람이 휙휙 나갔는데 나는 추워서 덜덜 떨었고 치아가 부딪쳤으며 열이 나고 입과 코에 물집이 생겼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자면 뜨는데 이불을 덮으면 이불마저도 떴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믿음이 부족할까 봐 내 몸에 모두 현현해주신 것을 알았다. 4~5일 연공했는데 내 전신에 있던 병들은 감쪽같이 다 나았다! 당신이 얘기해보라, 어떻게 하기 싫을 수 있겠는가! 한겨울에 눈이 오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큰 빗자루를 들고 연공장의 눈을 깨끗이 모두 쓸어 놓고 다른 사람들이 연공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보도원은 “아! 누가 눈을 쓸었나요?”라고 물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 후 게시판을 만들었는데 나는 매일 아침 메고 와 연공장에 걸어 대법을 알리고 더욱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법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연공을 시작해서 오늘까지 23년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는데 간혹 어떤 일로 한 장이라도 빠뜨리고 연마하지 못하면 다른 공간에 있는 본체(本體)의 어느 한 부분이 연화가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어 바로 보충한다.

나는 연공장에서 사부님의 지난, 광저우, 다롄, 창춘, 옌지 설법 테이프를 한 세트 청해 여러 번 반복적으로 들었는데 법리에 대한 이해가 많이 빨라졌으며 신체 변화도 빨랐다.

법공부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게 되다

1995년 초,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을 정식 출판하셨는데 금방 내가 대법에 입문했을 때였다. 4월에보도소에 가니 두 배낭으로 책을 가져왔는데 나도 한권 요청했다. ‘전법륜’을 받고 너무 기뻤다! 하지만 나는 한 글자도 몰라 매우 조급했다. 이 좋은 법을 몇 십년간 찾아서 겨우 만났는데 볼 수가 없다니! 나는 그 때까지 누구도 원망한 적 없지만 부모님을 원망하게 됐다. 어릴 때 나에게 공부를 못하게 해 현재 대법책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연공장에서는 수련생들을 몇 개 소조로 나눴다. 하지만 몇 명의 늙고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법공부 소조에 안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저희 집에 오세요. 우리도 법공부 소조를 만듭시다”라고 말했다.

우리집의 법공부 소조에는 처음 몇 명밖에 안됐지만 점차 많아졌는데 가장 많을 때에는 30여 명에 달했다.

법공부 소조가 우리집에서 법공부를 하면서 나의 법공부에 엄청 큰 도움이 되었다. 모두 함께 법을 읽었고 통독했는데 나는 수련생들이 읽는 것을 들으면서 한 줄 한 줄, 한 자 한 자 따라 봤다. 혼자 법공부 할 때는 사부님 설법 테이프를 대조하며 했다. 나는 모든 설법 테이프를 다 갖고 있다. 하지만 ‘전법륜’은 사부님께서 정리해 출판하셨기에 각지에서의 설법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중 광저우 테이프의 내용이 ‘전법륜’과 별 차이가 없이 맞았다.

수련생은 나에게 “글을 배우려면 먼저 어떻게 쓰는지 보고 읽는 발음을 보며 그 다음에 글자의 뜻을 아는데 당신은 어떻게 배우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법을 배우고 글을 익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부님 설법하신 내포를 먼저 이해하고 글이 어떻게 생겼는지 배웁니다.” 몇 개 글자 외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사부님께서는 “어떤 소수의 사람은 또 잠을 잘 것인데, 내가 강의를 끝내면 그도 잠을 깬다. 무엇 때문인가? 그의 머리 안에 병이 있어 그에게 조정(調整)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조정하면, 그는 전혀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그를 마취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청각부분에 문제가 없어 그는 잠을 달콤히 자지만 도리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듣는다. 사람은 이때부터 정신이 나며 이틀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는다.”[1]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먼저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뜻을 이해하고 머리에 있는 병을 제거할 때 어떠한 상태가 나타나는지 알며 자신을 대조하는데 마찬가지로 자고 있었지만 다 들었고 마지막에 한 글자 한 글자 어떻게 생겼는지를 본다. 이 ‘수(修)’자를 말하자면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큰소매가 펄럭이며 나부끼는데 수련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나쁜 것들을 수련해 버리고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오색찬란하며 너무 예쁘다! 조금씩 아래로 나쁜 것들을 버리는 것이 수련이다. 책에 있는 공백 부분에는 모두 파룬 또는 금빛이었는데 다 법이었다. 사부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시든지 나는 다 그대로 믿었다.

법공부에 집중하고 글을 익히기 위해 나는 반년 간 집에 있으면서 연공장에 가지 않았는데 ‘전법륜’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 후 연공장에 갔더니 보도원은 “어디 갔었나요? 찾으러 집까지 가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집에 반년 있었고 이 시간에 ‘전법륜’을 한 번 읽었다고 말했다. 반년에 1번만 읽었지만 나는 독립적으로 법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날 아침 연공장에서 돌아올 때 대법을 수련하는 교수와 함께 걸어오게 됐다. 그는 어제 하루에 ‘전법륜’ 4강을 읽었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아, 나는 반년에 9강을 1번밖에 못 읽었는데, 너무 차이가 크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어제 저녁 꿈을 꾸게 됐는데 꿈에서 그가 하루에 4강을 읽은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어떻게 먼저 알게 됐냐면 그들이 너무 부러워서였다고 했다. 지식이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 나는 절로 ‘그래 전생에 나도 교수였겠지’라며 위로했다. 집에 와서 딸과 이 일을 말했는데 딸은 나에게 “어머니,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금방 글을 배웠지만 천서(天書)를 읽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도 ‘전법륜’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얼마나 심오한가요. 어머니는 참으로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전법륜’을 읽는 기초 상에 다른 많은 글자도 알게 됐고 사부님께서 발표하신 경문도 나는 혼자 읽을 수 있었다. 어떤 글자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지만 단체 법공부 때 수련생들이 정정해주며 정확한 발음을 알려준다. 그날 법공부 할 때 내가 읽을 차례였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모두 정리해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제거해 버림으로써 당신이 앞으로 수련할 수 있도록 보증하지만, 반드시 진정으로 대법(大法)을 배우러 온 사람이어야 한다.”[1]를 읽을 때 ‘리순(理順)’을 ‘루순(捋順)’으로 읽었지만 틀린 것을 몰랐다. 옆에 있던 수련생 한 명이 퉁명스럽게 바로 “뭘 읽는 거예요? 어떻게 읽는지 알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잘못했음을 알았는데 어떻게 법을 잘못 읽을 수 있는가? 매 한 글자는 모두 불도신인데! 나는 가책을 느꼈다. 나는 사부님께 감사드렸고 내 발음을 정정해주고 내 심성을 제고해준 수련생에게 너무 감사했다!

지금 모든 대법책을 나는 모두 읽을 수 있으며 법공부 할 때 글에 대한 장애가 없으며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글도 다 알아본다. 모두들 “한 글자도 모르든 데에서 이 짧은 시간에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아는데 참으로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라고 말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지혜이고 대법이 나의 지혜를 열어줘서인데 나는 너무 행복했다!

정마(情魔)의 교란을 제거하다

남편은 도박을 좋아해 누가 부추기면 바로 갔으며 돈을 다 잃으면 돌아왔다. 그는 성욕도 강했는데 이것을 위해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양측 자궁부속기염으로 부부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남편은 참을 수 없어 이혼하자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자기가 다 키우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건 안 되고 누가 네 명의 아이를 키워주겠냐고 했다.

89년 법원에서 이혼수속을 마쳤는데 나는 건강이 나빠서 언제까지 살지 몰라 아이들은 모두 남편에게 맡기는 것으로 판결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이혼은 했어도 집은 떠나지 않겠어요. 애들을 버릴 수 없어요.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져야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큰딸은 18세, 작은 아들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이들을 그에게 맡기려니 나는 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혼자서 네 명의 아이를 양육하게 됐다. 그는 집에 계속 있었지만 나는 아이 한 명을 더 키운다는 생각으로 아이들 옷을 사면 그의 옷도 사주고 용돈도 줬다. 나중에 그는 내 돈을 훔쳤는데 내가 물으면 그는 얼버무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미용실을 맡아 경영했는데 하루 종일 서 있어서 너무 힘들었지만 애들을 키워야 하니까 참았다. 우리는 이혼한지 10년 됐지만 그간 그는 늘 도박하고 여자를 찾으며 자유로이 보냈지만 실제로 나를 떠나 생활한 시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누가 그와 진심으로 생활할 수 있겠는가? 그는 돌아왔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검사를 받았는데 방광암이어서 종양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그는 덩치가 커서 그를 부축해 일으키고 눕히는데 많이 힘들었고, 대변이 나오지 않아 나는 손으로 파냈다. 이때 그는 울면서 애들과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은 운명이니 치료를 잘하라고 위로해줬다.

나는 법을 얻고 대법을 그에게 알렸으며 그와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했다. 법공부를 한 후 그는 모든 것을 알게 됐는데 울면서 “나는 본체를 갖고 갈 수 없겠네”라고 말했다. 입원 8개월 좀 더 됐을 때 암세포는 폐까지 전이되었지만 나는 줄곧 병원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 그는 질병으로 20여만 위안을 썼으며 내 저축도 대부분 썼다.

내가 남편을 보살필 때의 정성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는지 그들은 나를 모두 칭찬하면서 “너무 대단해요, 이혼한지 오래 됐는데도 지극히 돌봐주는데 쉽지 않네요!”라고 했다. 내가 남편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한 병실에 있는 환자, 병원 의사, 간병인들은 모두 감탄했고 나는 그들에게 홍법을 해 대법을 알려줬는데 책을 본 사람도 있고 대법을 수련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터에서 돌아올 때 남편의 동료는 나를 그녀 친척에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친척도 배우자가 질병으로 사망하고 돈도 지위도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그럼 4년을 기다려 아들이 대학 졸업하게 되면 그때 보죠”라고 말했다. 누가 4년을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자연스럽게 거절됐다.

남편이 사망한 후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것은 베이징의 지식청년들이 하향해 우리 농장에 왔을 때인데 한 청년은 나에게 유달리 잘해주었다. 그는 내 오빠와 동갑이었는데 각종 구실로 우리집에 와 나를 만났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그는 바로 내 앞에 나타났지만 연애나 혼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해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는 나에게 “나를 따라 가요. 베이징에 데리고 갈게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부모님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그와 함께 가면 도피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 주변에 많은 여자들이 연인과 함께 도피하는 현상이 적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뒤에서 듣기 거북한 말을 많이 했다. 나는 집에서 맏딸인데 내가 이렇게 하면 여동생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또 나는 글도 모르는데 그렇게 멀리 있는 베이징에 가서 그가 나를 구박하면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오는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절했다. 그때 그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는데 “당신을 아내로 맞지 못하면 나는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맹세했다. 다음해 그는 베이징에서 나를 찾아 왔지만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가 결혼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지 않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나는 어머니 집으로 갔는데 그와 함께 하향한 동창들을 만나게 됐고 그가 줄곧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여동생들은 베이징에 가서 그를 찾으라고 부추겼다. 그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마음이 일어났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다시 만나서 타당치 않은 거동을 하면 지금까지의 수련이 헛된 것이 아닌가! 나는 자신을 단속하고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법을 얻었는데 이 좋은 법을 그도 얻게 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를 만나면 꼭 그에게 법을 얻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일하러 간 다음 조용해지자 그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지만 나는 될수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마음이 무척 고달팠다. 어느 날 꿈을 꾸게 됐다. 꿈에서 나는 금색 사막 위에 홀로 누워있었는데 의식 속에서 사부님께서는 공중에 황금색 가사(袈裟)를 입고 높고 높은 곳에서 하신 말씀이 아래로 울렸다 “하나의 속인 마음이 있어도 올라갈 수 없다!” 그 소리는 큰 종소리와 마찬가지로 윙윙 울렸다. 내가 눈을 떠보니 내 몸은 9개의 링에 의해 묶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묶여 있었다. 나는 나가야지! 몸을 곧게 펴고 조금씩 위로 뽑았다. 몸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으며 링은 아래로 빠졌다. 다 빠지고 난 다음 나는 내가 자주색 나는 도가 도포를 입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에 대한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됐다. 사상업은 제거됐고 정마(情魔)는 소멸됐는데 나는 이 한 마디 “하나의 속인 마음이 있어도 올라갈 수 없다!”를 더욱 명심했으며 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더욱 엄격히 다스리게 됐다.

가정도 잘 원융해야 한다

나는 아이들이 많아 집도 크다. 사위와 다음 세대들을 다하면 10여 명 되는데 그들은 대법을 수련하지 않는다. 대법의 아름다움과 수련인의 풍모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는 가정 내에서의 사소한 일처리에 반영된다.

속인의 이치로 말하면 나는 60세가 넘었고 아이들은 다 젊은데 우리집에 오면 나는 편하게 쉬고 일은 아이들이 해야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련하는 사람의 수련 층차와 경지는 모든 일에서 표현되는데 제거하지 못한 사람 마음은 모두 구체적인 일에서 표현된다. 그들이 오면 이것저것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한 것은 다른 사람이 한 것과 맛이 달라요!” “외할머니가 볶은 반찬은 정말 맛있어요!”라고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해 잘해준다.

가끔은 힘들고 아플 때가 있어 조금 쉬고 싶었지만 나는 수련인이고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으며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하면 안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1]라고 알려주셨고, 대법제자는 표준에 도달해야 하는데 “큰 뜻을 품고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懷大志而拘小節)”[2]라고 말씀하셨는데 작은 일은 보통 가정생활에 표현된다.

작은 딸이 대학 1학년 다니던 해에 아들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작은 딸에게 “네 동생 바라지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 너는 아버지 보고 돈 달라고 해라. 네 아버지가 또 도박판에 가서 잃게 하지 말고”라고 말했는데 딸은 화를 내면서 내가 동생 편을 든다면서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바라지 할 수 있겠어요? 나 스스로 장학금을 탈게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오해가 생겼는데 9개월간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도 않고 나와 말하지도 않았으며 고의적으로 나를 화나게 하고 욕했다. 나는 속상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아들딸은 한 생의 인연인데 예전에 내가 잘못 대하고 화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지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 물질이 배후에서 교란해서인지도 모르는데 너무 가엽구나! 또 내 업력이 그에게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사부님께서는 “왜냐하면 업력이 누구에게로 떨어지면 바로 그가 괴롭기 때문인데, 보증코 이러하다.”[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막내딸은 괴롭기에 화내는데 그것은 내 업력이고 그녀가 나를 대신해 제거하고 있다. 참음을 수련하는데 그 ‘인(忍)’자는 칼이 마음에 박혀있어 아프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나는 마음이 움직이면 안 된다.

9개월이 지났다.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듯이 막내딸을 대했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관을 넘은 것을 보고 변화를 가져다주셨다. 학년이 끝나고 막내딸은 2천 위안의 장학금을 받아왔는데 나에게 겨울신발을 사왔다. 언니 둘은 막내딸에게 나에게 사과하라고 했는데 막내딸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했다. 언니 둘은 “어머니가 우리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드셨니?”라고 말하자 자매 셋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내가 주방에 있을 때 막내딸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막내딸은 울면서 “어머니,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잘못했어요. 어머니를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를 다독이면서 “엄마는 화 안 났어. 엄마가 어떻게 너에게 화낼 수 있겠니?! 엄마는 괜찮아”라고 말했다. 딸은 겨울신발을 내 놓으면서 연공할 때 신으라고 했는데 나는 신발이 있으니 딸에게 신으라고 했다. 우리 둘의 발사이즈는 같았는데 거절할 수 없어 하루 신고는 발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딸에게 줬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딸은 대법에 더욱 가까워졌는데 대법책을 읽기도 하고 알고 있는 대법 진상을 지인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얼마 전 막내딸은 자가용으로 티베트 여행을 떠났는데 출발하기 전에 호신부를 달라고 해서 여행 내내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웠다. 일행 차량은 5대인데 기타 4대는 산사태 등의 사고를 당했지만 딸의 차는 아무 일 없이 주자이거우(九寨溝) 대지진 전에 그곳을 떠났다. 딸은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주셨어요”라고 말했다.

몇 년 전 작은 아들은 결혼준비를 하려고 새집을 샀다. 하지만 기업이 부도나면서 일자리를 잃었는데 은행대출을 상환할 방법이 없었다. 아들은 내가 알면 걱정할까 봐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누나를 찾아가 고충을 말했다. 나는 딸집에 가서 아들을 만났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일을 말했다. 아들은 의아해하면서 “어머니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들에게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좋은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리고 또 내가 살고 있는 집을 팔아 대출을 상환하자고 했다. 급히 돈을 써야 했기에 30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집을 27만5천 위안을 받고 팔았다. 나는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잃어야 하고 수련하는 사람이 무엇을 잃지 못하겠는가?!

누나들은 동생을 원망했고 또 내가 동생 편을 든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들에게 빨리 직장 찾으라고 재촉하지 않았고 여유시간 있을 때를 이용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을 향상시키라고 권했는데 아들은 밥하고 반찬하는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1달 내에 3가지 자격증을 취득했다. 운전면허, 회계자격증, 회계출근허가증이었는데 빠른 시간에 취직이 됐고 월급도 기존 월급의 3배나 받게 되어 경제적인 문제가 완화됐다.

자신의 이익을 버린 것은 중생을 위해서이고 사사로운 감정에 좌우지되어 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몸소 이 모든 것을 다 봤기에 대법 사부님의 가르침이고 대법이 정념을 갖고 있는 생명에 대한 배려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아들은 말할 때 대법을 위하는데 내가 집에 없을 때면 그는 과일을 사다 사부님께 향을 올리고 절한다. 자녀들은 그들의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데 효과가 좋았다. 그들이 대법 수련에 들어올 수 있도록 좋은 기초를 닦았다.

우리 대가족은 늘 밖에 가서 외식하고 여행하는데 국내 국외 여러 곳을 다녀왔다. 휴일이면 나는 아이들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랐다. 오면 나는 그들에게 사전(史前)문화, 전통문화, 사람의 이치와 업무 중 도를 어떻게 장악하는지 말해줬는데 아이들은 매우 믿었다. 그들은 “우리 어머니는 교수보다 더 교수 같아요!”라고 말했다.

모두 나의 가족

18년간의 박해 동안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경찰이 집을 수색하고 미행을 당했으며 구치소에 갇히기도 했다. 수용소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파출소에도 갔었는데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두려운 마음도 없어 빠른 시간에 나왔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사람은 모두 나의 친인이라”[3]는 말씀을 명기하고 나도 세인들을 가족으로 보고 그들을 선하게 대하며 진상을 알려 그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내 앞에서 악해지지 못했다.

이 몇 년간 반박해하고 중생을 구도하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박해 초기에는 현수막을 제작하고 현수막을 걸었는데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대법 사부님은 결백하시다!” 등 현수막을 시 중심에 걸었는데 사악을 겁에 떨게 했다. 수련생들은 가장구식 프린터로 전단지를 인쇄하면 나는 집집마다 배포하고 직접 대면해 진상을 알리며 ‘삼퇴’를 권했다. 그 후에는 핸드폰을 사서 전화로 진상을 알렸다.

시내로 돌아온 그 몇 해간 나는 병원 이발소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병원의 각 과와 왕래를 많이 하면서 병원에서 치료하는 이치를 다소 알게 됐는데 사부님 설법과 결합해 이해하게 된 것은 사람 이 층의 이치뿐만 아니었다. 한 수련생은 박해를 받았는데 그의 가족들은 대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들은 수련을 포기하라고 무릎까지 꿇었지만 그녀는 대법을 계속 수련했다. 어느 날 그녀의 남동생을 만났는데 나는 말했다. “누나는 온몸에 병이었고 조금만 아파도 며칠 누워있어야 했는데 대법을 수련하고 복을 받았지 않았나요. 사람이 병원에 와서 치료하면서 적외선, 자외선을 쬐는데 그것들은 물질이고 기계의 방사선이나 에너지는 병을 알아내거나 치료합니다. 파룬궁의 공(功)도 모두 고에너지 물질인데 병균이 오기도 전에 그것을 죽이기에 병원에 가서 돈 쓸 일도 없습니다. 누나가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의 남동생은 전자를 전공하고 태극권을 연마했으며 팔괘를 아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바로 알고 “저와 누나의 매듭은 풀렸어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잘 수련하세요”라고 말했다.

진상을 알릴 때 가장 먼저 지인과 친척 친구, 동료 이웃에게 알렸는데 한 명씩 말해 탈퇴시켰고 전부 본명으로 탈퇴했다. 나는 대법책의 글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른다. 몇 명을 탈퇴시키면 나는 바로 집으로 달려가 이름을 적었는데 손을 꼽으며 세 번째는 누구, 다섯 번째는 누구인지 기억해야 했다. 집에 가서 어떻게 기록하는가? 자주 쓰는 성씨 장, 왕, 리, 자오 등은 쓸 줄 알지만 이름은 어떻게 쓰겠는가. 예를 들어 이름이 ‘샤(霞)’이면 나는 어머니 이름과 같은 글자라 어머니 신분증을 찾아 베꼈고, 이름이 ‘샤오메이(小梅)’이면 매화꽃을 바지에 그렸는데 집에 돌아와 신문 광고에서 찾았으며, 성이 ‘궁(龔)’이면 획수가 많아 쓸 줄 모르지만 동생 와이프 성이 궁씨임을 기억하고 수련생을 찾아가 기록했다. 그는 ‘샤오바오(小寶)’인데 소선대를 탈퇴하고, 그는 ‘다창(大強)’인데 공청단과 소선대를 탈퇴한다고 마음속으로 외우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4일 만에 54명을 탈퇴시켰는데 하루에 몇 번씩 집으로 달려갔겠는가? 그 후로 나는 소책자를 갖고 다니면서 그들이 직접 적게 했는데 이렇게 하니 많이 쉬워졌다.

어머니는 이후에 병상에 누워계셨는데 우리 형제들이 번갈아 보살폈다. 나는 7개월에 한 번씩 고향에 갔으며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구도하려고 했다. 내가 아는 지인 한 분 있는데 나는 그를 ‘삼촌’이라 부른다. 그는 매우 착했는데 다리를 놓고 길을 보수했으며 나무를 심어 조림하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성 노동모범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당에게 세뇌되어 관념이 고집스러웠다. 나는 매번 집에 가면 그를 찾아가 진상을 알렸는데 어떻게 말해도 그는 삼퇴하지 않았다. 나는 ‘9평공산당’을 각종 방법을 찾아 그에게 줬지만 그는 보고도 ‘수령’에 대한 숭배는 마찬가지였으며 집에는 사당 지도자 상으로 가득했는데 마오마두(毛魔頭)의 석고상도 여러 개 있었다.

나는 발정념하여 공간을 청리했는데 탁자 위에 있는 것들은 모두 손으로 ‘멸(滅)’자를 쓰고, 높은 곳에 있어 닿지 못하는 것들은 나는 “붓 휘둘러 사나운 파도 멸하노라”[4]를 염하면서 그것을 향해 공중에 ‘멸’을 쓰면서 그의 환경을 청리했다. 그는 나이가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내가 갔을 때 앉기도 힘들어 해서 내가 부축해 앉혔다. 어떻게 말해도 그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에 “삼촌은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삼촌이 공산당의 순장품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내가 만약 알리지 않으면 정말 삼촌에게 죄송할 겁니다!”라고 말하고 떠나려 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고 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나는 이제 올 기회가 많지 않은데 내 말을 듣고 지옥에는 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하기 힘든 것을 알기에 동의하면 머리를 끄덕여 주거나 응하고 답해주세요”라고 말하자 그는 “응”하고 답하는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가장 어렵게 탈퇴를 권유했던 분인데 탈퇴하고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참으로 빨리 서둘러야 하며 언제 기회가 사라질지 모르는데 사부님께서 이 생명을 구하셨다.

이에 앞서 나는 침대에서 가부좌 하고 있는데 땅에서 한 사람이 침대 높이만큼 올라왔다. 상반신은 군복을 입고 군용 솜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누구예요?”라고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나타났는데 우연은 아닐 것이고 그를 구해달라고 나를 찾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당신은 당원 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퇴를 하려구요?” 그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요?”라고 물었는데 그는 답하지 않고 사라졌다.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누군지 생각했다. 가족이 ‘삼퇴’에 동의해야 진정으로 탈퇴시킬 수 있는데! 나는 바로 삼촌에게 물었다. “우리 이곳에 남자이고 군인인데 돌아가신 분이 있나요?” 삼촌은 우리 농장에 ‘사오융(小勇)’이라고 있었는데 그의 누나와 매형이 몇 동 몇 층에 산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아래층에서 그 군복을 입은 사람의 누나와 매형을 만나게 됐는데 물어봤더니 그의 누나는 “그러게요, 그는 군에서 잘 나갔고 중대장까지 했는데 전역하지 않았어요. 설을 쇠러 집에 왔다가 전우 집에서 술 마신다음 자전거 타고 돌아오는 길에 큰 유조트럭에 걸려 아주 멀리 끌려갔는데 얼굴이 다 닳아 없어졌어요”라고 말했다. 정말 맞구나! 나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천목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어 꿈에서 봤다고 하면서 그가 그쪽에서 어렵게 보내고 있으니 나는 확인하러 왔는데 가족이 동의하면 나는 그를 위해 탈퇴시켜줄 것인데 당원에 가입할 때 선서했기에 탈퇴하면 그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누나는 바로 “그러면 탈퇴해줘요!”라고 말했다. 나는 또 그들에게도 물었지만 다 가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를 염하라고 말해주면서 대법은 당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동의했는데 8개월 후 다시 그들을 만났다. 나는 “저에게 사실대로 말하세요, 당원, 단원, 소선대에 가입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들은 소선대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천재인화(天災人禍)에 대해 말해 주면서 삼퇴하면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주었고 죽은 남동생도 나를 찾아 삼퇴를 하는데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겠냐고 하자 그들은 실명으로 탈퇴했다.

2013년부터 나는 진상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삼퇴를 했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적을 수 없었다. 정말로 조급했다! 나는 사부님께 도와달라고 빌었다. 그때 수련생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핸드폰을 갖고 있었고 가명이 다 적혀 있었는데 상대방이 탈퇴하면 순서대로 이름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는 큰 문제를 해결해줬다. 그럼 나도 하나 해야지. 나는 핸드폰에 있는 탈퇴한 사람 이름을 수련생에게 전해주면 됐다. 나는 이 두 개 핸드폰으로 매일 나가서 전화를 하는데 많이 할 때는 매일 60여명을 하며 적어도 3, 40명을 탈퇴시키는데 수련생들은 다들 부러워한다. 하루에 어찌 이리 많이 탈퇴시키나요?

나의 가장 큰 체득은 마음 써서 탈퇴를 권하는 것이다. 나는 전화하기 전에 먼저 발정념으로 가지하는데 나의 진상전화를 듣는 사람들이 정확한 선택을 하며 듣는 사람을 위해 전화 받기 좋은 시간을 선택하는데 평일 오전 근무 시간은 바쁘기에 오후 3, 4시부터 저녁 8시 반까지 하고 휴일에는 9, 10시부터 시작하여 저녁 8시 반까지 한다. 대륙 외곽 지역에는 대법 제자들이 적은데 나는 전적으로 윈난, 광시 등 지역에 전화해 그들이 진상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기에 전화로 대법 복음(福音)을 그들에게 전한다. 어려운 것은 탈퇴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인데 저녁에 핸드폰을 보고 상대방이 녹음한 소식을 열심히 들었다. 어떤 사람은 다 듣지 않았지만 중간쯤에 자신 스스로 선택을 하는데 누구도 빠뜨리지 않았다.

외곽 지역은 사투리가 너무 심해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한 번 또 한 번 들으면서 ‘좋아요!’ ‘탈퇴!’ ‘OK!’ 등을 판별한다. 핸드폰 액정은 글자가 작지만 나는 그대로 모방한다. 나는 전자파를 막아주고 눈을 보호하는 안경을 썼는데 가끔은 볼 때 두통이 있었다. 탈퇴한 이름을 베껴 사진을 찍어서 수련생에게 전해주면 대기원 탈당사이트에 전달하는데 탈퇴하지 않은 번호는 별도로 기록해 직접 전화하는 수련생에게 전해주었다. 항상 찾고 기록하기를 늦은 밤까지 하는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아들은 내 모습이 애처로운지 “어머니 이 작은 글씨에 눈이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나는 신의 일을 하고 있기에 괜찮아!”라고 답했다. 나는 탈퇴 인원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루라도 시간을 준다면 나는 사람을 구도하고 또 구도할 것이다!

제14회 대륙교류회를 빌어 나는 자신이 법을 얻고 사부님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한 글자도 모르던 데에서 오늘날 대법을 읽고 깨달으면서 자신의 수련을 지도하기까지의 이 과정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너무 편애하셨다. 사부님께 보고 드리는 동시에 말씀드린다. “사부님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최후의 최후까지 우리는 꼭 잘할 것이며 사부님께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성자(聖者)’[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홍음2-두려워 떨게 하다’

(밍후이왕 제14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17년 11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밍후이 대륙법회 >제14회(2017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11/3561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