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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온갖 마난 겪으면서 중생을 구도

글/ 산둥 대법제자 샹롄(香蓮)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밍후이왕] 제13회 인터넷 법회를 빌려 자신의 수련과정을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과 교류하겠다.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의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법을 얻은 것은 정말로 신기했다

법을 얻은 과정을 돌이켜 보면 내가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 사부님의 점화라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에게 신념을 가지해주셨기 때문에 미친 듯이 날뛰는 박해가 발생할 때 신사신법(信師信法)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일흔 살이고 1997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한 농촌 제자다. 쉰 살 전에는 다른 농촌 부녀자와 마찬가지로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부지런히 돈을 벌며 고생스럽게 생활했기 때문에 50세에 이르러 몸이 망가졌다. 복막염, 신장염, 기관지염, 요추 디스크로 온몸이 병에 시달려 죽을 지경이었다. 1996년의 밀 수확기에 밀을 베러 밭에 갔는데 허리와 다리가 아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편은 밀을 베는 차로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1997년의 밀 수확기 전에 아들에게 신을 만들어주려고 신발 견본을 빌리러 이웃집에 갔는데 그녀 집에 ‘전법륜’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웃은 “이 책은 불법(佛法)을 수련하는 것이에요. 인연 있는 사람이 보면 다 좋다고 하지만 인연이 없는 사람이 보면 아니라고 해요.”라고 했다. 비록 학교를 1년 조금 안 되게 다녔고 아는 글자도 몇 개 없지만, 여전히 책을 들고 보았다. 먼저 사부님의 사진을 보았는데 어찌 이렇게 낯이 익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안의 글씨를 보고 있는데 큰일이 났다. 책 안의 모든 글자가 튀어 올랐다. ‘이 책의 글자가 어찌 튀어 오를까?’라며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대부분 글을 모르지만, 여전히 보았다. 한쪽도 다 보지 못했는데 또 곳곳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몸도 돌고 방도 돌지만 어지럽지는 않았다. 놀라서 책을 던지며 “안 된다, 안 된다. 이 책을 보면 어찌 곳곳이 돌까요?”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금방 책을 본 느낌을 생각하면서 계속 ‘그것은 어떤 책일까? 어찌 그렇게 특별하냐?’라고 곰곰이 생각하다 참지 못해 또 이웃집에 갔다. 그녀는 “배우고 싶으면 앞에 있는 ΟΟΟ 집에 가요. 밀 수확기가 끝나면 그녀 집에서 배워요.”라고 했다.

밀 수확을 끝마치고 ΟΟΟ 집에 갔다. 사람들이 돌려가며 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글자를 얼마 몰라 그저 옆에서 그들이 읽는 것을 들었다. 어떤 곳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들을수록 마음이 확 트였고 편안했다. 오랫동안 길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은 것처럼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속으로 ‘내게 사부님이 생겼다.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라고 했다.

1998년 봄에 보도원을 조직해 시내 모 대기업에서 교류반을 개최한다는 것을 들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고 부러워 못 견디겠고 가고 싶었으나 자격이 되지 않는 데다가 또 글자를 모르고 세상 물정을 모르므로 스스로 틀림없이 못 가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꾸 가고 싶었다. 날이 되자 원래 가겠다는 수련생이 갑자기 일이 생겨 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보도원에게 “제가 갈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보도원은 “갈 수 있어요, 누구든 갈 수 있어요.”라고 했다. 그래서 낡은 이불을 지고 여비를 들고 남편에게 터미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여 혼자서 버스를 타고 백 리 밖에 있는 시내로 왔다. 차에서 내렸는데 학습하는 곳과 멀어 길을 물어봤다. 먼 길을 떠나 본 적이 없고 시내에 온 적도 없어 사람들이 어떻게 가라고 해도 나는 흐리멍덩해 몰랐다. 나는 이불을 지고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구불구불 돌다가 뜻밖에도 단번에 교류반을 개최하는 곳에 도착했다. 자신도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도착하고 보니 정말로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퇴직한 노 근로자, 노 간부, 노 군인 그리고 시내의 간부도 있고 나처럼 농촌에서 온 사람도 있고 남녀노소 다 있었다. 시 위원회에서 일하는 한 언니는 우리가 농촌에서 와 가난하고 돈이 얼마 없는 것을 알고 늘 집에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이 언니는 전혀 잘난 체하지 않았고 글자를 모르는 농촌 사람을 깔보지도 않았다. 이런 언니와 함께 앉아 대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정말로 행복했고 속으로 ‘날이 어두워지지 말라, 날이 어두워지지 말라, 이렇게 될 수 있다면 쭉 함께 법공부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법공부 체득을 교류할 때 한 노년 수련생 언니는 나처럼 글자를 몰랐다. 그녀가 글자를 배우는 신기한 과정을 교류했는데 나에 대한 계발이 매우 컸다. 노년 수련생은 한 번은 책을 안고 잠이 들었다. 꿈에서 배가 고팠는데 갑자기 눈앞에 큰 한 사발 국수가 놓여 있어 사발을 들자 국수가 글자로 변했고 글자가 층층 겹겹 사발에 쌓여있었다. 사발을 내려놓으면 여전히 국수였고 다시 들면 또 글자로 변했다. 그녀는 아주 이상해했지만, 마지막에 글자를 모르니 이 한 사발 글자를 먹자고 생각하고 들고 먹었고 다 먹자 깨어났다. 깨어난 후에도 여전히 도대체 한 사발 국수를 먹었는지 한 사발 글자를 먹었는지를 생각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녀가 다시 ‘전법륜’을 들고 볼 때 안의 글자는 다 알게 되었다.

나는 듣고 정말로 부러워했고 ‘나도 글자를 배워야겠다, 사부님께서 꼭 도와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학습반에서 자신이 신속하게 제고되고 매일 로켓을 타고 씽씽 위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한 층의 하늘 한 층의 하늘로 위로 올라갔다. 온 사람이 변했고 환골탈태했다. 그 며칠 동안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이렇게 좋은 공법을 더욱 많은 사람이 알게 하고 더욱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게 하려고 나도 나가서 홍법(洪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놀러 다니기 좋아하지 않는 나는 어떤 때 수련생과 함께 다녔고, 어떤 때 혼자서 이웃집에 갔고 주변 마을 곳곳에서 홍법을 했다. 누가 옥수수를 훑고 있는 것을 보면 도와서 옥수수를 훑었고 누가 땅콩을 따면 도와서 땅콩을 땄다. 다른 사람을 도와 일하면서 이 법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했다. 원래, 온몸에 병이 있었는데 언제 다 나은지도 몰랐다. 원래 다리가 아파 길을 걸을 수 없었고 또 복막염, 신장염이 있었고 이전에 해마다 병원에 두 번 입원해야 했는데 지금 다 나았다. 우리 집은 아이가 많고 남편은 학교에서 글을 가르치고 있어 다섯 식구의 논밭이 있는데 지금 혼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원래 온몸이 병이었는데 지금 힘이 가득했다. 정말로 “대법(大法)을 널리 전하니, 소문을 들은 자는 찾고, 얻은 자는 기뻐하는바, 수련자가 날로 많아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1].

나와 수련생의 열정적인 홍법을 통해 사람 백여 명이 대법을 배우러 왔다

그때는 그저 법공부만 했다. 저녁에 법공부 팀에서 단체로 배웠고 시간만 있으면 스스로 배웠고 모르는 글이 있으면 아이와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집안일, 농사일은 언제나 빨리빨리 했다. 일을 다 하면 법공부를 할 수 있었고,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나는 완전하게 ‘전법륜’과 사부님의 설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에 큰 파룬이 마당의 공중에 떠 있고 우리 집의 마당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 지붕만큼 높았는데 바른 방향으로 아홉 바퀴, 반대 방향으로 아홉 바퀴 회전했다. 남편보고 빨리 나와 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한참 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만자도 이렇게 선명한데.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또 끊임없이 색깔이 변해요. 이렇게 잘 보이는데 당신은 어찌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대략 5, 6분 나타났지만, 남편은 끝까지 보지 못했다. 당시 ‘난 그렇게 잘 보이는데 남편은 왜 보이지 않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했다. 법공부한 후에 그것은 대법제자에게 보여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로 파룬이 늘 여기에서 돌고 저기에서 회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아침에 급하게 연공장에 갔는데 연공장에 도착해서야 가지고 있던 도끼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포륜할 때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 도끼가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연공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보니 도끼는 정말 그곳에 있었다.

한 동안은 저녁에 나가서 법공부 했는데 이마에서 강한 한 갈래 빛이 손전등처럼 길을 비추어 주었다. 그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천목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천목이 열려도 수련하기 어려우며, 心性(씬씽)을 파악하기는 더욱 어렵다.”[2]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법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해 속으로 두렵고 방해를 받을까 봐 두려워 사부님께 “사부님, 닫아 주세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사부님의 말씀을 다 믿습니다.”라고 했다. 그 후로 적게 보였으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마음은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마난을 겪었지만, 의지는 금강 같았다

사부님께서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3]라고 말씀하셨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江澤民) 불량배 집단이 미친 듯이 대법을 박해한 후부터 읍 정부, 파출소의 사람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피웠고 어떤 때는 하루에 3번씩 와서 수련을 포기하라고 협박했다. 9월의 어느 날, 수련생 7명이 우리 집에서 단체 법공부하고 있는데 읍 정부와 파출소의 사람에게 전부 납치당했다. 그들은 내가 두목이라고 생각하고 읍 기율검사 서기의 지휘로 나에 대해 여러 가지 고문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사부님의 법상과 대법 책을 안고 다리를 펴고 시멘트 바닥에 앉으라고 하고 손으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치고 구두를 신은 발로 내 몸을 마구 찼다. 눈앞에 별이 보이고 온몸에 멍이 들고 기절할 때까지 구타했다. 내가 기절하자 그들은 찬물을 끼얹어 깨웠다.

그들은 여전히 날 바닥에 앉혀놓고 등 뒤로 수갑으로 채운 채 발로 내 등을 밟았고 두 팔을 머리 꼭대기까지 올렸고 내가 아파서 기절해서야 내려놓았다. 그들은 또 뱀 한 마리를 잡아 와 내 목에 넣어 놓았다. 순식간에 닭살이 돋았고 뱀이 내 몸에서 기어 다니는 괴로움은 말할 수 없었다. 10분 후에야 그들은 가져갔다.

이 졸개들은 읍 기율검사 서기의 지휘로 저녁에 방에서 날 때리고 낮에는 나보고 맨발로 대밭을 돌고 뛰라고 했다. 뛰어 발이 터지고 걸음마다 핏자국이었다. 뛸 수 없어 멈추면 그들은 참대막대기로 날 때려 참대막대기가 여러 개 부러졌다. 이렇게 그들은 나를 3박 4일 동안 괴롭혔다.

酷刑演示:吊铐毒打

고문시연: 매달아 놓고 구타하기

날 아무리 때려도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현 구치소에서 한 깡패를 고용했다. 이 깡패는 온 현에서 가장 악독한 깡패고 누구든 그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가 뭘 하라고 하면 바로 그것을 한다고 했다. 당시 그들은 나의 두 발을 나란히 수갑에 채워놓고 두 팔을 펴놓고 ‘일자형(一字形)’으로 날 난방 파이프에 매달아 놓았다. 나는 이 깡패에게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고 당신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나쁜 일도 하지 않았고 다만 나의 믿음만 견지하는데 날 때리면 이후에 아주 비참할 것이에요.”라고 했다. 이 깡패는 웃으며 “그건 당신이 상관하지 마라! 전문적으로 때리러 온 것이다! 내 손에서 굴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 사람이 때리면 특별히 아팠고 괴로웠다. 그는 날 때려 내가 기절하면 찬물로 끼얹어 깨웠고 깨어난 후에 계속 때렸다. 한 번은 깨어난 후 깡패가 내게 “다른 것을 배우면 안 돼?”라고 했다. 나는 “다른 것은 배우지 않아요. 이 대법만 배워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만 믿고 이 대법만 믿어요.”라고 하자 그는 계속 혹독하게 때렸다. 고개를 들 수 없자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고 거의 애걸하는 목소리로 “빨리 배우지 않겠다고 말해요.”라고 했다. 미약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죽지 않으면 배울 거예요!”라고 하자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놓고 가더니 이후로 다시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만약 한 수련자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생사의 염두를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악은 틀림없이 두려워한다.”[4] “수련이란 곧 어려운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든지, 사악이 미친 듯이 박해하든지, 생사에 관계되든지를 막론하고, 당신이 여전히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면서 인류사회 중의 어떠한 일도 수련의 길에서 행보를 교란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5]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고문으로 대법제자의 믿음을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정신적으로 날 모욕했다. 그들은 나와 다른 두 수련생을 가축을 싣는 화물차에 묶어놓았다. 목에 밧줄을 건 채 뒤 받침대에 묶어놓고 등 뒤로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는 하얀 간판에 검은 색으로 ‘파룬궁 장본인’이라는 글자를 써 놓았다. 또 다른 수련생도 나와 똑같이 해놓았다. 우리 셋을 차에 묶어놓고 읍 각 마을에 가서 조리를 돌리고 모욕시켰다. 그리고 2,000위안(약 34만 원)을 내놔야 석방한다고 남편을 협박했다.

2003년 3월 말의 어느 날 점심에 잠을 자고 있는데 ‘610’과 국가보안 경찰이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고 날 침대에서 끌어 내려 경찰차까지 끌고 갔고 날 현의 세뇌반에 납치해갔다. 당시 내복과 슬리퍼만 신었다. 당일 저녁에 날 세뇌반 마당의 오동나무에 수갑으로 채워놓았고 하룻밤이나 나무를 안고 서 있게 했다. 북방 3월의 저녁은 아직 매우 추웠다. 경비원도 솜옷을 입고 당번을 섰는데 난 오로지 내복 바람이었기 때문에 추워서 벌벌 떨었다. 불법으로 일주일 수감한 후에야 비로소 날 석방했고 5,000위안(약 85만 원)을 갈취해갔다.

2002년 겨울, 우리 집의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를 낳으려고 하는데 날씨가 추워 새끼 돼지가 얼어 죽을까 봐 돼지우리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따뜻하게 해줬다. 새끼돼지를 받아내느라 바쁜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봤더니 읍 기율검사 서기가 한 무리 사람을 데리고 와 있었다. 나는 “당신들 왜 왔어요?”라고 물었다. 기율검사 서기는 “어떤 사람이 당신 집 돼지우리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난다고 해서 집에서 분신자살할까 봐 걱정되어 왔어요.”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율검사 서기를 끌고 돼지우리로 가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보더니 알았다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따라가면서 손으로 가리키며 그리고 큰 소리로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당신은 부모님께 난방을 안 해 드리나요? 아내와 아이에게 난방을 안 해 주나요? 집에서 난로 피우고 따뜻하게 하는데 분신자살한다고 해요? 톈안먼 분신자살도 이렇게 날조된 것이 아니에요? 당신들은 헛소문을 퍼트리고 국민을 괴롭히는 것이 사람이 할 짓인가요? 온종일 돈을 달라고 하지 않으면 사람을 때리는데 당신들은 업보를 받을 거예요! 이후로 우리 집에 오지 마시오!”라고 했다. 큰소리로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이웃에게도 들려주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알게 하고 동시에 톈안먼 분신자살은 날조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후로 읍 공무원은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중책을 짊어지고 사람을 구하는데 바쁘다

99년 사악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진상을 알리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낮에 진상 자료를 들고 재래시장에 가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직접그들에게 배포해주었고 동시에 대법은 박해당한 것이고 리훙쯔 사부님께서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주셨고 TV에서 말한 것은 전부 날조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때 아직 ‘삼퇴(중공 및 그것의 부속조직 공청단, 소선대에서 탈퇴)’를 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대법이 박해당한 진상을 알리기만했다. 저녁에 나가서 진상 표어를 붙이고 진상 자료를 배포했고 거의 모든 주변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때 사악은 대법제자를 심하게 박해했다. 남편은 두려워 저녁에 나가지 못하게 했는데, 대문을 잠그면 나는 담장을 넘고 나갔다. 어느 해 겨울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고 진상 표어가 도착했기 때문에 저녁에 함께 나가서 붙이자고 수련생과 약속했다. 저녁에 남편이 잠이 들면 몰래 마당으로 나와 담벼락을 넘어 이웃집 마당을 거쳐 이웃집의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 담장 위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삐었고 반달 가까이 나가지 못했다. 그 후로 남편은 다시는 문을 걸지 못했다. 발목을 삐자 오히려 진상을 알리는 조건이 좋아졌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했다.

‘9평공산당’이 발표된 후 전면적으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사부님께서 “특히 중국대륙의 대법제자들은 사람마다 모두 나와서 말해야 하며, 곳곳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닿도록 해야 한다.”[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나도 바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는 행렬에 들어섰다.

글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탈퇴시킨 것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많으면 기억할 수 없었고 집으로 돌아와 삼퇴한 이름은 남편보고 써달라고 해야 했다. 어떤 때 그가 쓰기 싫어하면 그에게 이름을 써달라고 하지 않고 다만 이 글은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고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남편은 선생이기 때문에 자주 물어보자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습관이 나왔고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었는데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그는 나의 기억력이 좋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거리에서 ‘삼퇴’를 권할 때 쓸 줄 모르면 상대방에게 쓰라고 했다. 때로는 정말 쓸 줄 모르면 사부님께 요청했다. ‘사부님, 삼퇴했는데 이름을 쓸 줄 모릅니다. 자꾸 다른 사람보고 물어보는 것은 번거로워요. 사부님 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름이 있는데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때로는 사부님께서 요청하면서 필을 들면 누가 내 펜을 잡고 글을 쓰는 듯이 그 펜은 스스로 그렸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물어보면 다 옳게 썼다고 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정말로 많은 글을 쓸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틀리게 쓰기도 했다. 한 번은 ‘삼퇴’ 명단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게 수련생에게 주었는데 그는 한 글자를 가리키며 “이건 무슨 글자이에요?”라고 물었다. 나는 한참 보고 나서 알았다. 원래 ‘조(造)’였다. 수련생은 선의적인 우스개로 “당신은 창힐(倉頡-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인 황제(黃帝) 때의 좌사(左史).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함)처럼 글자를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했다.

어떤 때 공책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는데 진상을 알리고 ‘삼퇴’시켰으면 이름을 팔에 써놓았고 팔에 더는 쓸 곳이 없으면 다리에 써놓았다. 어떤 때 온몸에 사람 이름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옮겨 쓰고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는 수련생에게 넘겨주었다. 그 날 남편은 내가 또 소매를 걷어 올리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공책에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당신 뭘 해요?”라고 물었고 팔에 다리에 전부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웃었다. “당신 진짜로 열심히 공부하네요. 평생 학생을 가르쳤는데 당신처럼 이렇게 좋은 학생을 본 적이 없어요.” “대법제자인데 당신의 학생을 어찌 저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그 두목, “(장쩌민)너무 잔인했네요. 마땅히 고소해야 해요!”

2015년 장쩌민 고소 이후 국내 많은 대법제자는 소란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구치소 세뇌반에 수감되었고 어떤 사람은 두려워 또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들을 두려워하나?

장쩌민을 고소한 나의 고소장은 현에 압수당했다. 어느 날 현 검찰원, 법원의 사람이 우리 집에 왔는데 ‘답방(방문하여 고소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 행위)’한다고 했다. 그들은 다섯 사람이 왔는데 녹음기를 들고 왔고 집안에 들어오자 흉악스럽게 장쩌민을 고소했냐고 물었다. 나는 떳떳하게 “네, 고소했습니다. 그가 절 박해했으니 당연히 그를 고소할 권리가 있죠.”라고 했다. 그리고 박해당한 과정을 그들에게 말했다. 평소 그들을 찾아 진상을 알리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데 오늘 찾아왔으니 그들도 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회를 빌려 그들에게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은 거짓이고 ‘삼퇴’하면 평안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비록 그들은 탈퇴하지 않았지만, 진상을 들었고 어떤 사람을 진상을 알았다. 갈 때 책임자 같은 사람이 내게 “(장쩌민) 너무 잔인하네요. 마땅히 고소해야 해요!”

후에 듣는 말에 의하면 현 법원, 검찰원의 사람이 우리 집에 온 것이 첫 번째이자 또한 유일한 한 집이었는데 돌아간 후 그들은 더는 파룬궁수련생 집에 ‘답방’하지 않았다고 했다.

며칠 지난 후 향진 간부와 파출소 경찰이 또 왔는데 인솔자는 파출소 소장이었다. 들어오자 예의를 갖추고 ‘관례대로 공무 집행할 것입니다.’라고 했고 무슨 공무를 집행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기회를 틀어쥐고 그들에게 보시라이(薄熙來), 저우융캉(周永康), 리둥성(李東生)이 대법을 박해해 보응을 당했고 전 세계 20여 만 명이 실명으로 장쩌민을 고소했으며 아세아 백만 인이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해서 고소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조용히 들었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잠깐 앉아 있다가 갔다. 후에 들었는데 그날 원래 장쩌민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날 세뇌반에 보내려고 했는데 앉은 후 어떻게도 입을 열 수 없었다고 했다. 이 몇 년 동안 그들은 이미 내가 진상을 알리는 것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몇백 명 ‘삼퇴’ 명단을 시내에 있는 수련생에게 주고 인터넷에 발표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게 “이 몇 년 동안 모두 몇 명 탈퇴시켰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계산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이 몇 년 동안 매일 재래시장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는데 상태가 좋을 때는 매일 30~40명,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매일 10~20명이에요. 사부님께서 삼퇴를 권하라고 하신 후부터 비바람도 가로막지 못했고 멈춘 적이 없어요. 이것은 이달에 삼퇴 시킨 것이에요.”라고 했다.

자신의 수련 경력을 돌이켜보면서 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겪은 일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겠다. 너희들 말해봐라, 어느 날 써 놓으면 보는 사람이 있겠냐?” 아이들은 “그건 파룬궁이 누명을 벗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라고 했다. 사실 우리가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과정은 다른 공간에서 바른 신이 모두 기록하고 있으며 사부님께서도 줄곧 우리를 보호해주시고우리의 어려움과 고생을 알고 있으므로(사부님께서는 매번 설법할 때마다 대법제자에게 고생했다고 인사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에게 가장 큰 영광을 준 것이다!

사실 사부님께서 가장 노고가 많으시다는 것을 더욱 잘 안다. “대궁을 구원하기 위해 천법(天法)을 전하노니 중생들이 빚진 업을 한 몸으로 감당하네. 무량한 갖가지 업 거대한 난이 되어 검은 머리 희끗희끗 인체가 상했네.”[10] 이 한마디를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제자를 위해 중생을 위해 사부님께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오로지 용맹정진하고 세 가지 일을 잘 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해야 만이 사부님께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라는 것을 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수련생께 감사드립니다!

허스(合十)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사부를 모시다(拜師)’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2-정념정행(正念正行)’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去掉最后的執着)’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길(路)’

[6]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2-두려울 것 뭐냐(怕啥)’

[7]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2-빨리 알려라(快講)’

[8]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2-대법제자 (송사)’

[9]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정진요지3-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세인을 구도하자’

[10]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3-환원(還原)’

(밍후이왕 제13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 심득 교류회)

원문발표: 2016년 11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13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8/3371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