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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법을 실증하다

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9년 ‘7.20’전 파룬따파를 수련한 제자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은 법을 원용하기 전에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한편으로 법을 원용하는 것이다.’[1] ‘매 한 명 수련생의 속인사회 속에서의 표현은 모두 法輪大法(파룬따파)의 형상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우리 모두 잘못했다면 틀림없이 대법에 먹칠하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 역시 법을 원용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1]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원용할 것을 요구하시는데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자신의 층차에서 이런 깨달음이 있다. 바로 대법제자의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과정 중에서 세인들에게 진상을 말하고 ‘삼퇴’를 권하는 외에 우리는 법을 원용하고 세인을 향해 법을 실증하는데 꼭 진선인(眞善忍)의 요구대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인들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연공하고 사악한 당의 박해를 받으니 파룬따파는 꼭 억울한 것이다. 공산당의 거짓말과 모욕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자연적으로 파탄될 것이다.

아래에 나 자신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법을 원용하고 법을 실증했는지 몇 가지 일을 써내려 한다. 수련생들이 비평해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라며 함께 제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은 일에서 시작해 법을 원용

법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남편을 따라 다른 성의 모 현에서 재정분야 일을 했다. 법을 얻은 후 나는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우선 회사에서 좋은 직원이 되어야 했다. 회사 소재지는 전국의 현 중에서도 빈곤한 현으로 각 방면에서 비교적 낙후했다. 내가 여기 오기 전 회사의 위생상태는 더럽고 혼란하고 지저분했다. 사무실 유리문은 한 번도 닦지 않았다. 나는 매일 30분 앞당겨 회사에 출근해 사무실 안팎, 책상, 의자 밑과 유리 창문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이렇게 매일 견지했다. 나의 행동은 국장의 인정을 받았으며 다른 사무실도 우리 과를 따라 배우라고 했다. 다른 과 사무실도 잇달아 위생상태를 개선하고 환경을 미화했다. 우리 회사는 철저한 변화를 가져왔고 사무실 환경 역시 새롭게 변모했다.

우리 회사는 현위원회, 현 정부와 관련 부서들이 출근할 때 지나가는 곳이고 또 전체 현의 경제 중심지여서 환경의 변화는 빠르게 현의 직속 부서까지 알려졌다. 현의 주요 지도자들은 우리 회사의 변화를 눈여겨봤다. 한번은 전체 현의 정신문명대회에서 현 지도자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칭찬하며 “○ 언니가 다른 성에서 우리 현으로 전근 온 이후 회사의 환경이 환하게 변했는데 우리 직장 간부와 직원 모두가 그를 따라 배워야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장(縣長)의 부인이 “큰언니는 좋은 사람이므로 판결하면 안 된다”고 하다

퇴직 전 나는 우리 현장의 부인과 책상머리를 맞대고 일했다. 1997년 파룬궁을 수련한 후 나는 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업무를 성실하게 했고 책임을 다하면서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현장 부인은 몸소 나의 연공 후 변화를 느꼈다. 평소 나는 일상적으로 그녀에게 대법을 소개했다. 우리가 같이 일하는 기간 중에 한 가지 일이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시험 때 1점이 모자라 낙방했는데 6천 위안을 낸 다음 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그때 우리 회사는 학교와 관계가 좋았으므로 개학 후 학생들에게 3천 위안을 되돌려주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반환된 돈을 받았지만 내게 반환된 돈은 회사 모 직원이 이름을 사칭해 돈을 받아갔다. 이 일을 알고도 나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90년대에 3천 위안이면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현장의 부인은 마음 상해하며 하루는 학교에서 돈을 반환해준 일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누가 가져간 것은 모르는데 돈을 되돌려준 일은 압니다.”라고 말하니 그녀는 참지 못하고 회사의 ○○가 이름을 사칭해 타갔다고 실정을 알려줬다. 그리고 내 이름을 사칭한 사람은 현 정부의 비서로 전근해갔다고 했다. 그녀는 지도자를 찾아가라고 건의하면서 이렇게 갈취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조용히 “저희 사부님께서는 도처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라고 하셨는데 그의 집도 곤란하고 그의 부인은 실업자이며 자식은 어리므로 그가 가졌으면 내버려두세요. 만일 현 지도자가 알면 이 청년의 앞길은 끝장입니다. 이는 제 개인의 돈이므로 제가 갖지 않고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현장의 부인은 내게 탄복했으며 더욱이 대법이 사람을 선하게 교육하는 감화력에 탄복했다.

2000년 봄, 나는 파룬궁을 위해 청원한 것 때문에 불법적으로 4개월을 갇혔고 또 불법적인 징역 판결에 직면했다. 내가 갇혀 있을 때 그녀는 나를 판결한다는 소문을 듣고 남편을 찾아 “언니가 이렇게나 좋은 사람인 줄 우리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어요.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고 단지 한통의 청원편지를 부쳤다고 해서 이를 무슨 근거로 삼아 잡아가두고 또 판결하나요?”라고 말했다. 동시에 또 우리 회사 국장을 찾아가서 국장이 공안국에 가서 석방을 요청하라고 했다. 이 기간 남편도 정법위에 가서 사람을 석방하라고 했다. 정법위 서기는 “큰언니의 일을 우리는 알고 있고 현정부 직속기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많은 분들이 그녀를 위해 분주한데 마음 놓으세요. 아주 빨리 나오게 될 것입니다”고 말했다. 얼마 안 돼 정말 나를 내보냈다.

세 명의 촌서기 “파룬궁을 연공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

2003년 나와 남편은 고향으로 돌아와 거주했다. 우리는 전부터 촌의 공익사업에 관심을 가졌고 진선인(眞善忍)의 법리대로 행동하면서 오직 시민들에게 유익하다면 모두 지지해주었다. 2007년의 큰비는 촌의 저수지를 휩쓸어 가버렸다. 그 저수지는 촌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리시설이었는데 말이다. 2008년 장마철이 오기 전에 고쳐놓지 않는다면 장마 때 진흙과 모래가 쓸려 내려와 저수지를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촌민들마다 모두 걱정했다. 예산에 의하면 저수지를 수리하려면 10톤 정도의 시멘트와 얼마간의 돌이 있어야 한다. 촌 정부는 돈이 한 푼도 없어 내가 남편(수련생)과 협의 끝에 시멘트 구입비용 2천 위안을 내고 우리 집을 수리할 때에 남은 돌을 촌정부에 주어 급한 물자를 해결해 주었다. 촌서기는 촌민들이 봉사 작업을 해 저수지를 수리하자고 호소했다. 전 촌민들이 모두 기쁘게 나섰다. 촌서기는 기뻐하며 “우리 촌에 당신 같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날 경찰이 우리 촌에 와서 소란을 피우자 촌서기가 직접 경찰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할 일이 없습니까? 우리 촌의 저수지가 망가진 것을 파룬궁수련생이 돈과 돌을 내서 수리한 겁니다. 당신들은 한 푼이라도 냈습니까?”라고 했다. 경찰이 믿지 않자 촌 간부는 “못 믿겠으면 촌에 가서 마음대로 물어보시오! 모두 파룬궁 같으면 우리 촌은 벌써 좋아졌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난처해하며 가버렸다. 이는 고향에 돌아온 후 제1임 촌서기가 파룬궁을 인정한 것이었다.

우리 집 문 앞에는 큰 주요 도로가 있다. 1958년에 돌로 깔아둔 길인데 현재는 길이 울퉁불퉁하며 높이가 고르지 않아 형편없다. 사과 판매 계절에는 전 촌 절반의 과수농민들이 사과를 싣고 이 길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를 통과할 때 차들은 마치 꽃가마를 메고 가는 것처럼 천천히 가야한다. 그래도 차가 여기를 지난 다음에는 사과가 짓눌려 상처가 난다. 과일 농가들의 고충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2013년 남편은 한 기업의 초청으로 기술 고문으로 초빙돼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내가 촌서기에게 돈을 모아 길을 수리하자고 하자 촌서기도 동의했다.

촌정부의 명의로 관계가 있는 각 가정으로부터 모금하기로 했다. 내가 인민폐 1만 위안을 기부했고 그밖에 매 가정마다 500위안씩을 모금하기로 결정하고는 그날 오후 촌서기와 함께 집집마다 다니며 모금했다. 결국은 한 나절동안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촌민들로부터 이런 저런 말을 듣자 촌 간부들은 의기소침하여 돌아갔다.

많은 과일 농가는 나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촌서기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촌서기와 함께 하지 말고 당신 혼자 와서 모금하라고 했다. 그 이튿날 나는 촌간부의 참여를 사절하고 나 혼자 집집마다 다니며 모금했는데 58개 농가에서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금을 다했다. 내가 도로 수리 협력 조직을 결성했는데 촌민들이 도로를 수리하는 데 봉사하게 했다. 또 도로를 수리하는 작업팀과 연계하고 각 방면과의 관계를 협력했다. 한 달간의 노력으로 3백 미터 되는 전체 촌의 교통을 제약하는 주 통로가 완공됐다. 도로 개통을 선포하는 그날 전 촌민이 기뻐하며 환호했고 어떤 분은 TV로 녹화하자고도 했다. 내가 “그러지 맙시다. 제가 파룬궁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했다고 하면 그들은 오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촌민들은 “파룬궁이 어디가 좋지 않습니까? 당신 60여세 노부인이 그렇게 많은 돈을 기부하고 또 안팎으로 부지런히 서두르며 마음고생을 다 하면서 얼마나 쉽지 않았습니까? 탐관들에 비하면 몇 백배로 좋은 것입니다! 파룬궁은 좋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2임 촌서기는 이번의 도로 수리를 통하여 깊은 감동이 있었는지 나에게 “아주머니가 촌민을 인솔해 길 수리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무엇이 신용인지 알았고 무엇이 명망인지 알았습니다! 우리가 잘하지 못해 촌민이 신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 놓으세요! 상급에서 파룬궁 일로 당신을 찾으면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막겠습니다. 그들이 두 번 다시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제2임 촌서기의 파룬궁에 대한 태도였다. 내가 막 고향에 돌아온 첫해에 그는 촌 치안주임이었고 ‘610’사무실과 협력하며 우리를 세뇌반에 보냈는데 지금은 완전히 변한 것이다.

2015년, 나는 촌을 떠나 남편이 있는 회사에 출근하게 됐다. 촌에서는 국가의 지지 하에 저수지 진흙탕을 정리하고 산길을 수리했다. 제3임 촌서기가 전화로 나에게 “작업팀이 길을 수리하는 동안 전 촌이 다른 길을 수리하려고 모금하는데 촌의 사업을 지지해주시고 도로 수리에 기부하실 수 있는지요?”라고 물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두말없이 5천 위안을 기부했다. 촌서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말하기를 “파룬궁을 연공한 사람을 보시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전화 한 통으로 돈을 가져다주려고 집으로 왔어요. 우리 촌은 돈 있는 집이 많은데 누가 저 분과 같습니까? 만약 모두 파룬궁 수련을 한다면 좋을 겁니다.”라고 했다. 이는 제3임 촌서기의 파룬궁에 대한 인정이다.

좋은 사람이 되어 법을 원용하고 세인은 자각적으로 법을 수호하다

고향에 돌아간 지 몇 년 동안 우리는 공익사업에 기부하는 외 평소 어떤 집이 경제적으로 곤란하면 모두 전력으로 도와주어 난관을 넘게 했다. 몇 년간 우리 집에 급한 일로 돈을 빌리러 오기만 하면 하나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어떤 때 집에 돈이 없으면 내가 나가서 돈을 꿔서라도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돈 빌리러 온 사람 중 60여세 독신 노인이 있었는데 갑자기 뇌출혈이 발병했으나 돈이 없어 치료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노인이 상환능력이 없는 것을 근심해 감히 돈을 빌려주지 못했다. 이렇게 돈이 없어 약을 사지도 못하고 치료를 중지한 채 집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내가 이 일을 알고 즉각 인민폐 1천 위안을 가져다주고(한 동안의 의료비) 동시에 남편보고 민정국과 진 정부를 찾아가 노인을 도와 ‘5보호 사회보장’ 혜택을 받게 했다. 이렇게 경제적 곤란으로 치료를 못해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까지 10여 만 위안의 돈을 받지 못했다.

남편은 과수나무 기술자로서 퇴직 후에도 늘 외지에서 신품종을 도입해 실험삼아 심는다. 속인은 이런 묘목은 비밀리에 심고 소문내지 않는다. 남편과 상의해 우리는 연공인이기에 새 품종을 도입해도 비밀리에 심지 않고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며 누가 심으려 하면 무상으로 접지와 기술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 큰 체리 품종을 우리는 3년 동안 촌민들에게 제공해주고 매년 채집한 접지를 무상으로 과일 농가에 주었다. 현재 이 품종은 이미 우리촌의 주요 품종이 됐고 비싸게 팔려 경제 효과도 가장 좋은 품종이 됐다.

퇴직 후 촌에 거주하는 동안 나는 시종 연공인임을 기억하고 연공인의 행동으로 실제로 법을 실증하고 법을 원융했다. 전 촌민이 모두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게 했다. 촌민들은 나에게서 파룬궁이 억울함을 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촌간부들과 촌민들은 자각적으로 대법의 명성을 수호했고 대법제자의 안전을 도모했다.

어느 해에 내가 퇴직 전 처리한 경비에 대해 감찰국이 조사했으나 행방을 찾지 못하자(사실은 장부를 인계하는 회사 문제) 내가 탐오했다는 의심을 품고 원 회사에 가서 조사했다. 회사의 간부와 직원들이 백분의 백 말하기를 ‘이는 큰 누님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고 했다. 감찰국 직원들은 믿지 않고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우리 촌으로 나를 조사하러 왔다. 촌에 들어서자 여성 몇이 그들이 제복을 입은 것을 보고 파룬궁을 잡으러 왔다고 생각해 그들이 아무리 물어도 우리 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마지막에 상황을 모르는 여자가 그들을 우리 집에 데리고 왔다. 내가 당시 집에 있지 않았는데 그들이 조사하는 마을사람마다 그녀는 촌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고 촌을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했는지 알려주었다. 그들의 원래 생각은 나를 데리고 가서 조사에 협력하게 하려 했는데 회사와 촌민들의 말을 듣고 나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렸다.

점심에 우리가 돌아와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 국장이 웃으면서 “큰누님, 우리는 파룬궁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돈의 행방을 찾으러 왔습니다. 당신이 연공한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 우리 역시 이 돈이 절대로 당신과 상관없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간단히 정황을 묻고 나서 그들은 돌아갔다. 이후에 촌의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주기를 그들이 우리 집에서 면담할 때 촌의 몇몇 여성들이 창문 밖에서 듣고 있다가 만일 나를 붙잡아 가면 즉시 마을 스피커로 모두에게 알려 길거리에서 나를 잡아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10여 년 동안 나는 사부님의 가르침대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법을 원용하고 법을 실증했다. 다른 일면으로 말하자면 세인이 우리 대법을 배우는 사람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므로 그들에게 진상을 말하고 삼퇴를 권하면 그들은 쉽게 접수하고 믿는다.

층차의 제한이 있으니 수련생들이 비평해주시고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13기 중국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6년 11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원지>밍후이대륙법회>제13회(2016년)원문출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1/33698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