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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중에 쉽게 감지되지 않는 ‘사(私)’를 제거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사존의 ‘2015년 미국 서부 법회설법’을 보고 나서 나는 정법 노정과 자신의 간격 때문에 조급해서 매일 자신의 경지를 제고하려 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사부님께서는 부단히 점화하여 주시어 내게 사상 중의 쉽게 감지되지 않는 ‘사’를 보여주셨다.

최근 2년은 중국의 경제가 직선으로 하강하면서 어떠한 장사도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염두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장사가 잘 안되어도 나만은 영향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사실은 정말로 영향이 크지 않음). 요 며칠 나는 갑자기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됐다. ‘왜 다른 사람과 다른가? 나의 장사는 무엇 때문에 영향받지 않는가?’ 원래 내 마음속에는 수시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요 몇 년간 나는 대법항목에 적지 않은 돈을 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장사가 안되어도 나는 마땅히 영향받지 말아야 한다. 대법이 나에게 보답해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사심이 아닌가? 대법과 흥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염두는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장사가 잘 안될 때 튀어나왔는데 대법항목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지급했으니 속이 든든한 것처럼 느껴지고 지금은 그 보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는 생명의 깊은 곳에 숨어 내색하지 않고 사람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것의 표현은 아주 교활하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나는 놀라서 깨어남과 동시에 그것의 추한 모습을 보았고 정념을 발해 철저히 제거했다. 그러면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대법항목을 위해 지급한 것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에서이며 그 어떤 보답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더러운 ‘사’를 철저히 없애겠습니다! 철저히 없애버리겠습니다!”

며칠 전 주변에 있던 한 수련생이 입원했다. 그를 보러 갔는데 그는 그저 울기만 했다. 사전에 나는 그가 병업 형식으로 박해받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가 그다지 정진하지 않았고 법공부, 연공도 적게 했는데도 자신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몇 년간 현지에서는 수련생들이 이렇게 병업 형식으로 박해받는 사례들이 몇 건이나 발생했다. 이 수련생이 입원한 후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았는데 어떤 이는 “이것은 저절로 자신을 망친 거죠. 수련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수련을 애들 장난으로 여기며….” 또 어떤 이는 “평소에 세 가지 일을 어떻게 했어요? 자신이 잘 알 거 아니에요? 병업이 나타나니 그제야 사부님을 생각하고….”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안타깝기도 하고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 수련생이 이 몇 년간 정말로 너무나도 표준에 못 미친다고 느꼈다. 낮과 밤이 없이 장사에만 열중했고 발정념을 하면 손이 넘어갔으며 정진하는 면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데 사악이 어떻게 그를 가만 놔두겠는가?

나의 이런 인식은 사부님께서 한 수련생의 입을 빌려 방할하셨다. “당신이 이렇게 생각하면 구세력은 오히려 기쁘게 생각할 거예요. 구세력 구미에 잘 맞아요. 구세력은 ‘이렇게 많은 대법제자가 모두 이 수련생을 질책하고 있는데 우리가 정당한 일을 한 것이 맞지요?’라고 말할 거예요. 이것은 구세력과 무슨 다른 점이 있어요? 왜 자신에게서 찾지 않나요?”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단번에 자신의 ‘사’를 보게 됐고 자신이 줄곧 관념을 갖고 평가했으며 이 수련생이 정진하지 못해 박해받는 것도 이치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안 되면 도태시킨다’는 구세력의 이치로 수련생을 평가하고 구세력의 편에 선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이 관념을 해체하고 인식을 개변했다. 수련생의 병업 중에서 한 방면으로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고 정법 노정을 따라가야 하며 다른 한 방면으로는 그 수련생을 도와 발정념을 많이 하고 이런 박해를 승인하지 말며 동시에 법리상에서 그와 교류해야지, 그의 결점을 보고 질책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전신에 에너지장이 매우 강함을 느꼈다. 발정념을 해도 고요해질 수 있었고 남다른 감이 있었다.

또한, 나는 부단히 정진하면서(사실 정진하는 수련생과 비교하면 차이가 큼) 속으로 ‘이렇게 정진하는데 원만은 문제없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다했고 대가도 감당했으니 정법이 종결되는 그 날이 되면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요 며칠 사이에야 깨달았는데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많은 설법 중에서 우리에게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1], 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원만의 배후는 무엇인가? 고생의 나날을 견디어 냈다, 인간 세상의 고해에서 벗어났다, 해탈됐다 등등이었다. 중생 구도를 첫 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정진하는 배후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새 우주 생명의 표준에 도달하는가?

매번 내가 대법항목을 실증하기 위해 감당하면 한 가지 염두가 떠오르는데 그것은 바로 위덕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감당했고 돈도 더 많이 냈으며 많이 했으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 과위’, ‘높은 경지’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사부님과 흥정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대법제자라, 한 점의 ‘사’라도 새로운 우주로 가져갈 수 없다. 이 점은 전혀 홀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매번 발정념 할 때 나는 ‘자신의 신체에 있는 노병사(老病死) 마를 없애자. 삼계 내의 물질이 나한테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여 나의 용모는 젊어지고 젊어져 진상을 알리는 소재가 되게 하자’라는 생각을 추가했다. 요 며칠 나는 이 염두가 아주 순수하지 않음을 발견했다. 자신을 나타내려는 마음이 강했고 ‘젊다’의 배후에 ‘사’가 있었으며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기를 바랐다. 허영심이 얼마나 강한가? 젊어진다 해도 어떻단 말인가? 영원히 사람으로 살 수 있는가? 대법이 가져다준 아름다움은 저도 모르게 간직하게 되는 것이지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표면이 아무리 좋다 해도 최후에는 버려야 한다. 갖고 가는 것은 수련해낸 순정함과 무사(無私)의 경지인 것이다.

요 며칠간의 체험을 적어 교류하려하니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

문장발표: 2015년 11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28/3196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