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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정념 위력이 다른 이유는?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9년 10월 15일】 나는 밍후이왕에 발표된 동수들의 수련체험 중에서 수련인이 사악의 교란과 박해에 봉착해 발정념을 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으나 발정념의 효과에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경찰이 문밖에 왔을 때 어떤 수련생은 발정념으로 경찰을 쫓아버릴 수 있었고, 어떤 수련생은 발정념으로 외계 환경에 갑자기 변화가 나타나게 했다. 이를 테면 경찰이 전화가 와서 그 기회에 수련생이 도망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발정념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악에게 잡혀갔다.

몸에 엄중한 ‘병업(病業)’ 박해가 나타났을 때에도 역시 부동한 상황이 나타난다. 어떤 수련생은 정념이 나오자마자 증상이 순간에 사라졌고, 어떤 수련생은 한동안 발정념을 거쳐서야 병업관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발정념 효과가 크지 않은데 나중에 병원에 가거나 심지어 어떤 이는 구세력에게 보귀한 신체를 빼앗겼다.

똑같은 사부님의 제자이고, 같은 법을 배우는데 왜 정념의 역량차이가 이렇게 큰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에, 마난이 왔을 때 발정념을 할 때의 목적, 다시 말해서 출발점이 정념 위력의 차이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바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만약 구세력 박해를 부정하는 기점이 위사(爲私)한 것이고, 박해 받지 않으려는 생각이 바로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이를테면 자신의 수련에 영향이 미칠까 봐, 박해당하는 고생을 감당하기 싫어하는 등등) 그럼 아마 발정념의 효과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발하는 것은 정념이 아니라 단지 “구하는 마음”일뿐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상황이 있는데, 사악이 아주 강한 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이 아주 중해 심태가 안정되지 못했거나 자신의 정념이 효과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 역시 정념의 효과에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이런 때는 신념(神念)이 부족하고 사람의 염두가 더 많기 때문이다.

만약 진정으로 완전히 신사신법을 할 수 있다면, 아울러 발정념을 하는 것이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라면 절대 구세력의 교란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공간의 사악은 제거될 것인 즉, 이 공간에서 체현되는 것은 사람을 잡으러 온 나쁜 사람이 도리어 도망가거나 병업 증상이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을 때, 너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저 자신이 아직 어떤 집착을 버리지 않았는가만 생각했고, 발정념 할 때도 여전히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박해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한 달이 걸려서야 관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 수련생이 병업관을 넘은 경력은 그와 달랐다. 그녀는 어느 하루 갑자기 아주 엄중한 병업반응이 와서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에게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나에겐 아직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고 많은데 이렇게 누워 있을 수 없다. 나에게 아직도 무슨 집착이 있든 없든 나는 모두 버릴 수 있다! 그런 후 그녀는 일어설 수 있었고, 즉시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구세력을 부정하는 그 일념은 산을 쪼개는 그런 힘이 있어야만 한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병업이 나타난 동수들은 모두 발정념으로 구세력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념이 어떻게 해야만 산을 쪼개는 듯한 힘이 있을 수 있는가? 지금 생각해 보니 법을 바로잡고 사람을 구하는 기점에 서야 하는 것이지 개인 수련의 기점에 서는 것이 아니며, 무사무아하게 구세력을 부정해야만 산을 쪼갤 힘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므로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 2009년 10월 15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0/15/2103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