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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 청구함’을 말하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2월 18일] 늘 이러한 문장을 보게 된다. 동수의 몸에 병업이 나타났을 때 사부님께 청구한다. 아직 수련하지 않는 가족이 위험에 부딪쳤을 때 사부님께 청구한다. 자신이 헤쳐나오기 어려운 번거로움을 만났을 때 사부님께 청구한다. 나는 또 한 편의 문장을 보았는데, 애를 잃어 사부님께 청구한 후 찾았다고 한다. 그외에도 많고 많은 생활상의 자질구레한 일로 사부님께 청구한 사례들이 있는데 그 예를 일일이 다 들 수 없다. 장시기 동안, 아주 많은 동수들은 마난에 부딪치기만 하면 곧 사부님께 청구하는데 모두 이제는 자연적인 습관이 된 듯 하다. 대다수 동수들은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을 신사신법의 정념과 동등한 것으로 여기며, 난 중에서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은 곧바로 사부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한다.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법이 있다. 일에 부딪치면 자신은 대법제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수련생으로 놓고 말할 때 사부님께 청구할 줄 안다면 정념이 나온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사부님의 대법제자로서 난 중에 사부님을 청하는 것은 우리의 신사신법을 체현한 한 면이다.그러므로 매번마다 사부님께 청구하여 많게 적게 늘 당시 눈 앞에 박두한 조급한 일부 일들을 해결할 수 있거나 완화 시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대법제자라는것을 기억 할 수 있는 우리 노 수련생으로 놓고 말 한다면 늘 초급 상태속에 머물러 있을수는 없는 것이며 ,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1.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이 순정한 정념인가

난(難) 중에 사부님을 생각할 수 있고 대법을 생각할 수 있으며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는 물론 정념이다. 하지만 이 ‘정념’이 순정한지 아닌지, 어느정도 깎아내려야 할지는 도리어 우리가 인식해야 할 문제이다. 원만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러가지 사람 마음이 있다.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이, 이러한 사람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았다고 보증하기 어렵다. 두려운 마음일 수도 있고, 안일을 구하는 마음이 너무 중했을 수도 있고, 마난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램일 수도 있고,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부족하여 마음의 불안정을 조성한 원인일 수도 있고, 사부님에 대한 의뢰심이 너무 중하여 자신은 사부님의 제자임으로 사부님은 자연히 자신을 보호해주실 것이며 자신의 마난을 풀어주실 거라고 여길 수도 있으며, 자신의 이미 잘 수련된 일면에 대하여 신심이 없고 자신의 정념이 부족하여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일 수도 있는 등등이다. 또 허다한 여러가지 사람 마음이 있는데, 모두 우리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구하여 자신의 고비를 넘는 것을 도와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이 일게 했을 수도 있다.

냉정하고 세심하게 생각해 보라. 기실 이런 고비, 난은 모두 우리의 사람 마음을 겨냥하여 온 것이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런 마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난 중에 우리가 가장 마땅히 해야할 일이 바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을 향해 자신을 잘 찾아봄으로써 법중에서 제고해 올라오는 것이며, 마난 속에서 뛰쳐나오는 과정 중에 마난을 없애버리는 이것이 바로 정념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로 사람 마음이 중하고 정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비로소 마난이 나타난 것이다. 아울러 바로 마난 중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이런 사람 마음을 분별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다. 만일 모두 그렇게 이성적이라면 난은 곧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하도록 지배한 배후의 어느 정도가 우리의 정념이며 어느 정도가 우리의 아직도 닦아버리지 못한 사람 마음인지는 아직 참으로 가려내기 아주 어렵다. 때문에 난 중에 있는 많은 동수들이 아마 자신의 사람 마음의 지배 하에 사부님께 청구한 것을 자신의 정념으로 잘못 여길 수 있으며,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한 것을 사부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잘못 여기고 있다.

기실 우리가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정념이 견정하다고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바로 우리의 정념이 아직 견정하지 못하고, 사부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을 그렇게 중하게 보는 것이며, 심지어 사부님을 믿는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수련하면서 우리는 누구나 모두 우리에 대한 사부님의 보호을 절실히 느꼈다. 사부님의 보호는 어느 때 어디에서나 있다. 아울러 매우 많은 돌발적 사건에서 사전에 근본적으로 사부님께 청구할 겨를이 없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우리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사전에 사부님께 청구하지 않았어도, 사후에 깨닫지 못했어도 사부님은 여전히 줄곧 우리를 보호해주시지 않았는가? 오직 우리들의 일사일념이 시각마다 모두 법에 있기만 하면 사부님은 시시각각 모두 우리를 도와 주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청구한 것이 아니며, 우리가 주관상 청구한 것과 청구하지 않은 것은 사실 모두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만약 참으로 내심 심처에서 그렇게 확고하게 신사신법 한다면 형식적으로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을 그렇게 중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 청구하여 효과를 본 후, 많은 동수들은 자연히 사부님께 청구하여 본 효과를 자신의 정념의 작용으로 여긴다. 이로부터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을 더욱 정념이라고 여기며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에 더욱 더 집착한다. 사실상,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 앞에서 우리 스스로 순정하다고 여기는 정념은 사실 너무도 보잘것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가 섞인 ‘정념’은 더구나 말할 필요도 없다. 참으로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와 대면할 때면 자신이 사부님께 청구한 이른바 ‘정념’이라고 여긴 것에 대하여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 둘 곳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자신의 사부님께 청구하는 이른바 정념을 사부님을 ‘함부로 지휘’하는 정도[成度]로 확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심생마와 아주 가까워질 수도 있다.

자신의 마난을 없애기 위해 사부님께 청구하는 심태의 태반은 대법과 사부님으로부터 얻어내려는 것이지 지불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때의 기점은 사(私)를 위한 성분이 많고 남을 위하는 성분이 적다. 때문에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을 순정한 정념이라고 할 수 없다.

2. 사부님께 청구하는 배후는 무엇인가?

난 중에 사람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 사부님께 청구하기는 아주 어려운 까닭에, 우리가 사부님께 청구한 배후는 아마 실질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마땅히 닦아버려야 할 물건을 밖으로 밀어내려는 것일 것이다. 원래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마난을 사부님께 밀어 버리면서 사부님께서 감당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응당 분명해야 할 것은, 그것은 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일체를 초월한 홍대한 자비이다. 그런데 제자인 우리로서는 도리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끝없이 사부님의 지불을 ‘향수’하면서 자신이 안을 향해 찾는 것과 제고할 기회를 매번 밀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매번마다 넘지 못하고, 넘고 싶지 않으면 사부를 찾는데 당신들은 사부를 도와 수련하는 것인가?(웃음)(뭇사람 웃음)아니면 자신이 수련하는 것인가?”(《미국 수도법회설법》)

자신의 법 실증이 휘황할 때면 사부님께 청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무릇 사부님께 청구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 난 중에 있는 사람이다. 사부님은 지극히 위대하고 신성하신 분인데, 우리는 도리어 우리 개인의 고비를 될수록 빨리 넘으려고 하면서, 심지어 생활 중의 일부 사소한 일을 위하여 그렇듯 신성하고 위대하신 사부님을 ‘불러오고 불러가다’니, 우리가 그래 바로 이렇게 사부님을 존경하고 있단 말인가?

대법의 홍대한 정도[成度]는 우리 그 어떠한 사람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전반 우주 천체 대궁을 육성한 무량한 법이며, 우리는 조사정법하고 있는 대법도이다. 그런데 개인의 난 중에서, 우리는 도리어 사람 마음의 지배하에 비자각적으로 이렇듯 홍대한 대법으로 자신 개인의 눈앞의 마난을 없애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무사무아의 경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며, 우리의 ‘조사정법의 법도’, ‘세속 중의 각자'(《축하》)의 신분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3. 구세력이 억지로 준 난은 응당 구세력이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일부 큰 고비를 만났을 때, 우리가 사부님께 청구하여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면 많은 동수들은 모두 생각할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감당하셨다.’ 하지만 아주 많은 거대한 난은 모두 구세력이 우리에게 집착심이 있다는 구실로 안배한 것인데, 이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견결히 부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감당하셨다.’라는 이 일념 자체가 사실 무형 중에 이미 구세력이 안배한 난을 인정한 것이며, 적어도 이 난의 존재를 승인한 것이며 적어도 사부님의 감당하심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부님의 감당하심에 감사드리는 동시에, 우리가 그것들의 안배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연히 구실이 있어 우리가 감당할래야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난을 우리의 사부님께 억지로 주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난 중에 사부님께 청구한 결과는 아마 자신마저 모두 응당 감당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사부님께 밀어주어 감당하시게 한 것일 것이다. 가령 대법제자가 대면적으로 이렇게 인식하고 이렇게 한다면 인위적으로 사부님 정법의 난도를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아울러 큰 난이 나타나는 것은 대부분 우리들 자신의 누락으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우리는 먼저 사부님께 청구하고, 다음으로는 또 사부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감당 하셨다고 여길 것인데, 이는 무의식 중에 우리 자신의 누락으로 구세력의 힘을 빌어 사부님을 ‘징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사부님에 대한 감격을 마음속에 담아둘 줄만 알고 도리어 떳떳하게 사부님의 지불을 ‘향수’하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사부님께 청구하여 순리롭게 고비를 넘긴 과정을 자신의 정념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래 바로 이렇게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한단 말인가?

구세력의 안배는 우리의 마음을 겨냥하여 온 것으로써 그것들은 사실상 우리의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며 우리의 지휘봉에 따라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법을 실증하는 길에서의 많은 일들은 원래 응당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지 그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구세력이 우리에게 집착이 있다는 구실로 억지로 들씌운 난을 우리 누구도 감당하지 말아야 하며, 더욱이 사부님께서 감당하시도록 밀지 말아야 한다. 정법이란 바로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하세하여 사람을 구도하는 신에 대해 구우주가 박해하는 이것이 바로 바르지 않은 것으로써 마땅히 귀정시켜야 할 것이며, 이것은 우리 조사정법의 하나의 중요한 환절이다. 때문에 큰 마난을 만나 오직 우리의 조사정법을 교란하기만 하면 우리는 안을 향해 찾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감당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구세력에게 되돌려 주어 그것들로 하여금 감당하게 해야 한다. 이래야만 비로소 구세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제지하고 부정할 수 있다.

4. 우리는 마땅히 사부님께 무엇을 청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난 중에 우리는 사부님께 청구할 수 없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고비를 넘을 때 우리는 물론 사부님을 의지해야 하고 대법에 의지해야 한다. 사부님과 법이 없으면, 어떠한 한 가지 일도 성사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난 중에 도대체 사부님께 무엇을 청구해야 하는가? 사부님은 2006년 《로스앤젤레스시 법회 설법》 중에 말씀하셨다. “정법은 절대로 엄숙한 것이며 수련을 시작할 때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사부가 이미 당신에게 해주었으며 지금은 바로 당신의 정념에 의지하여 고비를 넘어야 한다. 당신의 정념이 충족하다면 사부가 당신을 도울 수 있다.” 내가 이해하건대, 정념은 고비를 넘기는 관건의 관건이다! 때문에 난 중에 만약 참으로 사부님께 청구할 것이 수요된다면, 우리는 우선 마땅히 사부님께 우리의 정념을 가지해주실 것을 청구해야 한다!!!

사부님께 의지하는 것과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은 두개의 완전히 부동한 개념이다. 법에 대한 견정함과 사부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반드시 일마다 곳곳마다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중의 사소한 일을 위해 사부님께 청구하는 것은 사부님에 대한 불경이다. 개인의 마난을 없애기 위해 사부님께 청구 하는 것도 우리의 무사무아의 수련 종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는 더우기 될수록 사부님께 청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마땅히 닦아버려야 할 부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능력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적어도 마땅히 이러한 염원이 있어야 한다. “안을 향해 찾아 보며 자신이 법 중에서 닦아낸 정념에 의거하여 모든 고비를 넘겠다!” 이것은 우리가 대법을 실증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한 개 방면이다.

잊지 말라! 우리는 ‘조사(助師)’정법하는 대법도이다. 사부님의 근심을 덜어들이진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상상에 늘 사부님께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끼쳐들이진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이 “미래의 왕”(《축사》)들이 어찌 늘 사부님의 자비를 “지팡이”로 삼고 하루 종일 짚고서 자신의 세계를 관리하겠는가. 이는 긍정적으로 사부님이 바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안을 향해 찾고 자신의 정념에 의지하여 고비를 넘는 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표현이며, 우리가 철저히 구하는 마음을 포기하여 무사무아에로 걸어가는 시작이며, 마난에 직면하여 용감히 감당하는 기백이며, 또한 우리가 마땅히 미래에 남겨야 할, 어떻게 마난을 대하는가 하는 기본 태도이기도 하다.

그럼 사부님께 청구하지 않고 자신은 정념이 약하다고 여기는데 개인의 커다란 마난 중에서 어떻게 걸어나올 수 있겠는가? 나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응당 약간의 근심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사부님은 《2004년 미국 서부법회 설법》 중에서, “정법은 필히 성공할 것이며, 대법제자는 필히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사부님의 말씀에 대해 확고히 틀림없이 믿어야 할 것이다. 확고한 신념은 사부님께 청구하여 얻어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바른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커다란 마난 중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마땅히 자신의 수련 앞날에 대해 신심으로 충만되어야 하고, 오직 우리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곧 반드시 고비를 넘을 수 있을 것이다. 큰 마난은 우리 의지에 대한 고험이 될 수 있다. 어떠한 때일지라도 우리는 대법이 육성한 생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악이 어떻게 교란한다 해도 최종에 대법은 꼭 우리를 성취하게 할 것이다!

정념에 관하여 사부님께서는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명혜망의 보도를 보니, 한 수련생은 다리를 맞아서 분쇄성 골절이 되었지만 또 깁스를 하지도 않았다. 이 수련생은 자신이 불구가 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전혀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면서 매일 법공부를 했다. 정념이 아주 충족하여 조금이라도 앉아있을 수 있을 때면 연공을 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분쇄성 골절에 깁스를 하지도 않았으니 이는 모두 그 감옥의 병원에서 한 짓이라고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고 나는 다리를 틀고 연공할 것이라고 했다. 아파서 안 되도 여전히 견지했는데 나중에는 다리를 틀어도 아프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좋아졌다. 지금은 또 뛸 수 있고 달릴 수도 있으며 아무 일도 없이 정상인과 똑같다. (박수) 당신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낡은 세력은 절대로 감히 그를 움직이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관을 넘는 중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무엇을 정념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바로 정념이다!”

문장발표 : 2007년 12월 1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7/12/18/1685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