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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인 중에는 영웅이 없다(2)

—— 잘못된 인식에서 걸어나오다

글/정원(静远)

【명혜망 2006년 4월 22일】(윗 문에 이어)속인들이 ‘영웅’이나, ‘위대하다’고 부르는 것을 수련인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이는 수련인에 대한 요구가 속인사회에서 좋은 사람에게 요구하는 표준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어떠한 격진(激進)이나, 개인인식을 강조하는 행위는 모두 대법제자의 심성표준에 부합되지 않는다. 수련인은 반드시 반박해와 진상을 알림으로써 사람을 구해야 하지만 어떠한 정황에서도 수련인이라면 응당 이지와 청성, 지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요구는 확실히 아주 높다. 왜냐하면 수련은 초상적이므로 그에 대한 요구가 속인계층보다 높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당연히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잘하기 위해 더 노력하면서 행해야 한다.

정법구결을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2001년 5월 전 세계 대법제자들이 발정념을 갓 시작했던 그 시기에 일부 수련생들은 속인 마음이 있어, 혹은 발정념의 요령과 요구를 즉시 요해하지 못한채 일종 표어와 구호로 속인을 상대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이 방면의 법리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동수들은 반드시 이를 중시해야 한다.

그 외, 왕원이 사건이 발생한 뒤 일부 수련생들은 서방매체와 세인들이 전폭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지금까지 몇 해동안 퍼레이드도 하고,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등 활동을 했는데 그녀가 이번에 한 번 소리친 것보다 못하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는 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잘 검토해야 한다.” 는 이런 유형의 말들을 한다. 그리고 수련생들 중 상당 수는 제자들 속에 영웅이 나왔다고 하면서, 어떻게 어떻게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며 숭배한다. 만약 여러분이 즉시 냉정하게 법공부를 잘하고, 한 수련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심태로 돌아온다면, 이런 유형에 속했던 동수들은 가능한한 빨리 자신의 사로와, 문제를 대하는 기점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되도록 빨리 그 기점을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대법제자가 하나의 정체로서 세인을 구도하는 효과에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 대법제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련하며 일을 할 때 반드시 법에서 문제를 볼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사부님께서 성숙해지라고 요구하신 뜻에 따를 수 있다. 진상을 알리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적합하지 못한 방법으로 가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 일이 정면적인 효과가 있다고 하여, 그 속에 있는 대법제자의 심성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마져 합리화 될 수는 없다.

수련인 중에는 무슨 모범과 영웅이 없으며 오로지 심성수련과 법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만 있다. 우리가 개인이라도 좋고, 하나의 항목을 담당하는 소조라도 좋고, 민간단체라도 좋은데, 어떠한 일을 하여 만약 정면적인 효과가 있다면 모두 법리에 부합된 그 부분이 작용을 일으킨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대법제자의 노력이 합성(合成)된 것으로 모두 사부님과 대법의 위력이다. 그다지 냉정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 만약 주변의 수련인들이 정말로 수련생을 선하게 대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수련환경을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가 당연히 행해야 할 것은 숭배과 공유(恭維)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일깨워주고 더욱 이성적으로 세가지 일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매개 수련생 스스로 우선 이지적으로 수련의 각도로 법에서 문제를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동수와 함께 정으로 진상을 알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예를 들어 교류했던 일이 생각난다. 대법제자가 쓴 한 편의 문장이 만약 정의 각도에서 독자를 감동시킨다면, 속인생활은 정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장은 아주 쉽게 속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속인이 공감하여 쉽게 문장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문장은 박해를 폭로한 것이므로 이 문장 역시 진상을 알리고 세인을 구도하는 정면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을 대법제자가 읽게 되었을 경우는? 만약 그렇다면 대법수련생들의 정을 선양하는 것이며 아주 많은 사람들의 수련을 교란할 것이다. 작가 본인은 또 청성한 심태로 단지 ‘정’을 조금만 이용해 세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개인의 이 방면에 대한 집착이 강화되어 개인수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같은 이치로, 격진의 물건은 속인 사회에서 무슨 큰 잘못이 없고 현대인들에게는 또 일정한 시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격진의 방식을 이용해 쟁투하는 마음을 가지거나, 혹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구호나 외침처럼 이런 속인 층면의 방법을 사용하여 세인을 감동시키면 역시 일정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수련인으로서 자신과 속인의 본질적 차이를 뚜렷이 알고서, 이를 시시각각 기억한다는 전제하에서 해낸 일과 비기면 그에 따른 효과의 차이는 아주 크다. 그러므로 대법제자의 행위 속에서 이지적이지 못한 부분은 부정적인 작용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는 아주 많은 수련생들로 하여금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여 미봉할 수 있다. 일을 좋지 못하게 한 동시에 부정적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모두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기나니’ ‘할 수 있음이 수련이노라’를 확실히 기억해야 한다.

최근 《로스앤젤스시 설법》에서 대법제자가 오늘날 법을 실증할 때 “사람의 용기가 좀 필요하다”는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지적하셨다.“……바로 대법제자가 잘못이 있을 경우 남이 말하는 것을 싫어하며 누구도 말할 수 없는데 말만 하면 야단이다. 옳을 때 다른 사람이 의견을 제기하면 좋아하지 않고 틀려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을 하기만 하면 바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의견도 듣지 않으며 선의(善意)적이든 악의(惡意)적이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욱이 안을 향해 찾지 않는데 상당히 엄중해졌다.”

사부님께서는 이전에 우리를 탓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한 점을 남겨주셨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자로서 속인사회 속에서의 좋다, 나쁘다는 말을 마주했을 때 수련생이 한 것이 원용되거나 혹은 그다지 원용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우선 자신을 찾아야 하고 자신이 각 방면에서 모두 더 잘하도록 해야 한다. 이로써 대법제자의 정체를 원용하고 이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곧 스쳐 지나갈 순간의 시기를 이용해서 진상알림을 더 잘하여 중생을 구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한 생각으로 더구나 잘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성숙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먼저 써냄은 최소한 여러분들이 서로 일깨워줄 수 있는 작용을 즉시 일으키길 바래서이다. 적절하지 못한 곳은 여러 동수들께서 보충하고 시정해 주기 바란다.

(English Translation: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6/4/23/72354p.html)

문장완성:2006년 04월 22일
문장발표:2006년 04월 22일
문장갱신:2006년 04월 23일 03:45:16
원문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6/4/22/1258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