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남편의 억울함 호소하며 법률을 이용해 진상을 알리다 (하)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전편에 이어) 방범사무실(610) 주임 B는 그 광경을 보고 즉시 제게 앉으라고 했습니다. 방범사무실의 C에게 저를 녹화하게 했는데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즉시 그만두라고 하며 말했습니다. “B 주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 모습은 녹화할 수 없어요. 당신들은 내 초상권을 침해할 수 없어요.” 태도가 매우 단호하자 그들은 더는 녹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준비해 간 14가지 사교(邪敎)에 관한 39호 문건을 꺼내 그들에게 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보지 않았고, 자기들도 다 있으니 안 봐도 된다며 7월 22일 문건만 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천안문 분신 사건을 언급하길래 제가 말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가짜라는 걸 다 아는데 당신들도 믿습니까?” 저는 그들에게 그중 몇 가지 허점을 말해주며 그건 연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과 한참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했습니다. “남편은 작은 호리병에 ‘진선인(眞·善·忍)’을 새겼다는 이유로 8년 넘는 형을 선고받았는데, 누가 이 작은 호리병을 보고 바보가 되고 멍청이가 되고 상해를 입었습니까? 우린 너무 억울합니다!…”

나중에 그 방범사무실 직원 C가 말했습니다. “다 말씀하셨으면 어서 가세요. 많이 말씀하셨잖아요. 이 건물에는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있어요.” 나중에 C가 저를 배웅해 아래층까지 내려왔습니다.

저는 건물 안에서, 원래 제 남편에게 증명서를 써준 방범사무실 주임 K의 이름을 알아냈는데 그는 이미 애위판(愛衛辦, 위생 운동 위원회 사무실)으로 전근 간 상태였습니다. 저는 즉시 애위판 전화번호를 찾아 그에게 전화해, 왜 제 남편에게 그런 증명서를 써줘서 남편이 8년 넘게 억울한 판결을 받게 했냐고 따졌습니다. 그는 자기는 이미 전근 왔으니 상관없다며 지금 주임인 B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방범사무실에 가는 것은 확실히 다른 곳과는 달랐습니다. 처음에 그들의 사악한 기세 때문에 저는 매우 괴로웠고 수련생에게 방범사무실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수련생의 격려로 나중에 저는 다시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나중에 변호 의견서와 기타 문서가 생긴 뒤 저는 늘 문서 몇 부를 골라 그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방범사무실 주임 K와 B를 고소했습니다. 나중에 방범사무실에 갔을 때 한번은 제가 면전에서 이 고소장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소 의외였던 것은 그들이 펄펄 뛰기는커녕 오히려 예전의 그 사악한 기세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날 떵떵거리던 몇 사람을 포함해 모두 온화하게 저와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로는 제가 직접 방범사무실 주임에게 주면 그가 다 받았고, 받은 후에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이 구(區) 방범사무실은 정법위 사무실 건물 안에 있었는데, 한번은 남편의 병보석 문제로 방범사무실 주임 B를 찾아갔으나 자리에 없었습니다. 저는 건물 안을 배회하다가 아래층의 한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며 겸사겸사 남편이 박해당한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진지하게 제 말을 계속 듣더니 나중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저기 저 방에 가서 한번 이야기해보세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저는 고맙다고 한 뒤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부서기 사무실이었는데 부서기는 여자였고 말투도 비교적 좋았습니다. 제가 상황을 말하자 그녀는 B에게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B가 그녀의 사무실로 오자 제 면전에서 B에게 제 일을 처리해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또 B의 사무실에서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갈 때 B는 저를 아래층까지 배웅하며 경비원에게 “아주머니가 앞으로 저를 찾아오시면 바로 올라오시게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제 자전거가 안쪽에 있어 다른 자전거들에 막힌 것을 보고 그녀는 제 자전거를 꺼내는 것도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방범사무실에 가는 것은 마치 이웃집에 마실 가는 것 같았고 가고 싶으면 갔으며 사상적 부담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B도 제게 온화하고 존중하며 말했고 방범사무실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후 재심 청구를 위해 방범사무실 증명서의 불법성을 추가로 입증하고자 성 사법청에 정부 정보 공개를 신청하여, 구 방범사무실이 성 사법청에 등록된 사법 감정 기관인지 정보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성 사법청은 사법청의 사법 감정 기관 등록 명단에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나중에 사법청의 답변도 다른 문서와 함께 방범사무실 주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발생한 몇 가지 일에서 저는 그가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감옥 부감옥장 L이 남편의 장례 문제를 해결하려고 저를 찾았는데, 한동안 매우 거만하게 굴었습니다. 한번은 우리와 대화할 때 사악한 기세가 가득하여 어떤 말은 매우 악랄하고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 정법위와 우리 지역 정법위를 찾아갔다며 전 성(省)의 힘을 동원해 해결하겠다 했고 대법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이틀 뒤 제가 방범사무실에서 B 주임에게 진상을 알리고 있는데 감옥 부감옥장 L 등이 또 우리 지역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들 감시 위치 추적하고 있지 않나요? 위치 추적해서 찾아오시죠.” 그들의 위치 추적 미행이 대단한지 잠시 후 그들이 B 주임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방범사무실 사무실에서 대화했습니다.

감옥 측이 다시 제게 시신 화장을 강요하자 제가 말이 좀 급해졌고 무심결에 제게 불리한 말을 두세 마디 했는데, B 주임이 옆에서 살짝 저를 건드렸습니다. 말실수하여 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말라고 일깨워주는 뜻이었습니다. 저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또 감옥 측에 말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떻게 하든 이 일 처리는 아주머니가 만족하게 해야 합니다.” L의 이틀 전 사악한 기세는 마치 순식간에 꺾인 듯 방범사무실에서는 감히 지나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 한번은 B 주임이 제게 말했습니다. “다음에 감옥에서 또 찾아오면 제게 알려주세요. 저도 가서 그들과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중에 감옥 책임자가 또 저를 찾으러 왔을 때 제가 B 주임에게 알리자 그가 정말로 왔습니다. 보아하니 그는 준비하고 온 듯했는데 마치 상사가 훈시하듯 오랫동안 말했고 모두 제 편에서 말해주었습니다. 한 생명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매우 기쁜 일입니다.

우리 시에는 몇 개 구가 있는데 지난 몇 년간 수련생들은 B 주임이 있는 우리 구가 다른 구보다 박해가 훨씬 약하다고 확실히 느꼈습니다. 똑같이 대면해서 진상을 알려도 다른 구는 단번에 3년을 선고하는데 이 구는 때로는 바로 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행정 구류 며칠만 살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인접 구에서는 때로 1년에 수련생 몇 명이 억울한 판결을 받는데, 이 구에서는 몇 년간 수련생이 재판받은 적이 없습니다.

10. 홀로 감옥에 가서 문의하다 모욕당하자 현지 파출소장이 먼 길을 찾아와 상황을 설명하다

2심에서 원심판결이 유지된 뒤 2020년부터 남편이 감옥에 불법 감금됐습니다. 1년에 단 세 차례 전화만 허용됐고 그 후로는 완전히 연락이 끊겨 온 가족이 매우 초조해했습니다. 저는 제가 감옥에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다들 반대하며 제가 나이가 많아 혼자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 도저히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아이들 몰래 홀로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도착하니 문지기가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무슨 일입니까?”라고 묻길래 제가 말했습니다. “제 남편 A의 병세와 병보석 요청 건으로 감옥 병원 D 원장을 찾으러 왔습니다.” 제가 성씨를 묻자 그는 이곳 E 주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E 주임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파룬궁을 연마합니까?” 제가 되물었습니다. “그게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저는 곧이어 남편과 통화하고 싶다며 건강 상황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E 주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제가 또 감옥장을 만나겠다고 요구했으나 E 주임은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정문으로 들어가길래 저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사람을 시켜 복도를 지키게 하고 저는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제 남편이 안에서 몇 달째 전화도 소식도 없어서 설에 우리 가족은 모두 제대로 지내지도 못했어요. 제 남편은 나이도 많은데 억울하게 고난을 겪으며 안에서 먹는 것도 부실하고 영양도 따라가지 못할 텐데 몸이 어떻게 견디겠어요? 만약 그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떻게 살아요!” 말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저를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감옥경찰 F와 다른 몇 사람이 저를 사무실로 불렀는데 당시 그들의 태도는 괜찮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제 요구사항을 말했습니다. 갑자기 무장경찰인지 무슨 경찰인지 모를 사람이 들어오더니 제 코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날 때리고 잡아가기라도 할 건가요? 마침 내 영감이 여기 있으니 날 잡아가면 그이랑 같이 있겠네요!” 옆에서 사람들이 말린 덕분에 그는 손찌검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파출소 사람이라 칭하는 몇 명이 이베코 승합차를 타고 오더니 제 조서를 꾸미고 신분증을 조회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처럼 일흔이 넘은 비무장 노인을 상대하는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감옥 E 주임 일당이 이토록 야만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불법 감금된 남편이 몹시 걱정됐습니다.

일이 있고 난 뒤, 저는 감옥 소재지 공안국에 『정부 정보 공개 신청서』를 우편으로 제출해, 파출소 경찰이 감옥에서 제 조서를 꾸미고 조사한 일에 대해 정보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며칠 뒤 현지 파출소장이라 칭하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말투가 아주 온화했습니다. 그들은 정보 공개 신청을 받았고 조사 중이라며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길래 제가 대략 말해주었습니다.

또 10여 일이 지나 그 파출소장이 전화를 걸어와 자기들이 업무차 제가 사는 도시에 왔는데 저와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 남편이 갇힌 감옥이 바로 그들 파출소 관할 구역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먼 길을 왔으니 쉽지 않았겠다 싶어 즉시 가서 만났습니다. 대화 내용은 정부 정보 공개 신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보 공개 신청을 받았고 상부에서도 매우 중시하고 있어 특별히 직접 제게 설명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그날 제가 만난 파출소 경찰이라 칭하던 사람들은 그들 파출소 소속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만난 파출소 경찰이라 칭하던 사람은 이름이 ××이고 경찰 번호가 몇 번인데 그는 감옥의 감옥경찰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경찰과 그들 공안 경찰의 경찰 번호는 확연히 다르며 공안 경찰 번호는 6자리이고 감옥경찰 번호는 5자리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그날 간 건 정말 우리 파출소 사람이 아닙니다. 차도 우리 차가 아니고요.”

그 후 저는 성 감옥관리국과 감옥에 이 일을 여러 차례 민원을 넣었으나 끝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다시는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감히 그렇게 사악하게 저를 대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감옥에 가서 또 한 가지 상황을 알게 됐는데, 2020년 말부터 반년 동안 남편과 우리의 면회, 통화, 화상 통화, 서신 왕래 권리가 완전히 불법적으로 박탈됐고, 그 이유는 그가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상 통화 비용 200위안을 입금했으나 1년이 되도록 화상 통화를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권리들은 완전히 박탈됐습니다.

감옥이 접견 불허 등 남편의 합법적 권리를 박탈할 때 주된 구실 중 하나가 ‘전향’하지 않았다는 것이었기에, 저는 성 감옥관리국에 정보 공개 신청서를 제출했고 뒤이어 그들의 답변에 대해 행정심판을 제기했습니다. 심판청구서에서 저는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감옥법』은 감옥경찰이 피고의 법에 따른 재심 청구 권리를 마땅히 보호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피고는 죄를 인정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므로, 원고가 말하고 제출한 법률 문서는 개조를 방해한 상황이 없으며, 즉 한 사람이 도덕에 위배되거나 법률을 위반하도록 방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법에 따라 피고의 합법적 권익을 옹호했을 뿐입니다.”

“전향은 곧 죄를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A가 감옥에 갇혔으나 그는 무죄이자 죄를 인정하지 않는 복역 인원으로서 인격을 모욕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감옥법』 제7조는 피감독자의 인격은 모욕받지 않으며 그 신변 안전, 합법적 재산과 변호, 재심 청구, 고소, 고발 및 기타 법에 따라 박탈되거나 제한되지 않은 권리는 침해받지 않는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A의 권리이며, 감옥경찰은 마땅히 법에 따라 피고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고 죄 인정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동시에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감외(監外) 집행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법률 규정도 없습니다. 전향이 감외 집행의 조건이라는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으며, 법에 권한이 없으면 금지된 것입니다.”

성 감옥관리국은 답변하지 않았고 저는 이에 대해 또 행정심판을 제기했습니다. 행정심판청구서에서 저는 그들의 위법한 점을 엄정하고 바른 말로 지적하는 동시에, 대법(大法)은 중국에서도 완전히 합법이며 제 남편 A의 행위도 완전히 합법임을 논술했습니다. 나중에 감옥관리국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처음에는 딴소리를 하다가 대화 끝에 제게 한마디 했습니다. “문서를 아주 잘 쓰셨네요….” 본 시 사법국에도 참조로 보냈는데 본 시 사법국 직원도 전화를 걸어와 그렇게 말했습니다.

11. 남편의 불행한 사망

남편이 감옥에 불법 수감된 후 저도 그에 따라 감옥, 사법 계통에 문서를 제출했고 기타 문서도 감옥에 참조로 우편 발송했습니다.

남편은 옥중에서 장기간 극심한 빈혈 상태에 있어 한쪽 눈은 거의 실명됐습니다. 전문의에게 자문하니 장기적인 빈혈은 장기 부전, 특히 심부전을 직접 유발하여 생명이 늘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감옥, 감옥관리국, 사법청에 우편으로 『○○○ 생명 안전 보전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행정소송 제기에 용이하도록 직무 이행 신청서임을 명시했습니다.)

저와 딸은 여러 차례 감옥, 성 감옥관리국을 찾아가 남편의 병보석 처리를 요구하며 각종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은 1년 넘게 미루며 처리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민원서를 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어느 날 오전, 감옥에서 병보석 수속을 담당하는 두 사람이 제가 사는 곳에 왔는데 이미 점심때였고, 그들은 바로 제 딸과 함께 구 사법국에 들어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딸이 돌아와 전하길, 처음에 사법국 사람이 아주 거만하게 굴며 제가 억지를 부린다고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들이 저를 가라고 했을 때 제가 가지 않은 것을 가리킨 듯합니다.) 제가 그녀에게 자료를 줬다고 했는데 사실 저는 이전 문서 몇 부를 그녀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나중에 감옥 경찰이 말을 끊으며 “우리는 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거니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제 딸 말로는 감옥에서 온 사람이 말을 아주 잘했고 병보석 수속을 성사시키려고 매우 애를 썼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결국 병보석 문서 서식에서 막혔다고 합니다. 감옥 경찰관은 자기들이 늘 처리하는데 전 성 각지에 다 처리해줬어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는데 유독 이곳에서만 이렇게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구 사법국은 계속 자기들 주장을 고집하며 현지 감옥에서 발급한 문서를 꺼내 이대로 써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감옥에서 온 사람이 할 수 없이 제 딸 면전에서 그들의 감옥장 J에게 전화를 걸었고, J는 사법국 요구대로 고쳐서 다음에 고친 문서를 그들에게 보내주라고 했습니다.

제 딸은 감옥 측이 진심으로 병보석을 처리하려 하고 또 공정한 말도 좀 해주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감사해했습니다. 나온 뒤 제 딸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안 된다며 이건 우리보고 잘못을 저지르게 한 거라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자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한 감옥경찰이 제 딸에게 말했습니다. “감옥장 J가 특별히 당부했는데, 어머니가 아주 대단하시고 문서 작성 수준이 꽤 높으시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께 앞으로는 제발 그만 고소하시라고 전해달랍니다.” 제 딸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요, 우리 엄마가 젊었을 때 천하를 돌아다니셨는데요. 우리집은 우리 엄마한테 의지하고 있어요.” 나중에 우리는 그 감옥장 J가 두세 달 뒤 전근 간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감옥 측이 두 번째로 사법국에 왔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수속 부적격을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습니다.

반년 후 제 남편이 또 입원했으나 감옥은 줄곧 제게 전화하지 않았고 딸에게만 전화했으며, 동시에 저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제 딸을 속여 제게 알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결국 제가 알게 되어 병원 주치의와 과장에게 전화했더니, 의사는 제 남편이 이미 위독하여 위독 통지서를 세 번이나 보냈으니 빨리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마음이 너무 급해 즉시 감옥 병원장에게 전화해서 남편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여전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제 남편이 위독해서 이미 가망이 없다고 들었어요.” 원장이 말했습니다. “누가 그럽니까? 누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제가 말했습니다. “누가 말했는지는 묻지 말고 사실인지 아닌지나 말해봐요.” 그는 제 태도가 단호한 것을 보고 누그러져서 말했습니다. “그럼 내일 오시죠.”

이튿날 저와 딸은 바로 출발했습니다. 2022년 전염병 기간이라 우리는 방호복까지 샀는데 도중에 더는 가지 못하게 하여 부득이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강경하게 요구하자 감옥은 최종적으로 특례 처리에 동의했고, 감옥 병원장 L은 우리에게 이튿날 남편을 보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L이 우리에게 통지하길 남편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감옥 측은 차를 보내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마지막 면회도 못 하게 하더니 이제 죽어서 말도 못 하는데 우리보고 가서 뭘 하라는 겁니까? 당신들은 도대체 그이가 무슨 말을 할까 봐 두려운 겁니까?”

감옥 측은 우리가 가지 않자 사람을 보내 저와 상의했습니다. 감옥 교육과장 H는 아주 거만하게 굴며 당장 화장하자고 했고, 제때 처리하지 않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얼굴이 검게 변하는데 그때 가서는 동의하지 않아도 화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어디 화장해 보시지! 내 남편이 영문도 모르게 옥중에서 죽었고 떠날 때 우리 가족도 현장에 없었는데, 이면의 일을 해명하지 않고 화장하겠다고?” 그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제게 형편이 어려운지 묻더니 보조금으로 몇천 위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전 퇴직 연금이 있어서 돈은 안 부족해요. 당신들이 내 남편 일을 해명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당신들이 내게 똑똑히 말해야 해요.”

그 교육과장 H는 또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 남편에게 계란 국수를 해줬는데 자녀들이 돌보는 것보다 더 잘해줬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누굴 속이려 드는 겁니까? 당신들 감옥이 그렇게 많은 대법제자를 박해해 죽였는데 그이에게 잘해줄 수 있다고요?”

나중에 그들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결국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면 우리가 8~9천 위안을 주는데 당신에게는 좀 더 줘서 1~2만, 많아도 5만은 넘길 수 없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됐습니다, 나랑 얘기하지 마세요. 앞으로 오지도 마시고요. 내가 파룬궁을 수련했으니 망정이지 예전 성격 같았으면 벌써 몽둥이 들고 당신들을 때렸을 겁니다. 지금 보니 당신들도 거짓말의 피해자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이니 어서 진상을 아세요. 안 그러면 결과가 아주 안 좋을 겁니다.”

마지막에 사법 계통의 한 책임자 G가 나섰는데 그는 감옥장의 상사였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위독해 통지서를 세 번이나 내렸다면서 왜 우리에게 한 번도 만나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당신들 감옥은 뭐 하는 겁니까? 직무 유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기엔 필시 원인이 있을 테니 전 끝까지 추궁할 겁니다.” 그 후 그들은 남편 시신을 장례식장에 냉동해두었고 한동안 감옥 측에서는 아무도 저를 찾아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12. 갑작스러운 청문회, 사악한 기세가 하늘을 찌르더니 모두가 기피하는 망신스러운 일이 되다

여러 차례 요구하고 신청한 끝에 2023년 10월 중순, 저는 남편의 감옥 수감 당시 CCTV 영상을 열람 신청하기 위해 특별히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성껏 편집된 10여 분짜리 영상 조각 몇 개만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전체 영상을 요구했으나 감옥 측은 이미 영상을 삭제하고 이 10여 분만 남겨두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일이 심상치 않고 필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판단하여, 돌아온 후 『정부 정보 공개 신청서』를 제출해 법에 따라 정부 정보 공개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은 줄곧 응답이 없었습니다.

검찰원 주재 감옥팀에 전화하고 허베이성 감옥관리국에도 전화해 원본 전체 영상 열람을 재차 신청하려 했으나, 한 달 넘게 적어도 27차례 전화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어진 두 달 동안 299차례 전화해서 13번 연결됐지만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찾지 못했습니다. 전화할 때마다 저는 기록해두었습니다.

2023년 말, 감옥 병원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감옥장이 며칠 뒤 저를 만나러 온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와 아이들은 그들이 정한 호텔 회의실에 가서 만났습니다. 가서 보니 안에 이미 10여 명이 앉아 있었고 현장에는 카메라도 설치되어 렌즈가 우리에게 배정된 좌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저와 아이들에게 청문회를 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당시 저는 듣자마자 화가 나서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딱 보니 미리 준비된 홍문연(鴻門宴, 함정)이었습니다. 미리 알리지도 않고 우리를 허둥지둥하게 만들고는, 전체 영상은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기습적으로 이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청문회를 연 것입니다. 저와 동행한 사람은 두 딸과 생질뿐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기왕 왔으니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뭘 하려는지 보자, 나는 대법제자인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문회가 시작되자 사회자가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 지역 시 정법위 조사연구원이라고 했고, 감옥에서 온 4명과 우리 지역 6명, 인민대표대회 대표, 정협 대표를 일일이 소개했는데 구 방범사무실 주임 B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사회자의 발언을 끊고 말했습니다. “사회자 양반, 일단 말하지 마세요. 방금 소개한 사람 전 하나도 기억 못 하겠으니 기다리세요.” 저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한 사람씩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적게 했습니다. 사회자가 급히 말했습니다. “적지 마세요, 적지 마세요.” 제가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나중에 제가 당신들을 찾아야 하니까요.” 그가 저를 막을 수 없음을 알고는 부득이 동의했습니다.

제가 한 명씩 이름, 전화, 소속, 직책을 묻자 그들은 마지못해 써주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연신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전 적지 마세요. 전 변호사입니다, 변호사예요.” 저는 우스웠습니다. ‘변호사가 뭐가 무서워서 그러지?’ 보아하니 이 변호사도 그들이 하는 이 일이 떳떳하지 못함을 알고 있고, 그들을 따라온 것조차 불명예스럽게 여긴 듯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줄곧 파룬궁수련생이 배후에서 저를 돕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우리가 들어간 뒤 감옥 사람들은 뒤에서 바로 제 생질을 에워쌌는데 그가 파룬궁수련생이라고 생각하고 기어코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내려 했습니다. 제가 한 사람씩 찾아다니며 기록하자 그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는지 그들은 순식간에 자기들 진영이 어지러워져 어쩔 줄 몰라 했고 아무도 제 생질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질은 전날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누군가 계속 종이를 들고 쫓아오며 서명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감옥 병원장은 주로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감옥 측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병보석을 추진했는지 이야기하며 그들은 책임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감옥 병원장은 매우 교활하고 위선적이었습니다. 예전에 감옥에서 우리와 주로 상대하던 사람으로, 전화와 만남이 수십 번은 될 것입니다. 감옥은 남편과 딸의 통화를 세 번만 허용했고 우리를 면회시켜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남편이 통조림처럼 밀폐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감옥 안의 일에 대해서는 자기들 말하는 대로라고 여겼습니다.

감옥 측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들이 크게 의외라고 느낀 것은, 이 감옥 병원장의 발언에 대해 저와 둘째 딸이 책상을 치며 일어나 면전에서 그의 거짓말을 폭로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자신과 감옥을 변호할 수 없게 만들자 그는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며 사전에 원고에 준비한 내용만 계속 반복해서 읽었는데, 식견 있는 사람이 들으면 앞뒤가 맞지 않아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감옥 내 치료 기록을 제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옥 측이 아무리 치밀해도 빈틈은 있었습니다. 저의 끊임없는 요구와 제가 가족을 데리고 직접 감옥을 찾아가 검찰원 주재 사무실을 찾은 후에야, 감옥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치료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네 차례 입원 진료 기록 사본을 제게 주었습니다. 네 번 입원했고 치료비는 10여만 위안이 들었습니다. 감옥은 이것이 그들이 법에 따라 직무를 이행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은 수련생이 이 진료 기록에서 저와 병원 의사의 통화 녹음을 결합해 문제를 분석해냈다는 점입니다.

수련생이 분석하길 전액 자비 부담 의료비 14만 위안은 언뜻 들으면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입원 기간의 70%와 치료비의 85%가 남편 A가 세상을 떠나기 전 1주일 간격으로 입원한 마지막 두 차례에 쓰였습니다.

마지막 두 차례 입원 때 주로 무슨 치료를 했을까요? 입원했던 병원 과장은 만약 감옥에서 보낸 게 아니라 일반 환자였다면 분명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병의 말기 환자는 전혀 치료할 수 없고 베이징에 가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입원시킨 것은 주로 환자의 고통을 좀 줄여주고 최대한 생명 시간을 연장하여 가족이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입원은 남편 A의 질병에 대한 진정한 치료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앞선 두 차례 치료에서는 퇴원 시 의학 지표가 여전히 위험 단계였는데도 퇴원했습니다. 딸은 그들을 엄하게 질책했습니다. “당신들 이건 전혀 치료가 아니에요. 감기 걸려 입원해도 이것보다는 많이 쓰겠네요.”

원래 그들이 청문회를 연 목적은 1만 위안 배상으로 이 일을 종결지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10여 명이 와서 이런 기세로 우리를 위협하고 공갈하여 배상 합의서에 서명하게 하려 했지만, 우리가 갑자기 그들을 반박해 말문이 막히게 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또 5만 위안으로 일을 끝내자고 했으나 저와 가족은 엄중한 말로 거절했습니다.

일이 끝난 뒤 우리는 감옥이 벌인 이도 저도 아닌 불법 청문회에 대해 감옥, 성 감옥관리국, 사법청에 『정부 정보 공개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들이 감히 답변하지 못하자 우리는 또 성 정부에 『행정심판청구서』를 보냈고 그래야만 사법청의 답변을 독촉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감옥 쪽에 전화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제가 또 민원 제보를 했지만 아무도 감히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전화하는 동시에 저는 현지 정법위의 그 청문회 사회자를 찾아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 사회자는 사실 우리 지역 시 610(방범사무실) 부주임이었습니다. “당신이 사회를 맡았으니 당신이 책임져야 하고 당신이 내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며 내 진상 설명을 들어야 해요.” 청문회 이후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그를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입구 당직자가 안에 전화를 걸더니 그가 출장 갔다고 알려줬고, 나중에는 또 회의에 갔다고 했습니다. 반년 동안 적어도 20여 차례 찾았지만 한 번도 감히 나와서 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매번 이런저런 일로 없었습니다. 더 나중에는 그가 퇴직했으니 다시는 찾지 말라고 직접 알려줬습니다. 제가 누가 그의 업무를 인계받았냐며 그 사람 나오라고 했더니 인계가 없다고 했고,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아무도 그의 일을 인계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원래 그들은 사악한 기세가 하늘을 찔러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결국 흙투성이가 되어 모두가 기피하는 망신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 방범사무실 주임 B는 현장에서 감옥을 돕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13. 온갖 수단으로 위협하던 감옥이 끊임없이 애원하며 합의서 서명을 요구하다

저는 끊임없이 성 감옥관리국, 성 사법청을 찾아갔습니다. 나타나는 각종 상황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문서를 끊임없이 보냈습니다.

2024년 5월, 감옥에 새로 부임한 부감옥장 L이 왔는데, 이전에 감옥이 회피하고 무시하던 태도를 싹 바꾸어 매우 친절하게 굴며 입만 열면 아주머니라며 살갑게 굴었습니다. 여러 차례 먼저 저를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제가 감옥에 갈 때마다 가족으로서 감옥장을 만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명혜망의 교류 체험을 봐도 감옥장을 만난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기간에 이 부감옥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감옥은 제가 사는 도시에서 수백 km 떨어져 있는데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세 번이나 왔습니다. 한번은 이틀 전에 만났는데 또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귀찮아서 만나기 싫어 오지 말라고, 볼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괜찮다며 아주머니 볼일 보시라고, 다 보시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다 좋다고 했습니다. 제가 외출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어디 가냐고 물었고, 저는 X현에 있는 아픈 친구를 보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아마 휴대폰을 검색해본 듯 즉시 말했습니다. “X현도 아주머니네 ××시 아닙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X현으로 아주머니를 찾아가겠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남이 아픈데 당신들 경찰복 입은 한 무리가 남의 집에 가면 뭐가 됩니까? 괜히 그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요.”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친구분 집 근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제가 안 된다고, 아주 늦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아무리 늦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또 사법청을 찾아갔는데 그때 이미 오후였습니다. 뜻밖에도 밤이 꽤 늦었는데 그 부감옥장이 또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제가 만나지 않겠다고, 집에 없고 ××시(성도)에 왔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뜻밖에도 그는 자기도 방금 ××시(성도)에 도착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법청이 감옥에 전화해서 그가 이쪽으로 달려온 것 같은데, 끊임없이 위치를 알려달라며 만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대화 끝에 그는 에둘러서 남편 시신을 조속히 화장하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는 검찰원을 찾아가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았고 반드시 먼저 해결해줘야 화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위에서 그에게 빨리 해결하라고 큰 압력을 가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해온 과정이 비록 당시에는 별 효과가 없어 보였지만 바른 힘이 끊임없이 축적되어, 그때가 되니 사악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여러 번 저를 찾아와도 타협이 안 되고 위선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자 그는 사악한 수법을 썼습니다. 그들은 제 큰딸이 아버지의 사망으로 우울증이 심해져 일할 수 없게 된 것을 알기에 감히 더는 큰딸을 괴롭히지 못하고, 제 둘째 딸 직장으로 찾아갔으며 또 둘째 사위, 큰 사위를 찾아갔는데 그들은 모두 공무원입니다. 시신을 빨리 화장하지 않으면 장래에 영향이 있고 업무에 지장이 있으며 아이 진학에도 영향받을 수 있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자 정말 둘째 사위가 겁을 먹었습니다. 둘째 사위는 사당(邪黨) 사상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았고 당시 부직(副職)에서 정직(正職)으로 승진하려던 참이었으며, 외손녀도 몇 년 뒤면 대입 시험을 치르기에 이런 중대한 이익이 걸린 일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불안하고 매우 초조해졌습니다. 원래 부부 사이가 좋았는데 그가 집에 와서 둘째 딸과 상의하길, 아이가 영향받지 않게 하려면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둘째 딸도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려 제게 그들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너희들 두려워 마라. 내가 너희와 인연을 끊으마.” 둘째 딸은 급히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럼 내가 다시 내 집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이제 너희와 같이 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와 혼자 산다는 결정을 내린 것도 제 심리상의 중대한 돌파였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구매 판매 업무를 했고 관리자여서 자주 출장 가고 회의하느라 밥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때 두 아이가 어렸는데 제가 식당에 수표 한 장을 맡겨두면 아이들이 식당 가서 밥을 먹고 나중에 결제했습니다. 나중에 남편이 일이 바쁘지 않아 밥을 했기에 습관이 됐습니다. 은퇴해서 시간이 있어도 밥을 하지 않았고 다 남편이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잡혀간 뒤 저는 둘째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도 제 의존심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밥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고 독립적으로 생활했으며, 아이들도 때때로 먹을 것을 보내주고 장을 봐서 보내줬습니다. 지금은 이미 적응해서 느낌이 아주 좋고 아주 자유로우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방해받지 않습니다.

부감옥장 L이 끊임없이 저를 찾아오는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 지역 정법위를 찾아가 전 성의 힘을 동원해 제 남편 일을 해결하겠다고 떠벌렸습니다. 끊임없이 제 아이들 직장에 가서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저와 수련생이 만나는 데도 미행하고 옆에서 엿듣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해 우리 지역 수련생에게도 큰 압력을 주었습니다. 수련생 집에도 각자 일이 있고 또 다른 사람 구하는 일을 해야 했기에, 안전을 위해 우리는 예전처럼 만나서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타자를 칠 줄 몰라 아주 힘들게 겨우 몇 글자 편지만 보낼 수 있었습니다.

L이 계속 찾아오자 저는 좀 귀찮아졌고 게다가 수련생과 제때 연락하기 불편해져서, 한동안 저는 감옥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딸이 일반인 변호사를 한 명 구해 감옥과 이야기하게 했습니다.

L이 자주 아이들 직장에 찾아가자 아이들 직장 사람들도 그들을 귀찮아했고, L을 보면 바로 당사자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도 차츰 두려운 마음이 없어져 모두 감옥과 얼굴을 붉히며, 이 일은 어머니가 결정하는 것이니 자기들은 전혀 설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L은 더는 감히 거만하게 굴지 못했습니다. 방법이 없었기에 말투도 공손해졌습니다.

이렇게 또 한동안 시간이 지나 저는 또 성도(省都)로 가서 사법국, 감옥관리국, 성 정부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제 남편이 사망한 지 3년이 됐는데 아직 냉동돼 있어요. 당신들이 해결해주지 않으면 베이징에 갈 겁니다.” 성 정부 직원이 말했습니다. “베이징엔 가지 마세요. 그럼 영향이 좋지 않으니 우리 내부 일은 우리가 해결합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법청이 먼저 제게 연락해왔고 감옥관리국에 제 문서에 답변하라고 독촉했습니다. 그들이 이전에 제가 EMS로 보낸 문서를 반송했기에 이번에 다시 한 부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또 제가 선임한 변호사에게도 먼저 연락했습니다.

올해 어느 날 변호사가 전화해서 감옥 쪽이 돈을 더 주겠다고 약속했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데 동의하냐고 물었습니다. 동의하면 합의서를 써서 확정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만나는 데 동의했습니다.

며칠 뒤 감옥 부감옥장과 그의 상사 M 처장, 그리고 다른 감옥 직원들과 변호사가 다 왔습니다.

저는 그들을 데리고 둘째 딸 직장으로 가서 근무 중인 둘째 딸을 찾았고 우리는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우리에게 매우 공손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반드시 30만 위안이어야 하고 적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L은 애원하는 말투로 제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우린 정말 이렇게 많이 배상해본 적이 없어요. 감옥에선 늘 사람이 죽는데 우린 보통 6~7천 위안이면 해결했어요. 지금 남은 건 두 집뿐이라 해결하기 힘든데 아주머니네가 가장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눈빛과 말투를 보니 확실히 해결하고 싶어 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19.8만 위안을 내겠다고 하며, 이렇게 많이 낸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했고, 이 19.8만 위안마저도 반드시 두 번에 나눠서 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안 된다고 하자 L 등은 조심스럽게 애원하는 말투로 말했는데, 혹시라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제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고 우리가 약속해도 돈이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따라온 감옥장의 상사 M 처장이 말했습니다. “어르신이 만족하지 않으시니 우리가 최대한 어르신을 만족시켜 드려야죠. 돈이 안 나오니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방법을 생각해서 변호사 사무실에 5만을 주고 변호사 사무실이 감옥에 영수증을 끊게 합시다. 변호사 사무실이 수임료를 떼고 남은 돈을 아주머니께 드리는 걸로요.”

저는 여전히 안 된다고 했습니다. M 처장이 또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만족하지 않으시는데 다른 방법이 없네요.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모금해서 제가 1천을 내고 이번 제 출장 수당은 안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부감옥장 L에게 “자네가 5천을 모으게”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자네가 2천을 모으게”라고 했습니다. 부감옥장은 제 면전에서 자기 아내에게 전화해 은행 가서 돈 찾아 보내라고까지 했습니다. 몇 사람은 또 끊임없이 제게 동의해달라고 빌었고, 심지어 계속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제게 빌었습니다.

당시 제가 보기에도 그들이 좀 불쌍해 보였고 나중에 ‘됐다, 그냥 들어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배상금이 우리 요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이 회유와 강압을 병행하고 가족을 공갈 협박하다가 결국 방법이 없어 재차 애원하는 것을 보았고, 또 그들도 제가 알리는 진상을 들었기에 저는 더는 고집하지 않고 합의서 서명에 동의했습니다.

이때 둘째 딸이 말했습니다. “3년 전 아버지가 계실 때 아버지를 빨리 감옥 밖 병원으로 보내 진료받게 하려고 우리가 감옥에 1만 위안을 부쳐줬는데, 당신들은 나중에 얼마를 쓰고 얼마가 남았는지 아무 말도 없이 유야무야했어요. 이 돈을 당신들이 돌려줘야 해요.” 감옥 부감옥장은 처리하기 곤란하다며 치료에 썼다고 했습니다. 둘째 딸이 말했습니다. “그건 안 돼요. 제 휴대폰에 다 기록돼 있어요. 우리가 대납한 건데 안 주면 우리가 계속 고소하길 바라는 건가요?”

부감옥장은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잠시 후 그가 돌아와 말했습니다. “우리 책임자와 이야기됐습니다. 그 1만 위안도 드리는 걸로요.”

그 후 감옥은 시신을 화장했고 남편은 장례를 잘 치렀습니다.

지난 몇 년간 직접 성 감옥, 공안청, 성 감옥관리국, 성 정부, 성 부녀연합회, 본 시 정법위, 공안국, 법원, 사법국, 중급법원, 기율검사위 등을 찾아가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며 제가 느낀 가장 큰 체험은, 상대방이 매우 사납게 나올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신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면 정말로 신의 강력하고 비할 바 없는 에너지를 연결해 악을 진압할 수 있고, 이로써 대법의 위엄 있는 일면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비는 양심이 아직 남아있는 자를 구원할 수 있고, 양심이 완전히 먼지에 뒤덮인 사람에게는 위엄이 작용을 일으킵니다.

감옥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저는 남편의 병보석을 받아주지 않은 현지 사법국, 우리집 사유 재산을 압수한 공안국, 그리고 남편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린 법원, 연금을 압류한 사회보장국 등 관련자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들을 찾는 목적은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 법률을 통해 진상을 알리고, 그들이 하루빨리 파룬궁 진상을 이해하여 박해에 가담하지 않게 함으로써 자신과 가족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동시에 대법 또한 위엄이 있어 대법제자를 박해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상 이야기한 것은 비록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저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고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입니다. 만약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加持)가 없었다면, 대법의 인도가 없었다면, 현지 수련생들의 다방면의 유력한 도움이 없었다면, 공의포럼 법률 전문가 수련생의 노고 어린 지도가 없었다면 저 혼자서는 걸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전체 협력의 결과이며, 이는 오직 대법 중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숭고한 경지입니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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