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국 대법제자
[명혜망]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매체에서 수련하며 체득한 점을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매체에 입문하다
저는 2007년에 법을 얻은 제자입니다. 매체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림책을 만드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수련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2023년, 제 주변 환경이 갑작스럽게 바뀌면서 매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동료들처럼 매체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업을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고, 당시 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었기에 매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체된 수련의 길 위에서, 사부님께서 저를 ‘방할하듯’ 인도하신 곳이 바로 매체였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매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는 애니메이션 상품이 있었기에 ‘그림이라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매체에서 저는 영상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영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제가 갑자기 그 세계에 뛰어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충격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수련의 길 또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퇴로가 없는 수련의 길
매체에 들어올 때 저는 어떠한 사람마음도 모두 내려놓고 반드시 수련해 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기기를 다룰 줄 모르고 감각도 부족한 저는 매일이 충격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치 원시인이 현대문명 앞에서 쪼그라들고 제압당하는 것과도 같이 매일매일 좌절감을 느끼며 소침해지고 작아지며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법에서 자신을 바로잡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퇴로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매 하루가 치열한 정사대전(正邪大戰)이었습니다.
법을 얻기 전, 저는 나름 잘나가던 그림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매체에서의 첫해는 마치 제 안의 모든 것이 붕괴되는 듯했습니다. 15년의 수련 경험도 모두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충격을 감당하느라 마음과 몸은 늘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실신하듯이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법공부를 해도 법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눈은 갈수록 침침해졌습니다. 심신이 무거우니 늘 피곤하고 졸렸습니다.
법공부를 할 수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안으로 찾기였습니다. 관념의 충격, 소침함, 외로움, 적막감, 수치심, 모욕감, 질투심, 쟁투심, 오만함, 허영심, 과시심, 그리고 명(名)과 시시때때로 터져 나오는 한과 원망심까지, 마음의 어둠을 제거하며 법에서 자신을 바로잡았습니다. 다행히 매체에 들어오기 전 착실한 법공부가 있었기에 그 기억을 붙잡고 심성을 제고하며 걸어왔습니다.
어느 날 부서의 한 선임이 저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은 경력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1년이 다 되었는데 뭘 보여주신 겁니까? 하물며 그림 한 장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경력직이면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거구나?’ 저는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어 너무 죄송했습니다. 회사의 고충도 이해되어서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오히려 고요한 물처럼 물결 하나 일지 않았습니다. 저를 실증하기 위해서였다면 저는 매체에 들어올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명이 있어 여기에 배치된 거라면 그건 우주의 뿌리에 박혀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 무엇을 할 재간이 못 되고 무엇을 할 사명조차 배치되지 않았다면 제가 아무리 용을 써도 그건 얻을 수 없습니다. 얻고 안 얻고는 제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매체를 위해 일을 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입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더욱더 자신을 내려놓았고 어떠한 사람 마음도 키우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일은 저를 촉진하고 채찍질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제 생명과도 같았던 그림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과 원망심이 다 녹아 없어졌고, 사람마음을 많이 제거해 든든하고 순정한 우리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매체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힘들었기에 웃을 수 있는 이 길이 사부님께서 제게 마련해주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인식하게 됩니다.
한때 스스로 희망이 없는 제자라 느끼다
작년까지는 그럭저럭 법으로 자신을 잘 컨트롤하며 그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나왔지만, 매체 3년 차에 들어선 올해부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일에 대한 압력도 더욱 커져서 하루 종일 머리에 일이 꽉 차있었습니다. 심성을 더 제고하라고 배치해주신 것이라 생각했지만, 법공부 상태가 좋지 못해 너무 괴로웠습니다.
눈앞에 늘 안개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어 법을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회사에서 하는 아침 법공부 시간에 저는 거의 매일 졸았습니다. 그 소중한 시간임에도 자주 졸고 자주 잡념이 들어와 아주 오랜 시간 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억나는 법도 별로 없어서 그때 저는 스스로 희망이 없는 제자라 느꼈습니다.
그날도 눈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가방을 챙겨 퇴근했습니다. 전철 안에서 법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두어 문장을 읽기도 전에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졸음이 너무 깊어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늘 그렇게 대법책만 펼치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마음에 힘이 또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수련에서 낙오자가 된 것처럼 법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제가 너무 한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법을 너무 읽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사부님께서 어느 설법에서인가 추위에 관해 말씀하신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네가 나를 졸리게 하면, 나를 졸게 만드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너에게 돌려주겠다!’는 염두를 내보냈습니다. 1~2초 후 갑자기 ‘쏴~’ 하며 졸음이 제 공간장에서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법공부를 하는데 법이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에 들어왔고, 너무나 오랜만에 법광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기에) 희망이 없는 제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수련생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교류문장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법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사부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함께 끝까지 노력합시다!!
상태를 조절하다
우리 부서는 영상을 제작하는 부서이자 마케팅부서와 함께 회사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부서입니다. 속인 고객을 상대하다 보니 심성을 건드리는 일도 많고 각자 담당해야 할 영상 수량도 많아 일의 강도가 센 편입니다. 그래서 장기레이스 속에서 자신의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 아주 관건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매체에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온 후에도 선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힘을 조절하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전력으로 일하다가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힘을 조절하세요. 장기전으로 이 일을 대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조절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년, 3년 일하다 보니 정말 힘을 조절하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버텨낼 수 없음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맡은 프로젝트 중 많은 부분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제작인데, 그 업무는 노동집약적인 일이라 늘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합니다. 휴일 없이 밤늦게까지 손을 놀리고 놀려야 일정을 겨우 맞출 수 있습니다. 올해는 몸과 마음이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상반기에 시작한 한 프로젝트는 4개월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밤늦도록 일을 했고 새벽까지도 연장해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4개월 동안 영상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서있다 보니 몸의 원기, 진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다간 제 명에 못 살겠다’는 생각이 절로 새어 나왔습니다. 순간 놀라서 ‘멸(滅)!’을 염했지만 정말 쉽지 않는 나날이었습니다.
저는 션윈 무용수들이 장기레이스를 펼치면서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정신적 신체적 한계에 부딪히는 나날 속에서 법공부하고 연공하며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며 매일매일 자신을 승화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가 찾고 싶은 길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는 일을 경험하면서 저는 이 일에서 해탈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에겐 천지개벽일 정도로 수련에서 엄청난 진전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않고 회사 내 조용한 곳에서 제5장 공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내내 넘치는 활력으로 일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늘 아침에 동공, 밤에는 정공을 하는데, 점심시간에는 늘 피곤에 겨워 2, 30분을 자야 했습니다. 그렇게 잠을 자야 오후에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지 않아도 힘이 넘치는 자신을 발견하며 뭔가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로부터 저는 점심시간에 늘 정공을 했습니다. 점심시간은 하루 일과 중 거의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쉬는 시간을 연공으로 채웠더니 오히려 에너지가 증강되어 돌아왔습니다. 연공 후 머리가 맑아져 오후 시간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내면에서부터 힘이 넘쳐 나오는 것을 느꼈고, 내심에서부터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제 공간장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일상에 쉬는 시간이 없어도 힘이 넘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저는 제 몸이 불괴(不壞)의 신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테스트하듯이 집 계단을 한 번 뛰어 올라가 봤습니다. 저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5층입니다. 5층까지 뛰었는데, 정말 깃털을 단 듯 단숨에 가볍게 뛰어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2달이 지난 지금 저는 여전히 늘 힘이 넘치고 있습니다. 잠시 쉬어가고 싶은 그 마음 하나가, 반본귀진(返本歸眞)의 길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 사람의 마음 하나가 결국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질긴 닻줄이 되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환골탈태하듯 다시 수련에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환경 속에서 희망을 얻다
올해 들어 영상사업국을 떠나는 동료들이 많아졌습니다. 저 역시 마음이 힘들고 울적할 때가 많았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되뇌곤 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속인의 영상만 만들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사상염두가 속인 쪽으로 점점 휩쓸려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정법 노정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고,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의문도 들고, 일은 고되고, 희망은 보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뒤엉켜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명혜 라디오를 듣다가 가슴 깊이 파고드는 한 구절이 제 마음을 환히 밝혀 주었습니다. 사부님을 수행하며 따라다니던 수련생들이 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시며 사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따라다니면 바로 고생입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수련생들처럼 사부님을 직접 따라다니며 수행할 수 있었다면, 매일 라면을 먹는 일을 과연 고생이라 여겼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부님 곁에서 사부님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지고무상의 영광이자 무한한 기쁨, 행복이라고 여겼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고생이란 글자가 위대하고 휘황한 법보(法寶)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저는 아래 법을 읽으며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적막 속에서 묵묵히 수련하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수련이든 모두 이러한 고험을 겪게 되며, 모두 이러한 길을 걷게 마련이다. 오랜 기간 꾸준히 견지해 오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것이 비로소 진짜 정진이다.”(각지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부패한 물질 제거
9월 초, 새로 시작하는 스톱모션 작품의 연출 방향을 찾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기괴하지만 새롭고 독특한 분위기의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선임께 “이리 와서 이것 좀 보세요” 하고 보여드렸더니, 잠시 보시곤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 이런 건 안 보셨으면 좋겠어요. 현대의 변이된 거잖아요.”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 새로움은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해 반은 수긍하고 반은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임이 한마디 더 보탰습니다. “일할 때 법의 기점에 서야 하고 사심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다 보면 탈이 나기도 합니다. 아시죠?” “아, 네.” 순간 제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 않았던 저는 매 스토리마다 어떻게 연출을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 많은 영상을 둘러보며 연출법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움직이는 걸 보니, 제 마음 안에 뭔가 있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진지하게 안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본 영상은 다소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영상이 특별히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의 새로움에 눈이 끌렸던 것은 아마도 제 안에 ‘새로움 자체’를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요소를 가져와 보다 참신하고 흥미로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또 누가 나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거부감, 쟁투심,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 강대한 자아에 대한 집착, 가아(假我)에 미혹된 점 등을 찾았습니다.
그날 저녁 법공부 중에 “우리 진정한 수련은 양성(良性)적인 정보를 중시하며 우주특성에 동화함을 중시하는 것인데”(전법륜) 이 구절이 마음에 들어오며, 이 일의 엄숙성을 다시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며칠 후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이 사상업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저는 제 공간장 안에 아주 많은 부패한 물질들이 있음을 자각했고, 이 영상 건의 근본 문제, 어둡고 우울한 것과의 연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 안의 어두운 것들이 그 영상의 어두운 것들과 대응하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며칠 후 정월대보름 설법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 썩어빠진 귀신, 그것들은 당신들이 난잡해지는 것을 좋아하며, 구세력은 이 일체를 그 자신들의 배치에 따라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저는 난귀가 제 사상의 빈틈을 타고 들어와 제 공간장에 그런 부패한 물질을 쏟아부으며 저를 교란하고 있음을 인식했고, 구세력은 제가 사(私)를 중심으로 빙빙 돌게 하여 구우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일체의 것을 배치하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서 저에게 이런 갈등을 만들어주신 사부님의 안배에 깊이 감사드렸고, 그것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신 선임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창조적인 것은 도덕의 훈도와 전통문화의 기초 위에서 건립되어야 합니다. 무분별하게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상은 현대의 난잡한 예술을 이끄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고 공산악령의 그것과 동류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의 영상은 전통가치와 미학을 수호하면서 진선인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의 기점에서 바른 마음과 바른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인식을 제고했습니다.
법으로 일체를 가늠해야 한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금빛 찬란한 깎아지를 듯 높이 솟아오른 금산이 제 앞에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에둘러 산으로 올라가는 굽은 길이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꿈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저 높이 솟은 산은 날듯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힘이 없다. 수련을 못해서 에너지와 힘이 달린다. 일단 에둘러 둘러둘러 올라가다가 힘이 생기면 그때에 날겠다.’ 이런 생각으로 산길을 비척비척 걸어 올라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션윈 공연에서 한 장수는 사부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뛰어내려가 수련 성취했습니다. 한때 저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수련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속인의 관념에 둘러싸여 있는지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목욕통을 청소하라고 시킨 일화에서 한순간 제 머리가 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제자는 석가모니가 시킨 일을 자신의 관념으로 대하며 석가모니가 요구한 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딱 여기까지만 인식하고 더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수련생의 문장에서 큰 계발을 받았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는 석가모니의 요구보다도 자신의 이해와 인식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자신을 제일 위로 놓은 것이고 자신을 근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인식하고 제 수련이 늘 제자리에서 맴맴 돌며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원인, 제 수련의 번거로움과 어려움의 뿌리를 찾은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일 속에 매몰되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을 잊고 있었습니다. 일이라는 가상에 미혹되어 속인의 관념이 우위를 차지하여 자신의 인식과 상태를 고수했습니다.
이를테면 새벽 연공을 위해 1시 발정념을 미리 하고 잠자리에 든다든가 등등, 법에서의 요구를 자신의 상태에 맞게 절충하고 자신의 인식을 근본으로 삼았고, 법의 요구를 자신 아래에 두었습니다. 자신을 수호했기 때문에 법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념도 없이 법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개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대법(大法)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당신의 신통을 중요한 위치에 놓거나 또는 개오한 사람이 당신 자신의 이런 인식 저런 인식이 옳다고 여기며, 심지어 당신 자신이 대단하여 대법(大法)을 능가한다고 여긴다면, 당신은 이미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곧 위험하며, 갈수록 더 잘못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정말로 번거로워지고 수련이 헛되는데, 잘못하면 떨어져 내려가서 수련이 헛되고 만다.”(전법륜)
이 깨달음 이후 저는 1시 발정념을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고 모든 일을 법으로 대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법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법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오던 졸음도 달아나 층층첩첩 천문이 열리듯 법이 제 천체대궁 속으로 녹아들 듯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의식(主意識)이 맑고 수련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법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일하려는 마음이 강해져서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면 법이 문을 닫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눈앞을 가리던 안개 층도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법의 글자가 여러 겹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글자의 형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고도(苦度)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희망이 없던 제자에서 희망이 있는 제자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법
애니메이션이 노동집약적인 산물이므로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결과물을 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저는 노동으로 이 일을 돌파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매체에 들어오기 전, 다른 항목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이 잘 안 풀리면 무조건 법공부를 했고, 법에서 일깨움을 받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 단련해왔어도 이 애니메이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림의 수량이 워낙 많고 애니메이터나 화가가 우리가 요구하는 그림의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 그 그림들의 품질을 높이는 과정이 아주 매우 힘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그 그림들을 다 수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시간이 필요했고 그 모든 과정은 결국 노동으로 채워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공부를 하면서 저는 이 일 역시 철저히 법에서 제고해야 함을 인식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법 수련은 사실 무엇이든 다 수련해낼 수 있는 것으로 수련생이 무엇이 필요하면 바로 그것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주의 근본법이기 때문이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
저는 제 사상에 국한이 있어 법을 편파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주 중에서 있어야 할 것은 다 대법에서 오는 것임을! 우리가 만드는 영상 하나, 우리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하나도 다 법에서 오고 법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제가 자신의 힘으로 이 영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소롭고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법에서 다 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법에서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법이 이루어 준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림 표준을 내려놓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마음, 화가들의 그림이 못 그려올까 봐 걱정하는 마음, 품질을 올리는 과정에서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 등등. 저는 자신을 수호하려는 이 마음들을 내려놓고 제 마음을 우주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
제가 영상을 제작하면서 가장 내려놓지 못하는 부분은 그림에 대한 표준입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올해부터 제가 주로 담당하는 영역이 되었는데, 속으로 저는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대부분의 일은 바르게 처리할 힘이 있는데, 오직 유독 그림 앞에서는 예민해져, 마음이 크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프로젝트에서 외부 화가들은 제 수련에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스케치하는 화가분은 레이아웃과 세밀한 부분까지 다 그려주었음에도 선을 제대로 따지 못하고 인물도 너무 못 그렸습니다. 그러나 선의로 그를 이해하고 그가 못하는 부분은 제가 감당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타격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추석 연휴 내내 그가 그린 그림을 수정하며, 그 애니메이터가 앞으로 나아가며 일정에 맞춰 스케치할 수 있게 힘있게 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후반에 들어서자 그의 그림이 갑자기 환골탈태하듯이 눈에 띄게 이뻐지며 사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의로 사람을 대하면 그림도 따라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근본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채색 단계에 들어서자 또 다른 고험이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존중하며 함께 일해온 화가분께 몇 가지 피드백을 드렸더니 갑자기 붓을 내던지며 “더 이상 못 하겠네”하며 나가버리셨습니다.
빠듯한 일정에 참으로 심란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내심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겉으로는 차분하게 그에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걸 그림이라고 그려왔을까, 이런 걸 어디다 쓰란 말이야!’ 하며 화를 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화가의 부족함보다 제 마음이 더 흉했습니다. 저는 깊이 반성했습니다. 악념을 제거하고 진심으로 사과드리려 했지만 화가분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네 통의 문자를 남긴 끝에 그 화가분과 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긴 통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말씀드렸습니다. “작가님의 그림이 잘못된 게 아니라, 평면 그림과 영상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에 장르적인 차이가 있어 조율이 필요할 뿐인데, 제가 그 차이를 잘 설명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작가님과 이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작가님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며 진심 어린 마음으로 작가분과 소통했습니다.
그 후 화가분은 마음을 돌려 저와 다시 협력했고, 그분이 마음을 다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저는 전심전력으로 그분을 도와드렸습니다. 타격은 계속 감당해야 했지만 탄연하게 감당했습니다. 완성된 그림의 품질은 아주 좋아졌고 그림에서는 진선인의 아름다움과 순박함이 은은하게 배어 나왔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그토록 화를 냈던 이유는 사람을 존중하기보다 작품의 완성도를 더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품질에 대한 집착이 사람에 대한 존중을 가린 것입니다. 저는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함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마침 사부님의 신경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오히려 전통을 잊었고, 전통 문화 속에서 사람의 선량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 존경, 상호 사랑, 상호 도움 등 아름다운 일체와 전통적인 인간관계를 잊었다.”[션윈(神韻)은 왜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저는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앞으로는 정말 어린 양처럼 착해지겠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다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감당 능력을 이해하고 그들의 몫에 대하여 감사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여한 모든 이들의 협력의 결과물로 영상이 나올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 속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내 속에 그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일로 인해 한 방면의 뛰어난 사람일수록, 무엇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재능이 있는 사람일수록 화를 잘 내고, 예민하며, 상대를 쉽게 무시하고 다투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고 저 자신을 아주 우아한 자리에 올려놓았었지만, 이번에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들이 제 거울이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뉴질랜드법회 설법)란 이 법을 가슴에 새기려고 합니다.
진금(眞金)을 제련하다
매체 이 환경은 사람을 용련하여 진금으로 제련하는 너무나 좋은 환경입니다. 자신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 이 긴박한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기 어렵고 버티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여정에서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고, 오로지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생명으로 자신을 전환해야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 노군(老君)의 연단로(煉丹爐)와 같은 환경이 없었다면 저는 이렇게 제고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함께한 동료들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 길을 걸어 지나오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저를 감싸주고 일깨워주었던 동료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립니다. 간고한 환경 속에서 혼자라면 감당 못했을 일들을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함께 울고 웃으며 이 길을 지나왔습니다.
지난 2년 7개월 동안 지나온 모든 발걸음은 정말 잊지 못할 시간이 되어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의 역사가 되어주신 동료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것을 부족한 제자를 위해 안배해주시고 보살펴주신 자비로우신 사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이 저의 수련체득입니다.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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