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대법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행복

글/ 중국 청년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한 청년 대법제자입니다. 지난 수련의 길을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즐거움과 행복은 아름답고도 짧았으며, 풍파를 겪은 후의 저는 점차 강해졌습니다. 조금씩 집착을 포기하고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에서 시기마다 저는 왜 수련하는지, 그리고 수련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이해를 갖게 됐습니다. 제가 대법 수련 속에서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께서 저의 수련을 독려해 주시고 수련생들이 제게 도움과 타이름을 주신 덕분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위대하신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아래에 저는 저의 수련 길에서의 성장 과정을 간단히 여러분과 공유하려 합니다.

어린 시절 법을 얻은 인연

1998년 여름 저는 어머니를 따라 법을 얻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주변에서 수련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들은 모두 저를 칭찬하며 찬사를 보내셨는데, ‘어린 대법제자’라는 칭호는 저의 영광이었습니다. 기억하건대 그때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법공부 팀에 갈 때마다 모두 저에게 먼저 읽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얼굴이 붉어지거나 가끔 말을 더듬어 멋쩍었지만, 점차 저는 긴장하지 않게 됐고 법 읽는 것도 유창해졌습니다. 많은 경우 어른들은 “이 아이는 참 좋네요!”라며 칭찬하셨고, 저는 점차 체면심, 허영심 그리고 질투심을 나타났습니다. 일찍이 한 수련생 형이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나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형이 떠나던 날 법공부 시간에 모두 저에게 그 형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매우 기뻤지만 나중에 법을 읽을 때 저는 모두가 저를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빛이 가려졌고, 작은 저는 구석에 앉아 무시당하는 느낌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당시 그 형이 이 자리에 앉았을 때는 모두 그 형을 향해 앉았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 저는 어머니께 이 일을 이야기하며 화를 냈는데, 어머니는 웃으며 저에게 “이건 질투심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얼굴이 붉어졌고 비록 입으로는 여전히 조금 불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머니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을 얻고 수련하기 전에 저는 항상 병마에 시달렸고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거나 주사를 맞을 때도 저는 씩씩한 척했고, 그래야 어머니와 간호사들이 저를 칭찬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약을 먹을 때도 한번에 여러 가지 약을 먹어야 했는데, 저는 보통 그것들을 저의 작은 손에 모아 한 번에 입안에 머금은 후 물을 크게 마셔 단숨에 다 삼켜버리곤 했습니다. 수련 후 사부님께서 저의 몸을 정화해주셨고, 몇 번 열이 매우 심하게 났을 때 어머니가 가끔 저에게 약을 먹을지 물으시면 저는 고개를 저으며 “저는 먹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것은 좋은 일이며 저에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이미 책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듯이, 이것은 몸을 정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는 다음 날이면 열이 내렸고 정상적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이후로 병에 거의 걸리지 않았고, 혹시라도 불편해도 금방 회복됐습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께서 박해당하시던 나날

1999년 중공 악당이 대법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자 갑자기 저희는 합법적인 수련 환경을 잃었습니다. 어머니의 억눌린 심정을 보자 저는 매우 슬펐습니다. 비록 저는 이 일들이 발생한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명확히는 몰랐지만, 저는 많은 것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억하건대 어머니가 경찰에게 납치되던 첫날, 저는 문 앞에 서서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저에게 “걱정 마라, 엄마는 곧 돌아올 거다”라고 한 말씀만 기억합니다. 저는 울고 싶었지만 울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보고 걱정하실까 봐 두려웠기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에게 당부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작은 손을 흔들며 어머니께 “엄마 잘 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이 어머니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텅 빈 집으로 돌아오자, 순간 고독감에 휩싸여 저는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별은 단지 시작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저의 두 번째 이별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그해는 정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가 저를 공안국에서 집으로 데려오셨는데, 저는 어머니가 그들에 의해 어디에 갇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집으로 데려오신 후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고 저를 꾸짖지도 않으셨으며, 단지 제가 배고픈지, 뭐가 먹고 싶은지 물으셨을 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두운 불빛 아래서 간단히 정리하고 깊이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갔지만 저를 맞이한 것은 담임선생님, 교도주임, 그리고 정치교도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저를 불러 심문하고 협박했습니다. 저는 울면서 마음속으로 가장 쓰기 싫은 것을 썼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사부님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해요. 저는 처음에 어머니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시기 저는 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느꼈고, 심문받을 때마다 매일 방과 후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 심문받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나중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단지 매일 밤 잠잘 때 몰래 울며 저 자신을 꼬집었고, 이런 벌이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반항적으로 변했습니다. 수련 환경이 없었고 마음도 침체돼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으며 거의 매일 다투었고, 심지어 다투는 것이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을 발산할 수 있어 꽤 편안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매우 인자하시고 포용적이셨으며, 매번 싸우고 나면 저를 달래 밥을 먹이셨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아버지께서는 일하러 나가셨고, 저는 고모 집에서 얹혀살게 됐는데 고모집의 남동생이 저를 자주 괴롭혔습니다. 고모가 저에게 준 사탕을 남동생이 그냥 빼앗고, 저에게 밥을 못 먹게 하고 심한 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고모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고 심지어 여러 번 저는 고모가 이런 행동을 묵인하는 것 같았고, 어쩌면 그들이 제가 자기 집에서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떠나셨고 어머니는 불법 구금돼 제게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더는 참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그들이 저를 괴롭혀요. 저는 더는 참기 싫어요. 저는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니 어쩌면 다시는 수련할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요.’ 저는 이미 포기할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이 저에게 주는 고통이 사실은 저의 죄업을 덜어주는 것임을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고 고모에게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은 채 친구 집에 가서 친구에게 고모 가족이 저에게 한 ‘학대’에 대해 토로했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저를 매우 동정해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고모는 다른 친구를 통해 제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남동생을 데리고 저를 찾아와 심지어 친구 어머니에게 무릎까지 꿇었지만, 당시 제 눈에는 고모네가 가식적으로 보였습니다. 마지막에 친구 어머니가 고모의 애걸을 더는 보지 못하고 저를 고모와 함께 집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저는 더는 남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씩씩거렸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이 일 이후로 저의 형편은 눈에 띄게 호전됐고, 남동생도 더는 저를 괴롭히지 않았으며, 저는 남동생의 숙제를 가르쳐주고 함께 놀아주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남동생을 편애하셨지만 점차 저는 그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의도적으로 어머니나 수련과 관련된 모든 것을 피했고,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얼굴을 들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가끔 우리집으로 돌아와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집 안은 너무 춥고 습했으며, 잡초가 무성한 뜰과 온 집안의 먼지, 그리고 황폐한 집을 보며 멍하니 집 소파에 앉아 바닥만 쳐다보곤 했습니다. 가끔 울음이 멎거나 너무 추워 얼어붙을 때가 되어서야 고모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방과 후 길을 걸을 때 가끔 한 수련생 할머니를 보았는데, 할머니는 저에게 미소 지으며 격려하는 말을 해주셨고, 저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한번은 한 수련생 아주머니가 사람을 시켜 50위안을 보내주셨는데 저는 그것을 받고 눈물이 순간 흘러내렸고, 이것으로 저는 오래전에 잊었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저는 수련생 아주머니를 찾아가 울었고 저는 돈을 기어코 돌려드렸습니다.

친구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하다

2년 후 저는 중학생이 됐고 어머니도 불법 강제노동을 마치셨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온 날은 이미 밤중이어서 저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를 보는 순간 저는 얼어붙었고, 몽롱한 사이 이것이 진짜인지 의심했습니다. 저는 “엄마” 하고 외치고는 어머니 품에 안겨 소리 없이 통곡했는데, 마치 이 2년 동안의 모든 억울함과 고집이 눈물로 변해 쏟아져 나오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많은 진상을 이야기해주셨고, 법공부를 통해 저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온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경찰의 잦은 괴롭힘으로 어머니는 떠돌이 생활을 하시게 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하러 나가셨고, 저는 학교에 기숙했으며 주말에는 때로 고모 집으로 가거나 학교에 남아있었습니다.

중학생 시기 저는 매우 자율적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했고, 청소 당번을 맡아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조장이 많은 일을 더 시켜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는 늘 자신에게 ‘나는 대법제자이다. 나는 사부님의 제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한 친구가 저에게 “너는 어째서 늘 싱글벙글하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때까지 제가 그 시기 심성 관리를 비교적 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한번은 이전에 늘 저를 겨냥하던 한 친구가 갑자기 “너는 왜 그렇게 좋니?”라고 말해 저는 매우 의외였습니다. 저는 그가 늘 저를 탐탁치 않게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사부님께서 저를 격려해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저의 방식으로 친구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어떤 친구는 이해했고 어떤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어떤 친구는 조롱했고 어떤 친구는 동정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졸업 전 저는 반 친구 거의 모두에게 축원하는 말과 진상을 썼습니다. 비록 글자 수가 한정됐지만, 저는 상대방에게 희망을 남기고 싶었고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길 잃고 헤매다 깨닫고 돌아오다

대학에 와서 저는 순조롭게 현지 수련생들과 연락이 닿았는데, 저는 사부님께서 저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매우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점차 해이해졌습니다. 저는 수련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정진하여 실질적으로 수련하지 못했습니다. 기억하건대, 입학하던 날 저는 기숙사에 비교적 일찍 도착했기에 침대를 먼저 고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저기 고르다가 결국 문에 가까운 침대를 선택했습니다. 침대 맞은편은 캐비닛이었고, 저의 침대 머리맡도 캐비닛이어서 저를 잘 가릴 수 있었습니다. 커튼을 치면 저는 책을 읽고 가부좌할 수 있었고, 가끔은 틈을 내어 동공(動功)을 연마하기도 했습니다. 매주 주말이면 저는 수련생 집에 가서 수련생들과 함께 법공부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진지하게 법공부를 하지 않고 그저 형식만 따랐으며, 수련에 대한 이해도 표면에 머물렀습니다. 속인들이 생각하는 용기로 어떤 진상 알리는 일들을 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수련과 안으로 찾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점차 안락을 구하는 마음이 점점 심해져 늘 핑계를 대고 법공부에 참여하지 않게 됐고, 두려움이 커져 진상 알리는 것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택했던 그 침대 자리는 정말 너무 추워서 겨울에는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이라 밤에는 두꺼운 교과서와 외투를 이불 위에 덮어야 했고, 낮에는 솜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책을 봐야 했습니다. 마지막 반년 동안 저는 침대를 바꾸었는데, 비록 따뜻했지만 자신만의 책 읽고 가부좌하는 환경을 잃었습니다. 수련생들은 제가 뒤처질까 봐 주말마다 초청해주셨기에 제가 수련생 집에 갈 때마다 수련생 아주머니는 열렬히 환대해 주시고 저와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한 후 맛있는 음식을 해 주시고 수련에 대해 교류해 주셨습니다. 저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서 밥 먹을 때도 저는 가장 싼 밥만 먹었습니다. 저의 식욕은 왕성해 평소에 많이 먹는 편이었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 매번 밥을 반 공기만 먹어 배가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련생 집에 가는 것이 식사를 개선하는 날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공통된 대화가 별로 없어 수련생들의 열정이 따뜻하게 느껴졌지만, 저는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해 죄책감을 느꼈고, 또 수련생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점차 수련생 집을 가지 않게 됐습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저는 법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수련이 매우 해이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수련인이라는 것을 알기에 직장에서는 선물을 거절했고, 상사가 저에게 주는 리베이트도 받지 않았으며, 저는 저의 주변 동료 몇 명에게 진상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진상 이야기도 하지 않고 속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 빠졌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죄책감과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수련의 씨앗은 이미 저의 마음 깊은 곳에 깊이 심어져 있었고,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저를 계속 지켜보셨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가까운 수련생들이 연락해 와 때때로 저에게 속세에 빠져 길을 잃지 말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을 알았지만, 저는 대법 책을 붙잡고 마음을 가라앉혀 읽을 수 없었습니다. 수련생들과 함께하는 수련 환경에서 벗어나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 저는 환경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승진했지만, 방대한 업무량 때문에 식사 시간을 놓치는 일이 잦았고, 이에 따라 저의 몸에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나 허리와 골반에 통증이 생겼습니다. 직장 생활 1년여 만에 체중이 약 5kg 이상 빠져 사람이 매우 야위어 보였습니다. 그 시절 저는 자주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시간을 낭비하며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구나.’ 저는 사부님의 《2013년 미국서부국제법회 설법》을 손으로 다 베껴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수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착실한 수련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도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저는 적합한 직업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저임금 직업에 종사했고, 적합한 직업을 찾기 위해 매일 휴대폰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을 썼습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 저의 많은 에너지를 그곳에 쏟았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빨리 고치지 못해 아침에 새벽 연공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심성이 좋지 않아 온종일 일에만 몰두하고 마음이 고요하지 않아 연공 시 졸거나 발정념할 때 손바닥이 넘어지는 등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법공부를 하지 않아 한 번에 오래 법공부를 하려니 지루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상태는 저와 어머니의 갈등을 날마다 심화시켰습니다. 저희는 자주 다투었는데, 속인 마음 때문에 저는 억울함을 느꼈고 어머니가 왜 저를 포용하지 못하시는지 책망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모든 희생을 속인적인 정(情)으로 저울질했고, 어머니가 변했다고 여겼으며, 어머니가 오직 제 수련만 중시하고 저 자신은 중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으로 찾지 않았기에 마음에 쌓였던 원망과 억울함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많은 경우 저는 어머니의 분노를 무시하거나 어머니를 피해 달아났고, 저는 왜 어머니가 이렇게 ‘가혹’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저희는 여러 번 교류했지만 갈등이 터져 나올 때는 여전히 격렬했습니다. 이런 나날이 여러 해 동안 지속됐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치 두꺼운 얼음과 눈처럼 끊임없이 법공부와 심성 수련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렸습니다. 작년 초 어머니가 밖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몸을 움직이기 불편해지셨습니다. 당시 저는 직업이 없어 집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하실까 봐 저는 자진해서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하루는 집안일을 하는데 원망심이 갑자기 생겨났습니다. ‘나는 왜 여기서 집안일을 해야 하지? 저기 누구는 나가서 노는데!’ 저는 순간 이것이 원망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마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법제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머니는 단순한 내 어머니가 아니라 함께 수련하는 수련생이며, 지금 어머니는 내 도움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 원망하는 생각이 사라졌고, 마음은 매우 평온해졌습니다. 한번은 갑자기 ‘나는 오랫동안 놀러 나가지 못했네’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즉시 이것이 억울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 억울함 뒤에는 안락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놀러 나가지 못한들 어떠한가. 이것이 안락을 구하는 마음이다. 나는 수련인이니 이런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수련해 버려야 할 것이니 지금 바로 없애버리자.’ 이렇게 저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 기간 동안 법공부를 하면서 저는 점차 저의 직업이 순조롭지 않은 이유가 강렬한 이익심과 체면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 아래 어머니는 금세 혼자 걸을 수 있게 돼 더는 저의 보살핌이 필요 없게 됐고,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저에게도 적합한 직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직업을 맡을 때 한 분명한 생각이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일을 잘해야 한다. 이것이 내 수련 환경이다.’ 이전에는 직장에서 저 자신을 안으로 찾으며 수련하는 것을 하지 않고, 속인의 일을 일로만 여겨 직장에서의 암투나 이익에 대해 불평하고, 게다가 입을 수련하지 않아 뒤에서 사람을 험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직업만큼은 반드시 소중히 여기고 잘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제 저와 어머니는 서로 격려하며 끊임없이 법공부를 통해 모두 저희 자신의 문제를 찾았고, 선의로 서로에게 일깨워 주며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원망심을 수련해 없앱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신 “한 사람ㆍ한 생명을 만드는 데에 극미시하에서 이미 그의 특정한 생명 성분과 그의 본질이 구성돼 있다”는 말씀을 읽었을 때, 저는 제가 바로 법을 위해 온 생명임을 이해했습니다. 저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정말로 많은 귀중한 수련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법공부를 하면서 사부님의 법리가 끊임없이 제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모든 불평, 억울함, 원한, 질투, 게으름이 모두 속인의 아름다운 삶을 탐하는 마음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수련 중 겪었던 많은 난(難)은 저의 강렬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 사악한 요소들이 틈을 타 중생을 구하는 일에 많은 손실을 초래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가정 환경과 직장 환경에서 만난 갈등에 대해 안으로 찾지 않고 마음을 수련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밖으로만 보려 했기에 갈등이 격화됐습니다. 끊임없이 저의 성장을 보살피시며, 위대한 불법(佛法)으로 제자가 세속의 아득한 안개를 벗어나 집으로 가는 법선(法船)에 올라 제 온몸의 오물을 씻어내고 신성한 사명을 부여해 주신,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하신 은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수련 체험으로, 경지가 한정돼 있으니 부적절한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5/4922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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