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헤이룽장(黑龍江)성 대법제자
[명혜망] 1999년 7월 21일 오후 법공부 장소에서, 수련생들은 하얼빈의 파룬궁수련생 4명이 7월 20일에 공안에 끌려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현지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의 법공부 장소와 연공 장소를 여러 차례 교란한 행위가 헌법의 ‘공민은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해, 사태가 악화돼 사람들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헤이룽장성 정부에 상황을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미 날이 저물었기에 수련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밤에 출발했다. 그날 밤은 계속 비가 내렸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기차역으로 모여들었다. 매표소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물론 일반인도 포함해) 역 안을 가득 메웠다. 표가 30~40장 팔렸을 때, 매표소는 ‘행동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표 판매를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수련생은 승합차나 다른 교통수단을 공동 임대해 성 정부 소재지로 향했다. 간단히 말해 수련생들은 각기 다른 교통수단으로 사방에서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었고 비는 더욱 거세져 어쩔 수 없이 플랫폼에 머물러야 했다. 다행히 플랫폼의 비 가림막이 넓고 길어서 사람들은 소리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들리는 것은 빗물이 비 가림막을 때리는 소리뿐이었고, 이어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지붕 가장자리를 따라 폭포수처럼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비는 끊임없이 흐르면서 마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이튿날 새벽 3시가 넘어 날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 수련생들은 플랫폼을 나와 가랑비를 맞으며 성 정부로 가는 길을 향해 걸었다. 걸어갈수록 인파는 점점 불어나 넓은 물결을 이뤘다. 앞에서는 (줄의)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는 (줄의) 꼬리가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도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직 발걸음 소리만 들려 장엄하면서도 무거운 느낌을 줬다.
1999년 7월 22일 새벽 3~4시경, 헤이룽장성 각지에서 온 파룬궁수련생들은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인도를 비우고 자발적으로 줄을 서서 헤이룽장성 정부 문 앞에 섰다. 이후 성 정부 청사 옥상에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평화롭고 고요한 수련생들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또 경찰들이 줄지어 정부 정문에서 뛰쳐나와 완전무장한 채 파룬궁 대열 맞은편에 섰고, 동시에 녹화 차량이 파룬궁 대열 앞에서 붉은 등을 깜박이며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이런 태세를 보니 정부가 수련생들의 합리적인 요구, 즉 “파룬궁 서적 출판을 허용하고, 너그러운 연공 환경을 보장하며, 붙잡힌 수련생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룬궁수련생들이 맞이한 것은 청원 접수 담당자가 아니라 완전무장한 폭동 진압 경찰과 무장경찰이었다. 뒤이어 확성기에서 “15분 이내에 즉시 이곳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경고가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했고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아침 7시쯤 승합차 한 대가 와서 멈추더니 차에서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황급히 내렸다. 거리가 멀고 사람들에게 가려져 군인인지 소방관인지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대열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경찰에 붙잡혀 성 정부 청사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후 무장경찰은 성 정부 문 앞에 있던 파룬궁수련생들을 강제로 끌어 대형버스에 태웠고, 타지 않으려 하면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수련생이 타지 않고 버티면 두 명이 달려들어 억지로 들어 올려 버스에 내던졌다. 어떤 사람은 신발 굽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날 하얼빈의 모든 대형버스는 운행이 전면 중단된 채 파룬궁수련생들을 실어 나르는 데만 사용됐다. 수련생들은 차례차례 버스에 가득 태워져 하얼빈시 둥리(動力) 스포츠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파룬궁수련생들의 선한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어떤 폭력이나 분노도 없이 일체가 평화로웠던 파룬궁수련생들의 진정한 모습을 직접 보았다. 수련생들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곧 따라다녔다. 먼 길을 걸었음에도 그들은 시종일관 파룬궁수련생들 곁에 있었는데, 만약 경찰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얼굴을 마주했을 것이다. 경기장 밖에 도착한 사람들은 파룬궁수련생들이 밤새 쉬지 못하고 아침도 굶고 물도 마시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너도나도 찐빵과 생수를 가져다줬다. 사람이 많아 가까운 곳의 물건이 다 팔리자 어떤 일반인은 자발적으로 먼 곳까지 달려가서 사 오기도 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돈을 주며 거듭 고마움을 표했고 서로 양보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지만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도 질서가 매우 정연했다.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 없이 조용히 책을 보거나 법공부, 연공을 했다. 사람이 많아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 자발적으로 길을 비켜주어 편히 지나다닐 수 있었다. 화장실은 시종일관 깨끗하게 유지됐고, 일부 수련생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빈 병, 음식 봉지, 종잇조각 등 쓰레기를 주워 청결을 유지했다.
경기장은 빈틈없이 꽉 찼다. 신기하게도 날이 개어 사람이 많아 후텁지근하다고 느낄 때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순식간에 시원해졌다. 하늘이 흐려져 비가 내릴 때도 경기장 안에는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고, 오직 경기장 밖에만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때로는 비가 꽤 세차게 내렸는데, 비가 급하게 쏟아질 때 그 물줄기는 약간 폭포 같아서 정말 손오공이 수렴동에 머무는 것 같았다.
정오가 지나자 경기장 내에서 청원하러 온 모든 파룬궁수련생이 다시 강제로 대형버스에 태워졌다. 이들은 여러 학교로 분산돼 각 교실에서 영상을 찍고 등록 서류를 작성해야 했다. 그런 다음 등록 서류에 적힌 주소에 따라 각 지역 공안이 파룬궁수련생들을 현지로 데려가 처리했다. 그 뒤에 반복적인 박해와 조사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고, 당연히 구금되거나 강제노동을 당하거나 박해받아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룬궁수련생들은 원망이나 후회가 없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확고하게 중생을 구하는 길을 걷고 있으며, 역사적인 큰 서약을 이루기 위해 멈춘 적이 없다. 그들은 미래가 반드시 아름다울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관념을 바꿔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것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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