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명혜망](랴오닝성 대법제자) 저는 1997년에 득법한 대법제자로 20여 년의 수련 과정에서 대법은 제가 가정과 이웃, 직장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데 지침이 됐습니다. 아래에 제 수련 과정의 몇 가지 작은 이야기를 적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집도 우리집만큼 화목하지는 않아”

제가 젊었을 때 아버지의 급여가 낮았고 어머니는 가도사무실의 57공장에서 일하셨는데, 나중에 공장이 망해 어머니는 일자리를 잃었고 퇴직금도 없었습니다. 저는 자주 경제적으로 부모님을 도와드렸는데 사회에 전기냉장고가 막 나왔을 때 부모님께 하나를 사드렸고, 전기밥솥이 고장 나면 사서 갖다 드렸으며, 냄비와 그릇, 국자, 대야 등 생활용품을 모두 사드렸고 때로는 돈도 드렸습니다. 부모님은 두 칸 방에 사셨는데 저는 또 시공팀을 찾아 마당에 작은 방 두 칸을 지어드렸습니다. 작은 여동생이 부모님의 부동산 등기를 해드렸습니다. 나중에 철거 후 재정착할 때 부모님댁 주택 면적이 많이 늘어나 부모님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제 남편이 또 아버지의 근속연수를 이어주는 것을 도와 아버지의 급여도 올랐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10여만 위안을 모았고 저더러 은행에 데려가 저축하게 했습니다. 만기가 되면 저는 다시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재예치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딸의 아이를 1년 넘게 돌보게 돼 작은 여동생이 아버지의 돈을 관리하게 됐습니다. 제가 돌아온 후 아버지는 제게 작은 여동생에게 6만 위안을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가 아버지댁에 있었는데 작은 여동생도 그 자리에 있었고 아버지는 3만 위안을 꺼내 저에게 주셨지만 저는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빠와 언니, 동생이 여럿이니 제가 몰래 이 돈을 받을 수 없고 저는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탐내거나 차지하지 않으며 양심을 속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여동생은 제가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아버지 손에서 돈을 가져가며 “제가 먼저 언니를 위해 보관하고 있을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작은 여동생에게 “나는 받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떻게 처리하든지 마음대로 해”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느 날 작은 여동생과 제부, 그리고 제가 아버지댁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저에게 당신의 방으로 가자고 하셨고 제가 아버지를 따라 막 방에 들어갔는데 작은 여동생과 제부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도 그들을 피하지 않고 다시 2만 위안을 꺼내 저에게 주시며 “이 2만 위안은 네가 먼저 보관하고 있다가 내가 돈을 쓸 때 다시 내게 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방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저에게 돈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저는 “받지 않을게요. 작은 여동생이 대신 보관하게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작은 여동생이 또 가져갔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늘 제게 무언가 빚진 것 같고, 제가 이 가정을 위해 더 많이 희생했다고 말씀하시며 또 유언장을 작성해 저에게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산을 제게 조금 더 주고 싶다고 말씀하시며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가정이 불화하게 되잖아요. 저는 연공하는 사람이라 더 받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유언장을 찢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또 유언장을 작성하셨고 제가 꼭 잘 보관하라고 하셨는데 제가 받지 않자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일단 받았다가 나중에 역시 찢어버렸습니다.

제 오빠와 올케언니도 그 몇 년간 다른 지역에서 손주를 돌보고 있었고 때로 돌아와 며칠 머물며 아버지를 보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거의 90세였고 집안일은 저희 자매 셋이 했습니다. 작은 여동생 부부가 아버지댁에 와서 아버지와 함께 머물렀고 저와 둘째 여동생은 낮에 아버지를 모시며 밥을 해드렸고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오빠가 때로 돌아오면 작은 여동생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집은 단층집이라 겨울에 추워지면 난방을 끄고 다시 난방을 하려면 힘들었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오빠가 돌아오지 못하게 했고 집안이 매우 좋으며 작은 여동생이 있어서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오빠는 조금 두려워졌고 집을 모두 작은 여동생이 차지할까 봐 걱정돼 돌아왔습니다.

오빠가 돌아온 후 아버지의 저축을 조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축이 없고 다 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작은 여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작은 여동생은 다음 날 예금증서 하나를 가져다주며 이 2만 위안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빠는 예금증서가 작은 여동생 이름으로 돼 있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오빠는 제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 돈은 쟤 것이 되는 거 아냐?”라고 말하며 “아버지 급여가 한 달에 5000위안인데 이것밖에 모으지 못했어?”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오빠는 떠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계속 머물렀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급여를 받아 살림을 했고 그들이 조금 쓰면 조금씩 주셨습니다. 어느 날 둘째 여동생도 제게 “아버지가 많은 돈을 저축하지 않으셨나? 어떻게 다 없어졌어? 작은 여동생이 다 가져간 거 아냐?”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작은 여동생 부부가 이 2년간 아버지를 모시느라 꽤 열심히 했어. 그녀가 받을 것이면 받는 거지. 아버지가 기뻐하시면 되고 우리도 다투지 말자. 그녀도 이미 50세가 넘었는데 아직 아파트에 살지 못하고 있고 형편도 좋지 않으니 조금 받으면 받는 거지”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여동생이 “그것도 그렇네”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90세가 넘으시자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아지셨고 서서히 스스로를 돌보실 수 없게 됐습니다. 오빠는 우리 자매들에게 교대로 아버지를 모시게 했는데 한 사람당 하루 밤낮씩이었고 지금부터 오빠가 아버지를 봉양하며 집과 아버지의 급여는 모두 오빠가 갖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각자에게 몇만 위안씩 주되, 전제는 우리 모두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며 협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아버지도 동의하셨습니다.

2022년 말 코로나가 풀렸을 때 두 동생과 오빠 부부가 모두 양성(확진)이 됐습니다. 올케언니는 며칠간 누워 있었고 오빠는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기침을 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저만 양성이 되지 않아서 저는 그곳에서 버티며 아버지와 오빠 부부를 모셨는데 이 방에 한 명이 누워 있고 저 방에 두 명이 누워 있었으며, 저는 거실에서 밤낮으로 한 달 내내 그렇게 지냈습니다.

오빠는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부부는 죽을 뻔했어”라고 말했습니다. 올케언니도 “넌 정말 대단해. 정말 온갖 독에 물들지 않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곧 명절이 다가와 저는 또 그들이 명절 준비를 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누운 채로 3년이 흘렀고 종이기저귀를 차고 한 입 먹여드리면 한 입 드시고 밤에는 자주 소리를 지르시며 잠깐 뒤집어달라고 하시다가 또 가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이 3년 동안 아버지는 욕창이 전혀 생기지 않았고 아버지 방에도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몇몇 자녀들은 모두 최선을 다했고 오빠는 자랑스럽게 “어느 집도 우리집만큼 화목하지는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평온하게 돌아가신 후 오빠는 정말로 협의서대로 이행했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이야기

2022년 말 우리 단지의 한 이웃은 장사를 하는데 그녀가 제 차고를 이용해 약간의 물건을 보관하고 싶어 했고 한 달 정도 사용하겠다며 500위안을 줬습니다. 그녀가 다 사용한 후 저는 창고가 하얗게 칠해진 것을 보고 500위안을 그녀에게 돌려줬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얗게 칠하는 데도 돈이 드는데 제가 이중으로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냥 대충 한 번 칠한 것으로 많은 돈이 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연공하는 사람으로 이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강제로 그녀에게 넣어줬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함께 살아도 같이 일해보지 않으면 정말 누가 어떤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때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저를 꽤 예의 바르게 대했습니다.

우리 이 아파트 단지는 20여 년이 됐는데 관리사무실이 없고 지하실에도 문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문이 고장 나지 않아서 괜찮았는데 나중에 단지 문이 고장 나자 자주 사람들이 지하실에 소변을 보러 와서 여름에는 너무 냄새가 났지만 아무도 문을 달자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지의 절반 정도 입주민들이 모두 이사 가고 일부는 임대를 주고 일부는 임대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2층의 조금 젊은 입주민과 상의해 그에게 사람을 찾아 문을 달아달라고 했고 제가 돈을 낼 테니 그가 주선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찾아 문을 용접하겠다고 말했고 저는 400위안을 꺼내며 “충분해요? 모자라면 제가 더 보탤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충분하다며 문을 달았습니다. 곧 환경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우리 단지는 총 10가구인데 상주하는 집은 우리 4~5가구뿐이고 나머지는 임대한 집이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 문값은 아무도 주지 않았고 저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 단지 계단의 전기료는 항상 제가 집집마다 수금해서 전력회사에 가서 냈는데 이 단지에서 저는 나이가 가장 많아 거의 70세였고 젊은 사람이 수금하기를 바랐지만 젊은이들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으며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연한 일은 없고 함께 사는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그렇다면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전기료를 수금하면 보통 2년치입니다. 이 몇 년간 임대한 사람이 있는데 어떤 이는 1년만 살다가 이사 가고 전기료를 수금하러 가면 그는 곧 이사할 것이라며 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곳은 사람이 살지 않아 아무도 내지 않습니다. 한 번 수금하면 보통 200위안 정도로 거의 2년치입니다. 올해는 입주민이 적어서 각 가구가 조금 더 많이 내야 했습니다. 100위안 단위로 맞춰야 하는데 너무 잔돈은 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내지 않아 10위안이나 20위안이 부족하면 제가 보충했습니다.

4층의 한 가구는 임대해서 사는데 농촌에서 왔으며 손주가 도시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전기료를 낸 후 어느 날 저를 만나 자기 집 문 앞의 불이 켜지지 않는다며 제게 사람을 찾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관리사무소가 없으니 스스로 하라고 말하고 저도 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 그녀는 저를 보고 또 말했는데 그녀의 아들이 고치지 못했다며 혹시 선로가 고장 난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우리는 모두 같은 전선을 쓰고 제 집 문 앞의 불은 켜지니 선로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또 말했는데 아이가 우리가 돈을 냈으니 당연히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낸 것은 전기료이지 수리비를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저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고 정말 쓸데없는 일에 관여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또 생각해보니 수련인에게는 우연한 일이 없고 그녀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 온 것도 쉽지 않으며, 아이의 학업 때문에 그녀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들이 주는 약간의 돈으로 생활하며 손주의 학업을 돌봤고, 도시에서는 지출이 크며 무엇을 하든 돈을 써야 하는데 농촌처럼 채소를 먹는 데 돈을 쓸 필요가 없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이 단지의 전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집에 있던 감응 전구 하나를 가져가 그분께 드리며 설명했습니다. “만약 소켓이 고장 났다면, 비싸고 번거로운 감응용 소켓으로 다시 바꾸지 마세요. 2~3위안짜리 일반 소켓으로 교체하고 제가 드리는 이 감응 전구를 끼우면 됩니다. 앞으로는 전구가 고장 나도 전구만 갈아 끼우면 되니 훨씬 간편할 거예요. 이건 제가 전구를 살 때 주인이 알려준 방법이에요.” 그녀는 제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정말 몰랐던 사실이라고 거듭 고마워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우리 직장은 1997년에 철거하고 건물을 지으면서 직원들이 실업했습니다. 건물을 다 짓고 난 후 직장 상사는 누구든지 판매대를 사고 싶으면 돈을 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판매대 두 칸을 샀습니다. 판매대를 나누던 날, 서기와 부장 두 상사는 직원들이 먼저 고르고 남은 것을 자신들이 다시 갖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당시 매우 감동받았고 정말 높은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인들도 이렇게 하는데 저는 연공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먼저 고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모두가 고른 후 두 칸을 가졌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 두 상사는 미리 문 입구에 있는 가장 좋은 네 칸의 판매대를 남겨뒀는데 한 사람당 두 칸씩이었습니다. 제 두 칸은 위치가 그다지 좋지 않아 임대료를 높게 받지 못했고 두 칸이 다른 사람의 한 칸 임대료만큼도 되지 않았습니다.

제 판매대를 임대한 사람은 10여 년간 일하다가 그만두고 양도하려고 했습니다. 제 판매대 옆 사람은 그 몇 년간 장사가 꽤 잘됐던 것을 보고 양도받았습니다. 그 몇 년간 다른 사람들의 판매대는 모두 임대료를 올렸고 저도 그녀에게 1000위안을 올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올리지 못하게 해서 저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연말에 그녀는 맥주 한 상자와 음료 한 상자를 우리집으로 가져와 제가 그녀를 적지 않게 돌봐줬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당신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빠(제 남편을 가리킴)에게 주는 거예요”라며 놓고 떠났습니다.

10여 년간 제 판매대의 임대료는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 판매대를 임대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임대료를 내려달라고 했습니다(판매대 계약 만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 몇 년간 코로나와 사람들이 모두 인터넷으로 쇼핑을 해서 실제 매장이 그다지 좋지 않고 효과도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게의 판매대 중에서 제 임대료가 가장 낮고 게다가 제 임대료는 작년에 딸에게 줬는데 딸에게 아이가 둘이고 형편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 1년을 주고 가격을 내리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으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같은 직장 동료에게 전화해 그녀의 판매대 한 칸을 1년에 얼마에 임대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한 칸이 1년에 1만여 위안이고 이 몇 년간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듣고 제 두 칸은 그녀의 한 칸 가격밖에 받지 못하는데 그래도 가격을 내리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다른 판매대에서는 가격을 내리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왜 제 판매대만 가격을 내리려고 하는 걸까요? 혹시 제게도 돈에 대한 집착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손해 보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녀도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그녀도 부끄러워서 입을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역시 그녀에게 조금 내려주기로 했습니다. 제 두 칸의 판매대는 1년에 총 1만 4000위안인데 그녀에게 1000위안을 내려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전화해서 그녀에게 알려줬고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계속 감사하다고 말하고 내일 와서 임대료를 받아가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제가 갔을 때 그녀는 제게 그녀 아들도 아이가 둘이고 또 새 집을 샀으며 장사를 하는데 밖에서 외상값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녀도 꽤 난처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작별하며 나왔는데 그녀가 한마디 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정말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원문발표: 2025년 10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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