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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톈진대학교 그 시절을 회상하며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올해 5월 13일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 지 33주년이자 제26회 세계 파룬따파의 날입니다. 신성한 ‘5.13’이 다가오자, 저는 자연스레 대학 시절에 대법을 얻고 수련했던 그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수련생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과 사부님의 위대함, 그리고 파룬따파의 신기함을 목격한 바를 회상해 봅니다.

1. 인연 있는 사람들이 잇따라 찾아오다

1997년 3월 어느 이른 아침, 봄바람이 아직 쌀쌀했지만 햇살은 눈부셨고 톈진(天津)대학교 캠퍼스는 활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아침 운동을 좋아하는 남녀노소가 삼삼오오 모여 몸을 단련하고 있었습니다. 영어교(英語橋) 옆 과학기술관 입구 앞에는 몇몇 선생님처럼 보이는 이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부드럽고 천천히 둥글게 하는 편안한 동작을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달리기와 아침 운동을 즐기던 저도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살펴보게 됐습니다. 그때 저에게 말을 건 사람은 한 분의 퇴직하신 선생님이셨는데, 인상이 자상하시고 매우 친절해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파룬궁은 동작이 간단하고 배우기 쉬우며, 파룬궁을 수련하려면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파룬궁은 병을 제거하고 건강을 증진하며 도덕을 향상할 수 있다며, 이 수련법은 정말 훌륭하니 꼭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이런 부드럽고 아름답고 편안한 수련법이 마음에 들었지만, 학업이 너무 바빠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배우겠다고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계속했지만, 한 가지 새로운 습관이 생겼는데 매일 과학기술관 입구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지켜보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강한 자기장에 이끌리듯, 그곳은 저를 단단히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훗날 제가 법을 배우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속세에서 방황하던 저를 끊임없이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비록 저는 바로 수련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파룬궁을 배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싹튼 후로, 심했던 편두통이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감정도 더 이상 불안정하거나 들뜨지 않았고 성격도 한결 온화해졌으며, 마치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았습니다. 저는 파룬궁이 너무나 신기하다고 느꼈습니다. 그토록 의사를 찾아다니고 약을 써봐도 낫지 않아 저를 죽을 듯이 괴롭히던 편두통이, 바로 그 한 생각을 품은 순간에 나은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쪼개어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과학기술관 입구의 연공 장소에는 제 모습이 함께하게 됐고, 거기에는 활발하고 명랑하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여대생 한 명이 새로 왔습니다.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연공에 빠짐없이 참여했고, 매일 파룬따파의 주요 저작인 ‘전법륜(轉法輪)’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저는 이로써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연공 장소에 나오는 인원이 우후죽순처럼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처음에는 10여 명 정도였던 인원이 수십 명으로 늘더니, 다시 백여 명, 마침내는 3~4백 명에 이르게 됐습니다. 연공에 참여하는 인원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고 특히 젊은 수련생들이 점점 늘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의 학부생, 대학원생, 박사 과정 학생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과학기술관 앞의 넓은 공터는 늘어나는 연공 인원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됐고, 사람들이 많을 때는 도로 가장자리까지 서야 했으며, 심지어 길 건너 작은 호숫가까지 나가기도 했습니다.

옆에서 다른 기공이나 태극권을 수련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대여섯 명 정도였고, 그들 모두는 파룬궁이 이처럼 빠르게 확산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일부는 자신이 원래 수련하던 것을 포기하고 파룬궁 수련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당시 파룬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편리하게 연공할 수 있도록 아침 연공 외에도 저녁 연공 시간이 추가되어 낮에 일하느라 아침에 연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됐습니다. 파룬궁의 자원 보도원들은 매일 같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비로 산 녹음기를 들고 연공 장소에 와서 연공 음악을 틀어주었고, ‘전법륜’ 보서와 사부님의 법을 설하신 녹음테이프, 비디오테이프, 사부님의 기타 설법 등을 가방에 가득 담아 필요한 수련생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힘들다고 하거나 고된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연공 인원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행인들의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보도원들은 새로운 연공 장소를 나누어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외에서 새로 온 수련생들에게는 자신이 사는 집 근처에서 적절한 장소를 찾아 연공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대법이 더 널리 전해지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더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법을 알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내에서 나뉘어 새로 생긴 연공 장소는 류리타이(六里台)에 있는 작은 숲속에 마련됐고, 주로 학생들이 중심이 됐습니다. 한 박사 과정 수련생 선배가 녹음기를 들고 와서 연공을 이끌었고 모두 함께 수련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가을이면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면 눈이 쌓였지만, 먼저 도착한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여 모두가 깨끗한 환경에서 연공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연공 장소에서도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연공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치리타이(七里台)에 거주했기 때문에, 주로 이곳의 저녁 연공에 참여했습니다. 대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우리 젊은 학생들은 외투를 벗고 연공에 참여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우리가 표준적인 연공 동작을 하는 모습과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을 보고, 대법에 대한 존경과 호감을 느끼게 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온몸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은 정말로 몹시 추운 날이었고 바람도 매우 거세게 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외투를 벗고 연공에 임했습니다. 연공 내내 몸은 얼어붙었고 손은 얼어서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야 따뜻한 물로 몸을 녹였고 한참이 지나서야 감각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음속은 따뜻했고 스스로 고생을 겪으며 소업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습니다.

1994년 1월 17일, 사부님께서는 처음으로 톈진(天津)시 허핑(和平)구 젠서(建設)로 인민예당(人民禮堂)에서 설법하시고 파룬궁을 전해주셨습니다. 사실 그해에는 사부님의 일정이 이미 가득 차 있었지만, 톈진 측의 거듭된 요청으로 시간을 쪼개어 1994년 3월 14일, 톈진 바이리탕(八一禮堂)에서 두 번째 설법반을 열어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 두 차례 모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톈진에 온 것은 1994년 여름, 대학에 입학하면서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게 있어 매우 유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행운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톈진에 오셔서 설법하시고 파룬궁을 전해주신 것을 기념하는 대형 연공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웅장하고 장엄한 광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 연공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는 아주 소중한 대법 홍보 활동이 됐습니다. 그 자리를 통해 수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잇따라 법을 얻고 수련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희는 때때로 캠퍼스 밖으로 나가 대법을 알리는 연공 활동도 조직하곤 했습니다. 매일 같이 수많은 사람이 파룬궁 수련에 새롭게 동참했고 캠퍼스와 공원 곳곳에서 연공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2. 대법은 매 사람을 단련시킨다

야외에서의 단체 연공은 우리가 대법을 알리는 주요한 방식이었습니다.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우리가 연공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둘씩 수련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동시에 연공은 우리의 본체(本體)를 변화시키고 있었고 우리 모두 정신이 생기 있고 얼굴에는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으며, 피부는 희고도 불그레한 기운이 돌면서 실제 나이보다 몇 살은 더 젊어 보일 정도였습니다.

파룬궁은 심성 수련을 더욱 중시하기 때문에, 책을 읽고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련을 시작한 사람들이 파룬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대법으로 수련을 인도받을 수 있도록 보도원은 모두 함께 단체로 법을 배우는 시간을 조직했습니다. 치리타이에서는 한 박사 과정 수련생 언니가 기숙사를 관리하는 지도자와 연락해, 우리가 대학원생 활동실에서 단체로 법을 배우고 연공할 수 있도록 신청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법을 배우고 외웠습니다. ‘논어’, ‘홍음’, ‘정진요지’를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숙독하고 암송했으며, 우리의 일사일념과 일언일행을 법으로 지도하고 좋은 사람이 되며 더 좋은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 몇몇 결가부좌를 하기 힘들고 다리 통증이 극심했던 자매들은, 이처럼 서로 배우고 함께 수련하는 환경 속에서 조금씩 가부좌를 돌파해 나갔습니다. 저는 다리가 너무 뻣뻣해서 전혀 포개지지 않았고 한쪽 다리는 하늘 높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때 한 수련생이 말했습니다. “저는 언니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니는 해낼 수 있어요!” 그녀는 제가 오른쪽 다리를 밑에 고정하도록 하고 자기 손으로는 막대기처럼 굳은 제 왼쪽 다리를 위로 올렸습니다. 그렇게 힘을 합치자 마침내 결가부좌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통증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30분쯤 지나자 뼛속까지 아픈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전법륜) 이미 수련하기로 결심한 이상, 사부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끝까지 견뎌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사부님 말씀대로 실천했고 그렇게 해서 저는 기적처럼 처음으로 결가부좌를 한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튿날은 도저히 다리를 결가부좌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극심한 통증은 단 1초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참기 어려웠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리를 올리기만 하면 곧바로 다시 내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미 다리를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반드시 버텨내야 해. 나는 이미 결가부좌로 한 시간을 견뎠던 사람인데, 절대로 뒤로 물러설 수 없어.’ 그래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통증이 아무리 심하고 다리 색이 보랏빛에서 검은색으로 변해도, 저는 절대 다리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맞은편의 자명종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1분, 5분, 10분, 15분……다리 색이 검붉게 변한 수련생들도 보였습니다. 그들도 역시 극심한 통증을 참고 다리를 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그쳤습니다. ‘끝까지 버텨야 해. 반드시 끝까지 견뎌야 해.’ 이를 악물고 한 시간을 버틴 후, 제 두 다리는 이미 감각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저는 다리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고 다시 일어나 걷기까지는 30분도 더 걸렸습니다.

매일 연공 전에, 저희 셋은 항상 30분 먼저 도착해 먼저 다리를 눌러 풀고 주무르고 왔다 갔다 하며 활동을 해준 뒤, 다리를 결가부좌하고 1분 1초를 참아냈습니다. 가부좌가 끝난 후에도 30분 정도 지나야 자리를 떠났습니다. 보름 동안 꾸준히 이렇게 견딘 끝에, 마침내 저는 결가부좌로 한 시간을 편하게 있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가부좌 시간도 조금씩 늘어나 나중에는 3시간 이상 결가부좌 해도 거의 아프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주로 ‘전법륜(轉法輪)’을 통독했습니다. 저는 결가부좌를 한 채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아, 두 손으로 책을 받쳐 들고 온 정신을 집중해 읽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 읽을까 봐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다른 수련생들도 모두 그렇게 진지했고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습니다. 경험을 나누고 교류할 때는, 각자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어떻게 심성을 높였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는, ‘내가 어떤 점이 부족했는가? 어디가 법에 부합하지 않았는가?’, ‘어디에서 타인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만 생각했는가?’라고 돌아보았습니다. 모두가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부족한 점, 잘하지 못한 점을 찾고 있었습니다. 수련생이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는, 서로 선의로 지적해주고 도와주며 제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순정한 수련 환경이 우리 모두를 단련하고 있었습니다.

주말은 수련생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을 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부님을 직접 뵙는 것은 아니고 사부님의 설법 영상 속에서 뵙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류리타이에 사는 남자 대학원생 수련생들은 사비로 텔레비전과 비디오 재생기를 사서 사부님의 설법 영상을 재생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미리 숙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의자를 정리해 배치했습니다. 의자는 대부분 옆 숙소에서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먼저 온 수련생들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고 나중에 온 수련생들은 뒤에 서서 시청했습니다. 텔레비전이 켜지기만 하면,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단 한 마디라도 놓칠까 봐 집중했습니다. 사부님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습니다.

수련생들은 서로 돕고 격려하며 이 소중한 법연(法緣)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수련에 있어서든, 생활 속에서든 항상 서로를 배려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제가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수련생들은 모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생활도 잘 꾸려나가며, 수련도 잘해 나가라고 격려해 주었고, 마음의 부담이나 압박감은 느끼지 말고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는 제게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깊은 따뜻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수련생들은 제가 집에 돌아가서도 법을 잘 배우고 진상을 알리는 데 힘쓸 수 있도록 비디오 재생기를 사 주었습니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그 비디오 재생기는 지금까지도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책임’이자 ‘추억’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저의 수련생들이 떠오르고 우리 수련생들 사이의 하나하나의 소중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이 하나하나의 장면들, 연공 장소에서 수련생들의 음성과 표정, 함께 연공하던 그 평화롭고 조화로운 모습, 법을 배우고 교류하던 때의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 서로를 이해하고 책임졌던 마음들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릅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서로 연락이 끊겼지만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부님의 제자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축복을 보내며 함께했던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가 걸어온 수련의 길을 소중하게 간직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앞으로도 변함없이 정진하며, 착실히 수련하고 파룬따파의 진상을 모든 인연 있는 사람에게 알려 나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바르게 정법 수련의 길을 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명혜망 2025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5년 5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5/28/4952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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