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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소중한 역사의 장면들

글/ 중국 대법제자 연진(緣眞)

[명혜망]

파룬따파를 얻고 널리 알리다

저는 28년 전인 1996년 5월 18일, 당시 51세 나이로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얻었고 현재는 79세입니다. 그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가족들도 제 기공 연마를 지지했고 어떤 기공을 추천해줬습니다. 제가 그 기공을 배우러 가기 전, 한 건물 옆면 벽에 파룬따파 소개글을 보게 됐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보도원을 찾아갔더니 그는 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파룬따파를 소개해줬습니다. 저는 이 법이 너무나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날 바로 이렇게 파룬따파를 얻게 됐습니다.

파룬따파를 얻은 후, 매일 삼림공원에 가서 연공했는데 그때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아이처럼 즐겁게 뛰면서 손을 뻗어 나뭇잎을 만지기도 했습니다. 그저 어디를 보아도 기쁘고 마음 깊이 기쁨이 넘쳤습니다.

지역의 첫 번째 연공장에 점점 더 많은 연공인들이 모여들어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여러 곳으로 나누어 연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텔레비전 방송국 산에 새로운 연공장을 만들었고 저는 전선을 사서 전기를 연결했습니다.(그 당시 플레이어는 전원 플러그가 필요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녹음기를 들고 파룬따파 소개자료와 파룬 깃발을 가지고 연공장으로 갔습니다. 연공도 하고 파룬따파 소개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행복했고 어느새 몸은 병이 없어지고 가뿐해졌습니다.

그 해의 성대했던 장면들을 되돌아보면, 그 정토(淨土)와 마음을 정화시키는 장면들이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1996년 겨울, 야외 경기장에서 첫 대규모 행사를 개최했는데 지역 TV 방송국에서 인터뷰도 했습니다. 파룬따파의 신기한 광경을 일반인들도 목격했습니다. 눈송이 같은 파룬(法輪)이 수련생들과 사람들 위로 내려앉았고 하늘에는 파룬들이 줄지어 빙글빙글 돌며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날 저녁 TV에서 방영한 영상에도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사부님의 광대하고 자비로운 법력은 말로 형용하고 찬송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1997년에는 중심 정거장에서 단체 활동을 했는데 시내 수련생들이 참가했습니다.

1997년에서 1998년 사이,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름에 삼림공원에서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를 개최했는데 4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 한 노수련생이 수련한 후 글자를 알게 되고 건강이 좋아진 신기한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전쟁 시기에 참전했던 한 노인이었는데, 그 노인은 넓은 입구의 병을 들고 왔는데 안에는 며칠 전 배출한 비강암 종양이 담겨 있었습니다. 종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이 변형됐는데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종양이 배출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사부님과 파룬따파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표했습니다.

사실 이 삼림공원은 처음에는 아주 평범한 산이었지만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벽돌을 하나씩 들고 와서 매일 산길을 닦았습니다. 파룬따파가 널리 전해지면서 연공장이 생긴 후 이곳은 정말 복을 받았고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 휴식과 건강, 운동이 결합된 훌륭한 장소가 됐습니다.

1998년 가을, 체육관 실외에서 단체 활동을 했는데 20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1999년 1월, 체육관 실내에서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를 개최했는데, 농장, 구, 현의 수련생들이 모두 왔습니다. 5천여 명이 참가한 이 법회는 인원이 가장 많았고 박해가 전면적으로 시작되기 전 마지막 대규모 법회였습니다. 관람석 좌석이 모자라 수련생들은 자리를 양보하고 경기장 바닥에 앉았으며 통로에는 수련생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신성하고 조화로운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하고 법을 실증하다

1999년, 암흑의 7월이 다가왔고 7월 20일 우리는 지역에서 베이징에 간 첫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몇몇 수련생들과 택시를 타고 갔지만, 이웃 도시에도 도착하기 전에 가로막혔습니다. 이웃 도시 공안국으로 끌려간 후 본 시 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베이징에 갈 수 없었고, 두 번째로 베이징에 갈 때는 한 수련생과 함께 갔고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2000년, 저는 여동생과 함께 세 번째로 베이징에 갔습니다. 당시 전국 각지의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끊임없이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더 많은 이들은 가로막혀 오지 못했습니다.) 같은 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베이징에, 천안문광장에 모였는데 사람들은 남쪽 북쪽 각지에서 왔고 억양도 제각각이었지만 우리가 외친 말은 같았습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우리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

여동생과 저는 베이징에 도착한 첫날, 어느 곳이 현수막을 펼치기에 적합한지 살펴보았고 국기 게양대 주변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이튿날 우리는 천안문광장으로 가서 국기 게양대 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며 소매에서 현수막을 꺼내 높이 들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우리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경찰차가 마치 늑대처럼 우리를 향해 달려왔고 경찰들은 마치 병아리를 잡듯이 우리를 붙잡아 두 손을 뒤로 꺾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가호해주셔서 우리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제 주머니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주머니가 떨어졌어요!”라고 소리쳤더니 그 사람이 정말 주워줬습니다. 경찰들은 우리를 차에 던지듯이 밀어 넣었는데 차 안에서 우리는 진상을 알렸습니다.

경찰에게 납치된 후 우리 자매는 갈라졌는데, 저는 화이베이(懷北)현에, 여동생은 화이라이(懷來)현에 각각 감금됐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대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 장베이(彰北)현으로 이송됐는데 내몽골과 접경을 이루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매우 황량하고 가난했으며 아직도 예전 면 솜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련생들은 이름과 주소를 대면 현지 경찰과 직장, 가족에게 연루되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자아와 생사를 내려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어디로 보내고 어떻게 한다고 위협해도(당시의 인식으로 사악한 박해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음)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머릿속에 가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 이미 사악이 파룬궁수련자들의 장기를 강제로 적출하는 죄악이 시작됐습니다.

파룬따파 수련생들은 버스 10여 대에 실려 정말 엄청난 규모로 줄지어 달렸는데, 앞에는 작은 경찰차 한 대가 길을 열고 뒤에는 구급차 한 대가 따랐습니다. 관광버스 안에는 매 수련생 옆마다 무장경찰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 진상을 알렸습니다. 도중에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창문을 활짝 열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우리 사부님의 명예를 회복하라!”고 외쳤습니다.

비록 우리를 죄수처럼 감시했지만 수련생들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이 법을 얻었다는 것은 매우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부님의 ‘북미 대호수지구법회 설법’이 발표됐는데 저는 제목만 기억할 뿐 이 법을 얻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있던 한 속인이 전부 다 외워서 우리에게 암송해주었습니다.

저는 돈을 신발 깔창 아래와 겨드랑이에 숨겨두어 수색할 때 발각되거나 빼앗기지 않았는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함께 감금된 사람 중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었는데, 본 성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돈을 모두 압수당했습니다. 한 형사범(마야즈)은 매우 사악했는데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벗겨버렸습니다. 저는 필요한 수련생들에게 돈을 나눠줬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다

2000년 이후 당시 환경은 매우 엄혹했는데, 세 명의 수련생이 자료점을 만들었고 나중에 저도 합류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묵묵히 해냈습니다. 저는 수련생들의 소모품과 장비 구매를 도왔습니다. 종이를 사러 갈 때는 한 번에 10상자, 20상자씩 샀고, 차를 빌려 근처까지 실어 나른 뒤 다시 자료점 안으로 운반했습니다. 때로는 기사의 추궁을 받기도 했습니다. 자료를 인쇄하는 것은 한 집 없는 남자 수련생이 했는데, 기계 소음이 매우 커서 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야 했습니다. 6, 7월의 심한 더위에 갇혀있으니 수련생은 견디기 힘들어 반바지 하나만 입고 땀을 비 오듯 흘렸습니다. 자료가 완성되면 재빨리 가져갔습니다.

사악의 박해가 매우 광란적일 때 사악은 우리집 현관에서 감시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한 언니와 함께 나갔는데, 저희 아파트 정문 앞에 한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가 택시를 타자 그 차는 우리 뒤를 따랐습니다. 수련생이 보고는 “저 차가 또 왔네요”라고 했고 저는 “오든 말든 가요”라고 했습니다. 수련생이 “어디로 가죠?”라고 묻자 병원 뒷문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뒷문으로 들어가 어느 계단에서든 나갈 수 있었는데, 우리는 앞쪽으로 나갔습니다. 수련생이 “다리 안 아파요?”라고 하자 저는 “안 아파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미행을 따돌렸습니다.

저는 수련생들과 진상 알리기 팀을 구성해 비정기적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매일 나가서 대면해 진상을 알렸는데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든 못 만나든 매일 나갔습니다. 매일 파룬궁수련자의 세 가지 일을 잘 해냈습니다. 2장 공법을 한 시간, 5장 공법을 두 시간씩 연마했습니다.

순식간에 28년이 지나갔고 사부님의 보호 아래 정법 수련의 길을 착실히 걸어왔습니다.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맞아 제가 목격한 역사의 장면들을 써내려가며 파룬따파가 좋다는 걸 증명합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合十).

(명혜망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 응모작)

 

원문발표: 2024년 5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5/3/4759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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