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법공부팀에 A와 B 부부 수련생이 있었습니다. 2021년 연말 어느 날 밤, 우리 법공부 팀은 이들 부부간의 갈등으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저는 안으로 찾아봤고 A와 논쟁할 때 쟁투심이 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뉴질랜드법회 설법’을 공부하다가 세 가지 문답을 보게 됐고, 법공부팀에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져가서 수련생들에게 제고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읽었습니다. 읽고 있는데 A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한창 집중해 읽고 있어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가 계속 소리치는 것이 들렸으나 저는 다 읽지 못했기에 그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또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신은 이 마음이 정말 강하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그의 일그러진 표정과 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나타나 마음이 고요하지 않았고 ‘이럴 거면 함께 법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앞으로는 가지 말자’라는 염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염두를 즉시 배척했고 단체 법공부는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이니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련생은 모두 훌륭하며 그도 사부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배척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습니다. 제가 불편한 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으로 찾아보니 잠재의식 속에 상대 수련생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수련생이 쓴 ‘신앙의 세계에서 매 한 사람은 모두 당신이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며, 수행의 세계에서 매 한 사람은 모두 당신을 성취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라는 두 마디의 구절을 보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 후 마을 밖 다른 지역 수련생과 함께 나가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돌아오는 길에 수련생과 이 일에 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수련생은 “이건 좋은 일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사부님께서 ‘일거사득(一擧四得)’[1]이라고 말씀하신 법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탁 트이면서 그 순간 내심에서 우러나와 수련생에게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정말 심성이 제고해 올라온 것을 느꼈고 저녁에는 더욱 지체할 수 없이 일찍 도착한 수련생과 이런 기쁨을 서로 나눴습니다.
저는 수련생들에게 “B 수련생이 법공부 장소에 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교란이라고 했고 어떤 수련생은 구체적인 일 속에 빠져서 시비를 논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사람 마음, 집착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수련생들과 교류했습니다.
설이 지나고 며칠 후 A 수련생이 법공부 장소에 왔습니다. 그는 엄숙하고 진지하게 저와 다른 한 수련생의 가장 근본적인 집착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것이야말로 당신 집착이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또 우리를 설득해 이것이 박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려 했습니다.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노동교양소에 그렇게 많은 수련생이 사악한 경찰에 의해 박해를 받으면서도 조건 없이 안으로 찾아 결국 경찰을 감동시켰어요. 하지만 B 수련생은 대법을 수련한 적이 있고 대법이 좋다는 것을 믿는데 이것이 어떻게 박해일 수 있어요? 우리는 안으로 찾아봐야 하고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원용해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점에서 공통된 인식을 갖지 못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원용할 수 없다고 말한 다음 일어나서 갔습니다. 그 후 법공부 장소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저는 장기적으로 몸이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잠이 많아져 보통 대여섯 시간에서, 많게는 여덟아홉 시간까지 잤습니다. 여러 번이나 돌파하고 싶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수련에는 지름길이 없으며 오직 착실한 수련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소에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면서 자신이 현재 있는 층차에서 가능한 한 해야 할 것을 잘해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명리정(名·利·情)을 담담히 보며 세 가지 일을 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장기적으로 신체에 이런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분명히 스스로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집착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다른 지방 수련생과 이 일에 관한 생각을 나눴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집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집착을 알지 못해요. 아무런 집착도 없는 사람이면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없어요. 병업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의 수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무슨 집착도 없다고 하는 데 사실 집착이 매우 심하나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떤 때는 제삼자가 사물을 냉정히 바르게 보는 법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반드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기에 저는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잘 생각해보고 다시 말할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왜 생각까지 해야 하나요?”라고 묻자 그는 “저는 지혜롭게 말해야 하고 정확히 표현해 당신이 기뻐해야 하잖아요. 한꺼번에 말하면 정확하지 않고 표현도 분명하게 하지 못해요. 제가 당신의 모든 집착을 말해줘야 하고 장단점을 똑똑히 잘 분석해 다시 알려줄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고 직접 말해도 돼요. 제가 만약 마음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마침 제게 이 방면의 문제가 있다는 걸 설명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먼저 밥을 먹으러 간다고 말해서 일단 교류는 마무리 짓게 됐습니다.
저는 그 수련생의 말을 진지하게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그가 말한 이 몇 마디 간단한 말은 저를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저는 문득 이 방면에서 자신이 매우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절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슨 문제를 보면 전부 표현했으며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말투와 선한 마음이 부족했기에 때때로 분명히 상대방이 잘되기를 위한 것이지만 상대방은 오히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로 대립됐는데 사실 수많은 일은 자신의 관념과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울러 이 관념과 인식은 법에서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이 아닐까요?
저는 또 제가 지금 있는 학교의 교장과 주임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 이전의 동료이며 나이가 저보다 어립니다. 예전에 저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나중에 제 책임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직접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친근하다고 생각했고 이래야만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교장에게 왁스페이퍼를 사게 하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매우 이상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제야 자신이 호칭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후부터 그를 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임과 예전에 모두 같은 반을 여러 해 가르쳤습니다. 그가 담임 선생님이 된 것은 제가 가르친 덕분입니다. 비록 그는 당시 말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며 수줍어하던 젊은이에서 지금 관록이 넘치는 중년 남성으로 변했지만 몇십 년이 지나도 저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직접 불렀습니다. 스스로 이래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해 동안 가르친 과목은 영어입니다. 저는 서방에서 가족에게도 항상 감사하는 말을 달고 사는 것에 매우 반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공손한 관계는 냉담하고 멀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저는 몇몇 친구를 돕곤 했는데 그들이 고맙다고 말하면 저는 깊은 친구 사이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당(黨: 공산당) 문화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저는 사상적으로 이렇게 매우 많이 변이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오히려 자신이 수련을 괜찮게 했다고 여겼으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저는 자신이 깨달은 집착과 자아를 그 수련생에게 말하자 그는 하하 크게 웃으며 “이 집착인가요. 자아에 대한 집착은 최대의 집착이죠. 스스로 잘난 체하고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데 ‘자아가 좀 커지면[自大一點]’ 무슨 글자가 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냄새 취(臭)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 말 때문에 화내지는 말아요!”라고 말하며 제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이야기는 소동파와 불인(佛印) 선사의 이야기입니다. 소동파는 시를 써서 말했습니다. “팔풍(八風)이 불어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단정히 자금대에 앉아 있구나[八風吹不動, 端坐紫金臺].” 그런데 불인 선사가 이 시를 보자마자 “헛소리(放屁, 방귀 소리)]”라고 말하자 소동파는 매우 화가 나 그를 찾아 논쟁하려고 밤새 배를 저어 불인 선사의 절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열자 한 어린 동자가 종이 한 장을 건넸습니다. 위에는 “팔풍이 불어도 추호의 흔들림 없다더니 제 헛소리란 한마디에 강을 건너오셨군요”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소동파는 곧 깨닫고 몹시 부끄러워 감히 논쟁하지 못하고 수치스러움을 안고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에 본 적이 있었지만, 그가 제게 말하니 정말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제게 부족함을 지적해주면서도 제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로 보아 수련생의 지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잘난 척하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하지 않은 표현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10년 전 중학교에서 가르칠 때 지식 방면에서 논리가 어긋나면, 늘 매우 자신이 있어 했고 그런 잘난 체하는 강한 기세는 상대방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상대방을 갈수록 자신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결국 자신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그 후 끊임없이 정진함에 따라 이 방면에서 매우 매우 담담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난 지 네 번뿐인 다른 지역 수련생도 제 부족함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저는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을까요? 법공부 장소에서 A가 제 이 집착을 지적했을 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자아에 집착한 표현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계속해서 깊이 있게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비록 닫혀서 수련하지만, 심성이 조금씩 제고되면서 신체적인 반응이 매우 강해졌습니다. 사실 사부님께서 제게 더욱더 정진하라고 격려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느낌을 꼭 수련생들과 나누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련생들의 신사신법(信師信法)을 격려해주는 것 같았지만 표현할 때 기쁨을 금치 못한 표정에는 과시심과 환희심이 섞여 있었습니다. 약간의 법리를 깨우칠 때마다 스스로 즐거워했습니다. 법으로 자신을 대조하는 것은 착실한 수련이고 법으로 타인을 가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수련시키는 것입니다. 교류 과정에 자아에 집착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어 흔히 좋은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인식을 상대방에게 강제로 가해 반감이 들게 했으면서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A의 표현은 제 한 면의 거울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표현이 비교적 강렬해 저는 더욱 꺼리게 되어 숨기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줄곧 A의 자아에 대한 집착이 총칼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딱딱한 껍질처럼 매우 엄밀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이런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껍데기를 깨고 나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2개월간 핸드폰에서 매일 아침 알람처럼 늘 ‘당신의 핸드폰은 저장용량이 가득 차서 성능이 저하되오니 불필요한 파일 정리를 권장합니다’라는 알림이 멈췄다는 겁니다. 핸드폰은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매일 모두 일부 쓸데없는 파일을 정리했습니다. 이는 마치 매일 하는 숙제 같았습니다. 자신의 집착을 깨달은 후 핸드폰에 이런 알림이 더는 뜨지 않았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점화에 감사드립니다. 제자는 오성이 매우 낮아 사부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이 몇 년간 저는 줄곧 안으로 찾을 줄 알고 착실히 수련했으며 스스로 빠르게 제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자만하고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물질이 내보낸 자욱한 연기에 불과했습니다. 자아중심적이고 무사무아(無私無我)를 행하지 못했기에 법을 실증할 때 많은 일을 잘하지 못한 원인은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아 보호로 조성된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점화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반드시 이 집착을 정시해 없애도록 노력함으로써 사부님 은혜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층차의 한계가 있어 부족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2년 3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3/15/4396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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