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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바꾸고 사(私)를 닦아 버리다

글/ 캐나다 대법제자

[밍후이왕]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1]

매번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마음이 동경으로 가득 차면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그런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1]의 생명이 되고 싶었습니다! 밍후이왕을 보면 많은 수련생이 일사일념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있어 일에 부닥치면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매일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실속있는 수련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때로 한 가지 마음을 찾아도 그것을 진정으로 닦아 버리지 못했고 이런 집착의 근원도 깊이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일할 때 마음이 움직이면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먼저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법공부를 잘 할 수 있고,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구할 수 있을까…….’

이전에 한동안 법을 외울 때, 어떤 수련생은 느릿느릿 입을 열지 못해 이따금 다른 사람이 일깨워 주어야 했고, 어떤 수련생은 집중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어디까지 외웠는지 모르면서 계속 몇 번 외웠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일에 직면하면 저는 다른 사람처럼 선의로 타인을 이해하는 생각이 먼저 나오지 않고, 속으로 참지 못하고 원망하며 입을 꾹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수련생이 늦게 읽고, 시간을 지체하며, 집중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법을 외우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등의 생각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자각적으로 남을 먼저 걱정하고 먼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명백해진 일면은 돌파하고 싶었지만, 실질적인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번 매체 법회 심득원고를 통해 많은 수련생이 일사일념에서 무조건 안으로 찾고 거리낌 없이 사심을 닦은 수련체험을 들으면서 적잖이 도움 되었습니다. 그들의 항상 남을 위하고 정체(整體)를 위하는 마음은 실속있게 수련하는 면에서 자신의 격차를 보게 하였고, 또 법이 요구하는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경지와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부가 법을 전함과 동시에 신우주(新宇宙)도 건립되고 있는데, 사람을 구하는 과정 중에서 신우주도 끊임없이 생명으로 충실해지고 있다.”[2] “수련은 사람 마음을 보는 것이지, 당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보는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이 제고하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수련은 개인을 본다.”[2]

저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매일 열심히 진상을 말하고 삼퇴를 권유하며 사람을 구한다고 여기지만, 착실하게 수련하는 문제에서 제고하지 않고 깊이 숨겨진 집착과 사심을 닦아 버리지 않는다면 신우주 무사무아(無私無我)의 표준에 미치지 못할 것인데, 만약 장래에 진상을 알고 삼퇴한 생명이 내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갈 곳이 없다면, 그럼 내가 매일 바삐 보낸다 해도 결국 중생을 구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착실하게 닦지 않는다니, 사실 매우 엄숙한 일입니다!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역병이 전 세계로 확산돼 사람을 구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는 일 못지않게 시급한 것은 빨리 일사일념에서 실속있게 자신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1. 자신을 돌아보며 안으로 찾다

사부님께서 하신 “여러분이 돌아가서 시간을 다그쳐 착실히 수련하기를 희망한다.”[3]라는 말씀이 요즘 계속 귓가에 울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깨달은 것이 정말 엉망이어서 어떤 일은 한참 뒤에, 심지어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당시에 버려야 할 사심인데 겉으로만 안으로 찾고 깊이 감춰놓았습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집착, 독선적이고, 남을 고려하지 않고, 남에게 강요하는 등을 포함해 저의 몸에서 표현되는 여러 가지 난폭한 당(黨) 문화 행위가 무지하게 다른 수련생을 해치고 있는데도 자신은 몰랐습니다.

일부 일들이 마치 영화처럼 떠올랐는데 나는 이제야 정말 매번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4]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수련생이 션윈 홍보 부스에 오자마자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비슷한 경우에 직면할 때, 제 경험은 ‘논어(論語)’를 외웠는데 한 번 외운 다음 세 번, 다섯 번 외우면 바로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수련생에게 함께 ‘논어’를 외우자고 했고, 한 번 외운 다음 세 번을 외우는 게 제일 좋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선의로 수련생을 돕는 것이라는 생각에 함께 외우고 난 뒤 별생각 없이 각자 홍보에 집중했습니다.

한동안 지나서 이 수련생이 단체 교류에서, 션윈 홍보 부스에 갔을 때 고비를 넘은 과정을 말했습니다. 수련하지 않는 남편과 어린아이를 둔 가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왔을 때, 한 수련생이 다짜고짜 ‘논어’를 외우라며 한 번 외운 후 또 세 번 외우라는 통에, 안 그래도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온 그녀는 억지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수련생의 요구에 또 고비를 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는 정말 너무 착했고, 교류할 때 사실에만 입각하면서 누구인지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듣고 나서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수련생을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는데, 그날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녀에게 마난을 조성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그 자리에서 듣고 난 뒤 사과할 생각조차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속으로는 그녀와 나 말고는 아무도 제가 그랬다는 것을 모르기를 바랐는데, 체면을 세우고 명예를 구하는 아주 더러운 사심입니다. 수련생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을 보호하려 하였으니! 명백해진 일면은 당시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출발점이 그녀를 돕기 위한 것이니까 근본적으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였기에, 설령 안으로 찾는다고 해도 겉에서 찾을 뿐 깊이 뿌리를 캐지 못했습니다.

사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곧 자신의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녀의 시각으로 보았다면 선의로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가 실제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논어’를 외우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을 때, 마음속으로는 건의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남을 존중하지 않고, 상의하지 않고, 오만한 기세로 남을 깔보는 그런 강한 어투는 듣기에 아마 명령과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수련인이 법에서 무엇을 깨닫고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지만,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법에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잘못했을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이 틀렸습니다. 수련생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또 하나는 션윈 초창기에 고객센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는 고객들이 전화 예매를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예매 대기 고객이 많았는데, 접수받는 수련생이 한참 동안 수표 한 장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대기 고객들이 귀찮아하는 반응에 저는 고객이 예매를 포기할까 봐 걱정됐고, 그 수련생이 일이 숙달되지 않고 동작도 너무 느린데 일 잘하는 사람으로 바꿔야지 않냐고 속으로 원망하며 심성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이 수련생이 교류에서 말하길, 고객센터로 걸려온 전화가 고비를 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거기 앉아서 자신에게서 찾는 즉각적인 반응을 했지만, 속으로는 션윈 고객센터 전화 예매 업무는 최소한 업무에 익숙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며 불복했습니다. 저는 그때 기어코 타인이 자기 기준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큰 잘못이었습니다. 대법 수련인이라면 가장 기본적인 선을 수련해야 하지 않는가? 전화로 접수받는 수련생은 틀림없이 성심성의껏 수표를 처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쳤는지도 모르면서 좋지 않은 말투로 존중하지 않았는데, 진선인(真·善·忍) 중 가장 기본적인 선을 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제가 틀렸습니다. 중생이 떠나가면 매표 기회를 놓칠까 봐 두려워하는 이 마음도 잘못된 것이므로 반드시 수련해 버려야 합니다! 이 두려운 마음의 배후를 파보니 현장에서 표를 더 팔아서 자아를 실증하려는 사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선을 닦지 않고, 수구(修口)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 게다가 자아를 실증하는 이것은 이미 과오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고치려고 하는 저의 진심을 보신 사부님께서는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목놓아 울었고, 한 장면이 떠오르면 또 목놓아 울었습니다. 시간과 편폭의 제한으로 여기에서는 일일이 서술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동안 제게 상처받은 수련생, 언급한 경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모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뒤늦은 사과를 받아주세요!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저를 아껴주시고 포기하지 않은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사부님의 법상 앞에서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시기 바라며 경건한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2. 관념을 바꾸고 사(私)를 닦아버리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예를 들어주겠다. 불교 중에서는 인류사회의 모든 현상이 모두 환상이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찌하여 환상인가? 이 확실하고 확실하게 거기에 놓여 있는 물체, 그것을 누가 가짜라고 할 수 있는가? 물체가 존재하는 형식은 이런 것이지만, 그것의 표현 형식은 도리어 이런 것이 아니다.”[3] 왜 “인류사회의 모든 현상이 모두 환상이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3] 하는가? 개인적인 이해로는 “인류사회의 모든 현상”은 가까운 사람과 일을 포함하여 수련생, 동료, 가족, 친구, 그리고 진상을 말할 때 만난 중생, 그들의 어떤 표현도 모두 “환상이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거울이 내 문제를 반사한 것으로써 내가 안으로 수련하고 심성을 제고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든지 마난을 만들어주든지, 실질적으로는 다 내 수련을 도우러 온 것이므로 저는 마음에서부터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착실한 수련을 늦게 시작하고 아직 빨리 걷지는 못하지만,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줄곧 격려해주셔서 저는 관념을 바꾸고 사(私)를 닦아버리는 가볍고 미묘한 느낌을 체득했습니다.

(1) 법을 외우는 가운데 닦아버리다

법을 외우면서 깊이 체득했습니다. 글자를 잘못 읽고, 글자를 빠뜨리고, 글자를 덧붙일 때면 흔히 한눈을 팔거나, 교란을 받거나, 혹은 법에 맞지 않는 후천적 관념과 사상업이 작용을 일으킬 때입니다. 법에 따라 잘못 읽은 글자, 문장부호, 어조사를 더는 빠뜨리고 붙여넣지 않을 때가 바로 법으로 자기 소우주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며, 100% 신사신법하며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하도록 연마하는 수련 과정입니다. 수련생들이 함께 법을 외우는 시간이 오래되어 대부분 호흡이 잘 맞아 법을 외우는 방에 법을 읽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흔히 효과가 매우 좋아 법을 외우면 천체가 맑고 투명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제는 수련생이 자기 차례에 바로 외우지 않거나 어디까지 외웠는지를 모르는 상황이 또 닥치면 습관적으로 불평하려 하기 전에 항상 주이스(主意識)가 또렷하게 그 불평하는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깊이 파헤쳐 보면 하나의 사심이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법을 외우는 팀의 법을 외우는 속도와 품질에 영향받지 않으려는 사심이었고, 결국 자아를 지키는 것이며 기껏해야 우리 법을 외우는 팀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불평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일 뿐, 근원은 그 이익이라는 사심에 있습니다. 이번에 그것을 발견하고 주이스를 강화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 이익의 사심이 제가 원망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먼저 이 사를 닦아버린다면 원망하는 마음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우선 불평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겠다는 정념이 생기고 나니 저의 생각도 실질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수련생의 표현은 정말 거울인데, 수련생이 열중하지 않거나 교란을 받는 것을 맞닥뜨렸다면 실질상 제 공간장의 문제를 반영한 것입니다. 즉, 입에서는 법을 외우고 있지만, 생각은 아직도 항목의 어떤 일에 가 있고 어떤 이메일에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면, 수련생이 얼떨떨하게 어디까지 외웠는지 모르는 표상과 교란받는 정도는 다를지라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 순간 수련생의 역할은 저 역시 법을 외울 때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저더러 정신을 집중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제가 자기 문제를 보고 제고할 수 있게 해주니 참 감사한 일인데, 어찌 불평하겠습니까. 관념을 바꾸자 바로 법을 외우는 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수련생이 법을 외우는 것을 들었을 때는 모두 아주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느리게 외우거나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게 어떠한 영향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북받쳐 수련생에게 두 손 모아 허스했습니다. 제고할 수 있게 도와준 데 감사하면서 마음속으로 모두 함께 법을 외우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게 됐습니다.

(2) 진상을 말하는 가운데 사(私)를 닦아 버리다

역병이 퍼지면서, 전화를 거는 것 외에 저도 소셜네트워크 소프트웨어로 진상을 알리고 있습니다. 심혈을 기울이고 경험이 쌓이면서 중생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고 탈퇴하는 경우도 생겼는데, 그 후 한동안 소셜미디어에서 친구 삭제가 많아지거나 수락하지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어떨 때는 두 시간을 전화해도 진상을 말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기껏 기능을 익혀놨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며 수련생과 말하기도 했습니다. 말하고는 잘못된 느낌이 들었지만 어디가 틀린 것인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안으로 찾아보았는데, 제가 진상을 열심히 알렸기 때문에 중생이 의혹을 풀고 비로소 탈퇴한 것이라고 점차 믿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이미 법의 힘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아를 실증하는 숨겨진 사심을 찾았으니 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대법 수련에서 하늘의 공을 탐내는 어떠한 생각이든 모두 대법에 대한 불경이며 대법제자라는 호칭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법을 실증하는 것을 신성한 천직(天職)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소셜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서버에 접속했는데 연거푸 몇 사람이 탈퇴하자 그곳에 이미 진상이 많이 알려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음 날에도 계속 걸고 싶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법을 외우는데 ‘지금 그 서버에 미리 접속해놨다가 법을 다 외우고 바로 전화하면 몇 명을 더 탈퇴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법을 외우고 있는데, 바로 전화를 걸지도 않을 것이면서 서버에 접속해놓겠다는 것은 서버를 선점하겠다는 것이잖은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싶었습니다. 집착심이 폭로된 것을 본 저는 바로 그것을 배척하고, 그것에 이끌려 서버를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제고는 버리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다.”[5]

법을 외우고 다시 연결해보니 이미 그 서버에 접속한 수련생이 있었습니다. 마음에서 조금 서운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수련생이 제가 들어간 방에 들어와서 누군가 서버를 차지하고 있다며 제게 물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듣자마자 웃음이 나왔습니다. 물론 서버에 접속한 수련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입을 빌려, 아까 그 상실감과 불편함 뒤에는 구하기 쉬운 사람을 골라서 구하려는 안일한 마음과 수련생이 사람을 많이 구할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불편해진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발정념을 하고 자연스럽게 빈 서버가 있으면 거기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음가짐만 바르면 사부님께서 인연 있는 사람을 데려다주셔서 진상을 듣게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날 절에 다닌다는 사람과 대화하게 됐는데 그분은 시작부터 원망하는 투로 ‘수행하는 사람이 탈당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나중에 진상을 확실히 알고는 흔쾌히 탈당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는 간절한 말투로 수행의 정도(正道)를 물었는데, 제가 ‘논어(論語)’를 읽어주자 진지하게 다 듣고 나서 공손하게 정말 좋다면서, 9자진언(九字真言)을 기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사부님의 법이 중생의 불성을 열어주고 사부님께서 사람을 구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는 입만 열었을 뿐이며 플랫폼에서는 심지어 움직일 필요조차 없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이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수련인의 심성이 그 한 층 법의 그에 대한 요구에 부합되면 법력의 가지를 얻어 진상을 명백히 알릴 수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중생을 구한 것은 대법과 사부님이십니다.

하루는 접속할 때 제가 들어가고 싶었던 서버가 비었길래 들어가 보니 친구가 이미 다 걸었고, 어떤 것은 한 달 전쯤 건 것이었습니다. 저는 들어온 김에 받지 않았거나 탈퇴하지 않은 곳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손길 닿는 대로 전화했는데 10여 분 정도 통화했을 때 상대방은 공산주의청년단 탈퇴 성명에 동의했고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분신자살’ 조작 영상에 드러난 한 가지 허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스프라이트 페트병에 휘발유가 가득 차 있었는데도 고온에도 변형되지 않고 타거나 폭발하지 않았어요. 정부가 국민을 속이는 예 중에 아주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웃으며 맞다고 하더니 빨리 링크를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탈퇴 성명을) 접수해주자 그는 즉시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날 또 역사 교사를 만났는데 그는 진상을 꾸준히 말하는 대법제자의 용기에 감탄했다며 각성한 사람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중공 방화벽을 돌파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더 많은 유능한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싶어 하고 진상을 더 많이 알아서 자기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는 마음이 절박했습니다. 그는 매일 그룹에서 보내는 진상 채널에 의존해 진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법제자들이 운영하는 1인 미디어 프로그램을 매우 좋아한다며 자기에게 힘을 실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또 제게 1인 미디어 수련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달라며 더 많은 진상 방송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걸다가 억지를 부리는 중생을 만나도 구하기 어렵다고 불평하지 않는 것을 배웠습니다. 안으로 찾아보니 중생이 저에게 억지 부리며 비뚤게 나오는 것은 제가 진선인(真·善·忍)과 틀어진 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며칠 동안 임시로 속인의 업무가 늘어나 원래 계획했던 사람 구하는 항목에 영향이 있어서 다급해져, 속인의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급할수록 일상 업무는 더 느리게 처리되어, 서류를 찾지 못하거나 변호사가 다른 사건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조급함으로 자신이 비뚤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꼬인 힘을 풀어서 바로잡고 출근 시간에 엄무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쪽에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았더니 속인이 작업 중인 사건이 곧 다 처리되었습니다. 이때 마음을 다잡고 프로젝트에 임하니 순리대로 잘 처리되었습니다. 하루 지나 전화를 걸었더니 더는 억지 부리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중생의 표현은 역시 자기 공간장의 반영이고 정말 안에서 찾고 제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만난 중생이 말하길, 자신은 민주인사인데 리훙쯔(李洪志) 대사님과 파룬궁을 존경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한다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광로의 쇳물에 나무꼬투리 하나가 떨어져 들어가면 순식간에 그것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이렇게 큰 법으로 당신 한 사람을 받아들여 당신 몸의 업력을 없애주고 당신의 좋지 못한 생각을 없애버리는 등등, 그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6] 저는 바로 대법이라는 이 용광로의 쇳물에 들어간 작은 나무꼬투리입니다. 매일 대법에서 단련하고 대법에서 사심을 버리며 착실하게 수련하자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저를 밀어주시어 크게 진보하게 하셨습니다.

대법의 크나큰 법력과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2] 리훙쯔 사무님 저작: ’따지웬 씬탕런매체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4]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 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 제1기 법회 설법’

(2021년 캐나다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21년 8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8/22/4298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