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르네상스 이후 200년간의 미술에 대한 해석 (5)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화려한 르네상스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은 역사의 한 장에 나오는 황종(黃鐘), 대려(大呂)처럼 업적이 매우 위대하다. 이번 인류문명의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성숙해졌고, 향후 200년간 서양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 200년은 각종 상생상극의 요소가 격렬하고 미묘한 갈등을 겪으면서 음양의 균형이 점차 무너지는 단계였다. 무수히 많은 관련 요인과 배후의 심원함은 필자가 한두 편 문장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의 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당시 서양 미술의 일반적인 상황과 그 역사 시기가 사람에게 준 일정한 시사점 등 몇 가지 측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편에 이어)

도덕 풍조와 예술의 계승

기원전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신상과 신전에 색을 칠하는 전통이 있었다. 고대에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많은 물감 원료가 희소한 광석이어서 값이 비쌌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인류는 점차 귀한 물감의 값싼 대체품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성스러운 조각과 그림의 많은 면적이 황금과 은으로 덮인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같지 않으며, 믿는 신이 달라졌지만, 신을 숭배하며 경건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변하지 않았다.

훌륭한 품격은 미술 업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19세기 프랑스 미술사학자이며, 회화재료 학자였던 샤를 달봉(Charles Dalbon)은 르네상스 시기 헨트(Ghent) 화가 조합의 일부 엄격한 규정을 자신의 저서에 기록했다. 회화 작품의 견고함을 보장하기 위해 만약 모종의 고품질 안료(예컨대 청금석, 철석영 등)를 쓰도록 규정했다면, 화가가 속임수를 써서 저가의 안료를 섞어 같은 색깔을 낸 것이 발각됐을 때, 즉시 10리브르(대략 당시 마부나 시종 한 명의 2개월 수입에 해당함)의 벌금을 물렸다. 동시에 조합의 총무가 불시에 각 화가 작업실이나 집을 급습해 안료 조작이나 다른 규정 위반 행위가 있는지 검사했는데, 당시 다른 일부 지역 규정도 이와 유사했다.

이런 규정은 안료의 품질과 안정성을 효과적으로 보장했고, 회화 작품을 장기간 보존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오늘날에도 수백 년 전의 뛰어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폐지됐다. 물질 이익을 기준으로 삼아 원가를 줄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사상이 인간의 머리에 가득 찼을 때, 문화는 패스트푸드처럼 변했다. 과학과 경제의 발전은 재료 방면에까지 영향을 미쳐 안료 공장은 물론, 재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미술기법도 점점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오늘날의 미술 교육계는 모두 알고 있듯이 학술이론과 구체적 실천이 서로 분리됐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 국가의 미술대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미술재료와 기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아가 회화는 대부분의 ‘예술가’에게 버림받았고, 적지 않은 미술전문 교수는 심지어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는다.

초기의 저명한 재료 및 기법 학자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 약 1360년~1440년)는 자신이 저술한 ‘예술의 서’에서 당시 학생에서 성장해 화가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서술했다. 먼저, 1년 동안 기초적인 소묘를 배우고 나서 기본기를 훈련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화가 작업장에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안료를 연마하고 기본 재료를 갖추는 것부터 시작해 회화재료의 모든 세부 내용을 배웠다. 이후 다시 6년을 들여 색채 응용과 벽화 기교 등을 깊이 배웠는데, 전후로 적어도 13년 동안 각고의 훈련을 거쳐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이는 여전히 하나의 기초적인 숫자일 뿐이었고, 적지 않은 사람은 화가에게 필요한 전문기술을 가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경험이 풍부한 스승에게 남아 깊이 연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첸니니는 이탈리아 화가 지오토(Giotto)의 제자 타데오 가디(Taddeo Gaddi)가 지오토 주변에서 24년을 보낸 다음에야 공부를 마치고 떠난 것을 예로 들었다.

서양 미술을 깊이 연구한 사람은 모두 알듯이 역사상 그런 전통 미술의 대가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예술, 기법, 재료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이해와 숙달은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들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각국을 여행하면서 선대 대가들의 원작을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학습했으며, 서로 다른 유파의 예술 특징을 연구했다. 각 세대에 걸친 예술가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서양 미술의 학술적 노선이 완성됐고, 예술의 전수와 내포가 충실해졌다.

예술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전통예술은 두 가지 중요한 요소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조형 능력으로, 통속적으로 말하면 바로 작품이 모델을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바로 작품의 예술감으로, 이는 인문, 역사, 예술 전승 방면에 연관된 문제다. 전자는 잘 알다시피 화가든 조각가든 반드시 필요한 기본기가 있어야 한다. 후자에 대해서는 서양 미술사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 잘 모를 수 있으므로 아래에 중국 서예의 사례를 가지고 유추해 본다.

모두 알듯이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는 학계에서 ‘천하제일의 행서’라는 평을 듣고 있지만, 서예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행서와 비교하면서 모두 그렇게 쓰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그중 일부 글자의 필획 구성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천하제일’의 느낌을 받지도 못한다. 전문가가 있어야만 작품의 유파, 필법, 구도, 풍격, 문화 전승 등의 각 방면으로부터 그 우수함과 아름다움을 감정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서예 역사상의 유래로 인해 역사적 지위가 높아졌다.

图例:现存于世的《兰亭集序神龙本》,普遍认为是最接近《兰亭序》正本的摹本(王羲之的《兰亭序》正本已失传)。
작품 사례: 현존하는 ‘난정집서 신룡본(蘭亭集序神龍本)’은 ‘난정서(蘭亭序)’의 원본에 가장 근접한 모사본으로 알려져 있다.(왕희지의 난정서 원본은 소실됐다.)

예술의 문화적 향기는 곧 역사 속에서 발효되어 나온 것이다. 해서의 안진경(顔眞卿)체에는 안진경체의 소박함과 무게가 있고, 유공권(柳公權)체에는 유공권체의 가녀림이 있고, 매 한 가와 한 파에 모두 자신들의 특징이 있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이 자형(字形)의 필획 구조에 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입문까지 한들 아무것도 아니며, 정확한 운필과 적절한 강약 등 흔히 강구하는 일련의 방법을 반드시 잘 알아야만 그런 서예 유파의 예술감을 조금이나마 표현할 수 있다. 만약 선인을 초월하고 싶다면 더욱 반드시 이런 예술감을 철저히 이해해야만 약간의 전환점을 찾을 수 있다.

서양 예술에도 이처럼 늘 역사 전승의 문제가 있었고, 서로 다른 유파가 모두 이렇게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 속에는 서로 다른 체계의 전문 재료, 미술기법, 예술이념 등 각 방면이 포함된다. 그래서 만약 한 화가의 도제가 기본기만 연마하고는 아주 비슷하게 그릴 수 있다고 해도 예술 특색, 격조, 계승 등 기타 방면에서는 아직 요구에 미치지 못하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치면서 이런 귀중한 이념도 도덕의 추락에 따라 점점 몰락했다.

서양의 전통문화에서 칠죄종(七罪宗-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중 으뜸이 교만이라고 늘 강조해 왔지만, 사람들은 항상 이런 오래된 잠언을 망각했다. 17세기 후기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글에서는 당시 미술이 명암의 대조, 빛과 그림자의 점진적 변화, 그리고 구도의 구성 등 많은 방면에서 이미 라파엘로(Raphael) 시대를 초월했고, 나아가 예술계 일부 사람의 교만과 선대 예술이론에 대한 의문을 야기했다고 밝혔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겸손하게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의 원칙을 본보기로 삼을 것을 강조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실물을 보지 않고도 묘사할 수 있다’는 이론이 점점 프랑스를 휩쓸었고, 예술가들이 잇달아 모델을 버리고 상상을 통해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화필에 의지해 생활하는 직업 미술가로서 대량의 훈련을 거치면 대부분은 모델을 쓰지 않고도 창작 기술을 연마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델과 실물을 버렸기 때문에 창작할 때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이 부족한 데다 경험에만 의지해 그리다 보니 그려낸 사람과 물건, 환경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대부분 천편일률적이었다. 각자의 작품을 구별하기 위해 미술계는 필치, 필법 등 인공적인 흔적으로 개인의 특징을 남기기 시작했다. 당시의 예술을 보면 여전히 구체적인 자연의 실제 풍경을 묘사했지만, 이미 예술이 자연을 능가한 분위기가 보인다. 예술가들이 작품 속에 더욱 많이 표현한 것은 자아였고, 이전처럼 겸손하게 자연을 본보기로 삼고, 신의 창조물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필법 기교를 뽐내는 형세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년)의 시대에 이미 점점 극단으로 나아갔다. 프라고나르의 작품 대부분은 향락과 정욕을 주제로 한 것이었고, 그래서 기교상 줄곧 대단히 경쾌하고 분명한 필치와 화려한 색채로 분위기를 부각시켰다. 이렇게 경쾌하고 활기찬 운필 리듬이 요구됐으므로 그의 손동작에도 반드시 일정한 속도가 있어야 했고, 그래서 그리기가 아주 빨랐다. 이에 후세의 적지 않은 서양 예술 평론가는 그를 즉흥연주가(Improvisateur)로 부른다. 프라고나르 본인도 자신의 속도를 자랑스러워했고, 심지어 속도를 위해 품질을 포기하면서 한 시간 내에 완성한 일련의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1769년 완성한 초상화 뒷면에다 ‘한 시간에 그림 완성(En une heure de temps)’이라는 글을 적어 자랑했다. 그러나, 1시간 만에 다 그린 유화가 어느 정도 완성도인지는 누구나 알기 때문에, 어떤 예술사학자들은 농담 삼아 그를 습작의 거장(Maître de l’ébauche)이라 부른다.

고상하고 엄숙한 예술을 저속한 오락 잡기로 변질시키는 이런 행위가 극단에 이르자 당시의 예술계도 각성하게 됐다. 사람들은 예술이 사실상 이미 쇠퇴했고, 원래는 마음을 열고 자연을 본보기로 삼던 예술가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편협한 필치에 갇힌 것을 발견했다. 표현하는 것도 드넓은 천상세계가 아닌, 보잘것없는 개인의 가치였다. 서양 주류 예술가들은 역사상 미술의 발전 과정에서 예술이 발전할수록 문제가 나타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과거를 표준으로 삼아 겸허하게 선인의 것을 공부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특히 신고전주의(Néo-classicisme)의 출현과 번성으로 불량한 필치의 폐단이 철저히 바로잡혀 붓을 들어도 더는 어색한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고, 오랜 전통으로 회귀할 것이 재차 강조됐다. 발길을 돌려야만 예술의 괴멸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예술이 발전 과정에서 쇠퇴하는 상황은 르네상스 이후에야 출현한 것이 전혀 아니었고,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출현했다. 만약 인류에게 어떤 재주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끊임없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됐고, 암암리에 항상 그런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양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 미술이 몹시 성숙하지 못했음을 안다. 유럽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가들은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시기의 예술을 배운 후에야 서양 미술을 정점까지 발전시켰다. 2천 년 전 미술이 천 년 전의 미술보다 훨씬 성숙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곧 대다수 사람의 관념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문화, 예술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진보하는 것이 전혀 아니며, 한 시대의 예술이 반드시 앞 시대보다 우수한 것도 아니다.

서양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이전의 예술 발전 시기와 이어진 예술 미성숙 시기 사이에는 비록 줄곧 전란과 전염병 등 각종 재난이 있었지만, 인류는 전혀 멸망하지 않았고, 예술가를 대규모로 제거하는 상황도 나타나지 않았다. 성숙한 예술의 쇠퇴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며, 세월이 쌓이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예술사학자 샤를 모로 보티에(Charles Moreau-Vauthier, 1857~1924년)는 백여 년 전 그의 저서에서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이며 작가였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Secundus, 약 23~79년)가 회화와 관련해 남긴 일부 논술을 인용했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성숙한 예술이 인간 관념의 변이 속에서 어떻게 한 걸음씩 몰락했는지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미 흔히 보이는 우수한 작품에 흥미를 잃었고, 예술 품격의 방향을 미완성 작품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미완성 습작만이 예술가의 사상을 더욱 잘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사상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미완성의 방향으로 앞다투어 노력을 쏟았다. 플리니우스는 탄식하며 말했다. “마치 인간이 영혼을 어떻게 묘사할지 더는 모르는 것처럼, 현재의 인간은 육신을 어떻게 그리는지에 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몰락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서기 79년 폼페이(Pompeii) 멸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의 도덕성이 타락한 것이다. 고고학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폼페이에서 출토된 벽화들이 사실상 모두 인테리어 장인의 작품이었는데, 수준이 높지 않았고, 벽화의 내용이 몹시 음란하고, 심지어 변태적인 각종 장면으로 가득했다. 이는 오로지 정신적 자극을 추구하고, 맛있는 것을 먹기 좋아한 당시 사람들의 심리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예술상에서도 사람들이 다른 기호를 충족시키려 했으므로 화가들이 전통예술의 품위를 버리게 됐고, 본말이 전도된 사상에 공을 들였다. 더욱 높은 측면에서 보면 신께서 인간에게 전하신 예술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음란하게 만드는 데 쓰인 것이다. 예술이 도덕을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한 후에는 하늘도 이런 ‘예술’이 계속 번창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관련된 사람이 모두 하늘의 질책을 받을 수 있다. 폼페이가 베수비오(Vesuvio) 화산의 폭발로 하룻밤 사이에 철저히 매장된 것으로 이 점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인류의 도덕이 손상된 후에는 문화, 예술을 포함한 사람의 일체가 모두 따라서 쇠락하고 파괴됐다. 특히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후, 예술에 더욱 대규모 쇠퇴가 나타났다. 원래 있던 투시법과 해부학은 서기 3세기부터 점점 명맥을 잃었고, 예술가들이 더는 관련 지식을 갖고 표준에 부합하는 조소 작품을 창작할 수 없게 됐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건설할 때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로마의 다른 공공 건축물에서 부조를 떼어다 장식물로 썼다.

중세 미술 작품은 너무나 미숙해 보이며, 일부는 심지어 어린이 그림처럼 보이는데, 이는 곧 이전 기예의 실전으로 인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런 예술상의 쇠락이 소멸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이며, 르네상스 이후, 예술은 또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인류의 예술은 전통을 잃어 쇠락했다가 다시 전통을 배우고 전통의 길로 돌아서 번창했는데,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미술이 18세기에 쇠락한 것은 고대 로마시기의 쇠락과 대단히 비슷해 역사의 재연과 같다. 특히 19세기 인상파의 출현 후, 전통예술은 치명적인 재난을 겪었고, 무수한 고귀한 예술 사상, 조형 수법, 전통 기예가 끊임없이 실전되어 오늘의 미술계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지경에 달해 서양 예술계가 전통적인 회화와 조소를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동양 미술계 일부도 서양의 현대파를 본받고, 다른 일부는 공산 소련의 미술 체계를 꾸준히 답습하고 있다.

역사를 개괄하면 과거 ‘성(成), 주(住), 괴(壞), 멸(滅)’이라는 큰 추세 아래에서 르네상스 이후 2백 년 동안은 각 방면의 요소가 상생상극을 이루는 가운데 미술이 점점 균형을 잃는 과정이었다. 역사상 얼마나 혼란한 프로그램이 상연됐던지 막론하고 사실은 모두 표면적인 현상이고, 진실한 원인은 인심의 변화로 조성된 것이었다. 도덕의 추락은 일체 형식에 의지할 곳을 잃게 했는데, 관념의 변이는 사상 상태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인류 문화의 일체를 자라날 수 없는 척박한 사지로 몰아갔다.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과 참고가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철을 밟지 않게 하고, 마음과 눈을 바르게 해 우주의 지혜와 오묘함을 통찰하게 할 수 있다. 이것도 인류가 연구하는 역사의 수많은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오늘날 이 위대한 시대에 우리는 바른 생각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어떠한 종교의 틀 속에도 서지 않고, 법리를 기반으로 선악을 명백히 구별하고, 진심 어린 선념으로 예술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인류의 예술이 쇠잔해진 최후에 봉황이 열반하듯 거듭날 것이며, 정통 예술에 통달한 신전(神傳)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참고문헌:

Cennino Cennini,《 Libro dell』Arte 》, 1437
Charles Dalbon,《 Les origines de la peinture à l』huile 》, 1904
Charles George Herbermann,《 Catholic Encyclopedia 》, 1913
Charles Moreau-Vauthier,《 La peinture 》, 1913
Colin Jones,《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France 》, 1999
Helen Jackson Zakin,《 French Cistercian Grisaille Glass 》, 1979
Hendrik Willem van Loon,《 How to Look at Pictures: a Short History of Painting 》, 1938
Jacques-Nicolas Paillot de Montabert,《 Traité complet de la Peinture 》, 1829
Léonor Mérimée,《 De la peinture à l』huile 》, 1830
Martin Kemp,《 The Oxford History of Western Art 》, 2000
Max Doerner,《 Malmaterial und seine Verwendung im Bilde 》, 1921
Wang Xizhi,《 Lanting Xu 》, 353
William Fleming,《 Arts and Ideas 》, 1955
Yu Yue,《 Notes from the Celestial Place in Youtai Mountain 》, 1899

(전문 끝)

 

원문발표: 2020년 9월 13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3/4115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