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르네상스 이후 200년간의 미술에 대한 해석 (1)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찬란하고 휘황한 르네상스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영향은 역사의 장에서 옛사람을 놀라게 했고 찬연할 만큼 깊고 컸다. 이번 인류 문명의 미술은 르네상스 시기에 성숙해졌고 그 후 200년 동안 서양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의 200년은 다양한 세대 간 및 상호 제지 요인으로 인해 치열하고 미묘한 충돌로 음양 균형이 점차 무너지는 단계였다. 관련된 요소가 복잡하고 그 배후 범위가 깊고 커서 저자가 한두 편의 문장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문은 개인의 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몇 가지 방면에서 당시 서양 미술의 대체적인 상황 및 그 시대의 역사가 사람에게 준 계몽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겠다.

의식과 물질

예술은 매우 강한 이념적 범주로서 그 자체가 의식 및 이념과 같은 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회화, 조각 등 예술 형식은 흔히 모두 예술 개념을 먼저 가지고 나서 예술 기법을 통해 합리적으로 운용해 구체적인 물질 자료로 그것을 표현해낸다. 이 과정은 유물주의가 숭상하는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주장과 정반대다. 사실 한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의 사상 의식이 자신의 육체를 제어하기 위해 행동하기에 그의 사상 의식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물론 지금 과학계와 철학계 모두 의식 자체가 바로 일종 물질이라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이 양자는 대립 관계가 아니다. 단지 중국 독자들이 학교에서 유물주의 이론을 배웠기에 우리는 이런 잘못된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우선 가상으로 양자를 분리해 보자.

중국어로 된 미술사 문장에서 자주 보는 학술 연구는 일반적으로 예술과 경제학을 연결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중국 예술 연구자가 모두 경제학자인 줄로 잘못 알고 있다. 이것은 유물주의 ‘물질 결정론’에서 파생된 관념이다. 즉 ‘경제 기초 결정론’을 알기 쉽게 말하면, 예부터 지금까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이런 이론을 홍보했다. 역사의 각도에서 보면 이 이론은 현대의 비밀 결사 및 사회 금융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토론할 중점이 아니기에 여기에서는 논평하지 않겠다. 표면적인 얕은 이치로 간략히 말해보겠다.

그럼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가? 게다가 오늘날 경제 사회에는 돈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럼 몇 세기 이전에는? 당시 많은 국가에서는 상인이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귀족이나 승려가 아니면 상류층 사회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왜 그런가? 여기에 결정적인 요소는 돈과 같은 이런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도덕 이념이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집단의식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어떤 사람이 돈이 있다고 해서 신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승려 단체(신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단체)나 왕, 귀족(왕권신수설에 따라 신에게 권력을 받은 단체)과 같은 발언권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 사람이 신에 대한 공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을 연구하려면, 특히 역사상 종교적 신앙이 문명의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시기의 사상 관념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예술 발전 경로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 역사상 많은 예술 작품은 그 배후에 내포된 신앙, 이념과 예술관을 체현했다. 인간 세상의 저차원 위치에서 보면 인류 예술의 발전도 각종 의식이 대립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식 자체는 살아 있고 영성이 있다. 예술 작품 속의 사상 이념과 그것을 표현하는 물질 자료는 일체 중의 양면 관계와 같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의식과 물질은 또 통일된 것이다. 다음은 이런 요소가 미술 역사에서 나타난 일부 표현을 구체적으로 말해보겠다.

소재 금지령

학술계에서 르네상스가 끝난 시간에 대한 통일된 결론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17세기부터 이미 르네상스 시기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기에 우리는 잠시 르네상스 이후 200년을 개괄적인 숫자로 이해하자. 즉 17세기와 18세기라는 하나의 큰 범위로 보자.

이 시기 가장 뚜렷한 특징은 국가와 지역에 따라 예술 소재의 선택에서 큰 차이가 나타났다. 이런 차이는 16세기 종교개혁이 예술에 미친 영향에서 비롯됐다. 원래의 천주교와 비교할 때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는 교리적 차이로 인해 과거의 전통과 매우 달랐다.

용어의 혼동을 피하고자 특별히 지적할 점은 중국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개신교라고 불렀는데 이런 호칭은 실제로는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Christianity)는 2000년 역사를 가진 천주교, 희랍 정교, 개신교 등 많은 분파 유파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종교 개념이다. 개신교(Protestantism) 즉 많은 중국인이 말하는 ‘기독교’는 16세기 서양 종교개혁 이후 설립된 기독교의 분파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에 설립됐다. 양자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개신교는 우상과 성상(聖像)에 대한 숭배를 강력히 반대했다. 천주교의 ‘우상 숭배’ 해석과 달랐기에 많은 예술 작품은 직접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맨 먼저 공격받은 것은 삼차원 공간 속성을 가진 조각품이었다. 성당에 있는 예수, 성모 마리아와 기독교 성도들의 조각상은 쉽게 우상 숭배로 정의할 수 있었기에 이로 인해 많은 열광적인 개신교 신도들이 성당에 뛰어들어가 조각상을 파괴하고 부조를 제거하던 데에서부터 스테인드글라스를 부수고 회화를 소각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많은 개신교 신도에게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상징이나 이미지를 통해 표시할 필요가 없고 현란하고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모든 것은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키기에 남겨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우리는 오늘날 개신교 성당 내부에는 회화나 조각상이 없이 하얗게 깨끗하게 칠해진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장식 요소를 최소화해서 되도록 간결함을 추구했다.

图例:1566年,加尔文派的新教徒正在毁坏安特卫普圣母主教座堂中的雕像与宗教画,图为弗拉芒版画家霍根贝格(Frans Hogenberg)所绘制。
1566년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앤트워프 성모 주교좌 성당에서 조각상과 종교 그림을 파괴하고 있다. 이 그림은 플랑드르 화파 화가 프란스 호겐 베르크(Frans Hogenberg)가 그린 것이다.

르네상스와 그전의 미술은 모두 종교적 회화, 조각상을 위주로 했기에 역대 예술가들이 축적한 창작 경험과 예술 이론도 주로 신과 성도를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16세기 중후기에 ‘성상 파괴 운동’이 등장한 후 개신교가 지배하는 국가와 지역에서 미술 작업자들은 부득이 전통적인 주류 소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세속적이거나 또는 변두리 소재에 대한 주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런 작품은 이념적 특징이 없다. 게다가 원래 예술 이론은 ‘기법이 폐기되어’ 많은 개신교 국가와 지역의 미술이 급격히 쇠퇴했다. 예를 들면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독일 화가, 1471-1528)와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unger, 독일 화가, 1497-1543) 시대 이후 이들 국가에서 미술가의 이름이 예술사에 나타나는 빈도가 뚜렷하게 낮아졌다.

개신교 국가 중에서 이번 예술적 변화의 위기를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넘긴 국가는 네덜란드다. 초기 플랑드르 화파(Flemish Primitives)는 종교적 제단을 그릴 때 많은 세부 사항을 묘사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작품에 표현된 이야기의 장면을 현실처럼 보이게 했다. 화가들은 그림 속 주인공을 정밀하고 세심하게 조각할 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화초와 나무, 정물화, 풍경, 동물 등 모든 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해 특별한 인내심과 절묘한 기법으로 그렸다. 그리하여 그 지역 예술가들은 이런 동식물 등 다양한 이미지에 대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했다. 따라서 개신교가 예술가들에게 천주교의 전통 소재를 허용하지 않았을 때 정물, 풍경화, 초상화, 장르 그림과 같은 제재가 네덜란드 예술가들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갈 수 있도록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임시방편은 지역 미술의 제한된 활력과 예술 시장의 일시적인 번영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고 이 상황은 17세기에 드러났다. 프로테스탄트의 금지로 인해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이러한 신성한 주제를 피해야 했고 민속, 정물, 초상화 등 너무 많은 사상이 필요하지 않은 기타 소재만 연구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의 마음으로 예술은 순수한 상품으로 평가절하됐다.

전 국민이 신을 믿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신이나 성도를 표현한 예술 작품을 볼 때 신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으나 이런 성스러운 관계에서 분리되면서 예술 작품은 사람들 손에 있는 장난감이 되어 사람들은 마음대로 ‘예술을 갖고 놀았고’ 사상 압력이 전혀 없이 함부로 전통을 바꾸며 미적 가치가 빠르게 변했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조류에 따라 사상성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예술 기법을 바꾸어 다양한 표면 스타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예술 조류는 천박하고 표면적인 것으로 나아갔다. 예술가들도 점차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의 고상한 지위를 잃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순수한 수공업자나 도료를 칠하는 장인으로 보았다.

물론 모든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신과 성도를 표현한 소수의 미술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 부류 주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Rembrandt)는 이런 종교적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상업이 강성한 시대에 네덜란드에는 일부 주민이 여전히 천주교를 조용히 믿었기에 프로테스탄트의 금지는 그다지 엄격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런 소재에 대한 개인 소장품은 그렇게 큰 위험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예술가는 여전히 이 영역을 피했다.

중국에서 출간한 일부 미술사 서적에는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이 종교와 신화 소재를 그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용감하게 전통 종교적 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한 결과라고 썼다. 이런 설은 보기에는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16~17세기 종교 신앙은 유럽인의 사상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고, 화가들도 교파의 종교적 요구에 순응해 이렇게 한 것이다. 중국 미술 교과서는 유물주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했기에 오랜 역사에 걸쳐 인류 사상을 주도한 신앙, 신학 요소를 의식적으로 무시해 사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Dutch Golden Age)’에 경제가 발전하고 예술품 시장이 발달해 수백만 점의 그림을 그렸으나 일류 거장은 몇 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렘브란트,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와 같은 예술가는 당시에는 존경받지 못했고 심지어 한때 빈곤해 생계도 어려웠다. 역사책에서 그 수십 년의 짧은 번영 시기가 지난 후 네덜란드 예술이 쇠퇴해졌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데 익숙한 사람은 네덜란드 미술의 붕괴는 이후의 국력이 쇠퇴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예술 발전은 일정한 재정 지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역사상 개신교 국가 중에는, 예를 들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대영제국, 초강대국이 된 미합중국과 같은 강대국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두 미술사에서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상 신을 표현하는 예술을 금지한 것은 실제로 예술의 근본을 파괴한 것이기에 예술은 점차 쇠퇴해질 수밖에 없다.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미술 작품이 신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신의 이미지를 알기 어렵다. 언어 문자로 묘사하더라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보는 것과는 매우 다르며 이 부분 문화는 시각적 개념의 부족함이 나타날 것이다. 인류 역사는 신이 지켜보고 있다. 신은 신을 그리지 못하게 한 지역의 예술을 오랫동안 흥성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

 

원문발표: 2020년 9월 9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9/4115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