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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명작 해석(4)

[밍후이왕] ‘서유기’가 수련인의 이야기와 수련의 이치를 명확하게 말한 것이라면 4대명작의 으뜸인 ‘홍루몽(紅樓夢)’의 배후에는 또 어떤 깊은 뜻이 숨어있을까?

‘홍루몽’의 탁월한 가치는 단지 인물들의 형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나, 줄거리 구성의 배치, 사회풍모의 전면적이고 진실한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다. ‘홍루몽’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깊고 오묘하며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주제 표현에 있다.

‘홍루몽’의 내용이 너무나도 풍부하고 엄청나기 때문에 ‘홍학(紅學)’, 즉 ‘홍루몽’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까지 출현했다. ‘홍루몽’의 주제 역시 역대로 수많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왜 ‘홍루몽’의 영향은 이토록 심원하고 오래가는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홍루몽’안에서 맴돌다 ‘홍루(紅樓)’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夢)’만 보게 된다. 특히 현대인들은 종종 소위 ‘역사적인 한계 의식’으로 ‘홍루몽’을 제멋대로 평론한다. 심지어 그 이론으로 ‘속편’ 창작을 지도하려 하는데 정말로 부질없는 짓이다.

문학작품의 주제의 높이는 작가의 사상 경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렇게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곧 작가가 작품 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홍루몽’의 주제는 첫 회에 이미 아주 명백하게 알려주었고, 5회 때 진일보로 말했다. 작가 조설근(曹雪芹)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불도(佛道) 양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설근은 수련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도 필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 점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홍루몽’을 인식하는 기초이자 전제다. 작가는 제 1회 머리말에서 “이번 회에 ‘꿈’과 ‘환상(幻)’ 등의 글자를 쓴 것은 독자들의 눈을 깨우치려는 것인데 곧 이 책을 쓰는 주제다”라고 적었다. 파족(跛足) 도인의 ’호료가(好了歌)’와 견사은(甄士隱)의 오묘한 해석은 인생에 대한 수련인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 문외한이 어찌 두 사람의 어리석은 듯한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도인의 몇 마디 말이 견사은을 제도했지만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명리의 마당 중에서 뒹굴면서 미혹되어 깨어나지 못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이미 이 책에 대해 아주 익숙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있어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사전에 이미 이 작품을 전부 완성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십년을 열독하며 다섯 번이나 수정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작가의 사상경지에 서서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 이 물질세계를 가장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며 소위 일체는 모두 환상이나 몽환(夢幻)이라고 한다. 인생은 가장 무상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불가에서 볼 때 사람 중의 행복은 복으로 칠 수 없다. 사람은 인간세상에서 본래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 때문에 수련이 있는 것이다. 수련의 목적은 자신을 해탈하고 승화해 천국에 가려는 것이다. 사람 중에서 원만한 일이 있는가? 인생은 본래 불완전한 것으로 설사 세간의 일체를 얻을지라도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의 갈망은 끝이 없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어느 한 상태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은 수련자가 말하는 ‘청정’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속인사회로 말하면 ‘완전’한 것은 잠시이고 ‘불완전한 것’은 영원하다. 불완전한 가운데 영원히 완전한 것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원만한 결과를 말하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이 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정이 있는 사람은 결국 가족을 이룬다.’ 사실은 바로 사람들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다. 설사 사람의 소원대로 정말 이뤄져, 아름다운 혼인을 한다 해도 수련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원만’이 아니다.

누구인들 ‘홍루몽’이 완전한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80회까지 쓴 후 갑자기 사라지는가? 때문에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책 중 인물의 성격, 전체적인 줄거리 전개에 따라 각기 다른 ‘속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원작자인 조설근의 각도에서 보자면 책속의 일체 배치를 적당하게 펼쳐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 책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그는 왜 이렇게 처리했는가? 그가 의도적으로 상식적인 이치를 벗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경지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의도는 바로 그가 세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고 심지어 더욱 먼 곳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전부’를 다 보려는 것은 사람마음이며, 원만히 서술하는 것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내용을 표현한 후 곧 사라지는 것만 못하다. 마치 인류에게 재난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정지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더 유리하다.

‘홍루몽’의 위대하고 심오함은 조설근이 책의 후반부를 가볍게 삭제해 그 일부만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함부로 속편을 창작하려는 것은 개 꼬리에 담비꼬리를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전부 버려야한다.

사실 조설근의 배치에는 또 그의 독창적인 예술 구상이 있다. 우리 천천히 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계속)

문장발표: 2013년 8월 10일
문장분류: 천인지간(天人之間)>신전문화(神傳文化)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8/10/2777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