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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문화】 직무에 충실했던 범경문(范景文)

글/지진(智真)

【명혜망 2007년 12월 21일】인생의 길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지만 사람이 되는 기본 준칙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도덕과 지조를 견지하는 것이다. 우리 중화 민족은 역대로 지조를 중시해왔다. 수천년 동안 품행을 지키고 절개를 지킨 수많은 인인(仁人) 지사(志士)들이 나타났다. 명나라 때의 범경문(范景文)이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범경문은 병부시랑, 공부상서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명예(名譽)와 절조로 자신을 다그쳐 종래로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덕과 재주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사심 없이 도와주었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오면 일률적으로 거절했다. “만약 국가와 백성들에게 유리한 일이라면 내가 돌봐줄 수 있지만, 사리사욕을 위한 소인의 일이라면 나는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집 대문 위에 다음과 같이 여섯 글자를 크게 적어놓았다. “不受囑,不受饋(청탁 사절, 선물 사절)”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 가지 사절”이라고 했고 백성들이 아주 흠모했다. 한번은 현지에 기근이 발생하자 범경문은 전 재산을 몽땅 이재민을 구제하는데 썼다. 그는 간절하게 백성들에게 말했다. “모두 마음 놓고 가져가십시오. 당신들은 나의 옷과 음식을 준 부모나 마찬가지이니 나의 일체 옷과 음식은 당신들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범경문이 이부(吏部)상서로 있을 때 “천지의 인재는 천지를 위해 아껴야 하고 조정의 명기(名器)는 조정을 위해 수호해야하며 천하 만세(萬世)의 시비공론은 천하만세가 공동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의 명언으로 뜻은 인재를 아끼고 국가에 대해 책임지고 역사에 대해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는 공평무사하여 현명한 인재들을 많이 발굴했다. 만신창이이던 명나라가 한동안 “현명한 인재들이 많이 등용됨”에 “경문의 힘이 컸다.” 일시적으로 현명한 선비들이 모두 중용되자 소인들의 원망이 많아졌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권세가 있을 때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권세가 없을 때는 무엇에 의지하려 하는가?”라고 말하자, 범경문이 대답했다. “나라를 위해 현명한 인재들을 선발하는 것은 조정의 대계이다. 만약 사심이 있다면 나라를 해치고 자신을 해쳐 재앙이 얼마나 클지 예측하기 힘들다. 나는 현명한 선비들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며 소인들과 일부러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직책을 다하는 것이다.”

간신 위충현(魏忠賢)이 권력을 전횡하며 범경문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는 종래로 틈을 주지 않았고 단호히 거절했다. 일부 사람들이 권하기를 “당신이 위충현을 멀리하면 앞으로 어떻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지금 간사한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는데 그와 더불어 나쁜 짓을 한다면 더러운 명성만 남길 뿐이다. 이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다. 내가 조정에서 설 자리가 곤난해짐을 알기에 양심에 부끄럽지 않음을 추구할 뿐이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관직을 사임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 했지만 범경문은 그들에게 “만약 한 사람이 사리사욕 때문에 인품을 상실한다면 이것은 아주 우둔한 짓이다. 나는 비록 관직을 잃었지만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양심이 편안하다. 나는 정말로 아주 편하다.”

숭정(崇祯)제가 즉위한 후 위충현 등 간당(奸黨)을 제거해버리고 범경문을 하남 순무(巡撫)에 임명했다. 숭정 2년 청나라의 황태극(皇太极)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공해 오자 범경문은 부하 군사들을 이렇게 교육했다. “일국의 병사로서 변경을 지키고 백성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곧 도적의 무리와 같은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모두 엄격히 자신을 다스리길 희망한다.” 역사 기록에는 “수도를 지키는 병사(京师)들이 계엄을 선포하니 사방의 원조 병들이 약탈을 일삼았지만 유독 하남 병사들만은 추호도 범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길에서 백성들이 범경문에게 향차(香茶)를 가져오자 범경문이 공손히 받은 다음 땅에 쏟으면서 말하기를 “병사들은 엄동설한에 행진하면서 국난을 위해 다니느라 입술이 얼어터지고 손가락에 동상을 입었지만 한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는데, 내 어찌 여기서 향차를 마실 수 있겠는가? 당신들의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이 향차를 대지에 바치리라!”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감동되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후에 범경문의 공적이 커지가 태상(太常)소경(少卿), 내각 대학사를 역임했다. 그는 여전히 국사에 충실했다. 한번은 그가 숭정황제에게 간언하자 황제가 아주 기분 나빠했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간언하지 말라고 했으나 범경문은 도리어 다시 진언하면서 숭정황제게에 “간당들이 횡행할 때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사옵니다. 지금 영명하신 페하께서 계시온데 대신인 제가 몸을 사려 폐하께서 조금이라도 잘못을 범하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숭정이 이 말을 듣고는 감개하여 말했다.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경과 같은 사람만이 이렇게 큰 담이 있을 수 있소!”

청나라 군대가 들어온 후 명나라의 대세는 기울어졌다. 범경문은 나라의 대신으로서 국가와 천자를 위해 힘이 되어 줄 수 없어 심한 가책을 느꼈다. 경성이 함락되고 황제가 자살하자 범경문은 한탄하며 “황제 폐하의 소재를 모르니 오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는 우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 그는 명나라 내각 보정 대신 중 유일하게 순국한 사람이다.

지조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탄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상과 신념을 위해 정의를 수호하고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으며 고상한 품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지조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지해야 하는 것으로 군자는 홀로 있음을 신중히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 기풍이 일락천장하고 ‘지조’와 도덕 양지를 부르는 것이 이미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사람은 마땅히 인격과 품격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국가와 민족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12월 21일
문장분류 : 천인사이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7/12/21/16877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