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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비승’에 대한 고증 (2)

글/ 문사예(聞思睿), 장우징(張宇澄)

[명혜망] 동서양 문헌에는 모두 백일비승(白日飛昇: 대낮에 날아오르는 현상), 공중부양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요가 수행자, 은사(隱士)와 행각승 중에는 공중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고, 서양에도 ‘하늘을 나는 수도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불도(佛道)를 공경하고 수련하는 민족과 지역에서는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동서고금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목격담이 적지 않은데 아래 몇 가지 사례를 들겠다.

(1편에 이어서)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 ‘사자연’을 검색하면 80여 종의 서적 총 114권이 검색되며 키워드는 153회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황실 사서(史書)와 지방지(地方志), 도교 경전이 포함돼 있다.

이처럼 사자연의 백일비승 사건은 ‘신당서(新唐書)’, ‘사고전서’와 ‘태평광기(太平廣記)’ 등 황실 서적에 공식적으로 기재되어 후세 사람들이 중국 신전(神傳)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역사는 사람이 기록한 만큼 저자의 한계도 드러내지만 천기(天機)를 드러내기도 한다.

2. 신선 한상자의 이야기

한상자(韓湘子)는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고 있는 여덟 신선 중 한 명이며, 당나라 대문호 한유(韓愈)의 종손(從孫)이다. 기록에 따르면 한상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작은할아버지 한유 밑에서 성장했다. 한유는 그가 과거에 급제해 이름을 날리고 조정의 관리가 되길 바랐으나 한상자는 오로지 도를 닦아 신선이 되려 했다. 그래서 한상자는 스무살이 되던 해 한유와 작별하고 산에서 신선을 찾아 다녔는데, 나중에 여동빈(呂洞賓)을 만나 도를 얻었다.

한상자는 득도한 후 집에 돌아가 한유를 제도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생일잔치에 빈 술독에서 순식간에 술이 넘쳐흐르게 하고, 꽃씨에서 순식간에 싹이 트고 자라서 꽃봉오리가 생기고 거기서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게 하는 도술을 선보였다. 한유가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잎에 작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구름 감도는 진령(秦嶺)산에 내 집은 어디 있는가? 남관(藍關)에 눈이 쌓여 말이 가질 못하는구나.” 나중에 한유는 황제에게 간언을 잘못했다가 조주(潮州)로 쫓겨났는데, 남관 진령산을 넘어갈 때 갑자기 폭설이 내려 말을 타고 갈 수 없었다. 그때 한유는 꽃잎에 있던 시구가 떠오르면서 한상자가 이미 이날을 예견했음을 깨달았다. 오도가도 못하고 절망에 빠진 한유는 한상자가 과거 자신에게 효도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종손아, 그날 말뜻을 이제야 알겠구나. 그런데 지금 너는 어디 있는 거냐?”

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한유가 뒤돌아보니 한상자가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상자는 거듭 작은할아버지에게 자신과 함께 도를 닦아 신선이 되자고 권했지만 한유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 말도 틀리지 않지만 나로서는 백성을 위해 힘쓰는 게 낫겠다. 이것도 모두 정해진 게 아니겠느냐?” 그 후 한유는 ‘좌천돼 남관에서 종손 상(湘)을 만나다’라는 시를 지었다.

3. ‘백일비승’에 관한 기타 사서 기록

1)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하다

‘백일비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사기·효무본기(史記·孝武本紀)’에 있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에서 동을 캐서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鼎)을 주조했다. 정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긴 수염이 달린 용이 내려와 황제를 영접했다. 황제가 용의 등에 올라타자 신하와 후궁 70여 명도 따라서 탔고,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 더 탈 수 없었던 다른 신하들은 용의 수염을 잡고 매달렸는데 수염이 뽑혀 떨어졌고, 황제의 활도 아래로 떨어졌다. 황제가 승천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성들은 그의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정호(鼎湖)라고 했고, 황제의 활은 ‘오호(烏號)’라고 했다.”

‘사기(史記)’는 학술계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중국 역사서다. 저자인 사마천은 상고의 역사를 적을 때 각종 자료를 수집한 후 확신할 수 없는 내용은 가차 없이 버리고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상고 시기 연보(年譜)를 기술한 ‘역보첩(曆譜諜)’(이미 유실됨)을 읽은 후 ‘고문(古文)이 모두 다르고 일치하지 않는다’라며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천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황제의 ‘백일비승’은 빼놓지 않고 언급했는데, 내용은 많지 않지만 여전히 도가(道家)에 호의적이었던 사마천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이십사사(二十四史)’ 정사는 모두 예(禮)로 천하를 다스리고, 덕으로 인륜을 대하는 시각에서 기술됐기에 ‘백일비승’ 등 수련계 사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하지만 황실이 주도한 유서(類書.백과사전)에는 대량의 기록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송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편찬된 ‘태평광기’에는 도가 수련자들이 ‘비승’, ‘우화(羽化)’, ‘시해(屍解)’해 신선이 된 사례가 대량 수록돼 있다.

2) 장지화의 ‘백일비승’

‘태평광기’에는 당나라 유명 시인 장지화(張志和)의 수련 이야기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의 시는 잘 알고 있지만 그가 득도해 신선이 된 수련자라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장지화는 회계(會稽) 산음(山陰) 사람으로, 박식하고 문필이 뛰어나 진사에 급제했다. 그는 시도 잘 지었지만 서예와 그림에도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속선전(續仙傳)’에 보면 그를 ‘수진양기(守眞養氣)’하는 사람이라 “눈 위에 누워도 추위를 모르고, 물에 들어가도 옷이 젖지 않는다”라고 묘사했다. 그는 한때 황제의 총애를 받는 관리였지만 나중에는 관직을 내려놓고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산수를 즐겼고 공명(功名)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국공 안진경(顔眞卿)은 은둔 생활을 했던 장지화와 친교가 깊었다. 그는 호주(湖州) 자사(刺史.감찰관)를 지낼 때 장지화 등 문인들을 불러 술을 마시면서 ‘어부’에 관한 시를 짓게 했다. 장지화가 먼저 시를 지은 후 그것에 맞춰 다른 사람들이 시를 지었는데, 당시 장지화가 지은 시가 바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어부사(漁父詞)’이다.

서색산 앞에는 백로가 날고(西塞山前白鷺飛)
복숭아꽃 흐르는 강물에 쏘가리는 살이 올랐네(桃花流水鱖魚肥)
푸른 대나무잎 삿갓에 도롱이 걸쳤으니(靑篛笠綠蓑衣)
비껴 부는 바람과 가랑비에도 돌아갈 필요 없네(斜風細雨不須歸)

그 자리에서 장지화, 안진경과 육홍점(陸鴻漸), 서사형(徐士衡), 이성구(李成矩)는 총 25수의 시를 짓고 서로 칭찬하며 감상했다. 그때 장지화가 물감과 흰 비단을 가져오게 하여 시 ‘경천(景天)’의 뜻을 담은 그림을 그렸는데, 꽃과 나무, 새와 물고기가 자세하게 그려진 산수화 다섯 폭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이를 본 안진경과 여러 문객은 탄복해 마지않았는데, 기법이 뛰어나 지금까지도 따를 자가 없다.

나중에 안진경이 평망역(平望驛)에서 장지화를 만났다. 이날 장지화는 술에 취하자 강에 돗자리를 깔고 홀로 앉아 웃고 떠들면서 시를 읊었다. 당시 장지화가 앉은 돗자리는 배가 나아갈 때처럼 물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 움직였는데,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렸다. 또 구름 속에서 학이 날아와 그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강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안진경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장지화는 돗자리 위에서 손을 흔들어 안진경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3) 안진경이 시해(屍解)로 신선이 되다

수련자가 원만해 인간 세상을 떠나는 방식 중에는 ‘백일비승’ 외에 시해(屍解)도 있다.

안진경의 이름으로 유명한 서체 ‘안진경체’는 ‘바르면서도 속박감이 없고, 위엄과 호쾌함을 모두 갖췄다’, ‘옛것과 통하고 모자란 듯 보이나 세련됐다’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중국 서예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초기에 쓴 ‘다보탑비(多寶塔碑)’, 중년에 쓴 ‘동방화찬(東方畵贊)’, ‘안근예비(顔勤禮碑)’, 만년에 쓴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등은 모두 뛰어난 서예 작품으로, 그의 수련 경지를 보여준다.

‘태평광기’에는 당나라의 저명한 서예가이며 태자태사(太子太師)인 노국공 안진경이 반란군 진영에 뛰어들어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태평광기 32권’에는 또 안진경이 죽고 10여 년 후 안 씨 집안 하인이 낙읍(洛邑)에서 그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안진경은 그 하인에게 “나는 도를 닦는 사람이기에 죽기 전에 신체를 온전하게 보전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시해(屍解)’의 방식으로 원만했음을 의미한다. 시해로 신선이 된 사람들은 가족들이 죽은 줄 알고 관에 넣어 매장하지만 나중에 보면 관 속에 대나무나 신발 한 짝만 남아있다. 이런 사람들은 득도해 신선계를 드나들 수 있지만 생전 모습 그대로 인간 세상에 남아 인연 있는 사람을 제도한다.

수련문화는 조대(朝代)마다 다른 형식으로 나타났지만 모두 수련에서 경지를 높이다가 귀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중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기공 붐과 특이공능(초능력) 붐이 일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반본귀진(返本歸眞)과 영원한 천국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전(神傳)문화는 사람의 품성과 수련의 근본이 되는 도덕을 다져줬기에 ‘인과응보’의 이치는 중국인들의 뼛속에 새겨져 있다.

(계속)

 

원문발표: 2023년 9월 14일
문장분류: 천인(天人)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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