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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인 대인 (真善显大忍) ㅡ’4.25′ 8주년을 맞이하여 씀

글/어우양 페이(欧阳非)

[명혜망 2007년 4월 23일] (명혜평론) 1999년 4월 25일 만인(萬人)이 상방하기 시작한 후부터, 8년 동안 평화적, 이성적으로 박해를 반대하고 있기까지 파룬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바람을 겪었다. 8년 동안 받은 고난이 얼마인지, 간난신고가 얼마인지 일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파룬궁은 이렇게 걸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정부에서 연마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 정말로 좋다고 여겨지면 그러면 집에서 남몰래 하고 바깥에 나와서 말하지 말라. 파룬궁은 ‘진선인’을 말하는데 그럼 왜 ‘참’지 못하는가 ?”

이렇게 말하는 배후에는 동정과 함께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섞여 있다. 하나는 공산당이 얼마나 흉악한데 그와 싸워서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는가? 왜 좀 참지 못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면서 박해를 반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도리어 ‘참음’이 없다고 여긴다.

“참음”, 도대체 무엇이 참음인가 ? 어떻게 하는 것이 비로소 참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

사람들은 늘 하는 말이 “참”을 참자는 마음 심( 心)자 위에 칼(刀) 한 자루 놓은 것으로, 마음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것이라고 하는데, 바치고, 견지해야 하며, 받아도 당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당신은 해냈다는 것 등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장쩌민 집단의 대법과 사부님에 대한 악독한 공격과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에 직면하여 다른 수련생들은 상방가서 진상을 밝히려 했을 때 그는 가지 않고 “집에서 남몰래 연마”하였는데 그는 이것이 바로 참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한 번 말해보자 “집에서 남몰래 연마”하여 도대체 무엇을 “참았는 가를?”

신문,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에서 하늘 땅을 뒤덮을 듯 파룬궁과 그 창시인을 중상 날조하여 비방하고 있을 때 그는 숨어 있었다. 직장에서 그에게 파룬궁을 연마를 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쓰라고 했을 때 그는 썼다. 이웃이 그에게 아직도 연공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머리를 저으면서 언젠가부터 연마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련생이 그에게 교류하려 가려고 해도 구실을 붙이면서 거절하였다. …… 그리고는 집에서 “남몰래 연마” 하였다. 직장에 여전히 출근 할 수 있고 학교도 여전히 다닐 수 있으며 봉급도 여전히 받을 수 있어, 취업, 승학, 간부승급, 집, 퇴직금, 아무 손해도 받은 것이 없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무엇을 “참고”있는가?

오직 공격을 받는 자, 모욕을 당하는 자 만이 참음을 말할 자격이 있다. “나의 선생님을 욕하는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나는 참았다”고 하는데 모욕을 받는 사람이 그의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선생님을 위해 참으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상해를 받는 것을 보고 나는 참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기에 그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참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두려운 마음과 각종 고려로 하여 “집에서 남몰래 연마”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정체인 대법과 갈라놓은데 불과하며, 장쩌민 집단과 중공이 파룬궁과 대법 사부님을 비방날조 할 때 자신은 방관자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텔레비전에서 날조하고 있는 그런 악독한 비방에 직면하여 그는 아마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낄 것이며, 대법과 사부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가책”은 “참음”이 아니다.

“참음”은 일종의 미덕이며 “진” “선”과 나란한 숭고한 미덕이다. “참음”은 “나약”과 “목숨을 아까워”하는 것의 대명사가 아니며, 이지적이고 청성한 마음속 선택과 무너뜨릴 수 없는 견정한 의지의 행위 표현이다 .

파룬궁 수련생들이 일을 떠나 대법을 수호할 때 , 그것이야 말로 자신과 “진선인”을 함께 연결한 것이며, 대법의 한 입자로 된 것이다. 대법을 겨냥해 온 모든 압력과 모욕을 대법 입자인 모두가 당하고 있는데, 모욕을 당하는게 있어야 “참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직장에서 당신더러 연마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을 때 당신이 거절 하였다면, 당신은 사업을 잃고 학업을 잃는 압력을 느꼈을 것이다. 당신이 세뇌반에 납치되어 당신에게 회개서를 쓰라 했을 때 당신이 거절하였다면, 당신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 혹형과 시달림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바른 믿음과 수련을 포기히지 않았을 때 당신은 당신 가족들과 직장에서 무리하게 오는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생명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생사존망의 거대한 압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

이런 각종 압력과 위험에 직면하여 당신이 자신의 양심을 어기지 않고 여전히 당당하게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아무 주저없이 진상을 밝히고, 진정한 마음을 지니고 선의를 품고서 사람들에게 대법은 좋다고 알려주고 “진선인”은 우주의 진리임을 알려 준다면, 이것이 바로 “참음”이다. 약한 신체로 쟝쩌민 집단이 조종하는 전반 국가 기계의 압력을 받아 가면서 비폭력적이고, 평화, 이성, 솔직, 선량, 당당하고 원망없음을 펼쳐 보인다면 이것이 곧 “대인”(大忍)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망치게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계책이다. 파룬궁 수련생이 수호하는 것은 “진선인” 우주 진리로서 쟁취하려는 것은 정정당당하게 정법수련을 하는 합법적 환경이며, 수호하려는 것은 대법이 부여한 매 한 사람의 심신이 선으로 회귀하려는 인연이다. 파룬궁 수련생은 다만 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또한 인류의 사한 것이 바른 것을 누르지 않는 천리를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 집에서 남몰래 연마”하는 것은 절대로 “진선인” 대법이 만들어 낸 수련인의 사상 방법과 사유 논리가 아니다. 진정으로 생명이 능히 무한히 아름다운 경계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대법이 모욕받고 멸시 당할 때, 세간 사람들이 진상을 모르고 인연을 잃게 될 때 파룬궁 수련생이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빨리 진상을 알려 사람들이 그 귀중한 인연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그들이 어찌 “집에서 남몰래 연마”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파룬궁의 8년 동안의 반박해가 비로소 국면을 열어젖혀 무수한 세인들이 진상을 알게 되었고, 대법이 비로소 80여 개 나라에 전해질 수 있었으며, 대법의 홍전은 인류의 역사를 열어놓을 수 있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였다.

사실 공산당의 강권폭력이 도의(道義)에 대하여 사람들의 신심을 훼멸 하였으며 공산당의 사악한 본성이 사회의 도덕을 패괴 시켰다. 중공이 통치하는 시회에는 “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선”이 없으며, 더구나 “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더욱 변이 되었다. 정의를 보고 용감히 뛰어드는 것은 바보 짓이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 되었다. “집에서 남몰래 연마” 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그의 첫 생각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사람들의 예봉을 피해자에게 돌리게 하였을 뿐 박해자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객관적으로 장쩌민 집단과 중공의 사악한 기염을 북돋아 주게 되었다.

“진선인”은 일체 (一体)를 원용 시킨다. 대법제자는 반박해 활동과 진상을 알리면서 진(眞)을 하였고 선(善)을 하였으며, 진과 선 가운데서 인(忍)을 실천 하였다. 파룬궁 수련생의 지불은 또한 공산당에 의해 파괴된 도덕을 바로 돌려 세웠으며, 중국사회, 나아가서 인류 도덕의 회귀를 위해 기초를 다져 주었다. 명백한 사람은 파룬궁이 8년동안 꾸준하게 이성적으로 박해를 반대해온 것은 “대선대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불을 가치있게 함으로써 인류에게 순정한 “인”을 펼쳐 보인 것이다.

문장발표 : 2007년 4월23일
문장분류 : [시사 평론]
문장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4/23/1532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