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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파리코뮌과 신고전주의 미술 (2)

글/ A.H.

[밍후이왕](전편에 이어)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계몽운동에 호의적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교과서에 바로 그렇게 쓰여 있고, 모든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계몽운동은 정상적인 전통사상을 가졌던 당시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한 세뇌 운동이었다. 목적은 사람의 바른 신앙을 사상으로부터 제거하고, 이후의 살인 혁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계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모든 업종에서 나왔지만, 아주 큰 공통점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전통 종교 신앙을 반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신에 대한 공경이 여전히 존재하는 시대를 암흑시대로 묘사하고, 스스로 ‘광명한 사람(현대 중국어에서는 계몽주의자로 해석)’이라며 허풍 쳤는데, 목적은 신앙을 소멸하고 마귀의 ‘광명’을 사람에게 가져와 ‘광명의 시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 사상가, 철학자, 사회학자, 이론가 등등 계몽시대에 두드러졌던 인물들은 사실 모두 선택되어 교과서에 수록된 사람들이다. 중국의 의무교육을 예로 들면, 중국공산당은 목적에 따라 교과서에 친공산당 관점의 역사적 유명인들을 선택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어려서부터 사령(邪靈: 사악한 유령)이 계획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게 했다.

상대적으로 정보가 개방된 오늘날, 일루미나티가 프리메이슨에 침투한 역사는 이미 한 가지 공개된 화제이며, 일찍부터 엄청난 비밀은 아니었다. 그런데 중국인이 잘 아는 수많은 역사적 유명인은 사실 모두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예를 들면 일 년 내내 기독교를 욕했던 볼테르, 무신론을 마구 선전했던 폴 앙리 디트리히 돌바크, 왕권신수설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몽테스키외 등등이다.

시대가 길어지자 어떤 사람은 비록 그가 백 퍼센트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명확한 역사자료는 없지만, 그 언저리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친밀하게 협력했는데, 예를 들면 무신론을 논증하는 책을 쓴 유물주의자 드니 디드로다. 그런데 서양 역사에서 유명한 수많은 성인과 그들의 자취는 오히려 중국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정부 기관이 통제했다.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에게는 각 시대에서 신령을 제멋대로 모독한 사람, 예를 들어 18세기의 볼테르, 19세기의 니체 부류의 사람이 루이 9세(성인으로 책봉된 프랑스 국왕, 정성스럽고 어진 정치와 덕행으로 유명함)보다 훨씬 많이 알려졌는데, 이는 모종의 음모로 통제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정식으로 배우고 숭배한 유명인 중 수많은 사람이 하늘과 땅을 상대로 싸운 광인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좋은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의 알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전혀 믿고 복종하게 할 수 없었던 무신론 ‘국교’인 ‘이성 숭배’의 단명은 숙명이었다. 에베르파의 많은 사람이 1794년 봄의 권력투쟁에서 세력을 잃고 살해되자 로베스피에르는 대중이 완전한 무신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해 일종의 색다른 유신론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종의 새로운 신앙,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모종의 자연신을 숭배하는 ‘지존자 숭배’를 발명해 새로운 국교로 삼았고, 1794년 6월 8일에 ‘최고 존재의 제전’을 내놓았다. 파리 지역에서는 자연스럽게 당시 선전 업무를 맡았던 다비드가 사람들을 샹 드 마르스 광장에 운집 시켜 거행했다.

图例:油画《战神广场上的至上节》(Fête de l’Être suprême au Champ-de-Mars),作者:德玛希(Pierre-Antoine Demachy),作于1794年。
 작품 예: 유화 샹 드 마르스 광장에서의 최고 존재의 제전’, 작가: 피에르 앙투안 드마쉬, 1794년 작.

이 새로운 국교는 당시 이미 사망한 볼테르 관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주 분명했다. 볼테르는 유물주의 경향을 가진 ‘자연신론’자였는데, 비록 사람이 알지 못하는 우주의 운행을 규정하는 지고의 힘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자연 규칙을 어기는 각종 현상과 기적을 부정했다. 그는 하늘의 아들로 불리는 사람은 모두 무당의 사기라며 천주교회를 적대시했고, 기독교가 맹목적인 신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심지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기꾼과 바보가 있는 한 종교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시대에 그처럼 대담하고 첨예하게 전통 종교를 공격한 것과 그 배후 세력의 종지와 지지는 갈라놓을 수 없다. 디드로, 볼테르, 돌바크, 달랑베르 등 계몽운동가가 함께 ‘백과사전’을 편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런 행위의 목적은 실증과학 지식과 무신론 관점의 힘을 빌려 이념상 종교 신앙을 대체해 전통의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사상의 기초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알듯이 괴이한 사교가 자연히 대중을 속일 수 없자 그들은 잠시 불량배 세력의 무력에 의한 강제와 학살 위협에 의존했다. 1795년 파리코뮌이 와해하고 무장세력이 교체되자 그들이 만든 이른바 ‘종교’를 정말로 믿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또 경신박애교(敬神博愛敎)부류와 유사한 새로운 것이 출현했지만, 모두 큰 풍파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각종 신교가 잇달아 튀어나오는 이런 현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모든 종교의 위상을 직관적으로 약화했다.

죽음의 예술

1793년 여름부터 1794년 여름의 1년 동안 자코뱅파가 주도한 파리코뮌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포와 폭력을 정부의 국책으로 규정해 정부 문서에 정식으로 써넣었다. 당시에 기록된 파리의 사형인 수는 2639명이었고, 프랑스 전국에서 처형된 사람의 총수는 1만6594명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더욱더 많은 사람이 법정의 정식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살해됐다.

1794년 6월 10일부터는 공안위원회가 후세에 ‘거대한 공포’로 불리는 법률을 통과 시켜 시행한 시기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하기 전 6월 10일부터 7월 27일까지 법률을 제정해 모든 시민에게 반혁명자와 그 당파를 체포할 권리를 부여하고, 체포된 사람을 치안 관리에게 인계하게 했다. 그리고 그 치안 관리는 체포된 사람을 반드시 즉시 정식으로 고발해야 했다. 동시에 악명 높은 혁명재판소는 체포된 사람이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스스로 변호하는 것을 금지하고, 판결 결과에 대해 항소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사형을 유일한 형벌로 규정하고, 죽은 자의 모든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다.

그래서 이렇게 무책임한 살인과 약탈을 부추기는 변형된 법률이 허락한 혁명재판소는, 단두대가 있는 현장에서 수천 명을 판결하고 처형했다. 사회의 부랑아들도 적지 않은 사람을 이른바 ‘반혁명분자’로 모함했고, 수많은 사람이 단순하게 의문이 든다는 이유로 체포돼 처형됐다. 당연히 또 적지 않은 사람은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맺은 사람을 이 기회를 이용해 제거했다. 혼란한 시국에서 폭도들이 약자를 공격해 죽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우리가 일찍이 알았듯이 이런 학살의 광분과 피비린내에 대한 갈망은 사령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현실 중의 폭력과 학살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걸음씩 수위를 높여 왔지만, 사령은 벌써 존재했고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 이 점은 인류의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예술작품에 반영됐다.

역시 당시의 대표 화가 다비드를 예로 든다. 다비드의 전기(前期) 작품은 주제에 있어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즐겨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1794년 세력을 잃기 전에 적어도 10폭에 달하는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렸다. 심지어 그중 절반의 제목이 바로 ‘모모의 죽음’이다. 예를 들자면,

‘세네카의 죽음’(1773년)

‘파트로클로스의 장례’(1778년)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1782년)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슬픔에 잠긴 안드로마케’(1783년)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1789년)

‘르 펠레티에의 죽음’, 또는 ‘르 펠레티에의 최후 시각’(1793년)

‘마라의 죽음’(1793년)

‘단두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1793년)

‘조제프 바라의 죽음’(1794년) 등이다.

图例:油画《荷拉斯兄弟之誓》(Le Serment des Horaces),作者:大卫(Jacques-Louis David),作于1784年。
 작품 예: 유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작자: 자크 루이 다비드, 1784년 작.

어떤 작품이 표현한 내용은 비록 죽는 장면이 아니었지만, 그 배후의 이야기와 구상은 무서운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유명한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다. 작품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와 이웃한 알바롱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쌍방은 각각 삼형제를 뽑아 3대 3으로 한판 대결을 보기로 약정을 맺었다. 로마 쪽에서는 호라스 삼형제가 뽑혔고, 적국에서는 퀴리아스 삼형제를 내보냈다. 결투 결과 퀴리아스 삼형제가 모두 전사하고, 호라스 삼형제 중 둘이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호라스 형제 중 한 명이 개선해 돌아올 때 그의 누이 카미유가 그의 전리품 속에서 외투 하나를 꺼냈는데, 그것은 그녀가 퀴리아스 형제 중 한 명을 위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원래 그녀는 그의 약혼녀였다. 카미유의 슬픔과 통곡은 오빠의 불만을 샀고, 결국 오빠는 그녀를 살해한 뒤 말했다. “감히 죽은 적을 위해 흐느끼는 로마 여인은 모두 마땅히 이렇게 사형당할 것이다.”

图例:油画《侍从给布鲁图斯带回他儿子们的尸体》(Les licteurs rapportent à Brutus les corps de ses fils),作者:大卫,作于1789年。
 작품 예: 유화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 작자: 다비드, 1789년 작.

이렇게 인간성을 버린 ‘대의멸친(大義滅親)’ 식의 소재는 대혁명에 영합해 공화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1789년 창작된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구현됐다.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로마 왕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슈퍼버스를 축출하고 로마 공화제의 설립자이자 집정관이 됐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은 오히려 공화제 전복과 군주제 복귀를 시도했다. 정권과 아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을 처형하고 로마 공화제와 자신의 권력을 지켜냈다.

(계속)

원문발표: 2020417
문장분류: 詩文樂畫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7/4038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