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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파리코뮌과 신고전주의 미술 (1)

글/ A.H.

[밍후이왕] 파리코뮌 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사람이 1871년경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탈취한 짧은 정권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모두 알듯이 프랑스 역사에는 사실 두 차례의 파리코뮌이 출현했다. 사람들이 잘 아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이미 제1차 파리코뮌이 출현했는데, 1871년 파리코뮌은 사실상 대혁명 시기 파리코뮌을 계승한 명칭이며, 조직 구조와 폭력 수단이 연장된 것이다.

현존하는 대량의 사료와 각종 연구는 두 차례 파리코뮌 배후에 모두 비밀 교파 조직인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의 그림자가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1792년 파리코뮌과 1871년 파리코뮌은 조직 명칭, 행동강령에서 구체적인 학살 수단까지 모두 극도로 유사하다. 양자에 비록 수십 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지만, 유사한 성질의 집단이 유사한 형태의 일을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일부 공산 이론은 습관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자산계급혁명’으로 규정하는데, 사실 이른바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구분 자체가 바로 공산 사령(邪靈, 사악한 영혼)이 대립과 살인을 부추기기 위해 날조한 억지스러운 정치 구호다. 오늘날 한 명, 한 명의 부유함이 국가의 부(富)에 필적하는 중국공산당 권력자 중 누가 무소유의 ‘무산계급’이겠는가?

사령은 사람들을 강제로 이른바 서로 대립하는 ‘계급’으로 분류하고, 다시 ‘계급투쟁’으로 속여 하나의 집단이 다른 하나의 집단을 죽이도록 선동했으며, 그 속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대혁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혁명’의 뜻이 ‘생명에 대한 혁파’로 이해될 수 있고, 통속적인 말로 바꾸면 바로 ‘살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혁명’을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대학살’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 역시 사실이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예술은 마침 거세게 일어나는 신고전주의의 조류 속에 있었는데 사령, 악귀와 수많은 내외 요소의 개입도 예술 유파를 일종 복잡한 상황에 부닥치게 했다. 저자가 이전의 글에서 1871년 파리코뮌 화가들이 추종한 사실주의 화파와 이후 공산 소련이 스타일과 기교에서 표현 내용까지 답습한 그런 것들을 언급했는데, 모두 사령의 요소로 충만해 있어 쓸모없는 것을 버릴 것이 요구된다.

한편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신고전주의는 그 자체가 사령을 위해서만 생겨난 것이 전혀 아니며, 단지 발전과정 중에서 사령의 영향을 받고, 일정 기간 이용당한 것이다. 그래서 또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부류의 순수 공산주의 예술 유파와 동등하게 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이런 신고전주의 예술을 연구, 학습하는 과정에서 사령에게 오염되는 것을 피하고자 확실히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극히 중요한 것이다. 비록 이야기하려면 각종 요소가 뒤섞여 복잡하지만, 역사는 바로 이런 것으로, 역사 속 예술 유파와 예술가들이 검지 않으면 곧 희다는 것이 전혀 아니며, 수많은 일에서 모두 하나씩 맥락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고전주의 스타일 태동의 예술적 배경

16세기 이후, 갈수록 꼬이는 종교개혁에 제약을 가하기 위해 천주교회는 종교 주제를 그릴 때 작품 속에 반드시 성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도록 예술가들을 독려했고, 천당을 향한 신도들의 동경과 그리움을 자극함으로써 17세기 바로크풍의 탄생과 발전을 촉성했다. 교회의 천장화나 자유자재한 신의 세계를 표현한 미술 작품에서 모두 볼 수 있듯이 움직임으로 가득한 역동적인 구도와 찬란하고 웅장하며 성스러운 광경, 점잖고 호화로우며 정교한 장식, 깊은 감동을 주는 빛나는 채색 등 많은 예술적 요소가 사람들 앞에 웅장하고 위대한 천국 세계를 펼쳐놓았으니 이로써 표현한 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찬가였다.

당연히 예술이 표현하는 스타일과 주제는 다양하다. 특히 인간 세상에서는 평화와 이성이 곧 정상적인 상태로, 이 점은 미술사에서 바로크와 병행한 고전주의에서 더욱 많이 나타난다. 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을 본보기로 구현된 미학의 관점으로, 이성을 숭상하고, 규범을 따르며, 우아하고 조화로운 예술을 통해 진리를 찾는다.

그런데 계몽주의 출현에 따른 실증과학의 발전과 각종 계몽사상, 무신론, 유물론의 확산으로 신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 약화하자 사람들은 갈수록 신에게서 멀어지고 현실을 중시하게 됐다. 18세기 바로크양식을 계승한 로코코 시기에 이르러 예술작품의 발전은 두 방향으로 나타나게 됐다.

종교예술 속에서 예술가들이 예전처럼 천국의 신성함과 찬란함을 표현했지만, 예술 형식상으로는 과거 바로크풍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광경 외에도 예술 기법상의 가볍고 정교함과 장식 요소의 풍부하고 세밀함 등 새로운 요소를 중시했다.

한편 세속의 예술 중에서 더욱 많이 그려진 것은 바로 인간 세상의 겉이 번드르르하고 감정적이며 섬세하고 로맨틱한 그림이었다. 이전 사람과 비교해 이때의 세속적 주제는 상류사회의 즐거운 생활과 애정을 추구하는 등의 내용이나, 신화를 소재로 암시하고 생활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줄곧 고전주의 전통을 부르짖은 전통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서는 당시 사회의 심미적 취향에 맞추기 위해 그런 스타일의 대표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1765년부터 1768년까지 원장을 맡는 등 로코코 양식을 창조한 예술가들이 원장과 교사 역할을 많이 맡았다.

하나의 예술 스타일을 어떤 사람이 좋아한다면 자연히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고전 취향을 추구하는 일부 예술계 인사는 로코코풍의 자질구레하고 번잡한 장식과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풍조에 점점 싫증을 느껴 이전의 고전주의 스타일을 찾았다. 동시에 계몽운동이 강력하게 제창하는 이성주의 사상이 보급되는 가운데 그런 추세는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프로이센 고고학자 겸 예술사가(藝術史家)]을 대표로 하는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고대도시 유적 현지 조사는, 사람들에게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조제프 마리 비앙, 이탈리아의 폼페오 바토니 등 유명 화가의 구체적인 실천에 따라 신고전주의 화풍이 점점 형성됐다.

빙켈만은 이상적인 방식의 문화로 고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재건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와 일부 고고학자가 보았던 고대의 조소와 건축 문화재는 사실 오랜 역사와 시간이 연마한 후에 남겨진 상태였다. 오늘날 현대 과학기술 연구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건축이나 조소는 사실 모두 당시 사람이 풍부한 색채로 칠한 것이었으나, 2천 년 동안 도료가 천천히 침식, 풍화되어 색채를 잃은 상태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시간의 경과로 인해 조화롭고, 간결하고, 단일한 무색 스타일을 가지게 된 것이었지, 원래 화려한 색채를 가진 고대 그리스 예술의 진정한 면모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오해한 빙켈만은 신고전주의 예술의 이상은 마땅히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 유파의 수많은 예술작품이 표현한 소박, 또렷함, 장중함 등의 특징을 보면 그런 예술적 이상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준 직관적인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술과 정치

공산 사령이 인류의 예술을 공공연하게 침범하고 통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술 스타일의 다원화를 포함해 예술 발전과정에서 출현한 각각의 큰 유파와 분파를 관용적인 태도로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사악한 요소가 체계적으로 인류의 예술을 장악하고 살인 혁명을 선전하기 시작한다면 그런 성격의 것들을 더는 정상적인 예술과 함께 취급할 수 없다.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는 예술가와 각 업종의 사람을 막론하고 광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데, 사실상 바로 사상적으로 사령의 조종, 통제를 받는 것이다.

본문이 서술하려는 내용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광적인 역사 시기에 집중돼 있고, 그래서 열거하는 일련의 작품과 사료에서 그 당시의 특징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사령에게 사상을 조종당한 사람이 바로 악마라는 것은 전혀 아니며, 많은 상황에서 사람이 사령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미혹 중에 산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사회 조류 속에 흔들거리는 가운데 많은 순간 자기 뜻대로 하기 어렵고, 어쩔 수 없이 사령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그래서 흔히 사령에게 이용당해 판단력을 잃은 사람들이 나쁜 일을 저지르지만, 사람의 본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예술이 신고전주의 예술 전체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해 프랑스와 세계 각지의 수많은 확실한 신고전주의 작품이 사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데, 역시 참고로 삼아 학습할 가치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가장 유명한 신고전주의 화가가 자크 루이 다비드였다. 다비드로 말하자면 미술을 모르는 수많은 중국인도 알 것인데, 바로 중국 학생의 미술 교과서에 있는 마라의 죽음을 그린 화가다. 다비드는 작품을 통해 폭력과 무참한 살인을 부추긴 인간 백정을 인자하고 용감한 영웅으로 미화했다. 중공 정권은 ‘혁명 투쟁’을 퍼뜨리기 위해 이 그림을 선전했고, 모든 중국 학생에게 이를 배우게 함으로써 뇌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다비드는 18, 19세기가 교차하는 시점에 유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논란도 비교적 많은데, 그중에는 그의 우수한 회화 기교에 대한 찬사도 있고, 예술이 폭력 혁명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을 애통해하는 시각도 있다.

예술은 최초에는 바로 신을 표현해 신전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래서 신을 찬양하고 도덕을 지키는 것을 소임으로 여겼기에 예술가들의 기점이 줄곧 아주 높았다. 미술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의 유명 예술가는 항상 교황, 주교, 제왕, 귀족들과 접촉했으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시야가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예술이 표현한 소재는 기본적으로 모두 종교 소재였고, 이후에 세속적 왕권과 관련한 소재가 나왔지만, 이것도 ‘신으로부터 받은 왕권’이라는 이론적 기초 위에 세워진 것으로, 결국은 역시 신과 관련이 있었다.

우수한 예술가는 일반 대중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회화로 말하면 일찍이 중세 유럽에서 사람들은 줄곧 회화를 불가사의한 작업으로 여겼다. 화가는 한 장의 백지나 하나의 목판에 자연경관이나 실제 인물의 모습을 비출 수 있었다. 특히 그림을 아주 잘 그렸을 때 당시 사람들은 화가의 기법을 사실상 신이 하사한 법술로 여겼다. 그래서 기예가 출중한 화가는 신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으로 여겨져 줄곧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창작의 자유를 누렸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에게는 자존심이 있었고, 미술 이론의 정형화된 구조 내에서는 정치, 권력 요소의 영향을 예술에 반영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각가를 예로 들면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자신의 조각상을 부탁했는데, 카노바는 그리스 시기 조각 스타일의 유행에 따라 나체 형상으로 조각하려 했다. 나폴레옹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옷을 입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각에 옷을 입혀 달라고 했지만, 카노바는 싫은 내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인과 똑같이 저희에게도 저희의 언어가 있습니다. 만약 어떤 시인이 사회 하층민의 관용적인 말과 사투리를 한 부의 비극에 쓴다면 당연히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희 조각가도 조각상에 현대의 옷을 입혔다가 똑같은 비난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전장에서 적수가 없던 나폴레옹도 자신의 조각상이 나체가 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가 항상 욕을 먹는 부분은 대혁명 시기에 공개적으로 예술을 퍼뜨리며 혁명 정치를 위해 일했다는 것인데, 이는 대다수 예술가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예술사가들이 다비드에 대해 논평할 때는 늘 예술 밖의 내용을 언급하는데, 곧 그에게 아주 강한 정치 민감성과 시대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비드는 루이 16세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정부의 주문을 받으며 발전하기 시작했고, 왕실 회화·조소 학원에 발탁되어 들어갔다. 그런데 정치의 풍향이 혁명가에게 쏠리자 다비드는 또 적당한 시기에 혁명 쪽으로 붙어 일정한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 파리코뮌에서 그는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의 단짝이 됐고, 자코뱅파의 일원이 되어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다비드는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왕실 회화·조소 학원을 폐쇄했다. 파리코뮌의 ‘공포정치’ 시기(1793~1794년, 중국공산당은 이를 미화해 ‘자코뱅파 독재 정치’로 지칭함)에 다비드는 공포정치 기구인 공안위원회의 위원을 맡아 폭력 혁명 선전을 책임졌다.

각종 새로운 ‘국교(國教)’의 배후

역사적으로도 권력과 이익에 아부하며 빌붙은 예술가를 적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다비드가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가 일했던 정치 세력이 정교 신앙을 박해하고 탄압한 것과 아주 큰 관계가 있다. 어쨌든 2백 년 전에 사람이 신을 믿는 것은 여전히 아주 보편적이었다. 신을 배척하고, 전통적인 종교 신앙을 짓밟고, 대학살을 저지른 정권을 위해 찬가를 부르고 선전을 한 것은 바른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분명 어려운 일이다.

마르크스의 그릇된 설을 종지로 삼는 교과서는 늘 유물주의 각도에서 출발하며, 프랑스 대혁명이 서로 다른 사회계층의 경제적 이익이 충돌해 발생한 것으로 쓰여 있다. 사회 각 계층의 모든 사람이 재물을 목숨처럼 여기는 것으로 묘사하고, 일체를 금전으로 시작하는 수전노로 묘사해 마치 자고이래로 인류가 돈만 믿은 것처럼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새겼다. 사실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며 세뇌의 수단이다. 살인하고 재물을 강탈하는 것은 흔히 모두 혁명가들의 하수인이나 하층의 총알받이들이 열을 올리는 활동이며, 사회를 바꾸려는 생각을 품고 다른 생각 없이 이를 추구하는 조직층과 지도자에게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18세기 말부터 오늘날까지 늘 존재한 이론은 프랑스 대혁명을 일루미나티가 통제하는 프리메이슨이 추진해 실현했고, 자코뱅파 안에 거대한 인원의 프리메이슨 회원이 있으며, 이들이 모종의 정신적 요구에 엄격히 따르며 각자 일들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수많은 혁명 간부의 생활에는 일종 종교 방식의 청렴결백함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물질이익을 이용해 사회 하층의 의용군과 사회의 각종 불량배를 대상으로 반역을 선동했지만,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요구가 엄격했다. 후세에 로베스피에르 등의 살인 습성이나 극단적 정치에 대해 수많은 고발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들의 개인 생활이 사치스럽거나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늘날 대량의 서방 역사 연구에서 모두 명확하게 지적하기를 프랑스 대혁명 배후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모두 일종 정신적인 것이 내부에서 관통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지도하는 사상은 절대 금전이 아니었다고 한다. 혁명 세력은 등장 이후 먼저 창끝을 신앙에 겨누어 전도사의 환속을 요구하고, 교당을 폐쇄하며 전도사를 학살하는 것으로 발전해 다시 새로운 국교를 건립하는 등 일련의 행동을 벌여 사람들에게 명석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만약 정권 찬탈이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면 바른 믿음을 소멸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목적일 것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소멸하기 위해 자코뱅파를 이끄는 혁명 세력은 전통 종교를 금지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의 환속을 강요하고 전도사와 신도를 학살했다. 1792년의 ‘9월 학살’에서만 1400명이 피살됐고, 이들 중 대다수가 각종 허황한 죄명에 따라 임시로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성직자 기본법’에 대한 복종 선서를 거부한 천주교 전도사 233명도 포함돼 있었다. 실제로 선서 절차를 완료한 적지 않은 전도사도 체포되어 해를 입었다. 보다시피 그런 이른바 죄명과 이유는 피에 굶주린 사령이 마음대로 갖다 붙인 억지 핑계일 뿐이었다.

전통 신앙에 대한 탄압은 새로운 역법을 반포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자코뱅파의 무신론자 의원 샤를 질베르 롬과 국왕 사형에 찬성표를 던진 지롱드파 의원 클로드 조제프 페리가 한 무리의 학자와 과학자를 모아 공동으로 이를 제정했다. 전통 역법은 예수 탄생의 해로 시작하는데, 오늘날 서기 원년으로 부른다. 동시에 서방에서는 각 날짜에 대응하는 성인의 이름이 있는데, 이런 전통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프랑스 공화력’, 또는 ‘프랑스 대혁명 역법’으로 불린 새로운 역법에서는 종교 신앙을 적으로 여겼으므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탄생일인 1792년 9월 22일을 ‘공화국 원년 1월 1일’로 삼았고, 원래의 날짜, 달의 종교나 신화적 색채를 가진 이름은 식물, 광물, 동물, 자연현상 등 유물론과 무신론 범위 내의 단어로 바꾸었다. 이런 행위는 전통 역법과 종교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국민 생활 속 정교 신앙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사에 항상 나타나는 ‘안개의 달(2월)’, ‘뜨거운 달(7월)’ 등의 단어는 프랑스의 전통 어휘가 전혀 아니었고, 전통적으로 달을 나타내는 단어를 파괴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이었다. 이런 역법은 1793년 10월 6일부터 법률로 통과되어 정식 채용됐고, 1805년 9월 9일 나폴레옹에 의해 폐지됐다. 그러나 1871년 5월 파리코뮌 당시에 잠시 되살아나 8일 동안 사용됐다.

당시로부터 전해진 일부 미술 작품 속에서 우리가 또 볼 수 있는 것은 하층민이 귀족의 화려한 스타일을 질투함에 따라 사회의 풍속, 생활에서 복장에까지 모두 혁명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발과 화려한 유행복 등등을 착용하지 못하게 압력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 문헌에서는 사람들이 말하고 연설할 때 전통적인 선생, 여사 대신 행정적인 단어인 시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고, 일부 초기 공산주의 파벌은 서로 동지라고 불렀다.

비록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현상이 사람들의 전통적인 사상에 충격을 주었지만, 사람의 관념은 즉시 변할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일반 대중이 기독교가 없는 생활에 단번에 적응할 수 없었으니 사령은 바른 믿음을 소멸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악한 세력은 일부 사교(사이비교)를 만들어 원래의 전통 종교를 대체했다.

1793년 가을, 파리코뮌 속의 무신론자 자크 레네 에베르와 피에르 갸스파르 쇼메트는 일종의 무신론 종교인 ‘이성 숭배’를 내놓아 프랑스의 국교로 삼았다. 그 교리는 모든 신을 부정하고 사람의 이성만 숭상하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금지됨에 따라 노트르담 대성당 등 원래의 종교 건축물들은 ‘이성 신전’으로 개조됐고, ‘이성절’에 허구의 무신론 ‘이성 여신’에게 숭배의식을 거행하는 데 쓰였다.

图例:蚀刻版画《理性节》(Fête de la Raison),15×9.5厘米,作者不详,作于1793年。
 작품 예: 에칭 판화 이성절’, 15×9.5cm, 작자 미상, 1793년 작.

철학을 배운 사람은 이렇게 인간의 이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신을 부정하는 사교의 배후에 계몽운동 사상의 흔적이 있음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한편 ‘계몽시대’를 지칭하는 프랑스어의 정식 명칭은 ‘Siècle des Lumières’로, 직역하면 ‘광명의 시대’다. 17세기 하반기에는 또 ‘Siècle éclairé’라는 말이 출현했는데, 직역하면 ‘밝혀진 시대’다. ‘일루미나티’도 이에 따른 이름을 얻었는데, 라틴어의 ‘계몽시대(Aevum Illuminationis)’라는 단어와 라틴어의 ‘일루미나티(Illuminati)’는 어근상 완전히 일치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서방 문화 속의 마귀 루시퍼(Lucifer)라는 이름의 뜻이 ‘Porteur de lumière’, 즉 ‘광명을 가져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루미나티와 계몽운동은 누가 가져온 것인가? 마귀가 가져온 ‘광명’은 진정한 광명일까?

(계속)

원문발표: 2020414
문장분류: 詩文樂畫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4/4036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