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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황으로 유배됐던 형제들의 인터넷 봉쇄 돌파를 돕고 싶다.” 

소소한 탈당 이야기 6가지

글/ 리친

[밍후이왕] 2020년 3월 상하이(上海)에서 온 취후둥(屈湖東)은 탈당 성명에서 “그 해 상산하향( 上山下鄕, 도시의 청년을 농촌과 산간벽지로 보낸 운동)으로 베이다황(北大荒)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이후 수십 년간 점차 중공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나중에 또 인터넷 봉쇄 돌파하는 방법을 배워 유튜브 등을 볼 수 있었다. 노년이 되어서야 중공이 나와 주변의 일반 서민들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범죄를 알게 됐다. 나는 이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는 기능을 베이다황으로 유배됐던 우리 형제와 속아서 함께 안후이(安徽)의 사선도시(四線城市)로 가서 교사가 된 상하이 지식 청년들에게 가르쳐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취후둥은 “이번 전염병 사태의 많은 혼란한 상태는 나에게 중공의 실체를 더욱 깊이 각인시켰다. 나 자신이 탈당하는 것은 물론 나의 후손들에게도 중공에 가입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해외의 에포크 타임스(Epoch Times) 사이트에서 삼퇴(중공의 당, 단, 대에서 탈퇴하는 것을 이르는 말) 성명을 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사고로 글을 많이 남겼는데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점차 깨달았는지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고했던 것이 인터넷 봉쇄 돌파 후 실증되다

2019년 11월 23일, 가명 ‘신쩌창(信則強)’이란 사람은 그가 수년간 진상을 추구해온 진실한 과정을 얘기했다.

나는 중공 당과 중공군에 30여 년의 세월 동안 근무했던 퇴직 군인으로, 사관학교 시스템에서 중국공산당 역사, 중국혁명 역사,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전부 공부했는데, 이치대로라면 나는 철저한 중국공산당 도당이다. 다행히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뇌와 도도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나의 사상 전환은 2002년 제16회 인민대표대회에서 국유기업 개혁을 심화시키자는 제안이 나온 후부터 시작되었다. 많은 국유기업이 민간 기업에 매각되었다. 공산주의는 사유제를 없애려는 게 아니었던가? 사유제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영기업은 왜 경영해나가지 못하고 반드시 시장경제를 해야 하는가? 설마 공유 체제가 틀렸단 말인가? 왜 서방 선진국들은 모두 사유제를 하는가?

2000년 이후에 이르러서야 나의 사업은 작은 성과를 냈다. 드디어 가정이 안정되었고 일도 잘 돌아갔으며 접대도 많이 적어져서 더 많은 여가를 가지면서 인생과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공산당의 사업에 문제가 있고 공산주의에 문제가 있으며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중국혁명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돌연히 깨달았다.

그래서 서점을 뛰어다니며 헌정 관련 책을 많이 사서 자유 민주 헌정과 루소, 존 로크, 몽테스키외, 홉스, 토크빌, 애덤 스미스 등등을 연구했으며 특히 하이에크 자유 철학 논집들이 내게 많은 계발을 주었다. 여러 해 동안 모은 사해(辭海), 중국 대백과사전, 군사 대사전 등 공구서와 학교에서 배운 마르크스주의 이론 교과과정 교재들도 다 끄집어냈다. 나의 사상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성으로부터의 깊은 변화였다.

내가 진정으로 바뀐 것은 2005년 어느 날이다. 내가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는 중 한 나이든 아주머니가 내 옆을 잠깐 지나가다가 내 손에 편지 봉투를 안겨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내가 열어보니, 그것은 두 장의 CD였는데, 하나는 큰 크기였고 다른 하나는 작은 치수의 CD였다. 큰 CD는 션윈 공연이 담겨있었고 작은 것에는 둥타이왕(動態網)을 설치하는 프로그램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것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에 설치했다. 나는 그 후 더 많은 진상을 알게 되었다. 공산당의 사악함을 본질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고 진상은 나의 사고와 판단을 실증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매일 에포크 타임스와 NTD TV를 보면서 공산당의 사악한 본질을 더욱 똑똑히 알게 되었다. 나는 능력이 닿는 대로 중공을 폭로하고 자유, 민주, 법치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널리 알렸다. 중화민족의 각성과 미래를 위해 분발하여 글을 써서 주변의 매 한 사람, 가족, 친척, 친구, 학우들에게 최대한 감화를 주어 중국의 미래를 위해 미약한 힘을 다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엄정히 탈당을 성명하는바 결코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한 노인의 각성

2020년 5월 8일 베이징 출신의 장아이위안(張愛緣) 노인은 “나는 올해 80대 중반이고 공산당에 가입한 지 70년이 다 되었다. 지금 외손자의 도움으로 인터넷 봉쇄를 돌파했고 타자도 해주었다. 나는 탈당하겠다”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는 일본인은 미워하지 않고 러시아 오랑캐들을 가장 미워했다. 많은 러시아인이 자주 마을로 와서 여자들을 강간했는데 우리는 이런 두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고향에서는 너무나 가난해서 여자아이들은 생계를 위해 일찍부터 나가서 일했는데 나도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중공은 아주 빨리 정권을 세웠고 나는 동북에서 일했다. 얼떨결에 청년단과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시의 ‘진보 청년’이 되어 버렸는데, 사실 나에게는 배를 채우는 것이 가장 큰 만족이었다. 소련에 대한 내 인상은 변함이 없었고 그것은 날강도 강간범 국가였다.

나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지난 경자년(1960년)의 대기근이었는데, 지금 보면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만든 인위적인 기근이었다. 그때, 나는 줄을 서서 물건을 사러 갔다가 기절했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래도 도시였기 망정이지 농촌은 더 비참하고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나중에 직장을 베이징으로 옮겼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우리 일가족 몇 명은 서북의 오칠간부(五七干校)학교에 유배되어 사상을 개조당했다. 이것은 속칭 ‘지구 수리’이다. 그 열악한 땅은 모두 알칼리성 토양이어서 몇십 리를 걸어도 사람과 집이 보이지 않아 먹을 수도 없었고 마실 수도 없었다. 딸은 그곳 제지공장에서 진폐병(尘肺病)에 걸렸으며, 아들은 아직 어렸기에 진흙 구덩이에서 수영을 배웠는데 후에 도시로 돌아와서야 감히 머리를 물속에 넣고 숨 쉬는 법을 연습할 수 있었다. 북서쪽으로 유배됐던 그 시절은 내 평생의 쓰라린 기억이 되어 평생 북서쪽을 다시 가본 적이 없다.

은퇴할 때까지 일하고 노후는 그나마 평온한 편인데 외손자가 내게 인터넷 봉쇄 밖의 진상을 자주 알려주곤 했다. 공산당이 갈수록 더욱 독재하며 후퇴시켜 나라를 다시 마오쩌둥(毛澤東) 시기로 돌아가려고 한다. 제2의 북한으로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로 돌아가려고 하며, 친척들이 서로 고발하고 검거하는 감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내 고향은 지금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둘째 오빠의 집에는 구들장 하나밖에 없는데도 이른바 소강사회(小康社會)라고 한다.

이번 펜데믹을 통해 나는 제2의 경자년(慶子年)을 겪었다. 이로 인해 나는 중공의 추악한 모습을 철저히 분별했다. 그것은 국민에게 불행만 안겨주는데, 지금은 전 세계에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공산당의 당, 단, 대 탈퇴를 성명한다. 이것은 한 노인의 각성이고 우리 아이, 손자 세대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며 공산당이 없는 중국이 더욱 좋아지고 인화(人禍)가 적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 대학 교사의 선택

2020년 7월 29일, 대륙에서 온 샤오쥔(小軍)은 삼퇴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내 한 대학의 교수인데 줄곧 에포크 타임스와 NTD TV 프로그램을 계속 시청하고 있다. 어렸을 때 대기근, 문화대혁명 등 공산당이 초래한 재앙을 윗세대에게 전해 듣고 어렴풋이 그 시절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1960년에는 가족 중에 이모가 굶어 죽었고 외할아버지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때 혹형 고문과 투쟁을 당해 건강이 줄곧 좋지 않아 50대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겨우 몇 살밖에 안 됐다.

상대적으로 비교적 평온한 시기에 자랐지만, 공산당의 그런 짓에 대해서는 매우 똑똑한 인식이 있다. 그 본질은 바로 두 글자 ‘위선’이다. 사람마다 하는 말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었고, 선전한 것과 실제 상황은 서로 모순됐다. 관리의 자녀와 친척들은 모두 외국으로 이민해서 외국 시민이 되었다. 하지만 국내의 민중에게는 세뇌하고 애국하도록 하는데 비참한 것은 많은 사람은 ‘나라’가 무엇인지 명확히 모르며 무엇이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대학원을 다닐 때, 청년단 지부 서기의 권유와 원스톱 서비스를 견뎌내지 못해 그는 모든 입당 자료를 나에게 가져다주면서, 나보고 그대로 베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입당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일생 중의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다. 나중에는 대학교에 교수로 들어갔는데 이미 도둑의 배에 탔으니 생계를 위해, 뇌졸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탈당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오래전에 인터넷 봉쇄를 돌파하여 공산주의 사당에 대한 인식이 대다수 사람보다 더 깊기에 내 영혼과 사상이 자유로 돌아올 수 있도록 공산 사당에서 탈당하는 것을 선포하는 바이다. 전 세계의 모든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여 중화민족을 71년간 해친 사악한 조직을 무너뜨리고 중화민족에 정토를 되돌려주기를 바란다!

몰래 발끝으로 바닥에 ‘아니오’라고 쓰다

2020년 7월 28일, ‘칼갈이군’이라는 가명의 사람은 “나는 봉쇄 담장 속 말단 공무원으로서, 권세도 없고, 인맥 배경도 없으며, 해외 재산도, 친척도 없으며 심지어 출국할 생각도 없다. 생활도 이제야 입에 풀칠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개가죽’을 쓴 ‘양’이라고 자칭해왔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적색 교육’을 받아 피해가 크다. 다행히도 나는 전통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인간성의 기본선을 조금이나마 남겼는데 바로 성실과 정의감이다.

1995년 말 입당 원서를 내지 않은 채 타의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데 2년이 지나서야 지도부에서 입당 원서와 사상보고서를 작성해서 보완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지금도 나에게 아주 불만이다. 할아버지는(바로 일반 농민이셨는데 부자 지주를 투쟁하고 나쁜 우파를 반대한다는 지표의 피해자이다) 중공의 ‘삼반오반(三反五反) 운동’ 시기에 온갖 비판과 괴롭힘을 겪었다. 일가족도 연루되어 장기간 박해에 시달리다가 결국 할아버지는 1960년에 산 채로 굶어 죽고 시체도 남아있지 않아 매년 청명에 조상님께 제사 지내는 날이 오면 아버지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울 때였다.

그때 나는 일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특별히 인내하며 고생도 잘하는 간부였고, 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하는 ‘일개미, 황소’였다. 나이가 들어가고 체험하고 겪은 것이 많아짐에 따라 서서히 나는 독립적인 사고를 하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진실한 면목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아울러 자신이 처한 이 부패하고 낙후된 사악한 조직에 속해 있는 것에 깊은 치욕을 느꼈다. 2011년 이후 나는 주동적으로 탈당을 제출한 적이 있었으나 회사의 당 건설 사업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는데 한동안 탈당하려고 해도 길이 없었다. 나는 그 후 매번 ‘입당 선서를 다시 되풀이’ 의식에 참석하라는 요구를 받을 때마다 몰래 발끝으로 바닥에 ‘아니오’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생활했는데 일하는 것도 대충대충 했으며, 공부하는 방면에서는 진상을 찾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사상적으로는 객관적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추구했다.

한 우연한 기회에 서양의 한학(漢學)학자가 저술한 진정한 중국 근대사를 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생애 전반기에 배우고 들어온 것을 바로 뒤집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반평생을 속아왔다는 것에 대해 비할 바 없는 분노를 느꼈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를 배우면 사람이 총명해진다고 하는데, 나도 정삼관(正三觀)을 하려면 반드시 먼저 역사관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짓 역사를 버리고 삼관을 바로잡으니 내 인식은 철저히 분열되게 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2018년 1월 나는 ‘인터넷 봉쇄 돌파’를 배워 바깥세상을 접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본질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을 뿐, 그것들이 못 하는 것이 없다.’ 바로 그때부터 나는 ‘인터넷 봉쇄 돌파’를 통해 알게 된 실제 정보를 늘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했고, 오래되자 친구들은 나를 ‘반혁명’이라는 별명으로 친절하게 불러주었지만, 일부 지도자들의 눈에는 ‘부정적인 에너지’로 비쳤다.

나는 정말로 갈수록 견딜 수가 없다!

2019년 7월 25일 허난(河南) 저우커우(周口)에서 온 자오충선(趙崇深)은 “화동 지역 진 정부의 고급(股級)간부”라며 “나는 공산당이 거짓말하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마음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나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줄곧 침묵으로 허용해왔다. 하지만 이 몇 년 동안은 예전과 달리 일상적인 업무 외에 낮에는 상급자의 각종 검사에 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밤에는 강국 학습을 해야 하니, 난 정말 갈수록 견딜 수가 없다! 매번 도움을 받지 못하는 국민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로 당의 휘장을 휴지통에 버리고, 휴대전화 속의 강국 학습 내용을 지우고 싶다! 그러나 공산당은 들어갈 수만 있을 뿐, 나올 수 없는 정당인 데다 지금은 엄격하게 감시하는데 이제 친한 친구의 소개로 이런 플랫폼이 있다는 걸을 알았으니, 여기서 삼퇴를 성명한다!

 

원문발표: 2021년 4월 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8/4228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