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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징역 11년을 선고받은 랴오닝 리궈쥔,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랴오닝 보도)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 파룬궁 수련생 리궈쥔(李國俊)은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 장쩌민(江澤民)을 법원에 고소했다가 중공(중국공산당) 경찰에게 보복 탄압을 당해 11년의 불법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리궈쥔은 차오양시 구치소와 랴오닝성 여자감옥에 감금당한 기간에 잔인무도한 박해를 당해 생명이 위급했다. 보석으로 집에 돌아왔으나 6개월 후, 결국 2020년 5월 5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53세였다.

임종 때, 리궈쥔은 그녀 마음속 깊은 곳의 한 마디 “파룬궁은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李国俊被迫害化疗后的照片
리궈쥔이 박해로 화학 치료를 당한 후 찍은 사진

리궈쥔은 1967년에 출생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줄곧 차오양현 정부에서 근무했는데, 기관 노동 운동 위원회 선전부 부장을 맡았다. 리궈쥔은 1995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해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1999년 후 ‘진선인(真·善·忍)’ 믿음 때문에 여러 차례 중공 경찰에게 납치, 불법 구류, 노동 교양 박해를 당했다. 직장, 책임자 등 다방면의 압력으로 신앙을 포기하도록 했다. 그 후 선양(瀋陽)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에서 핍박에 못 견뎌 ‘전향’했다. 그 후 리궈쥔은 6년 동안 믿음을 포기하고,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에 깊이 빠졌다. 이러한 생활은 리궈쥔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늘 그녀를 뒤따르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잃은 그러한 비참함과 고통스러움이었다.

리궈쥔이 새롭게 대법 속으로 돌아와 수련한 후, 단지 좋은 사람이 되려 한 그렇게 많은 수련생이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한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집안의 노인과 아이는 보살필 사람이 없었다. 리궈쥔은 이 마난 중의 같이 수련하는 수련생과 가족을 말없이 돕기 시작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이 좋은 사람들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불행을 줄여주었다. 어떤 이는 전혀 안면조차 없었다.

리궈쥔은 대법의 법리 중에서 일에 마주치면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해 주고, 일할 때도 타인을 고려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은 중공 공산당의 사무 업무인데, 사당 당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체제의 죄악을 깊이 알고, 다시는 더 많은 사람을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 내심의 선량함을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줄곧 매우 괴로워 이 직장에서 전출하려 했으나 줄곧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2015년 5월, 정부에서는 ‘사건이 있으면 반드시 입안하고, 소송이 있으면 반드시 수리한다.’고 공언한 후, 리궈쥔은 국민의 합법적인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법에 따라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제소했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에서는 명문으로 규정한 ‘탄압 보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례를 뒤엎고 또 함부로 장쩌민을 고소한 민중을 납치해 거듭 곳곳에서 억울한 상황을 조성했다.

2015년 11월 9일 오전, 리궈쥔은 집에 있다가 직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직장에 용무가 있으니 직장으로 한번 오라고 연락이 왔다. 매우 재촉했는데, 리궈쥔은 마음속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난타(南塔) 공안 분국 치안대대 대장 류레이(劉雷)가 몇 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두 대의 승용차가 아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물은 후, 직접 리궈쥔을 난타 분국으로 납치했다. 차오양현 위원회 서기 리구이핑(李貴平)과 차오양현 공안국 국장 장멍(張猛)이 이번 납치를 동의하고 참여했다. 뒤이어 리궈쥔의 집은 수색당해 컴퓨터, 대법 서적 등 개인 물품은 깡그리 강탈당했다. 리궈쥔의 남편이 다른 사람의 낡은 프린터와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공구마저 경찰에게 강탈당했다.

그날 시 공안국 국장 리차오(李超)가 직접 전 시의 경찰을 배치하고 동원해 대규모로 관할구역의 주민과 20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교란하고 납치했다. 그중 백 명에 가까운 사람이 불법으로 감금 구류처분을 받았고, 50여 명이 무고한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형기가 가장 많기는 12년에 달했다.

리궈쥔은 납치당한 후, 줄곧 차오양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2015년 추운 겨울에 구치소에서는 솜옷, 솜이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얇은 반소매를 입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또 창문을 열어 통풍을 시켰다. 악랄한 환경에서 리궈쥔은 몸에 끊임없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위생용품이 없어서 곳곳에 피가 흘렀다. 죄수는 또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기간에 또 차오양시 국가보안지대의 사람에 의해 여러 차례 심문을 당했는데, 누가 전임 시 위원회 서기 왕밍위(王明玉)가 파룬궁을 박해한 비밀 서류를 폭로했는지를 캐물었다. 리궈쥔은 줄곧 협력하지 않았다.

차오양 시위서기 젠뱌오(蹇彪),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류차오전(劉朝震), 가이융우(蓋永武)의 지시하에 리궈쥔은 차오양시 솽타 검찰원, 솽타 법원에 의해 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11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천 위안(약 17만원)의 벌금, 집행비 50위안을 갈취당했고, 공직에서 쌍개(双开, 당직과 공직을 동시에 전부 박탈하는 징계처분)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법률을 따지지 않고 함부로 억울에게 중형을 선고함은 변호사들마저 깜짝 놀라 “정부 측은 온 산을 방화할 수 있는데, 국민이 집안에서 불을 켜는 것은 허락하지 않네요?!”라고 격분해 말했다. 이것은 파룬궁 수련생을 위해 무죄 변호를 진행하는 변호사들이 분개해서 늘 말하는 한 마디이다.

리궈쥔은 자신에 대한 억울한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해, 차오양시 중급인민법원에 상소를 제기했다. 2016년 6월 6일 오후, 시다잉쯔(西大營子) 베이산(北山) 중급인민법원 내에서 리궈쥔의 억울한 사건은 2심 불법 재판을 열었다. 법정에서 판사 멍판스(孟凡石)는 매우 날뛰며 리궈쥔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몇 차례나 강제로 중단당했다. 10여 분 동안 형식적으로 진행한 불법 재판은 황급히 끝냈는데, 법률적인 근거 없이 원 판결을 유지했다. 가족은 온통 억울함이 가슴에 가득했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당시 리궈쥔 본인의 적립금마저 동결 당했다.

2016년 8월 16일, 구치소 경찰은 리궈쥔을 선양 여자감옥으로 보냈는데, 몸 검사를 받은 후 감옥에 의해 수감을 거부당했다. 경찰은 리궈쥔을 속여 “만약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동의하면 당신 신체검사 비용 천 위안은 당신이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돈을 당신이 내세요.”라고 말했다. 선량한 리궈쥔은 가족이 이 시각에 어떠한 충격과 압력을 감당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다시는 가족에게 어떠한 부담을 보태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들에 의해 강제로 감옥으로 보내졌다.

리궈쥔이 랴오닝 여자감옥 4감구로 간 후 감옥 측은 그녀의 몸 상황을 돌보지 않고 강제 전향을 시행했다. 음험하고 악독하게 연루시키는 수단을 썼는데, 전향(강제로 믿음을 포기함)하지 않기만 하면 곧 그녀를 감시하는 죄수들의 모든 대우를 취소하고 그녀에게 시켰다. 가령 슈퍼에 가서 물건 사는 등을 포함했다. 이런 모순을 모두 리궈쥔의 몸에 악화시켰는데, 몸이 허약한 리궈쥔에 대한 정신적인 압력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매 순간 시달림으로 보냈다.

리궈쥔의 몸 상황이 갈수록 나빠진 상황에서 2018년 2월 8일에 선양 739 병원으로 보내져 첫 번째 수술을 받았다. 이전에 감옥 측은 줄곧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 수술비가 필요할 때 비로소 가족에게 통지했다. 수술 후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절차를 밟아주지 않았다. 랴오닝성 감옥 관리국에서는 각종 구실로 시간을 끌며 병보석 절차를 밟아주지 않았다. 병세가 진일보로 악화될 때까지 끌다가 2018년 7월 18일에 리궈쥔은 거듭 선양 종양 병원에 입원해 두 번째로 수술을 받았는데, 23일 동안 입원하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리궈쥔은 4차 화학요법 치료를 받았는데, 매번 화학요법 치료비용은 7~8천(약 120~137만 원) 위안이다. 치료하는 모든 비용은 모두 본인이 부담했다.

감옥 측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을 수 있는 절차를 질질 끌다가 2019년 11월 5일에 리궈쥔의 생명이 위급할 때에야 비로소 병보석으로 풀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감옥 경찰이 압송해 왔는데, 허약한 리궈쥔에게 여전히 형구를 씌웠다. 줄곧 차오양에 도착한 후에야 형구를 열어주었다.

리궈쥔은 마침내 가족의 신변으로 돌아와 가족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았는데 심각한 병세로 안정을 취하고 요양해야 했다. 그러나 솽타구 광밍(光明) 사법소에서는 리궈쥔의 병세가 심각함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전화를 걸어 교란하고 감시했다. 경찰 왕밍하오(王明浩)와 한쉬(韓旭)는 두 차례 집으로 와서 교란, 전화를 감청하는 등을 진행했다. 이는 병이 위중한 리궈쥔에게 두려운 압력이었다. 중공의 경찰들은 근본적으로 이 일가족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납치당할 때 건강했던 리궈쥔이 가족에게 돌아왔을 때는 생명이 위급한 사람이었다. 일가족은 마침내 단란하게 한자리에 모여 살게 되었는데 기다린 것은 생사 이별이다.

리궈쥔의 친정집 모친은 연세가 이미 고령이다. 3월 28일, 리궈쥔은 병이 위중한 몸을 끌고 농촌으로 돌아와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노 모친을 문안했다. 집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솽타구 광밍 지역사회 경찰 왕밍하오는 두 차례나 전화를 걸어 돌아오라고 독촉하며, 이미 지역을 초과했다고 말했다. 리궈쥔은 부득이 어머니 집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병고와 각종 정신적인 압력으로 리궈쥔은 병상에 몸져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사법소에서는 여전히 이미 펜을 잡을 기운이 없는 리궈쥔을 핍박해 ‘3서’를 써서 믿음을 포기시켰다. 이미 사경을 헤매는 리궈쥔을 보고 가족은 마음이 에는 듯 아팠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대신해 썼다. 그런 다음 리궈쥔의 허약한 손을 잡고 지장을 눌렀다.

2020년 5월 5일 오후 4시, 마음 가득 억울함과 가족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리궈쥔은 영원히 두 눈을 감았다. 임종 때, 리궈쥔은 그녀 마음속 깊은 곳의 한 마디 “파룬궁은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감옥에서 박해당한 4년에 대해 리궈쥔은 단지 간단하게 매우 많은 고생을 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는 그 잔혹한 정경들을 회억하려 하지 않았다. 박해당해 극도로 두려운 상황에서 그녀는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으나 오히려 종래로 타인을 원망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관련 박해 기관과 박해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9/4087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