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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일가가 겪은 고난

[밍후이왕](밍후이왕 통신원 지린에서 보도) 창춘시 눙안현 양수린향에는 ‘진(眞)·선(善)·인(忍)’을 믿는 한 가족이 있다. 가장 왕치보(王啟波)는 박해 받아 사망했고 아내 쑨스잉, 딸 왕훙옌(王洪豔), 아들 왕훙옌(王洪岩)은, 억울한 옥살이 9년을 마치고 금방 석방된 60여 세 랴오위안시 할머니를 집에 묵게 한 이유로 2017년 3월 6일 저녁 랴오위안시 610(파룬궁을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불법 조직)이 거느리고 온 한 무리 경찰에게 강탈당하고 납치돼 불법적으로 형사구류 됐는데 지금까지 불법적으로 7개월 넘게 수감되어 집에는 90에 가까운 노인이 눈물로 지새우고 있다.

'王启波' '孙士英'
왕치보                       쑨스잉

왕치보는 눙안현 양수린향 농촌신용사 직원이었다. 흐린 날 피부알레르기, 위염이 있었고 아내 쑨스잉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등 질병이 있었다. 오래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1997년 4월 부부는 잇따라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선 후 ‘진·선·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다.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일에 부딪히면 다른 사람을 생각했고 직장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성심껏 일해 동료, 학부모, 마을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왕치보, 쑨스잉 부부 두 사람의 병은 치료하지도 않고 나아 두 자녀도 잇따라 수련에 들어서 온가족이 대법의 불광(佛光)에 젖게 됐다. 아웃들도 그들 일가의 변화를 보고 모두 부러워했으며 많은 사람이 수련에 들어섰고 당시 사람들의 화젯거리로 됐다.

1999년 7월 장쩌민은 질투 때문에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파룬궁을 광적으로 박해했다.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했다. 중국공산당 언론은 24시간 끊임없이 파룬궁을 모함하고 비방했으며 중국인들은 거짓말을 듣고 속임수에 빠졌다. 갑자기 먹구름이 뒤덮였다. 이런 박해 환경에서 파룬궁수련생들은 각종 박해를 받았다. 왕치보 일가는 박해를 받아 가족과 집을 잃었다.

여러 차례 불법 수감되어 두들겨 맞고 노동교양을 받다

1999년 9월 16일 현지 향 정부, 파출소는 강제로 왕치보를 향 공산당 간부학교에 납치해 세뇌시켰다. 강제로 시멘트 바닥에 앉게 하고 마당 안에서 달리기를 하게 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으며 장시간 팔을 들게 해 벌을 세웠다. 9월 27일 저녁 향 당위서기 마바오린, 파출소 소장 자오시차오는 왕치보를 공산당 간부학교에서 현 구류소로 납치했다. 왕치보는 파출소에서 경찰에게 혹독하게 맞아 코에서 피가 흐르고 옷이 찢어졌다. 구류 기간 강제로 콩 마대를 멨고 콩을 고르는 일을 하면서 매일 과부하 노동을 해야 했다. 불법 구류 60여일 후 그에게 식비 1,400위안을 내라고 억지를 부렸다. 왕치보와 쑨스잉은 각각 공직에서 해임돼 경제력을 잃게 됐다.

中共酷刑示意图:殴打
중국공산당 고문 시연 사진
: 구타

2000년 2월 27일 오후, 현지 촌치안보안주임과 파출소 경찰은 왕치보를 재차 납치했다. 수갑을 차지 않겠다고 거절한 이유로 파출소장 자오시차오, 기사 차오둥쯔 등은 그를 혹독하게 때린 후 눙안현 구류소에 보냈다. 며칠 후 창춘 웨이쯔거우 노동교양소에 보내 1년 박해했다.

웨이쯔거우 노동교양소에 있던 기간 교도관은 죄수를 사주해 널판자로 왕치보의 엉덩이를 때렸다. 4월에는 찬물에서 돌을 건져내게 해 온몸이 얼어붙게 했다. 이후에 창춘 펀진 노동교양소로 이감됐는데 거기에서 박해 받아 온몸에 옴이 올라 가렵고 아팠다.

2001년 7월 6일 밤 11시, 12시경 양수린 향파출소 6, 7명이 왕의 집에 가서 사람을 붙잡았다. 왕치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이튿날 아침까지 버티다 그들은 창문 철근을 비틀어 열고 실내에 강제로 들어와 납치했다. 왕치보, 쑨스잉이 협조하지 않자 머리를 끄집어 당겼다. 왕의 둘째 누나(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음)는 남동생이 맞는 것을 보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함께 강제로 끌려갔다. 그들은 또 모든 파룬궁 서적, 자료를 빼앗아갔다.

붙잡힌 5명 중 아이들의 작은 이모를 제외하고 모두 혹독하게 맞았다. 왕치보의 둘째 누나는 맞아서 눈꺼풀이 퍼렇게 멍들었고 입술은 파랗게 됐으며 길을 걷지 못했는데도 이튿날 모두 눙안현 구류소에 구류됐다. 왕훙옌(아들)은 7일 구류됐고 작은 이모와 둘째 고모는 불법적으로 보름 구류된 후 풀려나왔다. 왕치보는 20여 일 수감됐고 쑨스잉은 한 달 넘게 수감됐으며 온 가족은 모두 1만여 위안을 강탈당했다.

왕치보 불법적으로 7년 실형을 판결 받고 박해 받아 사망

2002년 7월 13일 오전 현지 촌치안보안주임 장밍잔, 양수린 향파출소 소장 왕핑, 첸궈현 공안국장 우바우천은 4, 5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왕치보 집에 뛰어 들어와 아무런 증명서도 보여주지 않고 총을 갖고 와 위협하며 첸궈현 공안국으로 왕치보를 납치했다. 경찰차에서 그들은 왕치보를 혹독하게 때려 코에서 피가 흘렀고 전기봉을 겨드랑이에 끼워놓고 충격을 가했다.

酷刑演示:电棍电击
고문 시연
: 전기봉 충격

2002년 12월 18일 첸궈얼뤄스 몽골자치현 법원 재판장 류훙쥔, 대리 심판원 판웨이쉬, 자오광허, 서기원 후팡취안 등은 왕치보에게 불법적으로 징역형을 판결했다. 가족들은 전반 과정을 전혀 몰랐다. 2003년 1월 가족이 창춘 각 교도소, 지린 각 교도소에 가서 왕치보 행방을 알아보았는데 지린성 제2교도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찾아갔지만 면회를 불허했다.

교도소에서 왕치보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온갖 모욕과 박해를 받았다. 교도관은 자오허 시의 죄수 옌을 사주해 멜대로 왕치보 팔과 허리를 때리게 했다. 교육과의 리융성은 강제 전향을 시키는 사람인데 왕치보가 교도소 규칙을 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융성, 쑨얼샤(별명)는 죄수 왕야오린을 사주하여 왕치보를 혹독하게 때리게 했다.

지린성 제2교도소 7건물에서 왕치보는 매일 24시간 바오자(包夾: 24시간 따라 다니며 감시하는 사주 받은 수감자)의 감시를 받았다. 매일 그에게 14시간 넘게 의자에 앉아 있게 했는데 저녁 7시에야 의자에 앉기를 중지시켰다. 강제 전향, 잔혹한 박해, 침대 널판자를 빼내어 왕치보 엉덩이를 두 쪽 침대 널판자 사이에 끼이게 하고 두 다리를 곧게 펼 수 없게 했다. 또 위에는 무거운 물건, 널판자 등으로 눌러놓았다. 어떤 때는 널판자를 세워놓고 앉으라고 했는데 앉아 있지 못하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2003년 11월, 교도소는 1년간 가족이 면회하지 못하게 했다. 두 아이와 70여 세 되는 할머니는 여러 차례 교도소에 가 가족을 만나려 했지만 매번 밀어내고 욕하면서 문밖으로 내보냈고 뒷 건물 수발실 여경은 악담을 퍼부었다. 매번 두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왔다가 흐느끼며 돌아갔다.

2005년 5월 13일 왕치보는 감방 안에서 사람에게 연공을 가르친 이유로 샤오호(小號: 좁고 어둠 컴컴하고 환경이 열악한 작은 방)에 수감됐다. 엄한 단속 기간 의자 앉기, 천촹(抻床: 침대에 사지를 사방으로 묶어 놓는 일종 고문),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등 박해를 받았다.

가족이 면회를 포기하지 않고 강력하게 만나겠다고 요구하자 마침내 2005년 7월 22일 왕치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왕치보는 매우 여위었고 걸음걸이도 흔들거렸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면회했는데 교도관 왕옌보는 그들의 악행이 폭로될까 두려워 옆에서 전화를 도청하며 기록했다. 왕치보는 여러 차례 소송장을 써 판결에 불복했지만 교도소 책임자는 답변을 주지 않았고 청구서를 압류했다.

왕치보가 수감된 지 3년 동안 가족은 여러 곳을 다니며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4번 면회할 수 있었다.

2007년 3월 28일 새벽 1시가 넘어 가족은 갑자기 교도소 6건물 대대장 류전위 전화를 받았다. 왕치보가 뇌질환이 돌발해 지린시 제2중심병원에서 응급치료하고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급히 5시가 넘어 갔을 때 왕치보는 동공이 확대됐고 구강, 콧구멍에 모두 혈흔이 있었고 속옷에도 피가 좀 묻었으며 혀가 굳었고 온 얼굴이 퍼렇게 멍들어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당시 병원은 가족에게 ‘병세 위독 통지서’를 내렸다. 방안에는 류전위, 리융성 등 4, 5명 교도관과 두 죄수가 있었다. 병원은 산소 호흡기와 링거로 유지했다. 가족이 병세를 물었을 때 교도관은 뇌출혈이라고 했고 입에 왜 피가 나느냐고 물었을 때 토한 것이라고 했다. 간호하고 있는 죄수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죄수는 저녁 10시 넘어 샤워를 하다 넘어졌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늦은 시간에 샤워를 했냐고 물었더니 죄수는 일을 그때야 마쳤다고 대답했다.

왕치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에도 교도소는 두 명의 가족만 간호하게 했다. 9시가 넘어 왕치보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지린 교도소는 왕치보의 시신을 후뉴거우 장례식장으로 보냈다. 왕치보의 가족이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고향으로 가져가겠다고 요구했는데 교도관은 기만하고 위협하면서 결국 왕치보의 시신을 강제 화장시켰다. 당시 장례식장에는 ‘사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승용차 한 대와 경찰차 한 대에 모두 10여 명의 경찰이 있었다. 그 중에는 지린성 사법청 부청장 류전위도 있었다.

쑨스잉이 박해를 받다

쑨스잉은 두 번 수감됐고 두 차례 강제 세뇌반에 납치됐으며 4번 구류됐고 노동교양을 한 번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공직에서 해임된 상태다. 쑨스잉은 세뇌반에서 대법을 비방하는 신문을 억지로 보아야 했다. 그녀를 시멘트 바닥에 앉게 했고 교정에서 달리기를 하게 했으며 저녁에 잠을 자지 못하게 했고 야밤중까지 손을 머리 위로 들게 하고 벌을 세웠다.

2003년 3월 현지 파출소 경찰은 공구로 쑨스잉 집 문을 비틀어 열고 강제로 그녀를 납치했다. 집은 아수라장으로 됐다. 공안국의 한 경찰이 고무 방망이로 그녀 엉덩이, 두 다리, 두 발을 때려 퍼렇게 됐고 그녀 뒤로 수갑을 채운 두 손을 앞으로 당겼다. 구류소는 계속 그녀를 취조하고 혹독하게 때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끄잡아 당기고 슬리퍼로 때려 땅에 쓰러지게 했다.

같은 해 11월 현지 파출소는 또 그녀를 납치해 창춘 헤이쭈이쯔 여자노동교양소에 보내 노동교양을 1년 시킨 다음 또 불법적으로 5일 형기를 연장했다. 노동교양소에서 매일 14, 15시간 노역을 시켰고 일을 마친 후에도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면서 억지로 전향시켰다. 한 번은 대대장이 구두로 차고 전기봉으로 번갈아가며 충격을 주었는데 전기가 없을 때까지 온 오후 충격을 주고 다른 대대에 가 전기봉을 빌려오겠다고 떠들어댔다. 연속된 며칠 간 고문으로 두 다리와 발은 열이 나고 마비됐으며 굳어지고 아파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그 뒤로 쑨스잉은 점점 여위어가고 행동이 어려워졌는데도 생산 대대장은 여전히 억지로 그녀를 일하러 보냈다.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후에도 소위 ‘민감한 날’이 되면 향당위, 파출소, 직장 상사 등은 소란을 피우고 감시하며 집을 수색했다. 여러 차례 소란을 받고 납치되고 박해 받아 어쩔 수 없이 저가로 집을 팔고 고향을 떠났다.

양수메이가 박해 받아 기억을 상실하고 거의 반신불수가 되다

왕치보의 제수 양수메이는 1998년 11월 파룬궁을 수련한 후 엄격하게 ‘진·선·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해 심신이 정화되어 시부모님을 공경하고 손아랫사람을 잘 보살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박해로 지옥 같은 박해를 받아 억울한 옥살이로 기억을 심하게 상실하고 거의 반신불수가 됐다.

1999년 10월 양수메이는 두 번째로 베이징에 상방하러 간 이유로 눙안형 공산당 인원은 그녀를 강제로 창춘 헤이쭈이쯔 여자 노동교양소에 보내 노동교양을 1년 시켰다. 노동교양소에서 연공한 이유로 대대장 장구이메이는 양수메이를 대나무 판자로 머리를 때리고 뺨을 치고 또 교도관 마톈수, 위버센은 그녀 두 손을 가죽 띠로 침대에 묶고 바닥에 하루 동안 앉아 있게 한 후 침대에 ‘대(大)’자 형으로 뻗게 한 후 묶어놓았다. 밥을 먹고 대소변 보는 일을 다 침대에서 하게 하면서 12일 후에야 풀어주었다. 그래도 양수메이는 연공을 견지했는데 마텐수는 전기봉으로 끊임없이 그녀 머리와 얼굴에 충격을 가했고 위보는 옆에서 발로 차고 때렸다. 그녀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면 벽에 부딪쳤다. 전기충격을 받을 때 양수메이는 이가 덜덜 부딪혔고 몸은 덜덜 떨렸다. 마톈수는 기운이 빠지자 대대장 류롄잉과 위보가 이어서 두 전기봉으로 동시에 그녀 머리, 목, 얼굴, 유방, 겨드랑이, 온몸 손발에 다 충격을 가했다. 양수메이는 충격을 받은 후 입을 다물지 못했고 피가 흘렀으며 눈물을 흘렸고 온 얼굴은 누런 물집이 생겼고 얼굴이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이튿날 류롄잉은 그녀를 비웃기까지 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마음 아파 울면서 단식하고 항의하기 시작했으면 민원 편지, 고소장을 썼다.

양수메이는 노동교양소의 잔혹한 박해를 받은 후 이번의 하늘을 뒤덮을 듯한 전국적인 탄압은 언론매체의 독단적인 거짓 선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본인이 겪은 일로 박해를 폭로해 사람들이 진상을 분명하게 알도록 했다. 2001년 9월 말 그녀는 진상을 모르는 촌민의 고발로 납치됐다. 양수린 향파출소의 왕 뚱보, 리진창 등 세 명은 그녀를 강제로 책상에 눌러놓고 그녀 두 손을 뒤로 해 수갑을 채웠다.(보검을 멘 자세) 그리고 맥주 병 4개를 받쳐 넣었다. 이튿날 왕밍장, 장싱저우 두 사람은 수갑, 족쇄를 갖고 때리고 욕하면서 강제로 수갑, 족쇄를 채우고 벽 구석 의자에 앉게 하고 좌우로 뺨을 때렸다. 런완시는 뺨을 때리면서 말했다. “너희들을 어떻게 대하든 괜찮아, 알겠어?” 양수메이는 맞아 얼굴이 부었고 눈이 충혈됐다. 양수메이는 8일 단식했다. 경찰이 그녀를 노동교양소로 데려가던 도중에 그녀는 성공적으로 탈출했지만 어쩔 수 없이 유랑하게 됐다.

2007년 둘째 아주버니인 왕치보가 지린 교도소에서 박해 받아 사망한 후 연로한 시부모님이 걱정스러워 양수메이는 유랑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시부모님을 돌보고 집안일을 떠맡아 이 집은 다시 화기애애했고 차츰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기 시작했다.

2011년 3월 2일 저녁, 눙안현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반테러 대대는 양수린과 향파출소 인원과 함께 양수메이의 집을 불법 수색했다. 양수메이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납치됐다. 얼마 되지 않아 양수메이를 암암리에 4년 판결하고 지린성 여자교도소에 보내 박해하고 판결문도 주지 않았다. 3년 7개월 장기간 침대에 묶고 독극물 주사를 놓고 쪽의자에 앉게 하는 등 잔혹한 박해로 양수메이는 심하게 기억을 잃었고 사유가 혼란해졌으며 말을 똑바로 하지 못했고 사지가 굳어 혼자 걸을 수 없게 됐다.

선행을 하다 또 납치되어 모함을 받다

쑨스잉과 아들딸, 그리고 온 가족은 기나긴 18년의 박해를 걸어지나오면서 겪은 슬픔과 괴로움, 인내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 두 아이도 점차 성장했다. 그들은 잔인한 박해 때문에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의 불공정함에 소침하고 타락하지 않으며 계속 진·선·인으로 자신을 요구했다. 일에 부딪히면 너그럽게 용서하고 원망하지 않았으며 증오하지 않았다. 왕훙옌(아들)은 학업을 마치고 우수한 소프트웨어 고급 엔지니어가 됐다. 업적이 뛰어나 직장 매니저가 됐고 덕과 재능을 겸비한 젊은이로 됐다. 그와 접촉한 사람들은 다 그를 칭찬했다.

'儿子王洪岩' '女儿王洪艳'
아들 왕훙옌
(王洪岩) 딸 왕훙옌(王洪豔)

딸 왕훙옌은 마트 계산원인데 사장의 신뢰를 받아 설에 1천 위안의 상여금과 선물을 받았다. 사장은 모든 돈을 그녀에게 맡기면 자신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 아픈 일이 또 발생했다.

2017년 2월 27일은 랴오위안시 파룬궁수련생 류융전이 9년 동안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석방된 날이다. 쑨스잉 일가는 선한 마음에서 압력을 무릅쓰고 62세 류융전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류융전은 불법 판결 9년을 받아 지린성 여자교도소에서 각종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예를 들면 매달아 놓기, 천촹(침대에 사지를 사방으로 묶어 놓는 고문), 독극물 주사를 맞았고 사지를 묶어 공중에 매달아 놓고 경찰은 한 사람을 시켜 류융전의 몸을 짓누르게 했다.

2017년 3월 6일 저녁 10시 창춘시 관청 공안분국, 란자 파출소 랴오위안시 610 국가보안대대, 눙안현 국가보안대대 등 한 무리 사람이 불법 납치, 수색을 했다. 이 사람들은 방에 들어온 후 경찰증, 수색증을 보여주지 않고 바로 쑨스잉 모자를 바닥에 눌러놓고 그녀들에게 강제로 뒤로 수갑을 채우고 이어서 집안의 모든 물품을 수색했다. 당시 납치된 사람은 금방 감옥에서 나온 류융전 노인(지금은 집에 돌아왔음), 왕훙옌의 숙모가 있었다. 숙모는 파룬궁을 수련한 이유로 교도소에서 박해 받아 걸음을 걷지 못했고 머리는 이지적이지 못했으며 기억을 상실한 상태였다. 관청구 공안국은 보석 형식으로 가족에게 사람을 데려가라고 통지하고 2천 위안의 보증금을 받아냈다.

지금 왕훙옌(아들)은 창춘시 제1구치소에 수감되어 있고, 왕훙옌(딸)과 어머니 쑨스잉은 창춘시 제4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이미 7개월이 넘는다. 지금 소위 ‘안건’은 여전히 창춘 차오영구 검찰원 검찰과에 머물러 있다.(주요 사건 처리 인원은 류진밍) 검찰원은 이 안건을 관청구 분국에 한 번 돌려보냈는데 이후에 분국에서 또 검찰에 보냈다.

장쩌민이 발동하고 유지한 이번 집단 학살 박해는 1억에 달하는 파룬궁수련자와 그들 가족에 거대한 재난을 주었다. 아울러 무고한 좋은 사람에 대한 박해에서 중국 법치는 점점 어두워졌고 중국공산당 간부는 더욱 탐욕스러워지고 잔인해져 중국 사회의 도덕성이 떨어졌다. 모든 중국인은 모두 이번 박해의 피해자다.

가족과 친구들은 도처에 다니며 쑨스잉 가족 3명을 붙잡은 경찰 및 이 안건 심사에 참여한 검찰관이 쑨스잉 가족 3명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공정하게 처리하고 이 사회에 아주 필요한 선량함을 수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자기부터 시작해 자손후대에 공정함, 공평한 생활환경을 주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중국 법치가 더 건전하길 바라고 있고 공안 경찰, 검찰관, 법관 등 집법 인원이 모두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하루 빨리 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의 조종에서 벗어나 사악한 지시를 저지하고 자신의 주인이 되고 공안, 검찰, 사법 인원이 마땅히 있어야할 존엄성을 되찾길 바란다.

국내외 모든 정의로운 인사들이 이번 비인간적인 박해를 저지하길 바라고 박해에 참여한 경찰들은 형세를 똑똑히 보고 악인을 도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본인의 장래를 생각하고 자신에게 퇴로를 남기길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11월 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5/3563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