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월 중 박해 치사 23건이 증명되다(사진)

【명혜망 2004년 9월 4일】(명혜기자 구안루 종합보도) 명혜망의 통계에 의하면 8월 중 파룬궁 수련생이 중국대륙에서 박해 치사한 23건의 사례가 또 민간경로를 통하여 밝혀졌다. 따라서 박해로 치사한 파룬궁 수련생 인원수는 1036명에 달하게 되었다.

* 8월 중 폭로된 박해치사사례의 대략적인 상황

23건의 사망사건은 10개 성, 자치구와 직할시로 분포되었는바, 랴오닝성(遼寧省) 5건,쓰촨성(四川省) 4건,톈진시(天津市) 4건,헤이룽장성(黑龍江省) 3건,허베이성(河北省) 2건,지린성(吉林省), 산둥성(山東省), 안후이성(安徽省), 구이저우성(貴州省), 신장자치구(新疆自治區) 각각 1건이었다.

박해로 치사한 23명 파룬궁 수련생 중 연령이 가장 많은 사람는 산둥성 웨이하이시(威海市)의 57세 왕칭저우(王慶洲)이고 가장 어린 사람는 랴오닝성 둥강시(東港市) 29세 롄핑(連平)이며 50세 이상의 노인이 7명으로 30%를 차지하고 부녀는 10명으로 43%를 차지하였다.

23건 사망사례 중 15명이 2004년 박해로 사망했고, 18명이 감옥, 노동교양소에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혹은 가족에 의해 집에 돌아간지 얼마 후 사망하였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세인들에게 파룬궁의 진상을 바르게 알려줌으로써 불법판결, 노동개조당한 사람이 17명이었다. 가장 높은 형기는 11년에 달하며 여러 사람들이 생전에 거액의 경제적 갈취를 당하고 2명은 박해로 정신이상이 된 후 사망하였다.

* 31세 여 약제사 장훙이 완쟈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치사

하얼빈시 제4병원(哈爾濱市第四醫院) 약제사 장훙(張宏,여,31세)은 하얼빈둥리구(哈爾濱 動力區) 식물원 근처에 살고 있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견지함으로써 불법적으로 한차례 노동개조 당한 적이 있었고 2004년 7월 22일 다시 불법적으로 노동개조 당하여 하얼빈 완쟈 노동교양소(萬家勞教所)에 보내졌다. 그녀는 고문을 받고 7월31일 사망하였다.

장훙은 완쟈노동교양소에서 사악의 일체 요구에 협조하지 않고 3서를 쓰지 않았으며 7월 22일 오후 수갑이 채워졌다.(바닥에 선채로 두 손을 각각 윗 침대의 난간 위에 수갑으로 채워놓음). 7월 24일 그녀는 단식을 시작하였고 26일 악경은 음식물을 주입하기 시작하였으며 농도가 짙은 대량의 소금물을 주입하였다. 소금물 주입 후 악경은 그녀에게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 낮에는 수갑을 채워놓고 저녁에는 철의자에 앉게 하였다. 나중에 그녀의 심장이 좋지 않아지자 밤에는 나무판만 있는 침대에서 자게 하였다. 두 손을 각각 침대 위, 아래에 채워놓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대소변을 침대에서 보게 하였다. 악경은 또 고의적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입구로 그녀를 옮겨 바람을 쐬게 하고 하반신은 발가벗겼다. 상반신은 속옷만 입게 하고 몸에는 얇은 침대커버를 덮었다. 29일 음식물을 주입할 때 수건 전체가 선혈로 물들었으며 (악도들이 화장실에 버렸지만 사람들에 의해 발견됨) 오랫동안 서 있어 발은 검은 자주빛으로 부었다. 30일 그녀에게 링거를 주사하기 전에 집훈대 과장은 링거병을 찬물로 헹구었다.

박해당하는 기간에 그녀는 높은 소리로 악경의 박해를 폭로하였지만 악경은 노동교양소 직원 장구이윈(張桂雲), 천링링(陳玲玲), 순후이쥔(孙會君) 등을 시켜 그녀의 입을 테이프로 막게 하였다(음식물 주입 등 구체적인 일은 모두 이 세 사람이 실시하였음).

불법경찰들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 관교 리창제(李長杰)는 대장 조위칭(趙余慶)에게 장훙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은 모두 거짓이라고 하였다. 조위칭은 그녀가 다시 나아지면 또 그녀를 다스리겠다고 말하였다(전기고문으로 박해하겠다는 뜻). 30일 오후 장훙은 강제적으로 철의자에 앉혀졌고 머리에는 군데군데 하얀색 테이프가 가득 붙어있었다. 두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채워졌고 얼굴은 아주 새파랗고 여위었으며 다리와 발은 모두 아주 심하게 부어있었다.

31일 오후 남자경찰 4명이 담장으로 장훙을 들어내갔고 그들이 간 후 실내에 소독을 하였는데 말에 의하면 211병원에 보내졌다고 한다. 악경 과장 조위칭은 나중에 장훙이 심장병이 유발한 신장기능 쇠퇴로 사망하였다고 말하며 진상을 감췄다.

가족이 장훙의 시체를 보았는데 두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고 입은 아주 크게 벌려져 있었다. 신체는 이전보다 15~20킬로 정도 수척해졌고 바지 속에는 대변이 있었다. 노동교양소는 가족에게 빨리 화장하라고 요구하였지만 장훙의 가족은 지금 청원 중이고 시체검사와 화장에 단호히 동의하지 않고 있는바, 법률 절차에 따른 고소를 요구하고 있다.

* 45세의 은행직원 류징룽이 박해받아 불구가 된 후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나다

45세,지린성(吉林省) 둥랴오현(東遼懸) 농업은행 직원이자 대법제자인 류징룽(劉景榮)은 신념을 견지함으로써 박해 받았으며 랴오위안 노동교양소(遼源勞教所), 지린시 노동교양소(吉林市劳教所). 주타이인마허 노동교양소(九台飲馬河勞教所)에 보내져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2004년 1월 31일 억울함을 품고 인간세상을 떠났다.

2000년 3월 류징룽은 둥랴오현 공안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1년 노동개조형을 받았다. 그는 노동개조 당하는 기간 랴오위안 노동교양소 악경들의 각종 괴롭힘과 혹독한 구타를 당하는 동시에 체력을 초과하는 노동을 하였다. 일전에 연공하였다는 이유로 악경은 건물 밖의 철 난간에 그의 두 손을 뒤로 잠궈놓고 찬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옷을 발가벗기고 강제로 바닥에 넘어뜨린 후 찬 복도 바닥에서 찬물을 끼얹은 후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체중이 80킬로그램이었던 류징룽은 이 짧은 몇 달 동안 시달림을 받아 피골이 상접하였는데 체중이 50킬로도 채 안되었다.

2001년 4월 류징룽이 집에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회사에서는 4000위안의 월급을 보충해 주었고 둥랴오현 공안국 정보과는 이 일을 알고서 악경 4명을 보내 류징룽을 납치하여 그의 돈과 재물을 갈취하였다. 류징룽은 서명을 거절하였고 악경은 그가 거의 죽을만큼 구타하였다. 이후에 불법적으로 2년간 노동개조를 시켰다. 3개월 후 랴오위안 노동교양소는 그를 비밀리에 지린시 노동교양소로 보냈다.

지린시 노동교양소의 악경은 류징룽의 옷을 발가벗긴 후 몸을 수색하고 전기충격기로 감전시키며 늑대이빨몽둥이로 구타하였다. 그리고 그를 모난 나무에 앉혀 살점이 썩어 들어가게 만들었다.

2001년 12월 지린 노동교양소는 또 류징룽을 쥬타이인마 노동교양소에 보냈다. 류징룽은 그 노동교양소에서 7개월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고문으로 목숨이 경각을 다투었다.

2002년 7월 쥬타이 노동교양소는 류징룽의 생명이 위급한 것을 보고 그가 집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류징룽은 잔혹한 박해를 받아 신체가 회복되지 않았으며 2004년 1월 31일 인간세상을 떠났다.

* 푸신시(阜新市) 파룬궁 수련생 추이즈린(崔志林)이 혹독한 매질을 당하여 치사하였는바, 시체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43세 나는 랴오닝성 푸신시(阜新市) 파룬궁수련생 추이즈린(崔志林)은 2004년 8월 5일 진저우난산 감옥(在錦州南山監獄)에서 잔혹한 박해를 받아 사망하였다. 악경은 가족이 시체에 대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고 강제로 화장하려고 준비하였다.

2002년 9월18일 추이즈린은 랴오닝성 푸신시의 파룬궁진상 자료처에서 악경에 의해 납치되었다. 푸신시 법원은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은 상황 하에서 추이즈린에 대해 불법적으로 11년 판결을 내렸다. 2003년 하반기, 추이즈린은 현지 구치소에서 진저우난산 감옥 5대대로 옮겨졌다. 추이즈린 등은 이번 불법심판을 승인하지 않았는바, 민중을 향하여 파룬궁이 박해당한 진상을 이야기함은 잘못이 없다고 여기고 상소를 제기하였다.

추이즈린은 시종 대법을 단호히 수련하였고 전에 감옥에서 진상표어를 써서 대법을 실증하였다. 2004년 8월 5일, 가족들은 그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는 통지를 갑작스럽게 받았다. 가족들이 도착하였을 때 그는 이미 병원 영안실에 냉동되어 있었다. 감옥측은 사망자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어떤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가족의 강력한 요구 하에 비로소 검시관에게 시체를 검사하게 하였는데 가족은 이때야 비로소 사망자의 신체가 매를 맞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망 당시 이미 피골이 상접하였고 두 귀, 코, 입은 모두 솜으로 막혀있었다. 머리 뒷부분에는 구멍이 있었고 구강 내의 잇몸 한 부분은 이미 썩어있었다. 등 전체가 전체적으로 시퍼렇고 자주색을 띄었다. 양 옆구리, 늑골, 사타구니 외측, 허벅지 내측, 무릎 아래, 더욱이 복사뼈 부분은 오랫동안 전기충격기로 감전 당한 흔적이 선명하게 있었다. 팔꿈치의 살점 한 덩이가 이미 벗겨져 나가고 고환은 크게 붓고 시퍼런 자주빛이었다. 신체는 약물(혹은 맑은 물)로 담가지고 씻긴 흔적이 역력하였다.

감옥측은 가족을 위협, 공갈하였는데 가족이 사진찍는 것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지하였다. 나중에 7800위안의 장례비를 주어 급하게 일을 마무리지었다.

* 단위친은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후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나다

단위친(單玉芹,여 ,48세)은 헤이룽장성 이란현 다롄허진(黑龍江省 依蘭縣 達連河鎮) 사람이다. 파룬궁 수련생 단위친은 신념을 견지함으로써 수차례 박해를 받았다. 완쟈노동교양소에 수감된 기간에 단위진은 고문을 받아 정신이상이 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 단위친은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2004년 8월 20일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2000년 2월 단위친은 베이징(北京)에 가서 청원하다가 이란현 다롄허진 공안분국에 의해 불법으로 체포되었으며 이란현 제2구치소에 갇히는 동시에 2500위안 돈을 박탈당했다. 2000년 7월 신념을 견지함으로써 또 불법적으로 34일간 수감되었으며 1500위안 인민폐를 갈취당하였다. 2000년 11월 27일 그녀는 또 다롄허진 공안분국 악경에 의해 구치소로 붙잡혀 들어갔고 불법적으로 210일간 수감되었으며 돈 960위안을 갈취당했다. 이 기간에 그녀는 또 헤이룽장성 빙현(賓縣) 세뇌반에 보내져 파룬따파 수련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했다.

2001년 단위친은 또 한차례 다롄허공안분국에 의해 체포되고 불법적으로 2년간 노동개조 판결을 받았다. 완쟈노동교양소에 수감된 기간에 단위친은 악경에게 잔혹한 매질과 주먹, 발길질을 당하고, 전기충격기로 감전당했으며 수갑을 채운 채로 매달아 수갑이 모두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목에는 아직까지 그 상처가 있었다. 심지어 치아 14개가 구타 중 부러졌다. 장기간의 고문은 단위친의 신체가 급격히 나빠지게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소뇌위축”, “고혈압”, “반신불수”로 만들었는바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는 박해에 의해 울다가 웃기도 하며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완쟈노동교양소는 비로소 다롄허진 정부와 공안분국에 통지하여 가족에게 그녀를 데려가게 하였다. 그러나 진(鎭)정부 서기 모융펑(毛永峰)과 공안분국 책임자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이후에 모융펑이 완쟈노동교양소에 가서 사무를 볼 때 완쟈노동교양소는 단위친을 “보석받고 병치료”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모융펑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죽지 않았잖은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단위친은 또 6개월간 수감되었고 병세는 악화되었다. 2003년 12월 30일에 이르러서야 이란현 “610”과 가족에게 통지하여 단위친을 데려가게 하였다. 집에 돌아온 후 단위친은 계속 악화되고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2004년 8월 20일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 56세의 샤웨이가 향정부의 악인에 의해 산채로 구타당해 사망하다

쓰촨성 수이닝시 로츠향 위허촌(四川省 遂寧市 老池鄉 芋禾村) 파룬궁 수련생 샤웨이(夏偉)와 덩충친(鄧忠勤) 부부는 대법을 단호히 수련함으로써 99년 7월 20일 이후 장씨 정치망나니집단의 잔혹한 박해를 오랫동안 받았다. 샤웨이(남, 56세)는 2000년 7월 19일 불법경찰에 의해 납치된 후 혹독한 구타를 당하여 혼미상태에 처하였는데 이후에 늘 피를 토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다. 그는 2001년 11월 12일 사악의 장기적인 박해와 교란 하에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2000년 7월 19일 오전, 부부는 룽펑향(龍鳳鄉) 딸집에 있었고 마침 가공방에서 딸을 도와 밀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난창파출소(南强派出所) 악경은 그 마을에서 대법제자를 납치하여 세뇌반에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가공방을 지나갈 때 밀가루를 만드는 샤웨이부부를 보게 되었고 어떠한 이유없이 두 사람을 강제로 납치하여 룽핑(龍坪)세뇌반에 보냈다.

그날밤 7시가 넘어 로츠향 정부의 악인 덩쇼린(鄧小林), 부녀주임 루구이잉(陸桂英), 그리고 이름을 모르는 악경이 차 한대를 몰고 와서 두 사람을 현지의 관할구로 실어갔다. 차가 룽핑세뇌반 문앞에 도착하자마자 악인 덩쇼린은 흉악하게 욕을 해다. “누가 샤웨이인가. 빨리 나와라. 내가 너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보여주겠다.”

샤웨이가 문 앞에 나타날 때 악인 덩쇼린은 두말없이 단번에 샤웨이를 잡고 샤웨이의 전신에 주먹질, 발길질을 했다. 56세 샤웨이는 그 자리에 넘어졌고 코와 입으로 피를 흘렸다. 이때 악인은 또 한을 풀지 못한 듯이 발로 샤웨이의 전신을 마구 걷어찼다. 그리고 악경은 차문을 열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샤웨이를 붙잡아 차 속에 밀어 넣었으며 샤웨이는 차 속에 넘어져 움직이지 못했다.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는 피는 끊임없이 옷을 적셨고 바지도 붉게 물들였다. 그의 아내 덩충친도 차 속에 밀어 넣어졌는바, 덩충친은 남편이 차 속에 넘어져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고 힘껏 그를 부축하였다. 루구이잉, 덩쇼린은 차에 오른 후 계속 욕을 해댔다.

2시간이 넘도록 달려서 로츠향 진(鎭)정부 문 앞에 도착하였고 샤웨이는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덩쇼린은 샤웨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또 고함을 질렀다. “네가 나에게 죽은 척하고 있구나. 내가 또….” 악경들은 그가 맞아서 코와 얼굴이 시퍼렇게 붓고 신체는 극도록 허약해졌으며 또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자 책임을 질까 두려웠다. 이튿날 그의 딸에게 2000위안을 가지고 와서 그를 데려가라고 하였다.

딸은 부모가 또 악경에게 박해당할까봐 수련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 지경으로 매맞은 것을 보고 곳곳으로 사람을 찾아서 사정하였다. 그리고 200위안의 보증금을 내어 부모를 보석으로 석방시켰다. 집에 돌아온 후 샤웨이는 자주 피를 토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났으며 신체는 극도록 허약해졌다. 향진 정부, 파출소 악경들은 또 늘 집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집을 수색하였으며 사람을 시켜 부부를 감시하였다. 어느 한번 악경은 또 샤웨이 부부를 찾아가서 소란을 피우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집에 없는 것을 보자 그의 딸과 사위에게 수갑을 채워 인질로 납치하였다. 파출소에 도착한 후 몇몇 악경들은 딸과 사위에게 주먹질, 발길질을 하면서 부모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에서 100위안의 돈을 전부 빼앗아갔다.

2001년 11월 12일 불법요원의 장기적인 박해 하에 샤웨이는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고 임종 전에 많은 피를 토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샤웨이는 장씨망나니 집단의 공범자 덩쇼린에 의해 산채로 매맞아 사망한 것이다.

* * * * * *

매 한 개 사례마다 모두 피의 빚이고 매 한차례의 피의 빚마다 모두 한 가닥 끈이 존재한다. 선악에는 보응이 따르고 빚을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장씨집단의 파룬궁에 대한 말살적인 박해 속에서 지은 매 한차례의 피의 빚은 전부 갚아야 하는바 그 날는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다.

문장완성: 2004년 9월 3일

문장발표: 2004년 9월 4일
문장갱신: 2004년 9월 4일 10:17:58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4/9/4/8329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