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쓰촨성 통신원)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중국공산당(중공)의 소멸식 박해 중에서 약물을 사용해 수련자를 훼손하는 수단은 매우 악랄하며, 선량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본문은 명혜망에서 보도된, 쓰촨성 파룬궁수련자 28명이 중공의 세뇌반, 구치소, 노동수용소(勞敎所), 감옥, 일반 병원, 정신병원 등 장소에서 약물에 중독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실례를 열거했을 뿐이다. 실제 박해의 참혹한 정도는 폭로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1. 탕샤오청, 펑저우시 정신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
탕샤오청(唐小成), 남성, 당시 40세. 쓰촨성 펑저우(彭州)시 룽펑(隆豊)진 융펑(永豊)촌 주민이다. 2002년 5월 어느 날 저녁, 탕샤오청은 자전거를 타고 나가 파룬궁 진상 스티커를 붙이다가 악인에게 발각돼 구타당해 코와 입에서 피를 흘렸고, 이후 펑저우시 정신병원으로 납치돼 훼손당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인 2002년 8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파룬궁수련자 박해에 정신병원을 이용하는 중공
2. 황리사,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학대받아 사망

황리사
황리사(黃麗莎), 여성, 당시 34세. 쓰촨성 어메이산(峨眉山)시 룽츠(龍池)진 사람으로 전 러산(樂山)시 양춘푸(楊村鋪) 탄광 인사과 간사였다. 2002년 8월 22일, 떠돌이 생활을 하던 황리사는 청두(成都)시 공안국 칭양(靑羊)분국 쑤포(蘇坡) 파출소 악경(악랄한 경찰)에게 납치돼 청두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그녀가 이름을 밝히지 않자 ‘파룬궁 2호’라고 불리며 11-4 감방에 갇혔다. 8월 23일, 황리사는 단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후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관식)으로 훼손당했다.
2002년 9월 상순, 황리사는 청두시 칭양구 병원(청두시 칭양구 신화 지역사회 보건서비스센터)으로 납치돼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액과 불명 약물을 주입받았고, 구토와 혈변 등 소화기관 대출혈 증상이 나타날 정도로 훼손당했다. 황리사는 그녀를 박해하는 간호사에게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괴롭혀도 나는 당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9월 중순 이후 황리사는 혼수 상태에 빠졌다.
2002년 10월 17일 아침 7시경, 황리사는 박해받아 사망했고 몇 분 후 바로 화장됐다.
3. 후훙웨,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약물 중독으로 사망

후훙웨
후훙웨(胡紅躍), 여성, 당시 45세. 쓰촨성 청두시 신두(新都)현 유압펌프 노즐공장 직원이다. 2002년 9월, 중공 악당이 16차 당대회를 개최하기 전 청두시 공안국은 파룬궁수련자 체포 지표를 하달했다. 9월 28일, 후훙웨는 청두 푸난(府南)강변에서 실종됐고 11월 신두현 유압펌프 노즐공장은 공안국으로부터 후훙웨가 이미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공안국은 후훙웨의 사진 한 장만 보여주며 가족과 직장에 “굶어 죽었다”라고 말했고 가족과 직장이 시신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2년 11월 19일, 시신은 강제로 화장됐다.
후훙웨 사망 사건의 진상에 대해 명혜망 보도에 따르면, 2002년 11월 23일 청두시 공안국 총지휘실에서 전화를 받은 인사는 “이 일은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책임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청두시 칭양구 병원으로 납치돼 박해받은 한 파룬궁수련자가 목격한 후훙웨의 박해 사망 경위다.
“제가 들어간 지 6일째 되던 날, 즉 10월 21일 구치소에서 오랫동안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던 두 수련자, 즉 신두 유압펌프 공장의 장야링(張亞玲)과 후훙웨를 보냈습니다. 악당 요원들은 우리가 서로 말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우리는 기회를 찾아 간단히 교류하며 서로를 이해했습니다.
그녀들은 청두의 버스에서 납치됐는데 협조하지 않아 30여 일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원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 단식으로 항의했습니다. 의사는 매일 그녀들에게 수액을 놓았는데 수액 때문에 소변이 잦았지만 악경은 족쇄를 풀어주지 않아 침대에서 내려와 용변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참기 힘들 정도로 배가 불러오면 침대에서 그대로 소변을 봤는데 간호사는 거짓말에 속아 그녀들이 위생을 지키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악경은 그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저속한 욕설을 하며 매일 주먹과 발로 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속임수에 넘어간 간호사가 규정된 시간(1주일)에 침대 시트를 갈아주지 않아 그녀들은 계속 더럽고 냄새나며 축축한 침대에서 잤습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녀들은 여전히 신앙을 견지하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저는 매우 존경스러웠습니다.
11월 초가 되자 그녀들은 말이 비정상적으로 변했고 자주 반복하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왜 여기에 오게 된 거지?’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녀들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의사가 약물로 그녀들을 해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녀들이 박해받아 정신이 맑지 않은 상황에서도 신두 파출소는 그녀들을 데려가기는커녕 오히려 1인당 1년 6개월의 불법 강제노동 통지서를 보냈습니다. 그녀들은 통지서를 들고 있었지만 이미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고 무엇에 쓰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병원에 들어온 지 20여 일 만에 약물 중독으로 인해 후훙웨는 하룻밤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12일 오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훙웨의 시신이 실려 나갈 때 저는 그녀 병상의 흰색 시트에 지름 약 20cm가 넘는 혈흔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공안이 후훙웨가 “굶어 죽었다”라고 말한 것은 범죄 증거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4. 장제위, 난무쓰 여자 노동수용소에서 중추신경 파괴 약물 주입받고 억울하게 사망
장제위(姜潔玉), 여성, 당시 50세. 쓰촨성 청두시 피(郫)현 신밍(新明)공사 3대대 주민이다. 2000년 2월 24일, 장제위는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다가 피현 세뇌반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고, 2001년 2월 17일 다시 피현 세뇌반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2001년 11월, 장제위는 두 번째로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다가 불법 강제노동 1년 6개월 처분을 받고 쓰촨성 쯔중(資中) 난무쓰(楠木寺) 여자 노동수용소(또는 쓰촨성 여자 노동수용소)에서 고문과 중추신경 파괴 약물 주입 등 훼손을 당해 숨이 끊어질 듯한 상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2003년 하반기, 장제위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5. 멍샤오, 청두시 진탕현 제1병원에서 학대받아 사망

대학 시절 베이징에서 실습하는 멍샤오
멍샤오(蒙瀟), 여성, 당시 37세. 쓰촨성 난충(南充)시 시충(西充)현 농촌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청두 강철창에서 엔지니어, 작업반장으로 근무했다. 1999년 11월 17일, 멍샤오는 천안문 광장에서 ‘파룬따파, 생생불식(生生不息), 세상에 길이 남으리라’라는 현수막을 펼쳤다가 천안문 파출소로 납치돼 악경에게 구타당했다. 베이징 둥청(東城) 구치소에 불법 감금된 기간에 구타, 체벌, 뒷수갑, 전기충격봉 등 고문을 당한 후 불법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000년 4월 12일, 멍샤오는 퇀허(團河) 감옥으로 이송되던 중 가부좌를 했다는 이유로 구타당한 후 당직실로 끌려가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상하체가 끈으로 묶여 움직일 수 없게 됐으며, 밤에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로 묶여 있는 등 줄곧 이렇게 지냈다. 2000년 4월 22일, 멍샤오는 쓰촨성 여자감옥(젠양 양마진)으로 납치됐다.
멍샤오는 쓰촨성 여자감옥에 들어간 후 독방 감금, 구타, 계단에서 거꾸로 끌고 다니기, 전기 충격, 결박, 겨울에 홑옷만 입히고 실외에서 얼리기, 소진배검(蘇秦背劍) 식으로 수갑을 채워 침대 모서리를 통과시켜 침대에 묶기 등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 재연: ‘다베이카오(大背銬)’
멍샤오는 2년 억울한 옥살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장에서 대법 진상을 알리고 전단을 배포하다가 칭바이장(靑白江)구 퇀제(團結) 파출소에 15일간 불법 구류됐다.
2002년 1월 21일, 멍샤오가 쓴 글 ‘내가 박해받은 경험’이 명혜망에 발표된 후, 쓰촨성은 청두 강철창에 그녀를 엄격히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2002년 4월 24일, 멍샤오는 청두시 피현 탕창(唐昌)진 세뇌반으로 비밀리에 납치돼 요추, 미추 등 여러 곳을 발로 차여 다쳐서 서 있을 수 없게 됐다. 멍샤오가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해지자 공장에서 데려와 치안실에 가두고 공장 병원에서 대량의 중추신경 파괴 약물을 주사했다.
멍샤오는 2개월 넘게 법공부와 연공(煉功)을 거쳐 다시 일어섰다. 2002년 9월경, 멍샤오는 지혜롭게 빠져나와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3년 11월 19일, 멍샤오는 청두시 진탕(金堂)현 허핑(和平)가 임대 주택에서 청두시 폭동진압대대와 진탕현 공안국 악경에게 납치돼 진탕현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멍샤오는 단식으로 항의하다가 여러 차례 쓰촨성 노동개조국 병원으로 끌려가 음식물 강제 주입과 독 주사를 당했다. 나중에 멍샤오가 의사에게 진상을 알리자 의사는 더 이상 유독성 약물을 주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진탕현 제1병원으로 끌려가 수액을 맞았는데 수액을 맞은 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깨어난 후 전신 통증, 구토, 부정확한 발음 증상이 나타났다. 가족이 공안국에 석방을 요구하자 청두시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은 “병원이나 구치소에서 죽게 할지언정 석방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2004년 1월 8일부터 12일 사이, 멍샤오는 진탕현 제1병원에서 학대받아 사망했다.
6. 궈쥐팅, 쑤이닝시 링취안쓰 구치소에서 독 주사 맞고 사망
궈쥐팅(郭舉廷), 남성, 당시 69세. 쓰촨성 쑤이닝(遂寧)시 펑시(蓬溪) 톈푸(天福)진 사람이다. 2001년 3월 17일, 궈쥐팅은 톈푸진 정부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상을 알리다가 간(甘) 씨 성을 가진 악인에게 채찍으로 맞고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2002년 12월 30일, 궈쥐팅은 집으로 돌아왔다. 귀가 후에도 궈쥐팅은 여전히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며 거리, 찻집, 호텔에서 진상을 알렸고 인근 몇 개 향진(鄕鎭)을 자주 오가며 먹고 입는 것을 아껴 모은 돈으로 진상 자료를 만들었다.
2003년 11월 13일, 궈쥐팅은 악경에게 가택수색과 납치를 당해 쑤이닝시 링취안쓰(靈泉寺) 구치소에 감금돼 박해받았다. 궈쥐팅은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하다가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과 독 주사를 당했다. 그러나 어떤 박해에도 궈쥐팅이 시종일관 “파룬따파하오” 한마디를 잊지 않자 악경은 화가 치밀어 그에게 고문을 가했다.

고문 재연: 독 주사(불명 약물 주사)
2004년 12월 3일, 숨이 끊어질 듯한 궈쥐팅은 집으로 풀려났다. 궈쥐팅은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만인 2005년 1월 24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7. 리셴민, 쑤이닝시 서훙현 구치소에서 불명 약물 주사 맞고 사망, 시신 강제 해부돼
리셴민(李憲民, 리셴밍), 여성, 당시 51세. 전 쓰촨성 쑤이닝시 서훙(射洪)현 사회보험국 직원이다. 2005년 2월 1일 낮 11시, 리셴민은 서훙현 정부 초대소에 친척과 친구들의 설 연회에 참석하러 갔다가 4명의 ‘610’ 사복 특무에게 강제로 차에 실려 서훙현 구치소로 납치돼 불법 감금됐다. 리셴민이 납치된 후 서훙현 공안국 국보(國保)대장(국내안전보위대: 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저우위안(周淵)은 그녀에게 “이번에 너를 집어넣지 못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말했다.
2005년 4월 6일 오전, 리셴민에게 전신 오한 등 감기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 구치소에 보고했다. 구치소 경찰은 계속 무시하다가 오후 2시가 돼서야 수의사 출신인 푸(蒲) 씨 성을 가진 수감자를 불러 그녀에게 수액을 놓게 했다. 리셴민은 불명 약물을 주입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설사와 구토 증세를 보였다.
저녁 7시, 구치소 왕(王) 소장과 의사는 경찰 양슈(楊秀)를 불러 리셴민을 병원으로 보내게 했다. 병원 의사가 리셴민을 검사한 후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으나 경찰 양슈가 거절했다. 9시 넘어서 리셴민이 구치소로 다시 끌려온 후 또다시 불명 약물을 주입받자 전신 오한이 더 심해지고 눈이 튀어나오는 등 임상 증상이 나타났다. 4월 7일 새벽 1시, 리셴민은 박해받아 사망했다.
리셴민이 박해받아 사망한 후 악인들은 가족의 동의 없이 서훙현 화장장 뒤 시멘트대 위에서 시신을 강제로 해부했다. 가족이 도착했을 때 머리는 절개됐다가 이미 봉합돼 있었고 창자는 바닥에 놓여 있었으며 적출된 장기는 쑤이닝시 인민병원 병리과 주임 량하이차오(梁海橋)가 쑤이닝으로 가져갔다. 해부에 참여한 기관 및 인원은 쑤이닝시 검찰원 룽(龍) 처장, 서훙현 정법위, 현 ‘610’, 현 검찰원, 현 구치소다.
8. 리자빈, 청두시 솽류현 제1병원에서 불명 약물 주사 맞고 사망
리자빈(李家彬), 남성, 당시 50여 세. 쓰촨성 청두시 솽류(雙流)현 펑(彭)진 간쯔(柑梓)촌 거주. 2004년 6월 14일, 리자빈은 솽류현 정싱(正興)진 세뇌반으로 납치돼 감금 박해를 당했고, 8월 18일 다시 솽류 구치소로 납치돼 계속 감금 박해를 당했다. 4개월간의 잔혹한 박해를 거쳐 리자빈은 다시 솽류현 제1병원으로 납치돼 손발이 병상에 수갑으로 채워진 채 매일 불명 약물을 주사받았다. 불과 보름 만에 리자빈은 정신이 혼미하고 전신에 검푸른 부종이 생기며 피부에서 피고름이 흐를 정도로 훼손당했다. 2005년 2월 9일 전, 생명이 위독한 리자빈은 ‘보석(병보석)’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2005년 5월 16일, 집에 돌아온 지 3개월여 만에 리자빈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공산당에게 박해받아 죽는 것이다”였다.
9. 린펑, 청두 룽취안이 여자 노동수용소에서 불명 약물 주사 맞고 사망

린펑
린펑(林鳳), 여성, 당시 36세. 쓰촨성 난충시 순칭(順慶)구 우펑(舞鳳)진 4촌 9조 거주. 2002년 2월 11일, 린펑은 난충시 순칭구 마스푸(馬市鋪)에서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납치된 후 난충시 순칭구 법원에서 불법 강제노동 3년 처분을 받았고, 2003년 2월 청두 룽취안이(龍泉驛) 여자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노동수용소에서 린펑은 ‘전향’을 거부해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가족이 노동수용소에 면회 갔을 때 악인은 가족에게 “여기서 우리는 모든 형벌을 다 썼지만 그녀는 회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린펑이 수련 포기를 거부하자 그녀에게 불명 약물이 주사됐고 전신 부종, 보행 불가, 잦은 의식 불명 상태가 됐으며 병원 의사로부터 ‘신장 괴사’ 진단을 받았다.
2005년 5월 18일, 린펑은 노동수용소 악경에 의해 난충으로 압송됐고 가족은 그녀를 바로 촨베이(川北) 의학원 입원부 신장내과로 보내 구치했으며, 보름간 입원하는 동안 여러 차례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2005년 7월 26일 새벽, 린펑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0. 리자웨이, ‘적십자’ 병원에서 불명 약물 주사 맞고 사망
리자웨이(李家唯), 여성, 52세. 쓰촨성 루저우(瀘州)시 쉬융(敘永)현 전 쉬융현 도자토(瓷土) 공사 퇴직 직원. 2005년, 리자웨이는 사람들에게 파룬따파가 좋다는 진상을 알리다가 다시 구치소로 납치돼 박해받았고, ‘적십자’ 병원으로 보내져 불명 약물을 주사받은 후 두 발이 헐어 낫지 않았다. 2005년 11월, 리자웨이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1. 자오중링,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

자오중링
자오중링(趙忠玲), 여성, 당시 44세. 전 쓰촨성 청두시 진장(錦江) 전기공장 직원. 1999년 말, 자오중링은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다가 불법 강제노동 2년 처분을 받고 쯔중 난무쓰 여자 노동수용소에서 고문, 인격 모독, 약물 훼손과 강제 세뇌를 당했다. 자오중링이 노동수용소를 나올 때 이미 박해로 허리가 굽고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2003년, 자오중링은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청두시 진뉴(金牛)구 법원에서 불법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또다시 쓰촨 쯔중 난무쓰 여자 노동수용소에서 고문 박해를 당했다. 귀가 후 자오중링은 다시 신진(新津) 세뇌반으로 납치돼 박해받았고 이후 청두시 칭양구 병원으로 납치돼 계속 박해받았다.
2006년 11월 15일, 자오중링은 청두시 쓰마차오(駟馬橋) 부근에서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쓰마차오 파출소 류왕옌(劉望言) 등 악경에게 납치돼 청두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2006년 12월 말, 자오중링은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훼손돼 이른바 ‘처분보류’로 집으로 돌아왔다.
2007년 3월 23일, 청두시 진뉴구 검찰원 직원은 자오중링을 찾으러 반복해서 전화를 걸어 한번 오라고 요구했다. 3월 23일, 자오중링이 검찰원에 도착하자마자 청두시 구치소로 납치돼 감금 박해를 당했다. 자오중링이 단식으로 항의하자 다시 청두시 칭양구 병원으로 납치돼 계속 박해받았다. 2007년 4월 2일, 자오중링은 강제로 불명 약물을 주입받았다. 4월 23일, 쓰마차오 파출소 량샤오빙(梁曉兵), 의사 등 3명이 자오중링의 집에 가서 자오중링이 여전히 단식 중이라 매우 허약하고 매일 많은 병원비가 든다며 자오중링의 부모에게 가보라고 했다. 5월 4일, 자오중링의 여동생이 보러 갔을 때 그녀는 이미 말을 할 수 없었고 손으로 몇 번 시늉만 했다.
2007년 5월 5일 새벽, 자오중링은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
12. 황민,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

황민
황민(黃敏), 여성, 당시 53세. 전 쓰촨성 청두시 중소기업관리국 부국장. 2007년 3월 3일, 황민은 청두시 공안국, 칭양구 공안분국 악경에게 납치돼 청두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2007년 6월 상순, 청두시 칭양구 법원은 가족에게 전화로 황민을 체포해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 가뒀으며 병원에서 위독 통지서를 내렸다고 알렸다. 가족이 황민 면회를 요구하자 악경은 ‘체포 통지서’를 꺼내며 가족에게 서명을 강요했고 그렇지 않으면 면회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다. 황민의 둘째 여동생은 어쩔 수 없이 서명했다. 가족이 황민을 만났을 때 그녀는 문이 굳게 닫힌 방에 갇혀 있었는데 방에는 싱글 침대 3개가 있었고 양쪽에는 황민을 불법 감시하는 여성 수감자가 있었다. 방 밖에는 전자 감시장비와 7, 8명의 감시 인원이 있었다.
황민은 양손과 양발이 수십 근(斤) 무게의 쇠족쇄로 가운데 침대에 채워져 있었고 손톱은 매우 길었으며 몸은 매우 더러웠고(황민이 납치된 때부터 머리 감기, 목욕, 손톱 깎기, 양치질을 시키지 않았음), 하반신은 벗겨진 채 홑이불로 덮여 있었는데 홑이불은 매우 고약한 냄새가 났고 얼룩이 져 있었다.
2007년 6월 중순, 가족은 청두시 칭양구 법원으로부터 병원에 갇힌 황민이 불법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는 전화 통지를 받았다. 법원은 범죄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가족에게 어떠한 서면 통지도 하지 않았다.
2007년 8월 15일, 가족은 황민이 당일 아침 7시 30분에 사망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가족이 황민의 시신을 보았을 때 표정은 극도로 고통스러웠고 두 눈은 약간 뜨고 있었으며 머리는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입은 크게 벌어져 윗니가 완전히 밖으로 드러나 있었으며 아랫니는 입술 중앙 가까이에 치아 하나가 빠져 있었고, 구강 전체와 치아,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노란색 물질이 얼굴까지 퍼져 있었으며 독한 약 냄새가 났다. 손가락은 꽉 쥐고 있었고 양 팔뚝에는 손자국 모양의 멍 자국이 몇 군데 있었다. 시신은 당일 화장됐다.
13. 저우후이민,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학대받아 사망
저우후이민(周慧敏), 여성, 당시 45세. 쓰촨성 젠양(簡陽)시 스중(石鐘)진 황롄스왕(黃連石王)촌 출생, 호적지는 젠양시 정중(正中)가 121호 부(附)9호다. 1999년 12월 5일부터 2003년 7월 8일까지 저우후이민은 전후로 6차례 납치됐고, 3차례 쯔중 난무쓰 여자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됐으며, 3차례 병원(청두시 칭양구 병원, 젠양시 중병원, 두장옌시 임업중심병원)에 불법 감금됐다. 불법 감금된 856일 동안 구타, 전기 충격, 매달아 놓고 수갑 채우기, ‘군인 자세로 앉기’, ‘룽바오주(龍抱柱)’,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 강제 수액(수액 내에 다량의 수면제 투입)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박해받는 저우후이민의 상황 재연
2007년 9월 26일 저녁, 저우후이민은 청두시 공안국 청화(成華)분국 국보대대, 성덩(聖燈) 파출소 악경에게 가택 침입 납치를 당해 차례로 신진 세뇌반, 청두시 구치소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2008년 2월 1일, 계속 불법 감금돼 있던 저우후이민은 청두시 공안국 우허우(武侯)분국 국보대대의 불법 체포에 단식으로 항의했다. 2008년 2월 5일, 저우후이민은 청두시 칭양구 병원으로 납치됐는데 정문에서 어떤 사람이 그녀가 “파룬따파하오!”라고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3월 10일, 저우후이민의 사촌 오빠가 청두시 공안국 우허우분국 국보대대를 찾아가자 관련 책임자는 저우후이민이 이미 생명이 위독하다고 알리면서 성(省) 국가안전청이 석방하지 않으며 성 국가안전청은 “죽어도 병원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2008년 3월 13일 새벽 5시 반, 저우후이민은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
14. 류궈수, 완위안시 악경에게 가택 침입 및 강제 불명 약물 주사 당해 사망
류궈수(劉國淑), 여성, 당시 46세. 쓰촨성 완위안(萬源)시 주위안(舊院)진 사람이다. 2008년 7월 9일, 완위안시 공안국 국보대대 왕창(王强)은 악경 5명을 데리고 주위안진 류궈수의 집 문을 두드렸다. 류궈수는 2층 창문으로 보고 남편 펑정핑(馮正平)이 타지에서 일하고 있어 집에 5살 어린 소녀밖에 없었기에 문을 굳게 닫았다. 7월 11일 오후 3시, 주위안진 지인에게 그녀가 악인에게 24시간 앞뒤로 감시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7월 11일 저녁, 악경은 문을 부수고 류궈수의 집에 들어갔고 악경 4명은 류궈수를 바닥에 쓰러뜨려 몸을 꽉 누른 뒤 불명 약물을 주사했는데 류궈수는 매우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워했다. 주위안 파출소 악경은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펑정핑 형제에게 관두(官渡)진에 있는 류궈수의 여동생 류궈쥐(劉國菊)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와서 언니를 관두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고문 재연: 불명 약물 주사
2008년 7월 14일 저녁, 류궈쥐 등은 언니 류궈수를 관두의 집으로 데려왔다. 이때 류궈수는 이미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는데 표정은 고통스럽고 내심은 매우 공포스러워했으며 정신 착란 상태였다. 7월 17일 이른 아침, 이미 정신 착란 상태인 류궈수는 옥상에서 이웃집으로 기어오르다가 거리로 추락했다.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류궈수는 숨을 거뒀다.
15. 취안쉐인, 고문과 독약으로 학살당해
취안쉐인(全學銀), 남성, 당시 39세. 쓰촨성 쑤이닝시 펑시현 창러(常樂)진 11촌 사람이다. 2000년 4월, 취안쉐인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다가 천안문에서 악경에게 납치돼 펑시로 압송된 후 불법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몇 차례 단식으로 박해를 저지하다가 악경에게 음식물 강제 주입 및 폭행을 당했다. 2001년, 취안쉐인은 다시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다가 도중에 악경에게 납치돼 펑시로 돌아왔고 불법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 기간에 잔혹한 고문을 당해 신체가 극도로 허약해졌고 귀가 후 농사일을 할 수 없어 소량의 간장, 식초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2004년 11월 28일, 취안쉐인은 현 ‘610’ 및 국보대대에게 납치, 가택수색을 당했고 다시 불법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불법 심문 중 취안쉐인은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당했다. 더욱 악독한 것은 취안쉐인이 불법 형기 만료에 임박했을 때 강제로 채혈을 당하고 불명 독약을 주사받았는데, 독액으로 인해 폐 조직이 심각하게 손상돼 결국 폐가 썩어들어갔다. 취안쉐인은 2009년 3월 8일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16. 셰더칭, 청두시 신진 세뇌반에서 강제로 병원에 보내져 불명 약물 주입받고 사망

셰더칭
셰더칭(謝德淸), 남성, 당시 69세. 쓰촨성 청두 탐사설계연구원 병퇴(병으로 퇴직) 직원으로 청두시 칭장둥(淸江東)로 188호 거주. 2009년 4월 29일 오전, 셰더칭, 위친팡(余勤芳) 부부는 쓰촨성 청두 하이테크구(가오신구) 법원에 가서 파룬궁수련자 천창위안(陳昌元)에 대한 불법 재판을 방청했다. 오전 10시 넘어서 청두 탐사설계연구원 보위처 처장 방궈푸(方國富)는 푸난(府南)사무소, 푸난 파출소의 박해 활동에 협조해 하이테크구 법원 근처에서 셰더칭, 위친팡 부부를 납치했다. 푸난 파출소에서 셰더칭, 위친팡은 묶인 채 다음 날 아침까지 갇혀 있다가 사무소 주임이자 ‘610’ 두목 인윈(尹雲) 등에게 ‘청두 법제교육센터’(신진 세뇌반)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불과 20여 일의 감금 박해 속에서 건강하고 혈색이 좋던 셰더칭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훼손돼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고 소변을 지리며 물 한 모금 넘기기 힘들었고 심각한 협심증을 동반했다.
2009년 5월 23일 저녁, 청두 탐사설계연구원 보위처 방궈푸와 청두시 국보대대 ‘610’ 요원은 은밀히 생명이 위독한 셰더칭을 세뇌반에서 데려와 집으로 던져버렸다.
이후 4일 동안 셰더칭은 대부분 혼수 상태였고 조금 깨어 있을 때도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참기 어려워 얼굴이 고통으로 가득 찼으며, 침대에서 힘들게 몸을 뒤척이며 신음했고 마치 내장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워했다.
2009년 5월 27일 밤 10시 15분경, 셰더칭은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셰더칭은 생전에 힘들게 몇 마디를 남겼다. 신진 세뇌반이 그를 강제로 병원에 보내 이른바 신체 검사를 하고 그에게 불명 약물을 주사 및 주입했으며 최근 10여 일간 물과 음식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셰더칭이 세상을 떠날 때 양손은 검게 변했고 시신도 점차 검게 변했다.
17. 샤오훙모, 더양 감옥에서 불명 약물 주사 맞고 사망

샤오훙모
샤오훙모(肖洪模), 남성, 당시 47세. 쓰촨성 아바(阿壩)주 뤄얼가이(若爾蓋) 405 탐광대 직원으로 광한(廣漢) 뤄청(雒城)진 동가(東街) 101 지질대원 거주. 2001년 1월 18일 심야, 샤오훙모는 광한 악경에게 납치돼 베이와이(北外)향 세뇌반(장소는 폐업한 조립식 자재 공장), 광한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샤오훙모는 불법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쓰촨 더양(德陽) 두 곳, 광위안(廣元) 감옥으로 납치돼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8년 4월 18일,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샤오훙모는 사람들에게 파룬따파가 좋다는 진상을 알리다가 다시 악경에게 납치됐고 이후 광한시 법원에서 비밀리에 불법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두 번째로 더양 감옥으로 납치돼 감금 박해를 당했다.
샤오훙모는 감옥에서도 여전히 진상 알리기를 견지했다. 2009년 7월 15일, 샤오훙모는 불명 약물을 주사받고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이 주사 한 방이면 당장 지각을 잃게 돼”
2009년 7월 25일부터 26일, 샤오훙모가 더양시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는 동안 감옥 측은 가족에게 샤오훙모 뇌에 종양을 앓고 있다고 속였다. 샤오훙모의 어머니와 한 친구가 병원에 면회 갔을 때 쫓겨나 면회하지 못했다. 7월 27일, 샤오훙모는 쓰촨성 사법경관총병원 청두 병범(病犯) 감옥으로 이송됐다.
2010년 3월 중순, 샤오훙모는 쓰촨성 사법경관총병원 청두 병범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18. 류광디, 시산핑 노동수용소에서 대량의 불명 약물 주입받고 사망

류광디
류광디(劉光弟), 남성, 당시 60여 세. 고급 엔지니어, 쓰촨 에너지투자 주식회사(전 어메이 철합금 공장) 동력처 처장으로 성 과학기술발명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고 국가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2008년 4월, 류광디는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납치된 후 어메이산시 ‘610’, 러산 노동교양위원회로부터 불법 강제노동 1년 처분을 받고 충칭(重慶) 시산핑(西山坪)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장시간 강제 중노동과 학대로 류광디는 흉막염, 흉강 삼출액 등 질병에 걸렸고 가족의 강력한 요구로 겨우 노동수용소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 구석에서 류광디가 매일 연공을 견지해 병세가 호전되자 그를 감시하던 사람의 밀고로 노동수용소는 병원에 그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도록 지시했고, 그에게 대량의 불명 약물을 주입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2009년 4월 10일, 류광디가 불법 강제노동 기간이 만료돼 집으로 돌아올 때 이미 생명이 위독했다. 2010년 9월 25일, 류광디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9. 후구이팡, 쓰촨 여자감옥에서 약물 박해 당해 만성 중독사
후구이팡(胡桂芳), 여성, 당시 65세. 쓰촨 젠양시 차오츠(草池)진 춘리(群力)촌 1사 거주. 2005년 3월 상순, 후구이팡은 거리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악경에게 납치, 가택수색을 당했고 후구이팡과 남편 저우취안량(周全良)은 악경에게 족쇄와 수갑이 채워져 젠양 구치소로 납치돼 지극히 잔혹한 수단으로 형신공술(고문해 자백을 강요함)을 당했다.
후구이팡은 비밀리에 불법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쓰촨성 여자감옥(젠양 양마진)으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그 기간에 악경은 불명 약물을 사용해 후구이팡을 박해하여 만성 중독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그녀는 귀가 후 양쪽 눈이 멀고 먹는 대로 배설하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다가 2010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20. 천스밍, 메이산 세뇌반에서 약물 박해로 사망

천스밍
천스밍(陳仕明), 남성, 나이 미상. 쓰촨성 메이산(眉山)시 단링(丹棱)현 청샹(城鄕) 바이타(白塔)촌 4조 주민. 2010년 7월 20일, 천스밍은 집에서 5번째로 납치됐다. 그는 악경 8명에게 주먹과 발로 구타당하고 끌려가 차에 실린 뒤 메이산 505공장 전신통신부 초대소 세뇌반으로 납치됐다. 천스밍은 처참하게 약물 박해를 당했는데 불명 약물을 주사받고 음식과 식수에도 약을 타서 생명이 위독해져서야 집으로 풀려났다. 천스밍은 집에 돌아온 지 반년도 안 돼 2011년 4월 10일 오후 5시 반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1. 위안융원, 쓰촨성 여자감옥에서 약물 박해 당해 사망
위안융원(袁永文), 여성, 당시 69세. 쓰촨성 충라이(邛崃)시 전기공장 퇴직 직원. 2008년 3월 26일, 위안융원은 충라이시 시가(西街) 시장에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충라이시 공안국 국보대대 옌사오이(嚴紹毅), 카오펑(考棚)지역 사회경관 허관훙(何官紅) 등에게 납치돼 충라이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2008년 10월 중순, 위안융원은 충라이시 법원에서 불법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이후 쓰촨성 여자감옥(젠양 양마진)으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감옥에서 악경은 위안융원에게 강제로 불명 약물을 먹여 정신 행동 이상이 나타나게 했고 대소변을 모두 바지에 보게 했다. 악경 리춘(李春)은 자주 야간 당직 감호 류단(劉丹)을 사주해 밤에 위안융원을 구타하게 했고 위안융원은 미추골이 부러졌다. 위안융원은 박해받아 전신이 마비됐고 여러 차례 생명 위험이 나타나 청두 경관병원으로 이송됐다.
2010년 4월 20일, 가족이 청두 경관병원에서 위안융원을 만났을 때 그녀는 전신 마비 상태로 몸이 굳어 있었고 피골이 상접했으며 숨이 끊어질 듯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소변 처에 소변줄이 꽂혀 있었으며 정신이 맑지 않아 헛소리를 했고, 음식을 먹지 못하며 건드리기만 하면 “때리지 마세요”라고 소리쳤고 오른손에는 주삿바늘 자국이 많았으며 언제든지 생명이 위험했다.

박해받아 앙상하게 마른 위안융원
2010년 4월 21일, 악경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숨이 끊어질 듯한 위안융원 노인을 집으로 보냈으며 노인이 사망하기까지 2~3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위안융원은 집에 돌아온 후 가족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았지만 매일 유동식만 조금 먹을 수 있었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을 전부 침대에서 해결하다가 1년여의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2011년 5월 7일 새벽 5시 세상을 떠났다.
22. 우이화, 쯔양시 얼어후 세뇌반에서 독약으로 사망
우이화(吳義華), 남성, 당시 48세. 개인 의사로 쓰촨성 쯔양(資陽)시 옌장(雁江)구 마자(馬家)골목에서 진료소를 운영했다. 2010년 10월 12일 쯔양시 공안국 옌장분국 국보대대 황광우(黃光武)는 악경 7, 8명을 이끌고 우이화를 진료소에서 납치해 쯔양시 얼어후(二娥湖) 세뇌반에서 박해했다.
우이화는 신앙을 견지하며 ‘전향’을 거부했다. 얼어후 세뇌반 두목 샤오후이(肖慧, 여)는 국보대대 황광우 등과 결탁해 며칠 밤낮으로 우이화를 고문하는 동시에 그가 마시는 물에 중추신경과 내장을 파괴하는 독약을 투입했지만 우이화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2011년 3월, 우이화가 세뇌반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신체는 훼손돼 변형됐고 지인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집에 온 지 며칠 만에 갑자기 쓰러져 보안요원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24시간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우이화는 깨어난 후 의사에게 매일 혈액 세척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렇게 큰 액수의 병원비를 감당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퇴원했다.
이후 몇 달 동안 우이화는 심장과 위가 자주 격렬하게 아팠고 점점 여위고 초췌해졌으며 안색이 파랗게 변하고 입술이 검게 변했으며 자주 혼수상태에 빠지다가 2011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23. 뤄장핑, 윈난성 제1감옥에서 독 주사 박해 당해 사망

뤄장핑
뤄장핑(羅江平), 남성, 당시 51세. 쓰촨성 판즈화(攀枝花)시 미이(米易)현 싸롄(撒蓮)진 핑양(平陽)촌 거주. 2012년 1월 6일, 뤄장핑은 윈난(雲南)성 추슝(楚雄)주 난화(南華)현 룽촨(龍川)진 마을에 가서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난화현 공안국 룽촨 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돼 난화현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다. 2012년 4월, 뤄장핑은 난화현 법원에서 불법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2012년 6월 1일 윈난성 제1감옥으로 납치돼 감금 박해를 당했다.
윈난성 제1감옥에서 뤄장핑은 ‘전향’을 거부해 족쇄와 수갑 채우기, 구타, 체벌, 독방 감금 등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뤄장핑이 단식으로 항의하자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 주입을 당해 입안의 살이 짓이겨졌고 아랫니가 전부 뽑혔으며 윗니는 흔들리는 몇 개만 남았다. 뤄장핑은 또 독 주사를 많이 맞았다.
뤄장핑은 독 주사를 맞은 후 배가 부어오르고 오장육부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 대소변이 통하지 않았고 양발이 부어올라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었으며 기력이 없어 고개조차 들 수 없었고 말 한마디 하기도 매우 힘들었으며 안색은 밀랍처럼 노랗고 피골이 상접했다.
2013년 12월 23일, 훼손돼 생명이 위독해진 뤄장핑은 ‘보석(병보석)’으로 쓰촨 고향으로 돌아왔다. 뤄장핑은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니, 친척, 친구에게 그가 감옥에서 독 주사를 맞은 상황을 호소했는데 좌우 양팔에 독 주사를 맞은 바늘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고 양팔 바늘 자국 주위 2cm 범위가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5일 후인 2013년 12월 28일, 뤄장핑은 세상을 떠났다.

사망 전 집에서의 뤄장핑
24. 샤오장허, 두장옌시 톈마진 세뇌반에서 독살당해
샤오장허(肖章和), 남성, 당시 60세. 쓰촨성 두장옌(都江堰)시 톈마(天馬)진 셴허(仙鶴)촌 7조 사람이다. 2013년 10월 21일, 샤오장허는 톈마진 종합치안판공실(종치반) 셰빙(謝兵)과 샤오청웨이(肖成偉) 등에게 진 정부 세뇌반으로 납치돼 수련 포기 ‘보증서’ 작성을 요구받았으나 샤오장허는 거절했다. 다음 날 청두시 신진현 세뇌반에서 남녀 두 사람이 와서 샤오장허를 세뇌했지만 샤오장허는 끝까지 ‘보증서’ 작성을 거부했다. 오후에 30대 여자가 매우 은근하게 차를 타서 물을 붓고 끊임없이 샤오장허에게 마시게 했는데, 오후 5시가 넘자 샤오장허는 머리가 맑지 않고 흐리멍덩해지기 시작했으며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고 악인은 그의 손을 잡고 ‘보증서’를 썼다. 셋째 날, 샤오장허는 또 계속 불려가 ‘차’를 마셨고 머리가 다시 맑지 않고 흐리멍덩해져 쓰라는 대로 썼다.
샤오장허는 집에 돌아온 후 머리가 점차 맑아졌다. 그는 즉시 진 정부로 가서 머리가 맑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은 무효라고 엄정 성명하고 종치반 셰빙 등에게 그에게 무슨 약을 탔느냐고 따졌지만 종치반 사람들은 딱 잡아뗐다.
1주일 후 샤오장허에게 인후통, 목소리 쉼 등 증상이 나타났고 이어 몸에 선홍색 종기가 나타났다. 가족이 그를 두장옌시 병원으로 보내자 의사는 보고 나서 “이 병은 우리가 치료할 수 없으니 큰 병원으로 보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어 샤오장허는 가족에 의해 쓰촨성에서 가장 선진적인 화시(華西) 병원으로 보내졌다. 화시 병원은 처음에 샤오장허를 약물 중독으로 진단했지만 의아하게도 나중에 진단 결과를 ‘담석’으로 바꾸고 가족에게 환자가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물었으며, 또 이 병은 고치기 어려워 수술해야 하지만 수술실은 버텨도 중환자실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안 돼 샤오장허 몸의 선홍색 종기가 신속히 퍼졌고 2014년 5월 22일(음력 4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25. 장스샹, 러산 우마핑 감옥에서 약물 박해 당해 사망
장스샹(張世祥), 남성, 당시 66세. 쓰촨성 젠양시 젠청(簡城)진 정중가 16호 2단원 602호 거주. 2007년 6월 4일, 장스샹은 젠양시 쳰시(千禧)백화점 톈칭관(天慶觀) 상가에서 시민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젠양시 공안국 국보대대, 청중(城中) 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됐고 장스샹의 오른손 손가락 뼈가 부러졌다. 당일 오후 장스샹은 지혜롭게 파출소를 빠져나왔고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8년 11월 4일, 장스샹은 젠청진 룽왕거우(龍王溝) 21호 임대 주택에서 악경에게 납치돼 젠양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받았고 장기간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어 신체에 심각한 상해를 입었다. 12월 4일, 장스샹은 쯔양시 얼어후 세뇌반으로 납치돼 더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9년 12월 8일, 장스샹은 젠양시 법원에서 불법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이후 쓰촨 러산 우마핑(五馬坪) 감옥(현 러산시 자저우 감옥)으로 납치돼 감금 박해를 당했다. 감옥은 장스샹에게 ‘진선인(眞·善·忍)’ 신앙 포기를 강요하기 위해 그에게 잔혹한 박해를 가했고 또 강제로 불명 약물을 먹였는데, 감옥 의사는 “약을 먹지 않고 ‘전향’하지 않으면 네가 죽어도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라고 소리친 적이 있다.
2014년 11월 3일(또는 6일), 장스샹이 6년여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전신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고 다리 피부는 붓다 못해 반질반질해져 터져서 계속 피고름이 흘렀으며 생활을 전혀 자립할 수 없었다. 출옥 한 달 만인 2014년 12월 4일 장스샹은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26. 셰샤, 청두시 신진 세뇌반에서 약물 중독으로 사망

셰샤
셰샤(謝霞), 여성, 당시 56세. 쓰촨성 판즈화시 사람으로 쓰촨 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청두시 솽류현 탕후(棠湖) 중학, 솽류현 화양(華陽) 고급직업중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피아노 교육 성과가 훌륭했다. 10여 년간 셰샤는 신앙을 견지해 학교에서 불법 파면당했고 전액 지불하고 산 주택도 학교에 불법 몰수당했다. 셰샤는 여러 차례 납치, 불법 감금을 당했고 2000년 불법 강제노동 1년, 2006년 불법 징역 3년을 선고받아 구치소, 세뇌반, 노동수용소, 감옥에서 박해받았다.
2013년 5월 28일 저녁 8시경, 셰샤는 위독해 입원한 어머니를 보러 판즈화로 돌아가다가 청두 북역에서 역전 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됐고 이틀 후 청두시 신진 세뇌반으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2013년 8월 상순, 셰샤는 신진 세뇌반에서 나온 후 다리가 코끼리 다리처럼 붓고 배가 큰 북처럼 부어올랐다. 셰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신진 세뇌반은 강제로 그녀를 전향시키기 위해 밥에 약을 타고 불명 약물을 주사했으며 신체에 심각한 병증이 나타나서야 신진 세뇌반이 그녀를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또 그녀 앞에 있던 한 파룬궁수련자가 독침을 맞은 후 풀려나 얼마 안 돼 사망했다고 말했다.

중공 고문 예시도: 약물 주사
2016년 5, 6월경, 셰샤는 쓰촨 친구의 도움으로 아들이 일하는 뤄양(洛陽)으로 갔고 약 한 달 후 그녀의 임대 방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7. 팡후이, 생전에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서 약물로 장애 입어
팡후이(房慧), 여성, 당시 55세. 쓰촨대학 외국어학원 강사로 자전거를 타고 칭짱(靑藏)도로를 따라 라싸까지 간 적이 있어 10대 청년 용사로 선정됐으며 쓰촨대학 등산팀의 건장이었다. 2002년 2월, 팡후이는 왕장(望江) 파출소에 의해 집에서 납치돼 청두시 제1구치소에 불법 감금됐고, 3월 세뇌반으로 보내졌다가 8월 단식 항의로 석방됐다. 2002년 11월 5일 다시 납치돼 청두시 제1구치소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해 신체가 허약해졌고, 이후 청두시 칭양구 병원에 감금돼 약물 박해로 장애를 입어 언어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고문 재연: 독 주사
2003년 12월 25일 청두시 우허우구 법원에서 불법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집행유예). 팡후이가 집으로 풀려났을 때 이미 전신 부종, 피부 경직, 눈을 가늘게밖에 뜰 수 없었고 말이 어눌했으며 자주 극심한 두통이 나타나 참기 어려웠고, 때로는 아파서 머리를 감싸 쥐고 엉엉 울었으며 걷기 힘들어 발을 떼지 못해 끌며 걸어야 했고 자주 넘어졌다. 가족이 그녀를 큰 병원 전문의에게 데려가자 의사는 “중추신경이 파괴됐습니다”라고 했다. 가족이 급히 어떻게 파괴된 것이냐고 물었으나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19년 3월, 다년간 침대에서 마비 상태로 지내던 팡후이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8. 천리칭, 생전에 더양 감옥에서 약물 박해 당해

천리칭
천리칭(陳禮淸), 남성, 향년 82세. 쓰촨성 펑저우시 아오핑(敖平)진 초등학교 퇴직 교사. 2004년 3월 17일 심야, 천리칭은 펑저우시 공안국, 톈펑(天彭) 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돼 작은 방에서 형신공술을 당했는데 4일 밤낮 눈을 붙이지 못하게 했고 머리를 구타당해 정신이 맑지 않게 됐다.
2004년 12월 3일, 천리칭은 펑저우시 법원에서 비밀리에 불법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005년 2월 더양 감옥으로 납치돼 감금 박해를 당했다.
더양 감옥에서 천리칭은 ‘전향’을 거부해 꼬박 4일 밤낮 벌 서기를 당했고 발이 부어 걷지도 못했다. 한 번은 악인에게 맞아 위 대출혈이 발생해 진탕 칭장(淸江) 병원으로 이송돼 응급처치를 받았고 지혈된 후 다시 감옥으로 끌려와 20여 일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천리칭이 출옥하기 4개월 전, 감옥 측은 수감자를 사주해 그의 밥에 독을 탔고 독 밥을 먹은 후 그는 전신에 많은 땀을 흘려 온종일 땀 속에 젖어 있었는데 연속 4개월간 이랬다. 천리칭은 출옥 전에도 독침을 맞아 한때 정신 이상이 나타났다.
천리칭은 출옥 후에도 아오핑진 초등학교 교장 류위안더(劉遠德) 등의 감시를 자주 받았고 톈펑진 파출소 경찰과 지역사회 직원의 괴롭힘을 당했다. 2022년 1월 31일, 천리칭은 새벽 2시경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맺음말
본문은 명혜망에 있는 쓰촨성 파룬궁수련자가 약물에 중독돼 사망한 일부 실례를 열거했을 뿐이며 실제 박해의 참혹한 정도는 폭로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중공이 약물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자를 중독시키는 일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중공은 똑같은 수법을 써서 반체제 인사와 자신의 정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고 그 수단은 더욱 잔혹하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1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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