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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커우 파룬궁수련자 왕화이, 감금과 고문 박해로 사망

[명혜망](허베이성 통신원) 허베이성 장자커우(張家口)시 파룬궁수련자 왕화이(王懷·남)가 부당하게 7년 형을 선고받고 오랜 기간 중공(중국공산당)에게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박해를 받다가 지난 3월 9일 결국 억울하게 사망했다.

장자커우 자동차 무역 총회사 직원이었던 왕화이는 1995년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왕화이가 중공에 의해 장기간 박해를 받았던 과정을 간략히 설명한 것이다.

1999년 7월, 중공은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왕화이는 현지 파출소에서 경찰의 주요 감시 대상에 올랐다.

1999년 8월 30일 밤 10시쯤, 차오둥(橋東) 분국 훙치러우(紅旗樓) 파출소와 가도(街道)사무처 등의 40여 명이 왕화이의 집에 침입해, 법공부를 하고 교류하던 왕화이와 다른 수련자 28명을 납치했다. 차오둥 공안분국 전 국장 옌즈유(閆志有)와 부국장 마푸웨이(馬福維)는 즉시 장자커우시 공안국을 불러 불법 감금된 수련자들을 한 명씩 심문한 후 왕화이와 다른 수련자들을 각각 차오시(橋西)구와 차오둥구 악당학교 세뇌반으로 납치해 박해를 가했다. 며칠 후, 차오시구의 파룬궁수련자 5명이 불법 감금됐고, 차오둥구의 수련자 6명이 납치됐다. 같은 해 12월 10일, 왕화이의 직장인 장자커우 자동차 무역총공사는 그를 불법적으로 해고했다. 1999년 12월 말, 장자커우 차오시구 법원은 두 차례의 비공개 법정 재판을 거쳐 왕화이에게 부당하게 3년 형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고, 주거지 감시를 진행하며 매달 파출소에 가서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2001년 1월 2일, 왕화이와 그의 아내 류슈메이(劉秀梅)는 자택에서 왕이(王意)를 포함한 훙치러우 파출소 경찰 20여 명에게 납치됐다. 경찰은 왕화이에게 수갑을 채우고 수갑을 찬 왕화이를 심하게 발로 차서 피가 흐르고 두 손과 팔이 부어오르게 했다. 경찰은 또 왕화이의 머리를 이불로 감싸고 잔인하게 아래층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는 집에 있단 파룬궁 서적 등 관련 재산을 강탈당했지만 경찰은 해당 물품 목록을 작성하지 않았다. 차오둥 공안분국에서 왕화이 부부는 24시간 고문에 의한 강제 자백을 당했으며, 고문도구 ‘호랑이 의자’에 묶여 3일간 잠을 자지 못했다.

2001년 1월 3일 저녁, 류슈메이는 장자커우시에 있는 스싼리(十三里) 구치소로 납치돼 한 달간 불법 감금됐다가 이유도 없이 3천 위안을 갈취당한 후 풀려났다.

왕화이는 약 2001년 1월 5일(납치된 지 6일 후) 쉬안화(宣化)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이 기간에 왕화이는 불법적인 몸수색, 호랑이 의자 고문 등 박해를 받았으며, 가족이 왕화이에게 준 돈은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감옥경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출입구 앞 바닥에서 잠을 잤다. 6월 중순 어느 날, 경찰 리취안(李泉)은 왕화이의 몸에 숨긴 파룬궁 경문을 찾기 위해 몸을 수색한 후 경찰 20여 명을 불러 왕화이를 구타했다. 그 후 왕화이에게 거의 한 달간 여성용 작은 수갑을 등 뒤로 채웠다. 약 한 달간 수갑을 찼는데, 그 기간에 그는 감방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감방 동료들이 그의 팔에 가해진 상처의 심각성을 보고 소장에게 보고한 후에야 수갑을 풀어줬다. 수갑을 풀었을 때는 이미 수갑이 살에 박혀 빼내는 데만 2시간 가까이 걸렸고, 팔을 움직일 수 없었고 상처에서는 고름이 흘러내렸으며 치료 후에도 흉터가 남았다.

2001년 7월 17일, 왕화이는 차오둥구 법원에서 부당하게 7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장자커우시 사링쯔(沙嶺子) 감옥으로 처음 납치된 후, 나흘 뒤 바오딩(保定) 감옥으로 이송됐다. 왕화이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 2005년 바오딩 감옥 측은 왕화이, 마번순(馬本順), 마헝차오(馬恆超), 스원제(史文傑), 자오리산(趙立山), 장링장(張嶺江) 등 수련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이른바 ‘공격팀[攻堅小組]’을 구성했다. 감옥 측은 왕화이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을 썼고, 그가 협조하지 않자 온종일 빛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독방에 한 달간 가뒀다. 그는 감옥경찰의 지시를 받은 수감자들에게 여러 차례나 심하게 구타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잔인한 고문으로 50대에 불과했던 그는 모든 치아가 빠졌다. 7년간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단 두 번만 면회가 허용됐다.

2001년 4월 14일 밤 11시쯤, 왕화이의 아내 류슈메이(劉秀梅)는 집에서 훙치러우 파출소 소장 둥(董) 씨와 차오둥 분국 경찰들에게 납치돼 이튿날 쉬안화(宣化) 구치소로 보내졌다. 이 기간에 류슈메이는 박해에 반대하며 20일간 단식을 진행했다. 경찰은 그녀를 돌계단으로 끌고 올라가 다친 허리 쪽으로 고의로 떨어뜨렸다. 2001년 7월 17일, 류슈메이는 훙치러우의 경찰에게 납치돼 바오딩 가오양(高陽) 노동수용소로 이송돼 1년간 불법적으로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2007년 9월, 왕화이는 억울한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훙치러우 파출소와 주민센터는 불법적으로 그를 감시했는데, 소위 ‘민감한 날’이면 한 무리 사람들이 집 앞에 찾아와 그를 괴롭혔다. 특히 왕화이가 사회보장 퇴직 절차를 신청하자 훙치러우 파출소, 시 공안국, 차오둥 공안분국, 주민센터 직원들이 파룬궁 탄압기구 ‘610’과 연계해 그에게 재정적으로 박해를 가해 퇴직 후 15년이 지나도 연금을 받지 못하게 했고, 부부는 류슈메이의 연금 2천 위안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2024년 3월 7일 오후 3시 30분, 훙치러우 주민센터의 남녀 직원 각 1명, 그리고 훙치러우 파출소 경찰이 왕화이의 집에 찾아와 일가족을 또다시 괴롭혔다. 그중 주민센터의 남자 직원이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는데 류슈메이가 “그거 내려놔요, 찍으면 안 돼요!”라고 말하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러자 그 주민센터의 여직원은 “누군가 당신들을 신고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로 온 거예요!”라고 소리쳤다. 류슈메이가 “우리를 신고한 내용이 뭐죠?”라고 묻자 그 여성은 “누군가 당신들이 밖에서 무언가를 배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고 해요”라고 말했다. 류슈메이가 다시 “누가 신고했나요?”라고 묻자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고 말을 더듬으며 질문을 회피했다. 왕후이는 “신고한 사람을 알려주세요”라고 말하며 또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여직원은 매우 사악하게 “난 당신들과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공산당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떠났다.

사악한 당원들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괴롭힘은 왕화이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그는 2024년 3월 9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왕화이의 사망은 악당들의 박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박해 가담자들이 저지른 범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원문발표: 2024년 3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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