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수련의 길을 멈추지 않다

글/ 중국 대법제자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6년 7월에 법을 얻은 오랜 대법제자로 수련한 지 이미 30년 가까이 됐습니다. 매우 부끄럽게도 저는 자신이 정진하는 합격된 대법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년 한 번 있는 중국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에 대해 저는 줄곧 제가 잘 수련하지 못해 쓸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명혜 편집부의 ‘투고 통지’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수련했든 답안지를 제출해야 하며, 비록 제 답안지가 낙제점일지라도 원고를 쓰고 교류하는 것을 통해 진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 법에서 제고하고, 정법 수련이 끝나기 전에 노력해서 자신을 잘 수련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해 뒤쫓아 가겠습니다.

아래에 사존과 수련생들에게 제가 법을 얻고 수련하며 대법을 실증한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1. 미로에서 법을 얻고 정진하며 착실히 수련하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아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자주 인생의 의의를 사고했는데 특히 밤에 잘 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두려웠습니다. 20대 대학 시절 신경쇠약을 앓아 두통과 불면증이 있었고, 장기간 휴식을 취하지 못해 심장, 간, 신장이 모두 건강하지 못했으며, 아이를 낳은 후에는 류머티즘을 얻어 바람과 추위를 무서워했고 온몸이 아팠으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찼고 부부 사이도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낙심하고 심신이 지쳐있을 때 다행히 대법을 만났습니다. 당일 제1장 공법을 배웠는데 양손을 아랫배에 포개자 무언가 도는 느낌이 들어, 저는 즉시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모셨습니다. 저는 사람이 왜 병에 걸리는지, 왜 불행과 시련이 있는지 알게 됐고 인생의 의의를 알게 됐으며, 저와 아이가 구원받았음을 알게 되어 내심으로 비할 바 없이 기뻤습니다.

사무실 동료들이 제게 왜 그렇게 기뻐하고 활기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다시는 병원에 갈 필요가 없고 살아가는 의의를 알게 됐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단체 수련 환경이 있어 매일 단체 법공부와 연공(煉功)을 견지했고 다들 자주 수련 심득을 교류했는데, 특히 집착심을 제거하는 면에서 심성 제고가 매우 빨랐습니다. 저는 중공 악당 기관에서 일했는데, 알다시피 그곳은 부패하고 어두우며 사람 간에 암투가 벌어지고 바른 기풍이 결핍된 곳이라, 저도 이 큰 염색 항아리 속에서 혼자 깨끗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수련 후 저는 자신에게 엄격해져서 접대, 선물, 뇌물, 청탁 등을 마주해도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청렴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함을 단호히 해냈습니다. 제 업무는 상사와 동료들에게 일치된 호평을 받았고 연말 평가에서 여러 차례 우수 등급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 저는 업무 외에 집에 오면 법공부하고 연공하며 오락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1998년부터 저는 법 암기를 시작했는데 출근길에서, 차 위에서, 집안일을 할 때 머릿속으로 법을 외웠고 하여튼 머릿속에 온통 법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기간 법공부로 기초를 다져놓았기에, 악당 매체가 압도적으로 탄압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릴 때 바름과 사악함을 명백히 가려내어 대법을 굳게 믿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2. 박해를 폭로하고 자신만의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악당 CCTV가 대법과 사부님을 모함하고 비방하기 시작했고 각 직장에서는 단체 시청을 조직했습니다. 저는 당시 마음이 매우 괴로워 홀로 나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가방에 평소 보던 《전법륜》 한 권만 넣고 기차역으로 달려가 승강장 티켓 한 장을 사서 베이징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이튿날 아침 베이징에 도착해 차를 타고 곧바로 천안문으로 갔습니다. 저는 많은 대법제자를 만날 수 있을 거로 상상했지만 광장에는 온통 일반인들뿐이었고 누가 대법제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막막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이튿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이징 기차역에서 대학 동창을 만났는데 그는 베이징 철도 공안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파룬궁을 연마하고 더욱이 법을 수호하러 베이징에 왔다는 것에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가 왜 수련하는지와 파룬궁의 진상을 말해주었고 그는 이해하고 알게 됐습니다. 1999년 10월 29일, 제가 두 번째로 베이징에 갔다가 박해받고 돌아왔을 때 그는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었습니다.

1999년 10월 29일, ‘인민일보’가 사설을 발표해 대법이 무슨 교(敎)라고 모함하며 박해를 한층 더 확대하자, 저는 또 한 번 법을 수호하러 베이징에 갔습니다. 떠나기 전 저는 직장에 편지 한 통을 남겨 제가 왜 베이징에 가는지와 대법 진상을 알렸고, ‘내 행위는 비록 위법이 아니지만 구금되거나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바르지 못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천안문에 도착하자마자 순찰하던 무장경찰에게 체포되어 공안 서성(西城)분국 천안문 파출소의 한 지하실에 갇혔고, 당일 오후 베이징 주재 사무소 사람들에게 인계된 뒤 나중에 직장에서 보낸 사람에 의해 이송되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 직장, 가족, 친척과 친구들이 제게 큰 압력을 가했고 저는 본의 아니게 타협했습니다. 직장에서는 제게 정직 처분을 내리고 조사를 받게 했으며 저는 일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그 후 부서 지부 회의에서 저는 탈당을 요구받았고 아주 시원스럽게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비록 지금처럼 악당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미 공산당의 사악함을 똑똑히 보았기에 그 조직에서 탈퇴하는 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어떤 동료는 회의에서 저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며 당적을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저는 정중히 거절했고 속으로는 어서 빨리 이 사악한 조직에서 탈퇴하기를 바랐습니다. 악당 지부 회의에서 저는 자신이 왜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그리고 수련 후의 심신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제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소위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저를 도우려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 악당 매체의 말을 근거로 태도를 표명했는데, 오직 한 동료만이 양심적이고 공정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파룬궁을 저는 잘 모르고 연마해본 적도 없습니다. 마치 제가 포도를 먹어보지 않고 포도가 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파룬궁이 좋은지 나쁜지 저는 함부로 평론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동료는 평소 저와 접촉이 많지 않았는데 그는 1999년 초 위암으로 입원해 위의 4분의 3을 절제했습니다. 당시 그는 막 병이 나아 출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가 이 말을 할 때 저는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이 동료는 2002년에 조기 퇴직하고 변호사가 됐는데 그는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아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직장에 왔다가 저와 마주쳤는데 제가 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한마디 양심적이고 공정한 말을 했기에 우리 사부님께서 당신을 보호해주셔서 당신이 오늘까지 건강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겁니다.” 그도 그만큼 많은 암 환자가 다 죽었는데 유독 자신만 살아남았다며 분명 누군가 보호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우리 사부님이라고 알려주자 그는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2000년 6월 사부님의 경문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가 발표된 후, 저는 사악에게 타협하는 것이 치욕이고 오점임을 깨닫고 직장에 서면으로 소위 전향, 회개는 모두 본심이 아니며 저는 끝까지 굳게 수련하겠다고 성명했습니다. 직장 상사는 매우 화를 내며 시(市) 610에 보고했고, 한 동료가 제게 말하길 시 공안국에서 아마 저를 형사 구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덜컥했지만 즉시 진정하고 말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날 구류합니까? 난 범죄 사실이 없어요.” 저도 형사 사건을 다뤄봤기에 구류의 법적 요건은 범죄 사실이 존재해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파룬궁에 대해 법을 지키지 않지만 우리가 정말 법을 알면 그들도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 동료는 즉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들도 감히 저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사부님 설법을 보고 나서야 그 일념(一念)이 박해를 부정했기에 사부님의 보호로 제가 무사할 수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2000년 7월부터 진상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단계에 대법제자들이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받으며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했는데 대부분 구류, 강제노동 등 박해를 당했습니다. 수련생들은 우리가 이렇게 피동적으로 박해를 감당해서는 안 되며, 주동적으로 민중에게 진상을 명백히 알려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저는 인터넷을 할 줄 몰랐고 인터넷을 할 여건도 안 되어 수련생에게 자료를 받아 밖에서 장소를 찾아 복사한 뒤, 주민 거주지 각 가정에 배포했습니다. 나중에 복사 가게들이 공안의 사악한 통지를 받아 대법 자료를 복사해주지 않았습니다.

특히 ‘분신 사건’ 후 박해 형세가 엄혹해져 대법 자료가 아주 귀해졌는데, 저는 스티커 용지를 사서 손바닥 크기의 사각형으로 자른 뒤 스스로 ‘분신’ 사기극을 폭로하는 내용을 편집해, 어머니(수련생)에게 손으로 베껴 쓰게 하고 제가 장소를 찾아 붙였는데 주로 공중전화 부스, 버스 정류장 표지판, 전봇대 등 장소에 붙였습니다. 저는 또 ‘자유아시아방송’ 라디오 방송국에 ‘청취자 핫라인’으로 전화를 걸어 ‘분신’ 진상을 폭로했는데, 그날 밤 꿈에 사부님께서 “글을 잘 썼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만들 줄 아는 수련생을 알게 되어 그들이 제게 자료를 제공해주면 제가 나가서 배포했는데 아파트 단지, 시장 상가, 학교 교실 등은 모두 제가 진상 자료를 배포한 곳입니다. 한번은 제가 건자재 시장의 한 매대에서 막 자료 한 부를 내려놓자, 여사장이 집어 들더니 곁에 있던 한 일용직 노동자 같은 사람에게 “자, 가져가서 봐요”라고 했습니다. 그 노동자는 의자를 가져와 문입구에 앉아 대범하게 보았습니다.

한번은 수련생 집에 가는 길에 농산물 시장을 지나다가 자료 한 부를 한 매대의 화물 상자 위에 놓아두었는데, 수련생 집에서 돌아올 때 보니 시골 처녀 같은 여학생이 자료를 들고 큰 소리로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척 기뻤는데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진상을 알게 된 생명, 그 역시 살아있는 매스컴이다”(각지 설법3-2003 미국중부법회 설법)와 같았습니다.

20여 년 동안 저는 이사를 여러 번 했고 직장도 시내에서 시외로 옮겼는데, 저는 주위 아파트 단지에 모두 배포했습니다. 때로는 출장을 가거나 친척과 친구를 데리고 관광지에 갈 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낱장 자료를 붉은 봉투에 넣어 관광지 상점에 놓아두거나 기사가 운전석 문을 여는 손잡이나 와이퍼에 꽂아두었습니다. 때로는 스티커를 가지고 가서 관광객이 보기 쉬운 곳에 붙였습니다. 장쩌민 고소 기간에 저는 베이징에 가서 교육을 받았는데, 장쩌민 고소와 중공의 생체 장기적출을 폭로하는 스티커를 베이징의 버스 정류장 표지판, 거리의 쓰레기통, 벤치 및 공유 자전거의 프레임과 바구니에 붙였습니다. 비록 내용은 많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장쩌민이 고소되고 고발당했다는 것과 사악이 대법제자의 장기를 산 채로 적출한다는 정보를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는 늘 소책자, 진상 봉투, 스티커 등이 들어 있어 어디에 있든 편한 대로 했는데, 때로는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도 대면해서 진상을 알렸고, 세상 사람들이 진상을 알 수만 있다면 형식을 구애받지 않고 대법을 실증했습니다.

3. 자료점을 세우고 수련생과 협력해 함께 제고하다

사악이 파괴하려는 주요 목표는 바로 대법 자료점입니다. 그 몇 년간 제게 자료를 제공해주던 수련생들이 잇달아 박해당했습니다. 2016년 4월 후 저는 자료 출처가 없어졌고 어떻게 스스로 자료를 만들지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가 누군가의 소개로 D 수련생을 알게 됐는데 비교적 젊었고, 그전까지 줄곧 홀로 수련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제게 비어있는 집이 한 채 있는데 자료를 만드는 데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정말 제 마음을 보시고 D를 알게 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2017년 1월 1일, 우리는 자료점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가정용 컬러 잉크젯 프린터 한 대만 있었고 D가 주로 제작하고 제가 주로 배포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D를 데리고 한 번 배포한 뒤 그녀도 독립적으로 배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수요량이 늘어나 또 업무용 프린터를 샀는데 인쇄 속도가 빨랐고, 원래 있던 것은 표지만 인쇄했으며 우리는 주로 명혜망 소책자를 제작했습니다. 소책자는 읽기 편하고 내용이 전면적이며 그림과 글이 함께 있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합했습니다. D는 자료점이 세워진 뒤 전심전력으로 투입해 제고가 아주 빨랐습니다. 그녀는 대량의 법공부를 통해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하는 책임을 깨닫고 일체 시간을 다잡아 법을 실증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말마다 그녀는 아이를 시부모님 댁에 보내고 자신은 자료점에 와서 하루, 때로는 이틀 동안 만들었고 매주 3~4회 나가서 70~80권, 때로는 100여 권을 배포했습니다. 저는 출근 점심 휴식 시간을 이용해 자료점에 가서 제작했고 매주 1~2회 나가서 20~30권, 때로는 50~60권을 배포했습니다.

우리는 주로 고층 아파트로 갔는데 아파트 단지에 모두 CCTV가 설치되어 있어 안전을 보장하고 사악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한 라인(동 입구)만 들어갔고 층마다 1~2권만 놓았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가서 다른 층에 배포했습니다. 우리 자료점은 안정적이고 독립적으로 운영됐고, 기술을 아는 수련생이 구축을 도와준 뒤로는 프린터에 무슨 문제가 생기든 다시는 수련생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수리했습니다. 2023년 4월, D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그와 동시에 어떤 수련생이 제게 정중하게 다시는 자료를 배포하러 가지 말라고 일깨워주었습니다. 사악이 CCTV 영상에서 발견한 것 같으니 제게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라고 제안했습니다. 저도 제가 자아를 돌파하고 방식을 바꿔 법을 실증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4. 명예와 이익을 담담히 대하고 심성을 제고하니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1999년 박해 전, 직장에 총 9명이 파룬궁을 수련했는데 박해 후 저를 제외한 나머지 8명은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중 두 명은 수련을 내려놓지 못했지만 속인의 명예와 이익을 잃을까 두려워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저는 당시 그들에게 ‘나는 일도 해야 하지만 대법에 대한 믿음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바로 직장에서 대법을 실증하겠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99년 11월 베이징 천안문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돌아온 뒤, 저는 4년간 정직 처분을 받고 조사를 받았는데 그 몇 년간 직장의 승진, 등급 승급, 선진(우수사원) 선정 등 명예와 이익은 기본적으로 저와 인연이 없었고, 2007년이 되어서야 행정 직급과 전문 직함을 승진할 자격 조건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악당 기구의 인사 제도가 부패하여 비록 비(非)지도자 직무라 해도 접대, 뇌물, 선물 등에 의지해야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또 ‘공개’, ‘공정’ 절차를 밟는다며 무슨 ‘민주 추천’, ‘경쟁 연설’ 등 형식을 벌였는데 사실 여전히 부정한 기풍을 조성해, 낯짝이 두껍고 아부를 잘하는 사람이 표를 많이 얻었고 투표하는 사람도 공정한 마음이 결핍되어 ‘네가 내게 부탁하지 않으면 나도 네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수련인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매년 이맘때면 번뇌가 생겼고 마음속으로 늘 분해하며 불평했습니다. ‘학력, 능력, 임용 조건, 업무 실적으로 볼 때 난 진작 해결됐어야 해. 내가 주임 과원(科員)이었을 때 너희는 이제 막 간부가 됐는데, 이 몇 년간 다 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갔구나….’ 저는 이것이 질투심이 장난을 치는 것이고 수련인에게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님을 알았기에 그것을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011년 직장에서 또 직급 승진을 시작했는데 부서 상사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저와 면담하며, 자존심을 내려놓고 표를 모으러 다니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직장 일인자(기관장)의 임기가 거의 다 되어 지도자가 바뀌면 기회가 적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저는 진선인(眞·善·忍) 원칙을 위배할 수 없고 속인과 명리를 다툴 수 없으며 대법제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법리(法理)가 명확해지자 제 마음은 평온해졌습니다. 결과는 완전히 제 예상을 벗어났는데 이번 승진 종합 평가에서 제가 2위를 하여 순조롭게 부조연원(행정 부처급)으로 승진했습니다.

2019년 직장에서 또 직급 승진(행정 정처급)이 있었는데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13명이지만 명액(TO)은 6개뿐이었고, 그중 4개는 행정 직무가 있는 부처장에게 남겨둔 것이라, 즉 2개 명액만 남겨두고 9명의 비지도자 직무인 사람들이 경쟁해야 했습니다. 저는 일체를 순리에 맡기고 절대 다투거나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관하는 상사가 또 저를 찾아와 면담하며 일인자에게 저를 강력히 추천할 테니 협조해서 되도록 표를 많이 모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일체가 다 사부님의 배치임을 알았습니다. 공시 결과가 나왔는데 제가 바로 두 명의 비지도자 직무 중 한 명이 됐고 다른 7명은 탈락했습니다. 그중 4명은 2020년에 퇴직해야 할 사람들이라 그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어떤 이는 상사와 인사 부서를 찾아가 따졌습니다. “왜 파룬궁 연마하는 사람은 승진시켜 주고 우리 곧 퇴직할 사람은 승진시켜 주지 않습니까?” 인사 부서에서는 “이번 승진은 주로 업무 능력과 업무 성적을 고찰해 우수한 사람을 승진시킨 겁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직장의 많은 사람도 의논했습니다. “저기 파룬궁 연마하는 사람 좀 봐, 아무것도 지체하지 않았잖아.”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상사와 무슨 특수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등등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법제자에게는 사부님께서 관할하고 계셔서 자신의 것은 잃지 않으며 일체 사부님의 배치를 따른다는 것을 모릅니다.

맺음말

30년 가까운 수련 과정을 돌아보면 법을 얻은 기쁨이 있었고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여 제고함이 있었으며, 또한 사람 마음이 가로막아 고비를 넘지 못했을 때의 비관과 침울함도 있었습니다. 넘어지고 부딪치며 걸어왔는데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가 없었다면 저는 오늘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일’을 저는 줄곧 하고 있었지만, 각종 사람 마음의 가로막힘 때문에 전심전력으로 투입하지 못해 사람을 구하는 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는 것이 늘 힘에 부친다고 느꼈고, 시간을 다잡아 법공부를 하지 못해 마땅히 법공부하고 사람을 구하는 데 써야 할 시간을 오락, 휴대폰 영상 보기, 속인 정치에 대한 관심, 잡담, 쇼핑 등에 썼습니다. 때로는 법공부도 충분히 전념하지 못해 자주 잡념의 교란을 받았으며,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과 각종 두려워하는 마음이 여전히 아주 무거웠습니다…. 아무튼 사부님과 대법의 요구와는 거리가 아직 멉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금생에 법을 위해 왔으며 저는 자신을 잘 수련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며 중생을 구할 결심이 있습니다. 수련이 아직 얼마나 남았든, 고비를 넘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정법이 끝나지 않는 한 제 수련의 길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원문발표: 2025년 11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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