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다시 ‘믿음’을 논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최근에 명혜망에서 한 수련생이 쓴 ‘파룬따파를 왜 믿는가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 수련생은 교류 중에 “진정한 수련인이 이미 일정 기간 수련했는데도 여전히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생긴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의문’은 ‘파룬따파를 왜 믿는가’라는 의문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수련생은 글의 마지막에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막 파룬따파를 접한 사람에게는 정상적인 것이지만, 일정 기간 수련한 사람이 여전히 이런 의문을 품고 있다면 자신의 수련을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저는 여기서 다른 관점에서 수련인의 ‘믿음’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인 수련 경험과 느낌을 결합하여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1995년에 법을 얻었으며 당시 어린 대법제자에 속했습니다. 대법을 배우기 전에 가정환경 요소로 인해 수련과 신(神)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다 읽기도 전에 이것이 수련하는 보서(寶書)임을 알았고 끝까지 수련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설 때 마음은 아주 순수했고 믿음도 매우 순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단련과 시험을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불법 구금 기간에 사악이 저에게 다른 수련생을 밀고하여 자유를 얻으라고 했을 때, 그렇지 않으면 중형에 처할 것이라고 협박했을 때, 생사의 순간을 마주하며 제가 이전에 몇 년간 수련했건 상관없이 그 순간에 저는 정말로 전체 수련 과정을 다시 정리하여 제 믿음을 지탱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정리를 통해 초심을 되찾고 정념을 굳건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대법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라는 문제를 생각해 봤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이전에 제가 스스로를 확고하게 믿는다고 생각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큰 시험 앞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왜 수련하는지, 대법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감성적으로 대법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 후에 자발적으로 대법을 수련하겠다는 명확한 결심을 하고 제 모든 행동에 책임져야 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거의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발정념을 하며 사부님께서 제자를 가지(加持)해주시고, 압력을 견디며 반드시 확고하고 지혜롭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이 시험을 겪은 후, 앞으로 어떤 고된 단련과 시험을 만나더라도 믿음의 문제에서는 더 이상 망설임 없이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마음속엔 오직 확고한 믿음만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수련 과정을 전면적으로 정리하고 숙고한 후 끝까지 확고하게 수련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사부님께서는 법리를 말씀하셨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에 대한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수련인의 전체 수련 과정에서 믿음과 불신의 시험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수련 과정에서의 필연적인 안배입니다. 그 순간이 오면 당신에게 시험이 와서 당신의 믿음이 확고한지 보고 부족함을 드러내어 그것을 제거하게 합니다. 마치 우리의 심성이 끊임없이 향상하고 승화하는 것처럼 믿음 역시 끊임없이 승화하는 과정입니다. 최종적으로는 대법에 동화되어 우리는 대법의 한 입자가 되어 믿음과 불신의 개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한 번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 기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아마도 수련인의 전반적인 수련 과정,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대법에 들어섰을 때의 믿음은 아마도 견고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사람의 생각, 사람의 정(情), 심지어는 우리의 근본적인 집착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수련인은 문제와 부족함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집착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에 가려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오히려 우리가 수련 과정에서 느슨해질 때,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 고민할 때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수련하는가? 우리는 도대체 왜 대법을 믿는가? 만약 최종적으로 속세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유혹이 크고 내려놓을 수 없다면 속인이 되면 됩니다. 어찌하여 한편으로는 심성적으로 자기 제약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속인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해 고통스러워할까요? 또한, 대법 속에서 일을 얼버무리며 가짜로 수련하거나 심지어 대법에 오명을 씌우는 역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후에 계속 수련하기로 선택했다면 망설이지 말고, 반복하지 말고, 확고하게 수련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파룬따파를 왜 믿는가’라는 문제는 제 생각에 모든 수련인이 수련 과정에서 마주해야 할 문제지만, 앞서 말한 저자의 말처럼 수련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 문제를 고민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일 것입니다.

이상은 개인적인 수련 체득이며 경지의 한계로 인해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5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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