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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6)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서니 마난도 그칠 새 없이 찾아왔다. 우선은 몸의 소업이었다. 오후에 수업해야 하는데 오전에 배가 몹시 아파 ‘오후 수업을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했고, ‘그래도 많은 학생의 수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수업 장소로 갔다.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을 시작하자 신기하게 고통이 사라졌다.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무사히 수업을 마쳤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아프기 시작해서 곧바로 귀가했다. 너무 아파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났어도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 지나쳤다. 고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6층 계단을 뛰어올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오늘 제가 이겨냈습니다.’ 이는 소업이고, 사부님께서 잘 배치해주셔서 수업도 정상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런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전에 편도선염이 발생하면 통증과 함께 목이 붓고 심지어 곪으면서 열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했다. 인후가 붓고 곪았지만 열이 없었다. 또 한 번은 고열로 앉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목이 아프지 않다가 또 이틀간 고열에 시달리며 죽만 조금 먹을 수 있었다. 세 번째 날이 되어서야 일어날 수 있었는데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병과 같은 증세였으나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예사롭지 않은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장기간 병고에 시달려온 나는 그런 것을 특별히 고험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아마 속인 때 겪은 고통이 너무 많아서인지 수련 후 몸으로 겪는 소업도 많지 않았으며, 주로 심성에서 많이 겪었다.

시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루)이 우한에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어머니 병이 다 나은 것이다. 남편은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시어머니 치료비로 마련한 돈 3천 위안(한화 약 52만 원)도 시어머니에게 주었다. 남편과 나는 시어머니에게 준 3천 위안 때문에 크게 다퉜다. 그러나 나는 수련자라는 생각이 들어 더는 다투지 않았고, 3천 위안의 돈도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남도 아닌 시어머니에게 준 것이니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었고, 마음도 편안했다. 만약 수련 전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돈은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로 인한 억울함을 절대 참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당신의 어머니에게 준 돈인데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은 무슨 일에서나 나의 잘못을 찾아냈고, 별일도 아닌데도 크게 화를 냈다. 그런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 부부는 오랜 기간 그렇게 화합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파경의 위기에 처해 당장 가정이 무너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법을 얻기 전인 1991년 가정이 원만하게 영위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혼 문제를 제기했고 남편도 동의했다. 남편이 집에 왔을 때 이혼신청서를 갖고 왔다. 그런데 행정 절차상 한 가지 서류가 빠지는 바람에 우한으로 돌아가서 다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직장동료가 사무실로 사람을 보내 우리 부부 사이를 조율했고, 남편의 졸업 시기가 닥쳐오므로 그 후 다시 결정하자고 했다. 이혼 문제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지만, 생활은 역시 계속 조화롭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련자인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해 나 자신을 개변시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더는 내 입으로 이혼이란 말을 언급하지 않았고, 남편을 잘 대해주면서, 내 잘못으로 인해 ‘파룬궁이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남편이 집에 돌아온 후 며칠간 나에게 화만 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늘 아파트 밑에 내려가서 전화를 받았으므로,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눈치를 채지 못하는 바보로 여긴 건지, 날마다 조금씩 그의 일을 내비쳤다. 그는 “우한대학에서 같은 여자 연수생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점차 관계가 좋아졌다”라는 말을 내비쳤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 털어놓았다. “그가 좋아졌고, 매우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라고 고백했다. 그쪽 여성도 가정이 있었다. 듣는 순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단 말인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 그러나 즉시 ‘나는 수련자이므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참았다.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지낸 세월의 일들이 눈앞에 선하게 펼쳐졌다. 남편을 위해 나의 모든 걸 바쳤고, 그동안 나의 생명과 헌신의 대가로 오늘의 명예와 성공을 얻은 남편인데, 그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보답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풍파는 계속되었다. 바로 그때 헤이룽장에 있는 남동생이 뇌종양이라는 소식이 왔다. 악성일 수 있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내게 물어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남동생의 병은 아버지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동생은 우리 이씨 가문의 유일한 남자다. 하얼빈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 사범대학에서 외국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약관 33세에 가장 젊은 부교수가 되어 일본 연수까지 마친 젊고 유능한 교수로 슬하에 예쁜 딸아이(5세)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동생과 각별한 사이였고, 어려서부터 남동생을 돌봐주었으므로 남동생도 나를 가장 신임하며 따랐다. 동생 소식을 들은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동생을 도우러 갔다. 아버지와 여동생들과 함께 남동생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1993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당시 남편은 우한대학을 졸업한 뒤 베이징 검찰원 소속 국가검찰관대학으로 발령받아 ‘헌법학’을 강의하면서 학교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남편은 베이징역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톈탄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 검사결과 악성종양으로 판정되었다. 가족들 모두 괴로워했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수련자이므로 심태는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험을 반드시 잘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은 톈탄병원에서 수술로 대부분 종양을 제거했고, 수술회복 후 아버지의 의견대로 재발을 우려해 산둥 쯔보에서 방사선치료를 받기로 했다. 나는 동생을 따라가지 않고 베이징에 남아 계속 남편과 고험을 넘기로 했다. 그 여성은 끊임없이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남편은 함께 숙소에 있는 나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나에게 그녀의 ‘연서’를 보여줬고, 녹음도 들려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때 남편은 자신들이 함께했던 세세한 내용까지 말했다. 바늘로 한 땀 한 땀씩 찌르는 것 같았지만, 모두 나의 마음을 겨냥해 오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려는 것 같았다. 남동생의 병과 남편의 행동은 동시에 교차로 진행되었는데 나를 짓누르려는 것 같았다. 남편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친정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도 서슴없이 욕을 했다. 그럼 나는 욕을 하다가 멈춘 남편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통 일반 사람이 아니라 수련자인 나를 돕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그랬어도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동생은 잠시 잠잠해져 베이징에서 며칠 더 머물다가 다시 창춘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의 수업은 다른 교사가 대신 봐주었지만, 나는 계속 수업을 해야 했다. 시간이 나면 늘 쉬 씨 수련생 집에 찾아가 함께 제5장공법을 연마하고 교류했는데, 가끔 사부님도 뵐 수 있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석가모니 전’이라는 비디오테이프를 가져다 우리 몇 사람에게 보여주셨다. 해외에서 제작한 것으로 석가모니가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이야기였다. 꽤 긴 시간의 비디오로 석가모니가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해 심산에서 고생하며 수련하고 나중에는 보리수 아래에서 ‘개공개오’한 후 사람을 구도한 이야기다. 이는 내가 처음 부처에 대한 영상을 본 것이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 오셨다. 우리는 사부님 옆에 둘러앉았다. 사부님께서 물으셨다. “어땠나요?”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떠한지 물으셨다. 나는 부처에 대한 지식이 매우 적고 내용도 일부만 알 수 있었으나 하나만은 깊이 느낄 수 있어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석가모니 부처의 수련 시기는 매우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때 바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지금의 이런 수련은 고생스럽지 않으며,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이 없고, 해야 할 일도 전부 하면서 하는 게 아닌가.

창춘의 초기 제자 중 많은 사람은 가정고험을 넘고 있었다. 갓 수련을 시작하면서 고험을 매우 힘겹게 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무실의 한 동료 교사는 수련 전에는 남편이 늘 아내를 잘 대했으나, 수련 후 갑자기 태도가 변하면서 늘 다툼이 생겼다.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래도 참으며 남편을 달랬으나, 아직도 다 내려놓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녀는 “리리, 나중에 우리 둘이 나가서 함께 살면 이런 일이 없을 것 같다. 둘이서 서로 잘 보살피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러면 안 돼. 그런 게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한번은 여러 명의 수련생과 함께 또 사부님을 뵈었다. 동료가 비슷한 문제를 언급해서 나는 그에게 “모순을 회피할 수 없다”라고 말해 주었다. 사부님께서 나의 견해에 동조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박사학위의 부교수라는 직위로 베이징에서 방 3개에 거실이 딸린 집을 배정받았다. 스징산구 융러소구 84동 410호로 큰 평수의 집이었다. 나는 수업이 없을 때는 베이징에서 함께 실내장식을 했다. 집수리가 완성된 후 남편은 아들과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직장을 베이징으로 옮길 수 없어서 홀로 창춘에 남아 있어야 했다. 남편도 시간을 내어 창춘으로 나를 보러 오기도 했다. 그 한동안(1년 반) 나는 창춘에서 일부 활동에 참여했다. 창춘 수련생 제1회 수련좌담회에 참가해 수련생의 발언을 들었다. 그중 많은 수련생이 많은 불교 중의 일을 언급했다. 나는 즉시 그것은 우리가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불이법문’의 문제에 저촉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방면에서 침통한 교훈이 있었으므로 그 문제에 매우 민감했다. 그 문제를 즉시 보도원에게 건의했다. 창춘 수련생들은 정체적으로 한동안의 수련을 거친 후 책임자들이 의견을 모아 법회를 열기로 했다. 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수련생들은 모두 법회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인식했고, 이번 법회를 통해 ‘파룬궁(法輪功)’ 제자들이 처음 모이는 ‘큰 집결’이라고 칭했다. 우리는 밤새워 가위로 ‘창춘 파룬궁 수련생 심득 교류회’라는 큰 글자를 오려냈다. 그리고 사부님의 시사(詩詞) “공(功)을 수련하는 길은 마음이 지름길이라, 대법은 끝없나니 고생을 배(舟)로 삼을지니라(功修有路心爲徑 大法無邊苦作舟)”라는 글귀도 오려냈다.

내 기억에 지린대학에서 열린 법회 날, 수련생들은 모두 미소를 띠고 성대한 축제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그날 날씨는 유난히 푸르렀다. 나는 지린대학 강당 후문에서 그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법회에서 수련생들이 단상에 올라 발언했다. 어떤 사람은 준비해온 발언고를 읽었고, 어떤 사람은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라 파룬궁을 수련한 후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라오궈라는 수련생이 단상에 올라 심득체험을 발표했다. 그는 아내가 단가에 들러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하여 학습이 끝난 뒤 일어서서 걸어 나온 과정을 이야기했고, 또 학습반에 참가한 후 아내가 소업했던 이야기도 했다. 부부가 함께 수련하면서 관을 넘을 때 서로 격려한다고도 했다. 아내가 관을 넘기며 고통으로 바닥을 뒹굴 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돼지 잡는 백정이었고, 당신도 그렇게 큰 업을 지었으니 이렇게 소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업을 하겠는가? 꼭 이겨내야 한다!” 그의 아내는 설법반에 참가한 후 이렇게 큰 변화가 발생했고 자신이 가장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후 남은 관과 난의 고통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의 법회는 참으로 마음을 격동시켜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법회 진행 과정도 녹화했다. 우리가 돌아와 비디오를 볼 때 나는 육안으로도 비디오에서 상서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수련생들이 입장할 때 높은 하늘에 밀짚모자 모양의 형상이 줄지어 북측 문을 통해 법회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법회장 중심에는 지름이 매우 넓은 큰 빛기둥이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아있는 것도 보았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 다른 지역에서 설법을 마치고 돌아와 법회 비디오를 보셨다. 나중에 쉬 씨 수련생이 말하길, 사부님께서 비디오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번 법회에 올 것이 다 왔고, 무엇이나 다 있었는데, 나만 없었네.”

쉬 씨 수련생 아내가 작은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매우 감동했다. 이번 법회가 범상치 않았으며 대단히 상서로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쉬 씨 가족과 그 외 평소 잘 알지 못했던 두 명의 수련생과 함께 차를 몰고 사부님 고향 궁주링시로 가서 사부님의 집에 도착했다. 집은 궁주링시 중심에 있는 회색기와 집이었다. 본채에 딸린 집으로 크기가 같은 그리 크지 않은 집이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모두 동북식의 구들 방이다. 우리는 가지고 간 자로 방 내부와 밖의 모든 곳의 크기를 쟀다. 그것이 우리가 간 목적이었다. 나는 벽의 벽돌을 만지면서 자세히 일체를 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사부님께서 전에 사시던 곳이다. 앞으로 이곳의 모든 것은 기록에 남을 것이며 모두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당시는 사부님에 대해서 더 높이 이해할 수 없었다. 법으로 더 높이 사부님을 인식할 수 없었으나 이 집과 이 지역이 앞으로 매우 깊은 함의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집안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을 현상해 보니 우리 몸에 백색 광환이 둘러싸여 있었다. 어떤 수련생은 그것을 ‘파룬(法輪)’이라고 말했다.

(계속)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法輪大法(파룬따파)’

 

원문발표: 2021년 4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수(1992.5-1999.7)>수련체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12/4216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