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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수련의 기점에 서서 장기간의 가정 마난을 대하다

글/ 일본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에 신변의 수련생이 일 년 내내 가정 마난에 처한 것을 보았는데, 그는 이런 상태가 필연적이라고 여겨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장기간의 가정 마난을 정법수련의 기점에 서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약간의 깨달음을 현재의 인식에서 좀 말하겠다.

많은 수련생이 병업 박해를 받거나 중국에서 사악의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이 박해이고 교란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정법수련의 기점에 서서 박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박해를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박해를 해체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개시해주셨다. “내가 방금 말했듯이, 이 일체를 나는 승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깨끗이 제거해 버리려고 하는데 이 한 차례 사악을 포함한다. 원래 그것들은 우리를 마치 과거의 종교와 같게 대하려고 했다. 변이(變異)된 관념은 그것들로 하여금 역사상 신(神)에 대한 박해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는데,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은 이런 일이 이미 고층생명이 내려와서 사람을 제도하는 하나의 범례(範例)가 되었다. 이것이 어찌 될 말인가? 이 자체가 바로 부패이다! 한 신(神)이 내려와 사람을 제도하는데, 사람이 신(神)을 십자가에 못으로 박아 놓았으니 사람은 얼마나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죄를 갚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들만이 한 것이 아니라 더욱 높은 층차의 부패된 생명이 조성한 것이다. 그것들은 이 일체를 그것들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일체는 모두 변이(變異)가 발생하고, 변이된 것은 법(法)에서 벗어나서 점차적으로 이렇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느 한 층의 생명도 모두 감히 그것을 건드리지 못했는바, 일체는 모두 종횡으로 교차하는, 굉장히 복잡해진 요소에 의해 좌우지되고 있다. 이 일체 순결치 못한 것은 모두 제거해야 하는데, 철저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1]

내가 인식하기에 사악의 박해에는 각종 형식이 존재하는데, 병업 박해, 붙잡혀 구타당하는 박해, 경제적인 박해가 있다. 그러나 흔히 가정 마난에 대해서는 어떤 수련생은 오히려 이것이 박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 원인을 따지자면, 나의 분석은 아래와 같다.

1. 가족을 속인이라고 여기면 사부님께서 관여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의 가족이 중병에 걸려 보살핌이 필요하거나 그 외 무슨 위험이 나타나면, 수련생은 가족이 속인이기에 그들에게는 그들의 운명이 있어 우리가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긴다. 사부님의 설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식구가 혜택을 본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2] 더구나 우리와 이 한 세(世)에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연분인가. 그들과 대법의 연분 역시 얕지 않다. 전 세계 70억 이상의 인구가 있는데, 대법제자의 가정에 환생해 대법제자의 가족이 되는 사람은 필경 소수이다. 물론 속인으로서 그는 수련하지 않기에 생로병사에 직면할 것인데, 내가 인식하기에 정법이 가장 긴급하고 위대한 순간에 사람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만약 가족에게 나타난 상황이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이미 교란하고,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다른 한 가지 형식의 박해가 아닌가? 사악이 구체적으로 어떤 박해 방식을 택했든지 간에 이로써 그것의 목적에 도달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대법제자의 원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 앞뒤의 모든 일을 모두 사부가 당신에게 책임져 주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걱정한다고 될 일인가? 당신이 배치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말해서 될 일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이 이치를 말하지 않았는가? 그에게 복이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배치하든지 모두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부는 오히려 당신에게 배치해 줄 수 있으며 내가 있든지 없든지 나는 모두 배치할 수 있다.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가? 오로지 당신이 수련하기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모두 당신에게 책임져 줄 것인데, 이를 말하지 않았는가?”[3]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중병에 걸리셨던 게 기억난다. 아버지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느끼셨지만 본래 오기가 있으셔서 나에게 아버지를 뵈러 귀국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때 어머니께서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한 번 뵈러 귀국하기를 바라셨다. 나는 노수련생이고, 게다가 중요한 항목을 담당하고 있어 귀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께 귀국할 수 없다고 알려드렸다. 결과적으로 어머니는 대법을 원망하셨고, 우리가 수련하면 육친도 몰라보고 무정하다고 여기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괴로웠고, 가족이 대법을 오해할까 봐 걱정했다. 기왕 육친정으로 나를 교란한 이상, 내가 가족에 대한 육친정을 놓지 못해 사악의 틈을 탔다고 믿어 나는 육친정을 내려놓고, 이 일을 조종하는 배후의 모든 사악 요소를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했다. 이틀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지금은 심지어 어머니를 위해 밥도 하실 수 있으며, 건강을 회복하셨다. 이 일로 나는 제자가 정념이 족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일체를 균형 잡아주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자신을 잘 수련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관여해주실 것이라고 견정하게 믿는다. 나는 정법수련의 기점에 서 있기 때문에 가족이 사악에게 이용당해 내가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는 데 교란하는 작용을 일으키게 할 수 없는데, 이래야만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을 개인수련으로 삼는다면, 구세력의 계략에 들어맞아 이때부터 한도 끝도 없는 관을 넘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밍후이왕에서 문장 한 편을 보았는데, 경찰이 한 대법제자를 욕할 때, 그 대법제자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 결과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 다른 한 대법제자는 대법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어떤 박해도 당하지 않았다. 개인수련의 기점인지 정법수련의 기점인지에 따라 같은 난관도 완전히 다른 결과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

2. 필연적이라고 여기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빠지다

가정 마난 속에 처한 일부 수련생은 그 본질을 분명히 보아내지 못하고, 법에서 인식할 수 없기에 표면적인 가상에 미혹되어 마치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처럼 느끼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정서에 빠진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도 ‘자연(自然)’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필연(必然)’이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자연’이란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해석하지 못한 나머지 무책임하게 스스로 그럴듯하게 하는 말이다. 그들 역시 그 ‘자연’이란 자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 일체 마난(魔難)이 모두 필연적이고 바로 이러하다고 인정하므로, 일종 어찌할 수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들 사람의 일면은 명백해야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법을 얻은 그 일면이 똑똑해야 한다는 것이다.”[4]

사부:“대법제자로서 당신이 정말로 잘 할 수 있을 때면, 내 생각에 그 시끄러움도 당신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이 아니다. 당신이 법에 입각해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 속인의 시끄러움은 곧 속인의 시끄러움일 따름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물체는 변하지 않으나 신의 눈으로 보면 이 일체는 변하는 것이다.”[3]

나는 속인은 일체가 모두 불변한다고 여기고 곧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수련인으로서는 마땅히 초범적인 이치로 인식해야 하는데, 법리의 승화에 따라 신의 일면이 작용을 일으키고,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아 주위의 모든 것도 따라서 개변이 발생할 것이다.

착실히 수련하는 제자는 모두 이러한 수련 경험이 있다. 우리가 관념을 개변해 법리를 명확히 깨닫고 집착을 닦아 제거하면, 많은 일은 곧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때로는 그 빠르기가 정말로 ‘장대를 세우면 그림자가 나타난다’는 말처럼 그 즉시 효과가 나타난다. 우리가 오직 진정으로 법에서 제고하여, 명백해지는 것이 많고 내려놓는 것이 많아질수록 주위의 변화도 갈수록 빨라질 것이다. 다시 예를 들면, 어떤 수련생은 비록 감옥에 잡혀갔어도 박해당한다는 관념이 조금도 없고, 자신과 경찰은 박해와 피박해의 관계가 아니라 구도와 구도받는 관계라고 여긴다. 법리를 명백히 알기만 하면 박해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은 본성은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4]를 해낸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 한 층의 법리를 인식했을 때, 당신의 경지도 곧 그 한 층에 있어 사악이 당신에게 닿지 못하기에 자동으로 불필요한 박해를 피하게 된다고 여긴다.

3. 법리를 명백히 몰라 사람의 관념이 가족의 좋은 변화를 가로막는다

이 정법시기에 우리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대법과 큰 연분이 있어서인데, 대다수 가족은 모두 진상을 알고 있으며, 대법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다. 수많은 속인이 구자진언을 외워 복을 얻었는데, 하물며 우리와 이렇듯 큰 인연이 있는 가족은 어떨지 생각해보라.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인류가 다 무엇인가. 단지 구세력이 그것을 이용하고 있고 당신들의 더욱 큰 능력을 봉폐해 놓았을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들이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면 구세력이 보고서는,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 마음을 제거해야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총리를 나쁘게 변하도록 하자, 차라리 그를 나쁘게 변화시켜서라도, 당신들의 그 속인 마음을 제거해야겠다.’고 한다. 이렇지 않은가? 구세력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에 죽이려면 죽이는데, 정법 속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배치에만 집착한다.”[5]

우리가 자신의 집착과 관념을 제거하지 않아 구세력에게 틈을 타면 반대로 가족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의 사상 변화는 곧 당신 주위의 환경에 변화를 일으킨다.”[6]

그런데 우리의 바르지 않은 일념도 가족을 상반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 구세력이 안배한 길로 걸어가는 것인데, 구세력은 우리가 수련성취 하기를 바란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정 마난에 처한 채로 어떻게 대법의 초범함과 아름다움을 실증할 수 있겠는가? 가족에 대해 우리는 주도적인 작용을 일으켜야 하는데, 가족 역시 법을 위해 온 바른 생명이라고 믿어야 구세력에게 조종당해 우리가 법을 실증하는 데 교란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지 않고 대법의 구도를 받을 것이다.

맺음말: 정법시기에 장기적인 마난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매번 마난(魔難)이 닥쳐올 때, 본성(本性)의 일면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한다. 그럼 사악한 마(邪魔)는 이 점을 이용하여 끝없이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써, 수련생으로 하여금 장기간 마난 속에 빠지게 한다. 사실 이것은 사람의 일면이 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빚어진 것이며, 인위적으로 당신들 신(神)의 일면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신들이 이미 수련 성취된 그 부분을 억제하여 신의 일면이 법을 바로잡는 것을 저애하였다. 아직 수련 성취되지 않은 일면이 어찌 주사상(主思想)을 억제하며, 이미 법을 얻은 일면을 억제할 수 있는가? 인위적으로 사악한 마를 자양(滋養)하여 그것이 법의 틈을 타게 한 것이다. 제자로서 마난이 올 때, 정말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나 부동한 층차에서 당신에 대한 부동한 요구에 부합하도록 마음을 둔다면, 충분히 고비를 넘을 수 있다. 끝없이 끌고 내려간다면, 만약 心性(씬씽) 또는 행위에 다른 문제가 없다면, 사악한 마(魔)가 당신들이 방임(放任)한 틈을 탄 것이 틀림없다. 수련하는 사람은 필경 속인이 아닌데, 그럼 본성의 일면이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4]

“우리는 구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것의 이 일체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중에서 당신들이 행한 일체야말로 위덕이다.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박수) 그럼 이 각도에서 볼 때, 우리가 마주한 일은 바로 구세력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이다. 그것들이 최후로 발악하는 표현을 나와 대법제자들은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7]

나는 우리의 심성에 문제가 없는 정황하에서라면, 장기적인 마난은 바로 구세력의 안배로서, 정법시기에는 장기적인 마난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마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초범적인 이치로 가늠할 수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우리의 신의 일면을 억제하는 것으로서, 사악한 마가 틈을 탈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은 마난 속에 빠지게 된다. 법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바로 구세력이 안배한 개인수련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고, 자신이 사람을 구하는 것을 교란하게 된다. 정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사부님의 정법을 교란한다. 우리가 진정하게 마난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승인하지 않는 것을 해내면, 사실 바로 이미 그것을 초월한 것이기에 마난도 당신에게서 떠난다.

우리는 우리가 일찍이 대담하게 사부님을 따라 내려왔고, 조사정법을 하러 세상에 온 왕이지 일반적인 의미상에서 단지 개인의 원만만을 위한 수련인이 아니라는 것을 시시각각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모두 중생을 구도하는 데 있어야 하지 개인이 제고하여 원만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구우주의 위사위아(爲私爲我)에서 초탈해 나올 수 있으며, 이로써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신우주 대궁으로 진입할 수 있다. 따라서 정법수련의 기점에서 장기적인 가정 마난은 승인하거나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상은 나의 층차에서 깨달은 것으로서,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서: ‘도항-북미 대호수지구법회 설법’
[2] 리훙쯔사부님 저서: ‘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
[3] 리훙쯔사부님 저서: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4] 리훙쯔사부님 저서: ‘정진요지-도법(道法)’
[5] 리훙쯔사부님 저서: ‘북미 순회 설법’
[6] 리훙쯔사부님 저서: ‘각 지역 설법 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7] 리훙쯔사부님 저서: ‘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을 대표하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여 ‘비학비수(比學比修)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5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11/4248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