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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행운으로 법을 얻고 확고하게 진상을 전하다

홍콩 진상거점 이야기

[밍후이왕](홍콩 진상거점 교류 원고) 1999년 7월 중공 당국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홍콩에는 진상거점이 없었다. 각 지역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연공장에서 A4 한 페이지로 된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그때 진상 자료는 비교적 단순했고 사진도 없었다. 최근에 홍콩 진상거점의 한 파룬궁수련생은 자신 일가족이 법을 얻어 수련하다가 진상거점의 일부분이 된 경험을 교류했다.

1. 일가족이 법을 얻은 과정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우리 일가족은 기공을 찾아 신체를 단련했는데 그때는 파룬궁이 전해지기 전이었다.

1994년에 아내는 여동생의 소개로 광저우 3기, 4기, 5기 설법 전수반에 참가했고 나와 딸은 나중에 일부 설법 전수반에 참가했다.

아내는 광저우 설법 전수반에 참가한 후 일부 대법서적을 가져왔다. 그때는 ‘전법륜’ 출간 전이라 ‘파룬궁’이라는 책만 있었고 일부 녹음테이프를 우리에게 들려줬다. 그때 나는 도를 찾기 좋아했는데 아내가 가부좌하는 걸 보고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식으로 전수받았기에 집에서 함께 가부좌하면서 우리는 주로 연공만 했다.

딸아이는 어릴 때 본토에서 살았는데 몸이 좋지 않았다. 일교차가 크면 알레르기가 생겨 천식 증세가 나타났는데 하루에 세 번 주사를 맞아도 좀처럼 낫지 않았다.

1994년에 딸아이를 홍콩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 아이는 몇 개월간 유치원에 다니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기간 줄곧 병원에 다녔다. 딸아이는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전법륜’도 읽지 못했다.

1997년 10월 31일 저녁, 딸아이는 천식 증상이 발작해 병원에 가 치료했으나 집에 돌아온 후에도 아주 힘들어했다. 다음날은 홍콩 전체 수련생들의 매달 단체연공하는 날이라 연공이 끝나면 다시 병원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많은 수련생이 딸아이에게 연공을 시키라고 격려했다. 연공하고 나자 바로 호전되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 후부터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게 됐다.

딸아이는 그때 열 살도 채 안 되어 중국어를 겨우 알아듣는 수준이었는데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연공 외에 법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일가족은 이렇게 법을 얻었다.

2. 사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상 알리기를 끝까지 견지하다

중공 당국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전에는 수련생들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 지역에 가서 홍법 활동을 진행했다. 1999년 7월 중공 당국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홍콩에는 진상거점이 없었다. 각 지역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연공장에서 A4 한 페이지로 된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그때 진상 자료는 비교적 단순하고 사진도 없었다. 2000년 전후에 수련생들과 함께 진상 게시판을 제작해 전시했다.

나는 밖에서 진상을 알릴 때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면서 정장 차림을 했다. 우리의 진상거점은 리젠시 관광지였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정갈하게 차려입었다.

우리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10시간 남짓 서서 진상을 알렸다. 그때는 테이블과 의자마저 없었다. 오랜 시간 서 있다 보니 너무 힘들고 몸이 아팠다. 가부좌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전광판을 설치하고 탁자를 놓았다. 의자를 추가해 가부좌할 수 있었다.

리젠시 부두에는 많은 사람이 물건을 팔았고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유동 인구가 아주 많았다. 진상을 알게 된 사람들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사악한 단체인 청관회는 지역구 의회에서 회의해 우리를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그들은 일부 불량배와 주정뱅이를 심어 교란했고 때로는 페인트를 뿌리기도 했다.

그들은 일부 불량배들을 보내 우리의 게시판을 에워싸고 보이지 않게 했다. 심지어는 우리의 진상거점 앞에 대나무 천막을 쳤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는 리젠시 주변에 백색 현수막을 촘촘히 걸어 빈소처럼 보이게 했다. 현수막은 컨테이너로 선전(深圳)에서 실어 왔는데 기둥마다 걸었다.

나는 진상 깃발을 꽂을 수 있도록 손수레를 만들어 이동했다. 그들이 앞을 가로막으면 막지 못하는 곳으로 나는 손수레를 이동했다. 사악한 무리는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가부좌할 때 그들은 대법을 모독하는 깃발을 내 앞에 꽂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가부좌하며 연공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어르신은 그들은 욕했고 청관회가 파룬궁을 막고 너무 사람을 괴롭힌다고 욕했다. 그 후부터 그들은 이렇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수년간 사악은 우리가 진상을 알리는 방식을 표절했다. 우리가 박해를 폭로하는 사진을 펼치면 그들은 대법을 모독하는 사진을 전시했다. 우리가 고문전이나 생체장기적출전을 하면 그들은 사악한 빈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그들이 표절할 수 없었다. 바로 우리가 연공하는 것은 그들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늘 진상거점에서 연공했는데 그들은 더이상 속수무책이었다.

파룬궁은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연공을 할 뿐인데 중공 당국은 우리를 탄압하고 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수련하면서 우리는 줄곧 견지했다. 하지만 조금만 느슨하면 사악은 틈을 탔다. 우리는 끝까지 계속 진상을 알려 사람들을 구할 것이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3/31/42279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