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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진지하게 잘 쓰는 것에 대한 약간의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나는 네모 칸에 글씨를 매우 규범적으로 썼고 선생님은 나의 글씨를 모범사례로 전시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한 노 교사의 흘림체(連筆)를 늘 모방했고 이때부터 글씨체가 갈수록 거칠고 글자 같지 않았다. 법공부를 한 후 행서, 초서는 모두 마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정규적인 글씨체에 따라 글씨 연습을 했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글씨는 연습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더는 글씨 쓰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나는 글씨를 늘 난잡하게 썼다.

1. 글씨를 잘 쓰면서 나의 오만하고 잘난 척하며 사람이 안중에 없는 집착을 깨닫다

작년에 나는 경서 “홍음2”를 베껴 쓸 때 책 속의 글씨체에서 순식간에 깨닫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써야 한다! 한자는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법을 얻게 하려고 창조한 것이며 글자에 대해 공경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는 사부님께서 나를 깨우쳐 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마땅히 심성을 제고해야 한다! 아울러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글씨체가 납작한 것을 보게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깨달았다. “글자는 그 사람과 같다” 이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사람이 됨에 있어 겸손하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지 말고 제멋대로 하지 말며 일을 함에 있어 착실하게 마음을 써야 함을 깨닫게 했다.

나 자신이 대법 속에서 20년이 넘도록 수련한 것을 회상해보면, 비록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무사무아의 정각을 수련할 것을 요구함을 알지만, 자신을 깊이 파보면 뼛속까지 단단하게 굳어진 그 사람을 깔보고 잘난 척하는 그 ‘자아’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다. 속인과 왕래할 때 비록 표면에서는 최대한도로 속인 상태에 부합한다고 말하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늘 속인을 깔보고 늘 격앙되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사당 문화가 그 속에서 전부 드러났는데, 그들의 인식이 옅고 우리 수련인이 인식하는 이치를 인식하지 못 한다고 여긴다. 더욱이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상화로운 심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인류사회 역시 대법(大法)이 개창한 한 층차다. 그렇다면 반드시 이 층차에서도 중생에 대한 법의 생존표준과 이 층차에서 사람이 되는 이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속인 역시 이 일체 인식을 모두 거꾸로 하여 우주 고층의 바른 법리로 요구하고 인류 혹은 삼계의 일체를 가늠한다면, 그 삼계는 바로 바른 법리로 되어버리고 인류사회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사람의 상태도 없어지고 모두 신(神)의 세계이며, 동시에 사람에게는 수수께끼가 없고 또한 수련의 기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1]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고 자신을 수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 내가 어찌 또 속인을 깔볼 수 있겠는가? 매일 모두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어떻게 진상을 알려서 사람을 구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가 구하는 이들은 바로 이번 사악한 박해 속에서 가장 깊이 박해당한 속인이다!

다시 깊이 파보면, 가끔 얼굴을 마주하고 진상을 알리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려운 마음, 염려하는 마을을 제외하고 또 아주 깊은 내려놓지 못하는 틀을 감추는 마음이다. 다시 더 깊이 파보면, 이 ‘내려놓지 못한 틀’의 배후가 바로 ‘사람을 깔보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수련생과 교류할 때 상대방보다 ‘높이 깨달았다’는 과시심, 환희심에 표현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는 얼마나 엄중한 좋지 못한 마음인가! 나는 원래 글씨를 날리게 쓰고 붕 떠 있는 모습인데 마치 안중에 사람이 없고 제멋대로 하는 표현이 아닌가? 글씨는 연습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이 난잡하게 쓰도록 내버려 두는 관념이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지배한 것이다. 역시 자아를 개변하지 않으려는 이 관념이 그렇게 완고하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다!

2. 글씨를 잘 쓰면서 내가 일을 할 때 착실하고 마음을 써야 함을 깨닫다

나는 인내심이 모자라는 사람이고 일을 함에 있어 ‘번거로움’을 꺼렸으며 항상 대충했고 급하게 공로를 추구하는 사당문화가 이렇게 지금 글씨를 쓰는 데에서 체현되었다. 늘 빨리 쓰려고 했고 진도를 추구했으며 조급한 심태는 글씨를 반듯하게 썼는지에 대해 전혀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때에 배우러 다니는 사람은 모두 가부좌를 중시했으며, 앉음에는 자세를 중시했고, 붓을 잡는 데는 기를 운행하여 호흡함을 중시했으며, 각 업종은 모두 마음을 깨끗이(淨心) 하고, 호흡 조절(調息)을 중시했는데 전반 사회는 모두 이런 상태에 처해 있었다.”[2]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착실하고 착실하게 자신을 실질적으로 수련하게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자신을 잘 닦아야 비로소 사람을 더 구할 수 있고 사전의 서약을 실현하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들께 감사드립니다! 허스

층차의 제한으로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시정해주기를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대법은 원용(圓容)하다’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년 10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0/14/4109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