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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법리(正法理)’ 수련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법 공부와 수련생간의 교류 및 수련 중에 일어난 몇 가지 일을 통해 나는 바른 법리(正法理) 수련에 대한 얕은 인식이 있게 됐다. 나는 줄곧 자신도 모르게 바른 법리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가로막고 밖으로 보고 안으로 자기를 수련하지 못했으며 자기를 닦지 않아 안일한 마음이 생겼다. 끝나는 시간과 원만을 집착하는 것은 고난에 대항하고 좀 편안해지려 하는 사람의 관념이라는 것을 나는 줄곧 의식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이 후천적인 관념을 자신으로 여겼고 이 후천적 관념에 줄곧 좌우지되어 이른바 수련을 했지만 나는 줄곧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박해받기 전에 내가 막 수련을 시작했을 때 우리 법 공부 소조의 한 수련생은 매우 조급해했다. 다른 수련생들은 모두 소업 증상과 가정 모순이 일어나 씬씽(心性)을 제고할 수련 기회가 있는데 자신에게 소업 현상도 없고 가정에도 모순이 없어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며칠 뒤 그녀는 법 공부 소조에 와 매우 흥분하며 수련생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번에 집안사람이 마침내 그녀에게 모순을 일으켰는데 씬씽을 지켰다고 했다. 수련생들도 모두 그녀를 위해 기뻐했다. 그때 우리는 어느 수련생에게 소업 상태나 가정 모순이 있으면 모두 수련생을 위해 기뻐하는 이런 마음가짐이었다.

그때 우리 법 공부 소조는 저녁에 법 공부하기 전에 먼저 정공을 연마했다. 한 번은 우리가 조용히 연공 음악에 따라 정공을 연마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아이 엄마가 돌개바람처럼 뛰어 들어왔다. 내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는 방금 산 된장 한 봉지를 나의 몸에 던져 터져서 방에는 즉시 된장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나를 제고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당연히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았다. 이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가 수련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그러했다. 사실 바로 바른 법리로 수련한 것이다. 단지 그땐 우리에게 명확한 개념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박해가 발생한 이후 특히 최근 몇 년 수련에 대한 태도는 당초와 비기면 거의 반대로 된 것이다. 몸이 괴로우면 빨리 지나갔으면 했고 모순이 일어나면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찾았다. 그러고도 자신이 수련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사실 이미 수련하는 상태가 아닌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난 한 가지 일에서 나는 깨어났다.

한 수련생에게 갑자기 병업관이 나타나 나는 수련생 집에 가서 수련생과 함께 법 공부하고 발정념했으며 법에서 교류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 하에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었다. 그 과정 중에 나는 이것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수련해 제고할 한 차례 기회로 삼아 나도 안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았다. 우리는 법리에서 교류하고 법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 곧바로 수련생의 바르지 않은 상태를 바로잡았다. 그 며칠 동안 자신이 법에서 재빨리 승화한 것 같았고 하나의 기제 혹은 장(場) 속에 용해된 것 같았으며 나를 이끌고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는 명시하셨다. “그러므로 당신이 부딪힌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당신이 오직 대법을 수련하기만 하면 모두 좋은 일인데, 틀림없다.”[1] 나는 이에 깊은 인식이 있게 됐다. 대법 수련의 미묘함을 느꼈고 자신을 찾고 자신을 닦는 것은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련생의 집에서 돌아온 후 나는 반성했다. 왜 이전에 나는 자신을 찾지 않고 늘 밖으로 보았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 나는 사부님의 경문이 생각났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인류사회는 바로 고난(苦難)과 이익의 향수(享受)가 병행하는 세계이며, 당신이 아무리 돈이 많고, 어떠한 사회계층에 있든지 간에 인생은 바로 많은 고난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고달프게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사람은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고난에 대항하는데, 목적은 좀 행복하게 살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중에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피해(傷害)를 받지 않고 어떻게 잘 살며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공명을 성취하며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얻고 어떻게 강자가 되겠는가 하는 등등이 형성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런 경험이 있는 동시에 또한 인생의 관념이 형성되었고 경험은 또 실천 중에서 관념으로 하여금 완고(頑固)하게 변하도록 하였다.”[2]

사부님의 이 단락 설법을 다시 한번 열심히 배운 후 나는 자신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왜 병업 가상이 나타나면 나는 괴로워하고 빨리 지나가길 바랄까? 나는 병업의 괴로운 느낌이 나를 해쳐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왜 모순에 부딪히면 자기를 찾지 않고 밖으로 보고 다른 사람을 찾을까? 모순의 충격으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나는 밖으로 보고 다른 사람을 찾아 자기 마음의 괴로운 느낌을 완화하려 한 것이다. 게다가 속인으로 말하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으려면 자신이 장기간 인간 속에서 형성된 완고한 관념과 대항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나는 안으로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불편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막 부득이할 때에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찾았지만, 뼈를 에이듯이 자신을 찾고 집착심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수박 겉핥기식으로 상징적으로 자신을 찾았다.

아무튼, 나는 육체적인 고통이든 마음 고통이든 고생을 겪기 싫어하고 잘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줄곧 상술한 생각과 방법을 자신으로 여겼는데 이것은 후천적인 사람 속에서 형성된 완고한 관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고난에 대항하고 잘 지내기를 원하는, 바로 이 관념이 줄곧 나도 모르게 소위 나의 수련과 세 가지 일 하는 것을 지배했다. 지금 생각하면 수련 중에서 곤두박질한 것은 모두 이 관념이 배후에서 교란한 것인데, 나는 줄곧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당초 법을 실증할 때 생사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대법을 수호하는 대법제자가 되지 못했고 늘 마지막에 문제가 나타났는데 바로 이 관념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그것은 줄곧 오늘날까지 숨어있었다.

이 관념의 작용으로 나는 서서히 안일한 마음이 생겼다. 법 공부할 때 자신을 바로 잡지 못하고 늘 어딘가에 기대 좀 편안해지려 했고 연공도 매일 빠짐없이 할 수 없었다. 때론 오늘 너무 힘드니 하루 쉬자고 했고 세 가지 일을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늘 여지를 두었다.

나는 내가 원만과 끝나는 시간에 집착하는 것도 이 관념이 작용을 일으킨 것임을 발견했다. 이 관념이 수련이 매우 고달프다고 여긴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 수시로 박해받을 위험이 있어 마음의 압력이 매우 높다. 박해받기만 하면 심신이 거대한 고통을 감당해야 하기에 매우 괴로울 것이다! 박해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뒤에 바로 이 관념이 있다. 내가 수련은 매우 즐겁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매우 시급하게 생각하면 그래도 내가 끝나는 시간에 집착할 수 있을까? 전혀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관념이 나에게 수련과 사람 구하는 것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게 하여 내가 진정으로 바른 법리로 자신을 수련하지 못하고 대법에서 수련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수련의 아름다움과 사람을 구하는 위대함을 느낄 수 없다.

어떻게 이 관념을 타파할 것인가? 사부님의 법에 따라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실 인류사회의 이치는 우주의 이치와 반대이다. 사람이 난(難)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업을 갚게 하여 행복한 미래가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수련하는 사람은 바른 이치(正理)에 따라 수련해야 한다. 고생을 겪고 난을 당하는 것은 업력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 버리며 인체를 정화(淨化)하고 사상경지를 제고하며 층차를 승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로서,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며 이것이 바른 법리(正法理)이다.”[2] 우리가 진정으로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바르게 깨달으면 그 관념은 타파되고 우리는 진정으로 바른 법리에 따라 대법에서 즐겁게 수련할 것이며 대법 수련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느낄 것이고 가없이 넓은 사존의 불은(佛恩)을 느낄 것이다! 이 관념을 타파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찌 대법에서 수련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후천적인 관념을 타파해야만 우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라는 법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우리는 낙관적인 태도로 수련에서 발생한 모든 것을 대할 것이다. 특히 지금 사당(邪黨)의 소위 ‘제로화 행동’에서 말이다.

사부님의 설법에서 나는 우리가 수련 중에 부딪힌 모든 일, 구세력의 안배든 다른 생명의 안배든 사부님께서 나타나지 못하게 하면 절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구세력의 많은 안배는 우리 대법제자의 수련에 이용할만한 가치가 없으면 사부님께서 모두 막으시기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현재 층차에서 인식한 것은 사부님께서 나타나게 하신 것은 이런 안배를 이용해 대법제자가 자기 집착을 인식하고 법에서 닦아버리도록 사부님께서 “장계취계(將計就計)”[3]하신 것이다. 대법제자가 법리에서 승화함과 동시에 중생 구도(救度)의 사명을 완성하고 이런 안배를 부정하는 중에서 대법제자의 위덕을 확립하는 것이다. 고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바른 법리로 문제를 보지 못하면 구세력의 사유 방식에 좌우되어 많은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정말 우리 자신이 불러온 것이다.

개인의 작은 인식이므로 법에 부합되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원문발표: 2020년 9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28/4123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