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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다는 사유에 관해

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 전 갑자기 무릎이 불편해져 부어오른 느낌이 들었고 손으로 누르면 아팠다. 이 상태는 며칠 동안 지속됐는데 발정념을 해도 좋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이때 나쁜 사상이 나왔다. ‘관절염인가? 요즘 튼 에어컨 때문인가?’ 이전에 남편이 붙이고 나서 효과가 아주 좋았던 파스를 보고 머릿속에 일념이 번쩍였다. ‘붙이면 나을 거야.’ 이런 생각이 나왔지만 나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뇌혈전에 걸렸는데 어찌 이처럼 빨리 나을 수 있으며, 팔・다리를 모두 움직일 수 있겠는가?”[1] 나는 깨달았다. 뇌혈전이 있는 사람은 업력윤보로 인해 이 병에 걸리도록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수련해도 빚진 업력은 갚아야 한다. 그 사람은 뇌혈전 증상이 있었지만 일반인의 증상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진정으로 사부님을 믿는 것을 해내지 못했다. 나는 몹시 유감스러웠다.

이로부터 나는 아마도 인생의 길에서 업력윤보에 따라 무릎이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세력은 여전히 내 예전 인생의 길에 안배된 대로 나에게 업력을 던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수련의 길을 걸으면서 뇌혈전에 걸린 그 사람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사부님께서 이미 내 몸을 깨끗이 청리하셨다고 믿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확고한 일념으로 다음날 무릎이 정말로 좋아졌다. 나는 다시 한번 대법의 위력을 경험했고 정념만이 상태를 바꾸는 관건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또한 수련에 대한 내 신심을 강화했다.

나는 출산한 후 허리가 예전만큼 좋지 않다고 느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발정념을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릎이 좋아진 이후 요통이 다시 악화되어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아팠고 다리에도 힘이 없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곤했다.

요통이 참기 힘들게 되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너 구세력이 나를 교란해 내가 사부님을 굳게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대법에 대해 동요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사부님과 대법을 굳게 믿는다.’ 이런 간단한 일념이 나온 후 다음날 일어나니 허리가 좋아져 홀가분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고 온몸에 힘이 솟았다. 이렇게 여러 해를 지나 마침내 허리가 나았다. 나는 무척 감동했고 행복했다. 대법의 신기함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단순해 보이는 이 일념은 내심에서 우러나온 정념이었다. 이 일념은 이처럼 여러 해의 수련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나는 정념이 생기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체가 아프면 발정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보낸 것은 정념인가? 정념이라면 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가? 또한 그 이면에 있는 교란을 제거하기 위해 발정념을 했지만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고통을 제거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일반인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은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약과 주사를 사용한다. 하지만 발정념으로 고통을 제거하려는 것은 본질적으로 똑같이 편안함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정념은 정념이라고 부를 수 없고,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면 정념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 정념은 발생한 갈등이나 신체의 불편함, 더 나아가 전체 인간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대법의 인식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수년간 수련을 통해 몸소 얻은 깨달음이다. 인간의 생각이 자신이 법에서 깨달은 법리와 충돌하거나 모순될 때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정념을 찾을 수 있는가? 몸이 불편해지고,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배후에 있는 우리의 염두와 목적을 반성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자신의 집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진정으로 이기심과 부족함을 보면 그것을 바로잡고 법에서 올바른 인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정념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인간의 생각을 정념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1] 인간과 신의 차이도 바로 이 간단해 보이는 일념지차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라”[2] 나는 깨달았다. 정념의 위력은 대법 위력의 체현이다.

수련자로서 우리는 현재 신체의 불편한 상태가 특히 대법제자들이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칠 때 더 이상 소업이 아니라 구세력의 교란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교란할 수 있는가? 왜 감히 교란하는가? 근본적인 이유는 법에 대한 올바르고 확고한 믿음의 정도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부님 덕분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하려고 하고 어떤 불편한 상태도 없기를 바란다. 그런 후에야 대법을 믿고, 체득해야만 믿는다.

하지만 대법의 요구는 당신이 확고하게 믿으면 심성이 제고될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높은 인식을 얻게 될 것이며, 그래야만 몸에서 초범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당신 몸이 더 이상 사람의 병이 걸릴 수 없다고 정말로 믿는가? 몸이 불편할 때 무슨 생각이 드는가? 뿌리를 파보면 자신의 신사신법 정도를 알 수 있다. 사실 우리 신체는 더 이상 사람의 질병에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제고해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구세력이 틈을 탈 수 있다. 자신을 사람들 사이에 두기 때문에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사람의 인식으로 대함으로써 공을 움직여 사악을 제거하지 못하고 교란을 당한다. 인식이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므로 구(舊)우주, 구법리, 구세력이 감히 교란할 수 있다. 본질에서 인식을 제고해 심성을 높이고 안으로 찾는 것이 근본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 자신(自身)의 공의 변화만 강조하고 당신의 心性(씬씽)의 전변(轉變)을 강조하지 않는데, 그것은 오히려 당신의 心性(씬씽) 제고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정체(整體)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1] 우리가 대법에 대한 믿음이 반석처럼 확고하다면 사악은 이미 놀라서 달아났을 것인데 감히 와서 교란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올바르고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올바르고 확고한 믿음의 정도는 수련생마다 다른데, 바로 수련 층차의 차이다.

그렇다면 올바르고 확고한 믿음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실, 이것이 우리의 수련 과정이고, 안으로 찾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족함을 발견하고 부족을 승인해야만 그것을 제거할 수 있고,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부님을 믿으면 일체는 매우 단순해진다. 사부님을 믿기 때문에 탄연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사부님을 믿기 때문에 실과 득을 계산하지 않으며, 사부님을 믿기 때문에 좋고 나쁜 모든 것이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명백해지면 대법이 모든 것을 가늠하고 자신을 가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가 그렇다.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입으로 그것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승인되지 않고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직 대법의 표준에 따라 심성을 제고하고, 인식을 제고하며, 사람의 인식을 제거해야만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할 수 있다. 사람의 인식과 관념은 구세력에 의해 안배되기에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구세력의 안배를 승인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것에 대한 승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관건적인 순간에 정념의 주도하에 선택하는 것만이 구세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고 철저히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때때로 정념이 주도적인 작용을 일으키지 못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강대한 정념이 생기고 인간의 관념을 버리게 될 것이다.

이 기간 나는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이 집이 내 것임을 알면서도 그 집을 잊은 것 같았다. 또 다른 꿈에서 나는 이것이 내 집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거기서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젯밤 꿈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집을 청소하고 모든 더러운 물건을 제거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나는 그중에 깨달았다. 반드시 자신의 정념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만약 정념이 주인이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될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시가: ‘홍음2-두려울 것 뭐냐’

 

원문발표: 2020년 9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25/4121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