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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성을 제고시켜주신 시어머니

글/ 광둥(廣東) 대법제자 아밍(阿明)

[밍후이왕]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모두 도를 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연마(煉)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여전히 당신이 수련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고, 또한 당신이 결심하고 수련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사람마다 성불(成佛)한다는 이것은 불가능하다.”[1] 나는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한다고 해서 닦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착실하게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의 표준에 따라 하고, 대법의 표준에 도달해야 닦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존께서 매 제자에게 배치하신 수련의 길은 바로 제자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모순이 발생할 때마다 재빨리 마음을 조정하고 관념을 바꾸며 침착하게 직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심성(心性)을 닦는 문제와 집안일을 처리하는 면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법의 요구대로 할 수 있다. 때로는 잘하지 못하지만 지난 뒤 자신이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빨리 자기를 조정해 수련해 올라갈 수 있었다.

1. 작은 일에서 안으로 찾고 불공평해하는 마음을 제거

생활 속 작은 일에서 수련인의 경지가 반영된다. 한번은 시누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몇십 위안의 진료비를 시누이가 내려 할 때 시어머니는 기어이 내지 못하게 하셨다. 집에 돌아온 후 시어머니는 나에게 집에서 채소를 사라고 준 돈에 그 몇십 위안의 돈을 얹어서 달라고 하셨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말할 때 나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들끓었다. ‘앞서 시어머니 발에 무좀이 생겼을 때 시어머니의 네 자녀가 다 상관하지 않아 나 혼자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의사를 찾아다니며 진료를 받아 1천여 위안을 썼는데 지금 겨우 몇십 위안도 시누이에게 내지 못하게 하다니, 게다가 평소 설이나 명절이면 자녀들이 돈을 주어 시어머니에게 돈이 있는데 왜 나에게 달라하실까?’ 속으로 시어머니가 정말 나를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시어머니가 인색하고 편파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으라고 하셨는데 그럼 도대체 무슨 마음이 자신을 불편하게 했는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남편의 형제자매 중 누가 어려움을 겪으면 우리는 1천에서 수백 위안을 지원했고, 고향에 돌아가 마을 노인과 아이를 보아도 대범하게 돈을 주었으며, 시동생이 집을 살 때 10여만 위안을 주저 없이 지원해줬고, 돈과 힘을 내어 도와주면서도 따지지 않았다. 내가 몰고 다니던 승용차도 내 남동생에게 주지 않고 그(시동생)에게 주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나는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데 지금 왜 이 몇십 위안 때문에 마음속이 들끓을까?

마음을 조용히 하고 찾아보니,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 못되게 구는 것이었는데, 도량이 넓지 못한 것이다. 시어머니가 시누이에게만 치우친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불평했는데 이 역시 질투심이다. 돈 방면에서 표면적으로만 관대할 뿐이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했는데, 즉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한 것이다. 내 경제 조건이 시누이보다 나은데 내가 질투할 것이 뭐가 있는가? 게다가 노인과 따지다니, 이는 이미 옳지 않은 것이다. 정말 생각할수록 부끄러웠다. 마음에 숨겨둔 이런 더러운 사람 마음을 찾고 제거한 후 마음이 단번에 가벼워졌고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이해로 바뀌었다. 시어머니는 이전에 농촌에 계셨는데 그때 매우 가난해 가난한 것이 두려워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셨다.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에게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고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 사존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 선(善)과 인(忍)을 닦아내다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 집 근처에 채소를 가꾸러 오셨을 때 나는 부모님께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하시라고 했다. 남편은 연장 근무해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도 아직 배고프지 않다고 하셔서 나는 아버지만 오셔서 시어머니와 먼저 드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시어머니에게 인사했는데 시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시어머니에게 다른 일상사를 얘기해도 시어머니는 아버지를 보지도 않고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이 반응에 나는 매우 놀랐고 무슨 일 때문인지 몰랐다. 아버지는 거기에 서서 매우 난처해하면서 비웃듯이 웃으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바로 돌아가지는 않으셨다.

시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캐묻지 않고 절대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반드시 이 고비를 잘 넘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고 평온하게 아버지와 말하면서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목적은 아버지가 그렇게 난처해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애써 당시 무거운 분위기를 조절하려고 노력해도 시어머니는 내내 표정이 굳어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으며 서둘러 조금 먹고는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쾅 닫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밭에서 오시기 전에 혼자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셨다. 80세가 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아버지가 품위와 존엄을 무시당하고 식사하신 걸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부모님을 우리 집에서 식사하라고 한 나를 탓했고 아버지께 매우 죄송해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어머니를 도와 괭이를 들고 함께 집에 돌아왔을 때 시어머니는 표독스럽게 “내가 국과 반찬을 다 버렸다!”라고 말하고 방문을 힘껏 닫고 나오지 않으셨다. 나는 듣고 나서 당시 정말 욕하고 싶었다! 주방에 가보니 싱크대에는 기름기가 가득한 밥그릇, 접시, 젓가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 전혀 내 체면을 상관하지 않으시네.’ 나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것 같아 자신에게 냉정하고 또 냉정해지라고 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수련인은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 사람과 같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참아야 한다. 꼭 참아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렇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물론, 난(難)이나 모순이 오기 전에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모두 당신에게 알려 준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그것은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흔히 갑자기 나타나는데, 이래야만 비로소 사람의 心性(씬씽)을 고험(考驗)할 수 있으며, 비로소 사람의 心性(씬씽)을 진정으로 제고하게 할 수 있다. 心性(씬씽)을 지킬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려면, 이렇게 해야 비로소 보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모순이 오는 것은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1] “장래에 어쩌면 당신이 가장 체면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의 뺨을 두어 번 때려 당신으로 하여금 망신을 당하게 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당신이 참아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본다. 당신이 참아낼 수 있지만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 역시 안 된다.”[1]

나는 우연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 어머니에게 설명해 드렸다. “아마 어머니가 오셔서 식사하지 않으실 줄 아셨나 봐요.” 어머니는 땀을 훔치면서 한편으론 눈물을 훔치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맨밥을 드셨다. 국과 반찬이 없어 겨우 조금 드시고 집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나는 마침내 참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너무 지독해! 평소 그렇게 효도했건만 내 부모님이 밥 한 끼 먹는데, 그것도 당신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하다니!’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 문을 더 세게 닫고 설거지할 때도 탕탕 소리가 나게 하는 방식으로 시어머니에 대한 내 불만을 표현했다.

집안일을 다 하고 냉정해졌을 때 내가 표면적인 일에 따라서 화를 내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나에게 일리가 있더라도 노인에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다음날 나는 시어머니에게 사과하고 일의 자초지종을 여쭈었다.

알고 보니 시어머니의 남동생이 농사지은 벼를 잘 말리지 않아 검게 변한 것도 있고 못쓰게 된 것도 있다고 내 아버지가 말해서 시어머니가 듣고 나서 화가 난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남동생의 벼는 농약을 치지 않아 사람들이 앞다퉈 사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이런 소문을 냈다고 원망하신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주변 이웃에게 이 일을 말했는데 이웃들은 모두 이렇게 자기 친척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고 아버지를 비난했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이웃들에게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가려달라고 하는 습관이 있음)

‘원래 그런 사소한 문제였구나!’ 나는 즉시 시어머니에게 사과하고 설명해 드렸다. “아버지가 잘못 아신 겁니다. 제가 남편 직장 숙소에 오래 두어 변질한 벼를 닭에게 먹이라고 아버지께 드렸는데, 삼촌 집에서 농사지은 벼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오해입니다!”

시어머니가 화를 낸 이유를 안 후 나는 화가 나서 아버지를 찾아가 왜 함부로 말했느냐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서 시어머니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어머니도 옆에서 불만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잘못 말했다고 쳐도 네가 우리를 이렇게 대하지 말아야지! 우리를 거지 취급하고, 이후에 우리에게 밥 먹으러 오라고 하지 마라. 나도 너희 집에 못 가겠다. 네 시어머니를 볼까 봐 두렵다!” 아버지가 이어서 말씀하셨다. “나도 다른 사람 눈치 보기 싫다! 다시는 밥 먹으러 안 가겠다!”

사실 부모님은 매우 선량하시다. 평소 사람들과도 잘 지냈고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으셨다. 부모님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나는 또 시어머니가 사소한 일로 소란스럽게 해 부모님이 식사도 잘하지 못하게 했다고 원망했다. 시어머니와 며칠간의 냉전 끝에 머리에 사부님의 법이 떠올랐다. “수련인이여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찾으라 갖가지 사람마음 많이 제거하고 큰 고비 작은 고비 빠뜨릴 생각 말라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 다툴 게 뭐 있느냐”[2]

법에 대조해 안으로 찾아보니 평소 내가 시어머니를 존중하고 효도했으나 부모님만큼은 가깝지 않았다. 모두 사부님의 육친인데 내가 분별해서 되겠는가? 육도윤회 중에서 자신의 원신(元神)을 낳은 어머니만이 진정한 어머니다.

시어머니가 부모님 앞에서 화를 낸 것은 나를 도와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 육친정을 제거해주기 위한 것이다. 갑자기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내가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고 시어머니가 나에게 시험 문제를 내준 것인데 이 심성을 제고할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못한 것을 정말 후회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3] 나는 이 법리를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했다. 시어머니가 또다시 나에게 매몰차게 말할 때 모두 웃고 지나갈 수 있었고 진심으로 시어머니가 나에게 심성을 제고할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고마워했다. 내 마음이 안정되자 양가 노인은 지금 또 예전처럼 사이가 좋아졌다.

3. 힘들고 더러움을 두려워하는 집착심을 제거

평소 출근하면 하루에 세 끼를 나는 모두 직장 식당에서 먹는데 명절이나 휴일이면 내가 집에서 채소를 사고 요리를 해야 했다. 내가 먹고 싶지 않아도 해야 했다. 때론 업무가 무겁고 힘들어 짜증이 날 때면 시어머니가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원망했고 연중무휴로 쉬는 날이 없다고 원망했다. 출근하면 직장 일에 바쁘고 휴가 때면 온 집식구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다. 가끔 직장에서 연장 근무해 시어머니께 요리를 도와달라고 하면 시어머니는 매우 난처해하며 내가 요령을 피우나 해서 항상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특히 시동생 식구가 우리 집에 이사 온 후 6~7명이 밥을 먹어야 해서 집안일이 더 많아져 내 시간을 많이 점유했다. 직장에서는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비서가 세심하게 돌봐주고 또한 요리가 다양하고 맛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팽이처럼 바쁘게 빙빙 돌아야 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왼쪽 무릎이 붓고 아플 때였다. 계단을 한 걸음만 걸어도 심하게 아팠고, 화장실에 가도 쪼그리고 앉을 수 없었다. 매번 걸어서 채소를 사러 갈 때면 더 힘들었다. 오토바이를 사고 싶었으나 남편이 동의하지 않았다. 채소를 사 온 후에도 오래 서서 채소를 씻고 밥을 지어야 했다. 밥 지을 때 노인의 취향과 시동생의 음식 영양도 생각해야 했다. 하필이면 그때 집 하수구가 막혀 설거지하고 채소 씻을 때 화장실에 가서 물을 부어야 했다. 때론 심신이 피곤해 정말 도망가서 혼자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특히 주방에서 밥할 때 때론 시어머니도 채소를 씻어주시지만, 어떨 때는 맞은편 방에서 시어머니의 코골이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어느 해 겨울, 내 두 손바닥 피부가 매우 심하게 갈려져 물만 묻어도 아팠고 행주를 짤 때 힘을 쓸 수 없었다. 통증을 줄이기 위해 세척제 대신 쌀뜨물로 설거지를 하고 싶었으나 시어머니는 나와 맞서기라도 하듯이 항상 내가 남겨놓은 쌀뜨물을 버리셨다. 여러 번 귀띔해도 계속 그렇게 하셔서 한번은 내가 화를 냈다. “이 물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왜 기어이 버리세요? 그것이 어머님을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닌데 제 손이 이 지경으로 갈라진 걸 보세요. 제가 좀 편안해지고 싶어도 안 되나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느꼈다. 수련인이 무슨 편안함을 추구하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이 되돌아가려면 이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즉, 하나는 고생을 겪는 것이고 하나는 깨달음이다.”[4] “소화상은 늘 고달프고 힘들어 업을 갚는 것이 빠르며 개오함도 빨라, 어느 날 그가 단번에 개공할지도 모른다.”[1] 우리 수련인은 금강불괴의 몸인데 그 세척제를 두려워해서 되겠는가? 내가 이 집착심을 내려놓자 두 손바닥의 피부가 매우 빨리 나았다. 지금 시어머니도 적극적으로 채소 씻는 일을 도와주셔서 나는 법공부할 시간을 더 가질 수 있게 됐다.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수련해 나는 우리가 인연이 있어 한 가족이 된 것은 모두 은혜를 갚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가정에서 겪는 모든 번거로운 일은 모두 내가 넘어야 할 난관이다. 사부님 말씀을 듣고 자기 역할을 다하며 최선을 다해 가정을 돌보고 가정에서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내가 이 고생과 힘든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자 남편이 오토바이를 사주었고 동시에 사람을 불러 하수구를 뚫어주었다. 정말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 환경은 마음이 바뀜에 따라 변했다. 나에게 심성을 제고하도록 도와준 가족에게 감사드린다.

평소 식사를 준비하느라 매번 내가 마지막에 밥을 먹는다. 그런데 시동생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골라 먹는 습관이 있어 내가 밥 먹을 때면 그가 식탁에 있는 반찬을 다 뒤집어 놓은 상태다. 내 마음에는 응어리가 있었다. 시동생이 뒤집어 놓은 반찬이 더럽다는 느낌이 들어 반찬을 먹지 않고 맨밥을 먹더라도 시동생이 뒤집어 놓은 반찬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낭비할까 봐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남은 반찬을 바로 내 그릇에 부어놓으셨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여러 번 내가 먹지 않으니 내 그릇에 부어놓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시어머니는 여전히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한번은 화가 나서 밥을 먹지 않았다.

나중에 사부님의 설법 “그는 더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그는 대변도 감히 먹고, 그는 오줌도 감히 마신다. 과거에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그 말똥덩이가 얼어서 딴딴한데도 그는 아주 맛있게 갉아먹었는데, 그는 속인이 명백한 상태하에서는 겪어내지 못할 고생을 겪을 수 있었다.”[1]를 읽고서야 사부님의 자비를 깨달았다. 이런 방식으로 나에게 더러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하게 하신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은 후 시동생의 이 습관에 그다지 반감을 품지 않았다. 더 진일보 사부님이 말씀하신 법으로 가늠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 것을 배웠다. 밥 먹을 때 부드러운 채소를 골라 그에게 주어 시시각각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 됐다.

이 수련의 길을 돌이켜보면 시어머니는 나를 도와 사다리를 멘 사람처럼 끊임없이 나에게 심성과 경지를 제고시켜주셨다. 정말 시어머니에게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나는 사존께서 연장해 오신 일분일초를 소중히 여기고 항상 안으로 찾고 사존의 자비로운 제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잘 닦지 못한 점을 잘 닦아 사부님을 따라 진정한 아름다운 집으로 돌아가겠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 3-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년 9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3/4070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