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다칭(大慶)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견지하고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다가 중국공산당에게 일체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했다. 몇 차례나 경찰에게 납치되어 금품을 강탈당하고 강제 이혼을 당했으며, 전기고문 등 잔악한 괴롭힘의 박해를 당했다. 40세 때 억울하게 14년형을 선고받아 중년의 삶을 빼앗겨 수모와 치욕을 당하는 고통 속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1. 병마에 씌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했다
나는 다칭시 파룬궁(法輪功)수련생이다. 1980년 결혼한 후 고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자궁종양과 난소암이 발견되어 현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낫지 않고 종양이 계속 자라 거위 알 만큼 커지자 병원에서는 “수술해도 소용없다”고 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베이징의 암 전문병원을 찾아갔지만 역시 “수술을 해도 소용없고, 치료를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말을 들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복통을 참을 수 없어서 발에 수액주사를 해서 통증을 완화시키기도 했고, 폐결핵으로 가슴이 아프고 숨이 차서 걸을 때는 보폭을 짧게 천천히 걸어야했는데 온몸은 온통 두드러기였다. 눈꺼풀 아래 좁쌀만큼 작은 여드름 같은 돌기가 돋아 있었는데 결핵성뇌막염까지 있어서 늘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약을 복용해도 소용없었으므로 고약같이 생긴 아편 환을 복용하여 통증을 완화시키는 정도였고, 결핵성요추(4.5번)도 변형되어 잘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두 번씩이나 입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큰 병원에 반년 동안 마비상태로 입원해 있으면서 십몇만 위안을 썼지만 몸이 붓는 등 갈수록 나빠져서 거의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나의 투병생활은 하루가 1년 같은 고통 속에서 10여 년을 살았으므로 그 고통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실정이었으니 마치 생의 마지막인 것 같았다. 당시 남편은 매일 직장에 출근했다가 퇴근해서 집안일을 하면서 내 수발도 들어야 했으므로 남편도 과로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맘은 참으로 괴로웠다.
2. 대법을 수련하여 위기에서 살아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내 나이 36세 때인 1998년 5월 13일 운 좋게 불가공법인 파룬궁을 수련하게 되었다. 온몸에 업력덩어리였던 나를 연공을 시작한 지 4일 만에 사부님께서 정화해주셨다. 그때 나는 죽을 것만 같은 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사부님께서는 내가 감당해야할 적은 업력만 남겨놓으시고 전부 사부님께서 없애주시고 감당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깨어났을 때는 신기하게 통증이 사라졌고, 몸이 대단히 홀가분하고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병이 없이 가벼운 몸을 정말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집안일은 물론 힘든 노동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수련한 후 20여 년간 계속 몸이 건강해서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주사는 물론 약도 복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 사부님께서는 지금까지 돈 한 푼 요구하신 적이 없다. 그렇게 내 몸에서 고질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만고에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구하는 대법을 만났고, 진선인(真·善·忍) 법리는 나의 운명을 바꿔주었으며 또 내가 어릴 적부터 풀지 못했던 의문에 답을 주기도 했다. 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구도해주신 사부님의 은혜를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당시 남편은 내 몸에서 고질병이 전부 사라진 것과 나의 심성이 변한 것을 보고 기뻐하며 감탄을 금치 못한 채 파룬따파의 신기함을 높게 평가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내의 고질병이 파룬궁을 수련해서 나은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심성도 선량하게 변해 보기 드문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고 칭찬했다.
3. 믿음을 견지하여 누차 박해를 당하다
1999년 7월 20일부터 당시의 중공사당 우두머리 장쩌민은 이성을 잃고 선(善)을 지향하는 파룬궁에 먹칠하는 요언을 날조하면서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 1억 명에 달하는 선량한 파룬궁수련생들을 전부 박해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가택수색, 납치, 노동교양처분, 판결, 고문 등의 박해에 시달렸고, 심지어 불구가 되고 죽임을 당하고 생체로 장기적출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파룬궁수련자의 가족들에게까지 고통과 고난을 안겨주었다.
(1) 대법실증을 위해 텐안먼 입구에서연공하다
2000년 5월 1일, 나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실증하러 베이징에 갔다. 텐안먼(天安門) 입구에서 연공하다가 경찰에게 납치되어 베이징 사무실(파룬궁을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조직인 ‘610’ 사무실)로 연행된 후 타이양다오(太陽島) 숙소에 하룻밤 불법감금 되었다가 다칭시 훙강(紅崗)구 훙강파출소 경찰 3명에게 인계되었다. 그들 3명의 경찰은 남편에게서 7천 위안(약 123만 원)을 갈취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을 오가는 일체 비용까지 물게 했고, 돌아가는 길에 관광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하룻밤 숙박할 때도 우리의 돈으로 즐겼다.
나는 일단 다칭훙강 파출소로 연행되었다가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구치소에서 나를 죄수로 취급하려고 해서 응하지 않자,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계속 독방에 감금되었다. 어느 날 밤 수갑이 저절로 풀렸으므로 곧바로 연공을 할 수 있었다. 교도관이 CCTV를 통해 나의 연공모습을 보고 “연공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연공을 견지했다. 다음 날 그 교도관이 찾아와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내 몸이 허공에 떴다가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내가 연공했다는 이유로 족쇄를 채워 몇 번씩 끌어내 고문학대를 가했는데 밤낮 없이 허리를 많이 굽히게 하거나 들어 올려 비행기를 태우듯이 공중에 매달아 나의 수련을 박탈했다. 어떤 때는 너무 피곤해서 매달린 상태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한번은 교도관이 두 팔을 벌린 상태로 양손을 창살에 수갑을 채워 하루 종일 매달려있게 했는데 족쇄가 채워진 발끝이 간신히 땅에 닿는 정도라 고통이 심했으며, 식사를 할 때 잠시 풀어줬다가 식사기 끝나면 다시 매달았다.
내가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온갖 고문학대를 받은 지 6일째 되던 날, 남편은 회사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구치소로 나를 찾아와 이혼서류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이혼하지 않으면 회사에 출근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의 단란했던 가정은 중국공산당에 강압으로 그렇게 깨졌다. 그 후부터 나는 혼자가 되었고, 거처할 곳이 없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구치소에 한 달 동안 감금되었다가 훙강구 구치소로 이감되어 15일간 감금되었고, 다시 싸얼투(薩爾圖)구 구치소에 2개월 감금되어 감금박해에 단식으로 항의했다. 단식 5일째 되던 날 손발은 물론 몸의 감각을 잃었다.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자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4개월간 감금되어 온갖 고문박해를 당했으며, 남편은 7천 위안을 강탈당했다.
(2) 경찰이 나의 집을 잠복감시하다
2000년 10월 훙강 파출소 경찰이 나를 납치하기 위해 내가 사는 집 밖에서 며칠 동안 잠복하고 있을 때, 나는 11세 된 아들만 혼자 두고 집을 나섰고, 후에 이혼한 남편이 아이를 데려갔다.
(3) 텐안먼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치다
2000년 12월 다시 법 실증을 위해 베이징 톈안먼광장에 가서 현수막을 펼쳤다가 톈안먼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이름과 주소를 말하지 않자 건장한 체구의 40대 경찰이 주먹으로 나의 좌우 머리를 가격했고, 가슴을 20~30번 마구 가격했다. 매를 맞으면서 눈앞이 캄캄하고 멍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구둣발로 다리를 걷어차서 서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중공사당의 거짓말에 이용당하고 있는 그 경찰을 원망하지 않고 “당신은 화내지 말아요, 건강에 좋지 않아요, 나를 때리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아요”라고 그 경찰에게 선하게 말해주었다. 내 말은 들은 경찰은 정신없이 휘두르던 주먹질을 멈추고 그대로 감방에 감금시켰고, 그 후 나는 지혜롭게 빠져나왔다.
(4) 식당 주인의 신고로 납치되다
2001년 1월 한 수련생과 함께 후루(胡路)구 펑좡(風莊)아파트 단지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 식당 주인의 신고로 펑좡 파출소의 순찰차가 출동해 아파트 입구를 막고 우리를 납치하려고 했다. 나는 경찰차량 운전기사를 끌어안고 동료 수련생이 얼른 피신하게 했다. 나만 펑좡 파출소로 연행되어 심문을 당했지만,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다칭시 구치소로 이송되었을 때 구치소 감방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많이 수감되어 빈 감방이 없어서 파룬궁수련생들을 각각 타 지역 구치소로 이감시켰는데, 나는 다칭시 다퉁구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다.
단식으로 항의하자 3일 후부터 매일 코로 음식물을 강제 주입시켰다. 단식 9일 째날 혹독한 고문박해로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서 힘든데다 또 자궁에 혹이 자라서 복통이 심했다. 경찰은 건강이 악화된 나를 다시 훙강 파출소로 끌고 갔다. 가족들이 파출소를 찾아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파출소장 리징안은 듣지 않고 다시 훙강 구치소로 끌고 갔다. 나는 구치소 당직자에게 “나는 배가 몹시 아프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인계받아 수감시키겠는가? 만약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당신이 책임 질 수 있는가?”라고 묻자, 수감을 거부했다. 병원으로 이송되어 진찰을 받은바 “자궁의 혹이 커져서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집에 가서 치료하겠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5) 장춘에서 사복경찰에 납치되다
2001년 3, 4월경 창춘(長春)시에서 몇 명의 사복경찰에게 납치되어 창춘시 철북 구치소로 연행되었지만 이름과 주소 등 일체의 신상정보를 말해주지 않았고, 불법감금에 단식으로 항의했다. 교도관은 수감된 범죄자 5, 6명에게 사주해 매일 나를 괴롭히게 했다. 그 죄수들은 발로 차고 매질을 가했는데 심지어 변기를 뚫는 오물이 묻어있는 막대기로 내 입을 강제로 벌린 후 생수병에 담긴 옥수수 죽을 부어넣었고, 하루에 두 번씩 소금물을 부어넣었다. 강제로 입을 벌리는 바람에 앞니 2개가 흔들렸고, 소금물을 주입당한 후 혈변을 보기 시작하면서 대소변을 통제하지 못한 채 생명이 위중하게 되어 단식한 지 33일 만에 풀려났다.
(6)나를 파룬궁 우두머리라는 모자를 씌우다
2001년 7월 어느 날 다칭시 싸얼투구 중린 거리에서 하얼빈시 자오둥현 공안경찰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나를 ‘파룬궁 우두머리’라고 하면서 자오둥현 공안국으로 끌고 가서 수갑과 족쇄를 채운 후 철제 의자에 묶어놓았다. 그들이 이름과 주소를 물으며 나를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5, 6명의 경찰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면서 머리와 얼굴을 짓눌러 입을 벌려 전기봉을 쑤셔 넣어 고문을 가했고, 전신의 민감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전기고문을 했다. 감전으로 온몸에 상처였고, 입안도 큰 상처를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악독한 경찰은 대법사부님의 법상을 바닥에 놓고 나에게 짓밟으라고 했다. 응하지 않자, 강제로 내발을 들어 밟게 했다. 그 당시 50대 경찰은 더욱 악독했는데, 희롱하고 모욕을 주면서 뒤에서 목을 끌어안고 입으로 나의 머리, 얼굴, 귀 등을 비벼댔으며 두 손으로 목, 가슴, 유방, 몸의 앞부분과 허벅지 등을 만지는 등 성추행 고문을 했다.
악독한 2명의 경찰은 새벽이 될 때까지 번갈아가며 잔혹하게 괴롭혔는데 담뱃불로 괴롭혔고, 대나무 막대기로 상처가 난 두 무릎을 찔러 고통을 주었다. 그렇게 지지고 때리기를 반복하는 고문은 오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내 모습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고, 전신의 피부는 상처투성이였다. 악독한 경찰은 예리하게 못이 박혀 있는 널판자를 가져와서 나를 그 위에 앉히겠다며 위협했다.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나는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이렇게 대하지 말라. 나를 박해하면 당신들에게도 좋지 않다”고 선하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감히 못 판자고문은 가하지 않았다. 후에 하얼빈의 ‘장처’라는 남자 파룬궁수련생이 못 판에 구르는 고문을 당하다가 심장이 못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자오둥현 구치소에서 단식항의 7일째 되던 날 배가 몹시 아팠다. 구치소 측에서 자오둥현 병원에 이송해 검사를 받은 결과 15cm 크기의 혹이 발견되어 구치소 감시방에 감금되었다. 그 방의 창문 2개가 다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철제 난간 중간을 비집고나가 도망쳤다. 자오둥현 공안국은 나에게 현상금 7만 위안을 걸고 지명수배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유리걸식을 하게 되었다.
(7) 다시 납치되어 전기고문당하다
2003년 5월 1일 오후 하얼빈 211병원 건물에 있을 때 하얼빈 공안국 1분국의 자오광(趙光) 등 몇 명의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쳐 다시 납치되었다. 그들은 나의 머리채를 잡고 자동차 운전석 옆 바닥에 짓눌러 놓아 숨을 쉴 수가 없는 상태로 공안1분국으로 끌려갔다. 당시 가방에 들어있던 현금 1천 7백 위안(약 30만 원)과 노트북을 강탈당했는데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경찰 3, 4명이 작은 방 철제의자의 양손을 묶고 족쇄를 채운 후 이름과 주소를 물었다. 대답하지 않자 전기막대기 2, 3개로 동시에 전기고문을 가했는데, 건전지를 교체하면서 계속 고문했다. 파란 불빛이 찍찍 소리를 내는 고문기구로 8, 9시간 동안 고문을 당했다. 상의는 전부 찢겨지고, 바지도 군데군데 구멍 나서 너덜너덜했다. 전기고문으로 검게 타버린 피부에서 온통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는데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악독한 경찰들은 여전히 성이 차지 않은 듯 추호의 양심도 없이 이번에는 220V 전압의 전선을 내 왼쪽 손가락에 끼워 테이프를 감은 후 전신에 전류를 통하게 했다. 강력한 전류가 전신을 통과할 때 고통은 극에 달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통증으로 전신이 마구 떨렸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실신하면 찬물을 머리에 부었다. 혼수상태에서 “죽이고 말거야. 죽여보지 못한 것도 아닌데”라고 하는 사악한 경찰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1시간여 간 잔혹하게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내가 곧 죽게 될 것 같자, 수갑과 족쇄를 풀어 의자에서 내려놓았지만, 이미 두 다리가 마비된 상태였다. 경찰은 나를 다른 방으로 끌고 가서 서명하라고 했다. 체격이 거대한 경찰이 내 옷깃을 우악스럽게 잡고 들어 올려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러자 한 경찰이 “그렇게 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며 말렸다. 다음 날(5월 12일) 오후 6시 경 나는 하얼빈시 제1구치소에 감금되었다.
전기고문으로 건강을 잃어서 구치소에서 음식물을 먹는 대로 토했으며 머릿속이 윙윙거리고 아팠다. 제1구치소에서 21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다시 제2구치소로 이감되었다가 2003년 6월 초 헤이룽장 메이룬시 공안국에 끌려가 메이룬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 당시 두 다리는 이미 마비되어 걷지 못했고, 먹는 대로 토했다. 배에는 여전히 혹이 있었고 체중은 55kg에서 35kg으로 감소되어 뼈만 앙상해 생명이 위급한 상태였다. 경찰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풀어주지 않고, 나를 병원으로 끌고 가서 링거를 맞히며 응급처치만 했다. 같은 감방에 있던 죄수들도 내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나의 소지품을 전부 버렸다. 의사가 수술해야한다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20여 일 후 병원과 구치소를 오고가며 4개월간이나 괴롭힘을 당했다.
(8) 공안, 검찰, 법원이 결탁해서 법률과 증거를 조작해서 나에게 14년의 중형을 선고하다
하이룬(海倫)시 공안국은 나를 파룬궁수련생 두목이라는 모자를 씌워 법률과 증거를 조작했다. 검찰은 조작된 증거로 기소한 후 멋대로 13년형을 주문했는데, 하이룬시는 쑤이화(綏化)지역 관할에 속한다는 이유로 쑤이화시 공안국과 검찰도 1년형을 더 주문했다. 하이룬시 법원은 재판 개정 전 5, 6명을 구치소로 보냈고, 그들은 나에게 서명하라고 위협했다. 서명을 거부하자 그 중 한 사람이 내 손을 잡고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 나는 “강제로 서명하게 하는 것은 범죄행위”라고 항의 했다.
2003년 9월 하이룬시 법원은 불법적인 재판을 개정하기 위해 나를 의자에 앉힌 채로 병원에서 법정으로 옮겼다. 공소장은 전부 날조한 모함이었지만, 판사는 법률을 무시한 채 14년형을 선고했고, 불법적인 인권유린에 대한 고소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정당한 고소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나를 모함하기 위한 전 과정은 하이룬시 공안, 검찰, 법원과 쑤이화시급 공안, 검찰, 법원과 하얼빈 공안1분국이 결탁해서 꾸며낸 불법적인 판결이었던 것이다.
4. 감옥에서 받은 박해
2003년 10월 17일 나는 걷지도 못한 상태에서 뱃속의 종양은 그대로 있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 여자감옥으로 이송되어 사람들에게 안겨서 수감되었는데 감옥의 감시구역대장 뤼징화(呂靜華)는 나에게 “감방으로 기어들어가라”고 모욕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자 3, 4명의 죄수를 불러 업어가게 했다.
(1) 합숙감시구역에서 받은 박해
집단감시구역에 감금되었지만, 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매번 2명의 죄수가 부축해서 화장실로 갔지만 부축해서 일어설 때와 앉을 때 두 다리의 통증은 매우 심했다. 그런 고통은 1개월이 넘도록 지속됐다. 감옥에서는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정상적으로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다. 후에 한 고향 수감자의 도움으로 저녁에 연공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리는 서서히 나아서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걸음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죄수 수칙을 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역대장 왕샤우리(王曉麗)의 사무실로 끌려갔다. 왕샤우리가 “왜 수칙을 외우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죄수가 아니기 때문에 외우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가 뺨을 20여 번 때렸다. 그랬어도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왕샤우리에게 “우리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당신이 이렇게 하면 당신 자신에게 좋지 않다”라고 말해주었다.
며칠 후 감옥장 뤼징화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다시 수칙을 외우라고 했고, 나는 역시 죄수가 아니기 때문에 외우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주먹으로 뺨을 가격해서 나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코피를 흘리며 20여 분 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2005년 12월 20일 우리 파룬궁수련생들은 저녁 점호시간에 단체연공을 하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가 일부 사람들은 밀실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줄곧 감방에서 제5장 공법을 연마했다. 다음날 왕샤우리가 출근해서 나에게 “뭘 하냐”고 물었고, 나는 “연공을 한다”고 말했다. 왕샤우리는 몇 명의 죄수를 시켜 나를 자기 사무실로 끌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나의 한쪽 손을 어깨 너머로 또 한 손은 밑에서 끌어올려 대각선으로 수갑을 채워 하루 종일 그렇게 체벌을 가해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났을 때 한 수감자 말이 “인공호흡으로 살렸다”고 했다. 그들은 또 벽돌 한 장만한 곳에 새워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 걸을 수도 없었고 화장실에 가서도 쪼그려 앉을 수가 없었다. 두 손목은 수갑 찼던 곳이 깊이 패어 들어가 피멍이 들었으며, 이미 왼쪽 눈은 실명된 지 며칠이 지났다.
(2) 여섯 번째 감시구역에서 받은 박해
2006년 4월 6구역으로 이감된 후 살인범 나리리(那麗麗)가 감시자로 지명되어 나를 전화시키려고 했다. 매일 아침식사 후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게 하고 벽에 기대지 않고 허리는 곧게 펴고, 눈은 감지도 깜박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체벌을 가하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때렸다. 그렇게 4개월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3) 첫 번째 감시구역에서 받은 박해
2006년 10월 1구역에 이감되어 매일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계속 플라스틱 의자에 앉힌 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엉덩이가 짓무르고 나중에 굳은살이 박여 고통을 참기가 어려웠다. 빨래한 옷도 햇볕에 말리지 못하게 했고, 수련생과 대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화장실이나 설거지하러 갈 때도 항상 감시자 죄수가 따라 붙었다.
연공을 할 때는 60여 세 되는 살인범 죄수 쑨수롄(孫淑蓮)이 걸레자루로 내 팔을 때려 몹시 아팠다. 그렇게 그에게 맞으면서 1개월 동안 연공을 견지했다. 그러나 나는 대법에서 수련해낸 선한 마음으로 중공사당에게 기만당한 그를 선하게 대했다. 그녀는 감동해서 “당신이 연공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때려도 당신은 나를 미워하지 않네요,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을 거예요. 연공하세요,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후에 1구역 감방을 15일간 보수공사를 했는데, 내가 죄수복 입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오전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화장실 사용을 금한 후 오후 8시 30분 이후에 복도에 있는 대야에 대소변을 보게 했다. 공사가 끝나는 보름동안 나는 매일 15~16시간 대소변을 참아야 했다. 참느라 배가 아프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괴로웠다. 그런 심한 박해로 3개월 동안 하혈을 했는데,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심할 때는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에 올라갔다.
2012년 6월 어느 날 감시자 루산산(盧姍姍) 등 4, 5명의 죄수들이 세면실에서 세수를 못하게 하며 구타를 했고, 나중에는 머리채를 잡고 세숫대야 물에 3분가량 머리를 밀어 넣어 숨이 막혀 죽기 직전이었다. 감방으로 끌려와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질을 당했고 발길질을 당했다. 때릴 때는 사정없이 가격 했는데 창문에서부터 감방 입구까지 6m를 쫓아오면서 때리고, 다시 입구에서 창문 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20여 분간 때렸다.
(4) 감옥에서 기만으로 ‘전향’하게 하다
2012년 7월 감옥에서 또 강제로 수련을 포기하게 하는 이른바 ‘전향’을 실시한다면서, 파룬궁수련생을 더욱 박해하면서 감옥을 개혁한다고 했다. 그들은 모든 파룬궁수련생들을 전향구역에 집합시켰다. 나도 단체감시구역에 감금되어 전향을 강요받았다. 13일 동안 밤낮으로 눈을 감지 못하게 했고 정상적으로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악당 두하이샤(杜海霞), 장민취우(薑敏秋) 등 죄수 6명은 플라스틱 의자 다리 하나를 고의로 부러뜨리고 다리 세 개만 남은 의자에 나를 앉혀 뒤로 나가떨어지게 했다. 하루에 몇 번 나가떨어졌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눈을 잠깐 감기만 하면 이쑤시개로 눈꺼풀과 인중을 찔렀다. 어떤 때는 너무 피곤해서 눈을 뜬 채로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 혹독한 고문박해로 아무 생각이 없고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감시자 죄수들은 손을 잡아당겨 ‘보증서’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게 한 후 4개 다리의 의자에 앉혔다. 그런 후 “네가 보증서에 서명했다”고 말해줬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을 도려내듯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교도대장 스껑후이(史耕輝)에게 “파룬궁을 확고하게 수련하겠다”고 엄정하게 성명했다.
건강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복통이 심해 감옥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배 안에 15cm 크기의 종양이 있었다. 2013년 3월 감옥병원의 감시구역으로 이송되었다.
(5) 병원감시구역에서의 박해
병원감시구역 방에 24명이 있었는데 내 침대는 바로 CCTV 카메라 밑에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연공을 하려고 했지만 감시자인 살인범 리진롄(李金蓮) 등 4명의 죄수들이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렇게 1주일이 지난 어느 날 리진롄이 나를 바닥에 쓰러트려 주먹으로 때리고 무릎으로 가격하는 바람에 갈비뼈가 부러져 바닥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리진롄을 고소하라고 했다. 죄수에게 3년에 한 번씩 감형해 주는 제도가 있는데 신고나 고소를 당하게 되면 감형받지 못하게 된다. 대법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라고 했으므로 리진롄을 고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녀를 선하게 대했다. 후에 그녀는 내가 연공을 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았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말했다.
(6) 출옥할 때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다
2017년 5월 15일은 억울한 14년형이 만기되어 출옥하는 날이었다. 석방할 때 병원 감시구역대장 인핑즈(尹平指)는 죄수 왕옌훙(王豔紅)에게 지시하여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내진’을 받게 하라고 했다. 내진이라는 것은 몸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검사받는 인격모독적인 검사다. 출옥하는 여성 파룬궁수련생이 생식기 안에 은밀하게 물건을 숨겨 밖으로 반출하는 것을 검사한다는 것이다. 내가 검사를 거부하자 여의사(죄수) 장수잉(張淑榮)은 초음파검사를 하자고 했다. 내가 초음파검사도 받지 않겠다고 하자, 그녀는 “초음파검사도 받지 않겠다면 강제로 내진 검사를 하겠다”고 겁박했다. 그러자 구역대장 인핑즈는 구야줴(穀亞傑) 등 5, 6명의 죄수에게 지시해 나에게 죄수복을 입히라고 했다. 나는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자 강제로 죄수복을 씌운 후 나를 들어 올려 감옥의 2문(출옥 때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한다)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큰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쳤다. 병원 문을 나서서 2문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를 내려놓았다. 2문에서 한 여자 경찰이 나에게 “가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죄수복을 벗고 가겠다”고 말하며 죄수복을 벗어버렸다. 2문을 통과하려고 했을 때 교도관이 “죄수 수칙을 외워보라”고 했지만, 나는 외우지 않았다. 그는 내가 이름을 말하자 2문을 통과시켰다. 밖에서 3시간을 기다렸던 가족과 상봉했다.
5. 후기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을 뿐인데 사악한 중공사당은 불법적으로 나를 14년 동안 감옥에 감금한 후 온갖 고문박해를 가했다. 나의 소중한 중년의 인생은 중공사당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혔는데 기나긴 5천 1백여 일의 시간을 심신의 고통 속에서 보냈다. 40세부터 54세까지 심신이 잔혹한 고문박해를 당하면서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났다. 그 과정에서 또한 경제적인 손실도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큰 고난과 정신적 타격의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게 되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후 80세가 된 부모님께서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임종 전 계속 나를 걱정하셨다고 한다. 중공사당의 박해로 부모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내가 받은 박해와 모욕은 오늘 다시 생각해봐도 치가 떨린다. 그러나 중공사당이 20여 년간 파룬궁수련생들에게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박해한 것에 비하면 내가 받은 박해는 빙산의 일각이다.
원문발표: 2020년 3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3/4/4015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