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팔순 제자의 돌아가는 길

[밍후이왕] 나는 80세의 할머니다. 1998년에 딸의 소개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게 됐고 현재까지 21년을 수련했다. 나는 수련하면서 경험한 것을 적어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하니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1. 일가족 세 명이 성스러운 인연을 만나다

우리 집에서 법을 가장 먼저 얻은 사람은 딸이다. 1997년에 딸은 동료의 소개로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딸이 수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병들이 치료받지 않았는데 전부 사라졌다. 그때부터 딸은 아주 즐겁게 지냈고 파룬따파가 심신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병을 제거하는 효과가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딸은 나와 남편에게 대법을 소개해주었고 1998년 상반기에 남편은 ‘전법륜’을 한 번 보고 나서 대법 책에서 말한 것이 아주 좋고 모두 사람들에게 도덕을 중시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는 도리를 말했다면서 대법 수련의 행렬에 들어섰다.

그 후, 남편과 딸은 나에게 대법이 얼마나 좋은지 끊임없이 말하면서 나에게 빨리 수련하라고 했다. 나는 늘 반신반의하면서 대충 넘겼다. 1998년 8월 20일, 저녁에 내가 막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사부님께서 가사를 입으시고 아름다운 연꽃 단에 서서 먼 곳 하늘에서부터 나에게로 날아오시는 것을 똑똑하게 보았다. 사부님의 주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색깔의 파룬들이 있었으며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사부님께서 내 앞에 오셨을 때 나는 놀라서 깼고 단번에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사부님은 정말로 부처님이셨구나! 나는 수련을 시작해야겠다.’

그날부터 나는 파룬궁을 배우기 시작했고 사부님의 크나큰 자비는 마침내 나의 오래된 서약을 일깨워주었으며 나는 대법제자가 됐다.

2. 대법을 수련하는 기쁨과 신기함

대법을 수련한 후에 나는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했고 마음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상태는 아주 많이 개선됐다. 현재 비록 80세 고령이지만 몸이 건강하고 눈, 귀가 밝으며 작은 글씨도 볼 수 있으며 식구들의 빨래도 하고 장도 봐오며 밥을 짓는 등, 일을 할 수 있다.

21년 동안 비록 아주 많은 위험한 일들을 겪었지만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보호로 위험은 상서로운 일로 변하고 상태가 평온해졌다. 아래에 두 가지 예를 들겠다.

2014년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배가 심하게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들은 나를 강제로 시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받게 했다. 의사는 나에게 신장 결석이 심각하니 반드시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계시기에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하면서 입원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며 집으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도 아프지 않았다. 현재까지 5년이 지났지만 더 이상 신장 결석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올해 상반기 어느 날, 나는 시장에 야채를 사러 갔다. 길이 젖어 미끄러웠는데 조심하지 않아 시멘트 바닥에 넘어졌다. 그 당시 머리를 다쳐 피를 많이 흘렸다.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나이가 많은 내가 시멘트 바닥에 세게 넘어졌기에 아무도 감히 나를 부축해 일으키지 못했는데 스스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당직 경찰이 나를 부축해 집까지 데리고 왔다.

아이가 집에 온 후에 나를 시(市)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게 했다. 진단 결과는 오른쪽 팔 상박골이 안쪽 아래로 이탈했고 양쪽으로 골절됐다고 했다. 오른쪽 어깨 관절도 탈골됐고 팔은 완전히 피멍이 들었다. 오른쪽 눈가는 3cm 정도 찢어졌다. 의사는 입원해 골절 부위에 철편을 박는 수술을 할 것을 권유했다. 나는 완강하게 반대하면서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주고 계시니 별일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80세가 넘었는데 그런 고통을 받기 싫다고 말했다. 그들은 뼈를 다쳐 치유되려면 100일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의사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오른쪽 팔에 깁스하고 붕대로 목에 걸어 고정시켰다. 그다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것이 깁스 때문에 불편했다. 그리하여 석고를 떼어냈다. 아이들이 보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아이들이 볼 때는 수건으로 팔을 목에 걸어 고정하고, 아이들이 없으면 다시 내리고 해야 할 것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고 오른팔의 피멍은 전부 사라졌고 보름 정도 지나자 오른팔은 정상으로 회복됐다. 더 신기한 것은 전반 과정에서 내 오른팔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법의 신기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린다.

3.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다

1999년 7월, 이렇게 좋은 대법이 사악의 모함과 비방을 받았고 위대하신 사부님도 공격을 받았으며 대법제자들은 박해당해 수감됐다. 우리 가족 세 명은 대법제자로서 사악의 광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두 연이어 베이징을 방문했고 대법을 보호했으며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2002년 어느 겨울, 나는 한 지역에 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자료가 조금 남았었는데 그 지역 친척은 나를 도와서 배포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자료를 배포할 때 현지 경찰에게 납치됐다. 경찰이 자료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 경찰은 우리 집에 와서 가택수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납치했다. 그들이 사부님 법상을 움직이려 할 때 나는 완강하게 막아섰다. 그들은 사부님 법상을 아주 단단한 빨간 나무 의자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키 큰 경찰 넷이서 나를 들어 강제로 그 의자 위에 앉히려 했다. 나는 거세게 반항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내리눌렀고 단단하던 의자가 눌려서 부서졌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사부님을 대하고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을 그렇게 대하면 응보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내 말이 떨어지자 그중의 한 경찰이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 경찰의 어머니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나를 납치해 구치소에 가뒀으며 불법적으로 보름이나 감금했다. 거기에서 나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가족에게 감금 기간 생활비 300위안(약 5만 원)과 벌금 2천 위안(약 34만 원)을 내라고 했다.

이 몇 년간 나는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외에 또 수련생들과 함께 나가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 중생들을 구했다. 보통 아침 3시경에 일어나서 연공하고 발정념을 했다. 아침을 먹고 7시경에 바로 나갔고 점심에 집에 와서 점심밥을 지었다. 매번 나가면 모두 수확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수련생이 말하고 나는 발정념을 했으며, 어떤 때는 내가 말하고 수련생이 발정념을 하면서 우리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매일 적어도 몇 사람씩 삼퇴(공산당, 공청단, 소선대를 탈퇴하는 것)를 시켰고 많을 때는 10여 명이 됐다. 매번 중생이 구원되면 더없이 기뻤다.

4. 가족을 잃는 고통을 연이어 겪다

내 딸은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능력도 있었다. 착하고 효도했으며 일도 잘했다. 나는 아들이 없기에 줄곧 딸을 귀하게 여겼다. 그렇게 좋던 딸이 대법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번 납치되고 감금당했다. 아마 딸은 사망하기 전에 최소 8차례 납치됐을 것이다. 구체적인 횟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딸은 서술하기 힘든 많은 고통을 겪었고 몇 번이나 박해받아 생명이 위험해져서야 집으로 보내졌고 좀 지나면 또 납치됐다.

딸이 대법 수련을 포기하지 않자 직장에서는 강제로 해고하고 출근하지 못하게 했으며 봉급도 주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딸은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들은 딸을 가만두지 않았다. 매번 딸이 납치되면 우리 부부는 극도로 괴로웠고 매일 고통 속에서 보내면서 딸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딸은 집에 올 때마다 말라서 뼈만 앙상했다. 원래 170 정도의 키인데 집에 올 때면 몸무게가 35kg밖에 안 되어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팠다.

딸이 건강을 회복한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현지의 국가보안과 공안에 의해 납치됐다. 그렇게 우리 두 노부부는 끊임없이 딸을 잃는 고통 속에 시달렸다. 딸이 또다시 납치됐을 때(아마 6번째 납치됐을 때일 것) 남편은 드디어 그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져누웠다. 남편은 심지어 그의 생명으로 딸의 자유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은 수련생으로 놓고 말하면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남편은 그렇게 생각했고 결국 정말로 생명이 위독할 때까지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으며 딸은 그제야 풀려났다. 그러나 남편은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는 남편을 잃은 고통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딸도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 늘 자신이 잘하지 못해서 원래 건강하시던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했다면서 자책했다.

딸은 집에 돌아와 몸을 회복한 후에 또 나가서 일자리를 찾아 한 집안의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딸이 회사를 찾아 2년 넘게 그 회사에서 일했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능력도 좋았기에 전 지역에서 업무 능력은 동일 업계에서 상급으로 인정받았다. 회사에 훌륭한 명예를 가져다주었고 큰 경제적 이익도 안겨다 주었으며 아주 빨리 부서 매니저로 승진됐다. 회사에서도 늘 딸을 전국적인 교류와 연수회에 보냈다.

어느 해 봄에 회사에서는 딸에게 회의에 참가해 서로 배우고 상도 받도록 베이징에 파견했다. 그러나 딸은 베이징의 모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경찰에 납치됐다. 그렇게 딸은 베이징 여자노동교양소에 1년 넘게 감금됐고 전국 노동교양소가 없어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또 뼈가 앙상했다. 딸이 집에 돌아와 말하기를, 거기에서 사악의 요구대로 전향하지 않자 온종일 강제로 방안 모서리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야 했고 양옆에는 감시하는 죄수가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날이 밝기 전에 앉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이 들어서야 가서 잘 수 있었고, 그렇게 몇 달을 앉았기에 엉덩이 살이 찢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딱지가 앉았다고 말했다. 또 몇 개월 동안 씻지 못하게 했다고 했다. 그러나 딸은 아주 깨끗하고 위엄과 신망 있는 사람이다. 딸은 거기에서 그런 고통에 시달려도 결코 사부님과 대법을 배신하지 않았다.

예전에 회사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공헌을 했지만 딸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딸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한 것은 죽마고우이자 더없이 사랑하는 남편의 외도였다. 그런 여러 가지 충격들은 원래 허약하던 딸을 한계에 이르게 했다. 몇 개월 후에 딸은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는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힘을 내서 엄마를 잃은 외손자를 돌보면서 망가진 가정을 지탱해갔다.

나는 대법제자이기에 그 고난에서 걸어 나와 수련을 잘해야 했다. 잇따라 가족을 잃으면서 나는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몇 년 후에 나는 드디어 사위에 대한 원한을 수련해 제거했다. 그리고 이전에 우리 딸의 박해에 참여한 그 610과 공안들에 대한 원망, 딸의 회사 상사들에 대한 원한을 제거했다. 오늘날, 나는 그들에 대한 원한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자비와 연민을 수련해냈다. 사위가 그렇게 고독하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정했다. 나는 여전히 자애로운 엄마처럼 그의 생활을 돌봐주고 진심으로 사위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지금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일을 서둘러서 잘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며 사악을 전멸하고 중생을 더 많이 구해 마지막에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원문발표: 2019117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17/3991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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