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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자의 참음’으로 가정 모순을 없애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추석, 대학을 졸업하고 외지에서 일하며 2년 동안 집에 오지 않은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남편과 저는 기뻐하며 맛있는 음식을 해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 추석 명절을 제대로 지내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친절한 사람이며 무슨 일이든 다 할 줄 압니다. 그 날은 집에서 쉬려 했지만 아침 일찍부터 친구에게 급한 일이 있다고 불려 나갔습니다. 오후 3시경 수련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기술수련생이 그녀에게 왔는데 저에게 올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제 컴퓨터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시스템을 새로 설치해야 하는데, 지난주에 한 번 해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기술수련생이 한 번 오기가 쉽지 않고 수련생의 셋방이 만기가 되어 어디로 이사를 할지 몰라 기술수련생과 다음에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가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려서 저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컴퓨터를 갖다 놓고 다 수리하면 다음 날에 다시 가지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해야 할 음식을 미리 손질하라고 하고 컴퓨터를 들고 출발했습니다. 빨리 갔다 오려고 택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차를 두 번 갈아타고 4시경에 수련생 집 근처에 도착한 다음, 안전거리 내에서 집에 전화하니 아이는 아빠가 돌아왔다며 빨리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얼른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핸드폰을 끄고 배터리를 분리했습니다.

수련생 집에 가서 보니 기술수련생은 진상 지폐를 인쇄하고 있었는데, 제게 프린터 강좌를 보고 혼자 프로그램을 설치하라며 모르는 곳이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원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금방 돌아갈 수 없게 됐고,안전을 위해 전화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온 정신을 다 기울여 기술을 배우며 시간을 잊었는데, 컴퓨터를 다 설치하고 나니 8시가 되어갔습니다.

수련생 집을 떠나 안전한 지역에서 휴대폰을 켜니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이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고 여동생이 보낸 것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전화를 했습니다.남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어?왜 휴대폰을 껐어? 잡혔어? 왜 집에 전화 안 했어?” 여동생도 계속 전화해 저를 원망하고 질책하며 “어디까지 왔어? 집에 언제 도착해?”라고 물었습니다. 거의 길에서 오는 내내 통화했습니다.

수련인에게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은 심성고험이고 심성을 제고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기분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오늘 이 일은 대법제자와 대법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다. 무슨 상황에서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 속인의 기분도 생각해줘야 합니다. 제가 대법수련에서 심신에 혜택을 받아 남편이 제가 대법을 배우는 것을 지지하고, 진상도 알며 제가 대법 일을 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평소 집에서 휴식하는 시간은 모두 제 발정념 시간에 따라 안배합니다. 시간이 되면 제가 하던 일을 남편이 이어서 합니다. 수련생이 저를 찾으면 집에 일이 있어도 저는 나갈 수 있었습니다. 몇 년간 남편도 많은 것을 감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일이 발생한 것은 저의 무슨 마음을 제거하려는 것일까요?

안으로 찾으니 이 일은 저의 ‘남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이 마음을 겨냥해 온 것이었습니다. 직업 관계로 저는 가끔 남편을 질책하며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평소에 남편이 저를 질책하면 비록 수련인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1]를 해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억울한 생각이 들고 인정할 수 없으며 늘 이유를 찾아 변명했습니다. 얼마 전 ‘남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이 마음을 겨냥해 한 번의 심성 고비를 넘었지만, 그것은 단지 ‘속인의 참음’이었고 ‘수련자의 참음’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음(忍)은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2] 저의 참는 수련이 위치에 도달하지 못해 사부님께서 또 한 번 제게 기회를 주셨나 봅니다. 이번에 저는 반드시 이 고비를 잘 넘어야겠습니다. 제 마음은 태연해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 저는 여전히 택시를 타고 한 구역을 간 후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오니 저녁 9시가 됐습니다. 집에 가니 남편이 문을 안에서 잠가 놓았습니다. 아이가 문을 연 후 저는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남편은 저를 보더니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같이 살 수가 없어! 아이가 어쩌다 집에 한 번 왔는데 명절인데도 당신은 밖으로만 나도네. 늦게 온다면 전화를 한 통 해서 몇 시에 오는지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달라는 데도 고치질 않네. (일주일 전에 특수한 상황이 있어서 늦으면 전화해서 알리겠다고 약속했음) 또 이러면 당신 물건을 다 내다 버릴 거야. (당시에 집에 프린터 두 대가 있었음) 같이 못 살겠으면 갈라서!”라고 말하고 요리가 담긴 접시를 하나 집어 던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아주 평온했습니다. 억울함이 없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화도 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묵묵히 발정념하며 남편 배후의 다른 공간에서 그를 조종하는 사령난귀(邪靈爛鬼)를 제거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남편의 성격은 이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표정이 평화롭고 반격하지 않으며 변명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한참 화풀이를 하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얼른 따라 나가보라고 눈짓했습니다. 아이가 해놓은 음식을 저는 다시 데워놓고 바닥을 깨끗이 치웠습니다. 반시간 후 남편은 돌아와서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식사하라고 해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은 정말 제가 잘못했어요. 말도 없이 이렇게 늦게 와서 당신이 걱정하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 잘못으로 당신 자신을 벌하지 마세요. 식사하지 않으면 위장이 어찌 견디겠어요? 오늘은 제가 벌을 받아야 해요. 저는 오늘 저녁에 밥을 먹지 않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아이와 함께 식사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에 정말 밥을 먹지 않았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밤새 말이 없었는데 이튿날에 일어나니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 식구는 선물을 들고 함께 즐겁게 부모님을 뵈러 갔습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하에 저는 ‘수련자의 참음’으로 이번에 피할 수 없었을 것 같았던 가정 모순을 사그라지게 했습니다. 만약 제가 전화 안전이라든가 이번에 상황이 특수하다는 등으로 자신을 위해 변명했더라면 결과는 수습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대법의 위대함을 깊이 체험하게 됐습니다.

대법제자는 속인 사회에서 수련하며 가정은 가장 보편적인 일종 수련 장소이고, 또 아주 좋은 수련환경이며 수련 제고에 직접적인 작용이 있습니다. 우리의 각종 집착심은 사회에서나 수련생 중에서는 감출 수 있지만 가정에서는 남김없이 다 폭로됩니다. 가족은 밤낮으로 함께 지내며 가장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자주 가족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점화해주십니다. 동시에 가족 역시 우리의 거울로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직접 반영해줍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가정 모순이 어떤 때는 갑자기 나타나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사부님께서 그것을 이용해 우리를 최대한 빨리 수련 제고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모순에 부딪히면 내가 맞든 틀리든 자신을 돌아본다. 이 일에서 내가 어떤 잘못한 점이 없는가? 정말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모두 이처럼 생각하는데 첫 일념이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를 생각한다. 누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대법 수련자가 아니다. 이는 수련의 법보(法寶)이며, 이는 우리 대법제자 수련의 특징이다.”[3]

많은 대법제자가 심성 고비를 넘는 과정에서 모두 증명되었습니다. 연공인은 모순 앞에서 평온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며, 무슨 일은 하면 항상 타인을 고려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안으로 찾는다면, 근본에서 화와 원망이 생기지 않고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수련자 참음’이며, 이렇게 하면 시련은 대법의 용해 하에서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이와 반대로 단지 ‘속인의 참음’만 해낸다면 아주 사소한 마찰로도 큰 사달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안으로 찾음’은 정말 법보(法寶: 법력이 있는 보물)입니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맞지 않는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

 

원문발표: 2016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18/337687.html